운동가나 정치인이기 전에 사상가였던 장준하

당신께!

 

월남전의 종식이 나에게 준 충격이 어떤 것이었느냐? 그건 이런 것이었죠. 이 땅에서 이대로 독재가 계속되어 민주화의 가망이 없다는 것이 우리 겨레의 확신이 되면, 우리 겨레도 월남 민중과 같은 불행한 선택을 하게 될 것이다. 민주냐 독재냐가 아니라 두 독재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될 궁지에 몰리면, 우리 겨레도 어쩔 수 없이 월남 민중과 같은 선택을 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구나, 이 같은 예감에 나는 몸서리쳐지는 걸 느꼈죠.

나는 이 충격에 또 하나 다른 충격을 받았어요. 그것이 바로 장준하 씨의 죽음이었거든요. 민의가 무자비하게 깨부수어지는 역사의 퇴행을 막으려는 마지막 노력이 분쇄되었다는 것을 느꼈죠. 암담한 심정이었죠. 유신헌법을 비판하는 것마저 죄가 되는 긴급조치 9호의 암흑기를 몸서리쳐지게 느꼈죠. 온 사회가 깊은 침묵에 빠져 있었죠.

나는 장준하 씨의 관을 땅속으로 내리면서 그에게 약속했지요. “네가 하려다가 못한 일을 내가 해주마.” 나는 그의 죽음을 땅에 묻어 버릴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죽음을 되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죠.

내가 그를 “너”라고 부르면서 다짐을 했던 것은 장준하 씨가 동환이와 신학교 한 반이었기 때문에 “동환이”, “준하” 이렇게 동생처럼 불러오던 습성 때문이었죠. 그러나 이 나라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에 있어서 그는 나에게 대 선각자요, 대선배였죠.

그런 마음 다짐을 하고 장지에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백기완 씨는 “이제 문 목사님이 장준하 영감의 대타로 나서 주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어요. 그 이후로 그는 나를 형이라고 부르게 되었죠. 장준하 씨는 여전히 영감이라고 부르면서. 나는 그의 제안을 듣기만 했지요. 장준하 씨가 하다가 이루지 못한 일을 하마고 다짐은 했지만, 내가 과연 그의 대타자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자신이 서지 않았죠.

장준하 씨의 몸을 땅에 묻어 버리지 않고 그를 되살리려고 내가 한 첫 일은 『사상계』에 실린 그의 사설들을 모아 책을 내는 일이었죠. 이 땅의 양심들을 일깨우려고 피를 토하는 글로 남긴 그의 목소리를 되살리려고 했죠. 그것을 수집하는 일을 성근이를 시켜서 했는데 “장준하 선생은 운동가이기 전에, 정치인이기 전에 사상가이군요”, 이것이 그의 글을 모아 놓고 하는 성근의 말이었어요. 나도 그의 글들을 다시 읽어 보고 전적으로 공감할 수 있었어요.

『사상계』의 사설을 쓸 당시의 장준하 씨의 사상이 소박한, 그리고 보수적인 자유민주주의자라는 면모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죠. 그러던 그가 7·4 공동 성명 이후 사상의 무게를 민주에서 통일로 옮긴 것도 사실이죠. 그렇다고 그의 사상이 자유와 민주를 외면한 통일지상주의자로 변신했는가? 그런 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해요. 그의 사상의 제1주제가 자유와 민주에서 통일로 옮겨졌죠. 선민주는 보수요, 선통일은 진보라고 간주되던 시대였으니까, 그의 사상은 분명히 보수에서 급진 진보로 비약한 것이 사실이죠.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유와 민주를 버리고 통일을 잡은 것이냐고 하면 그게 아니죠. 자유와 민주, 평등과 정의의 실현으로서 통일이 보이기 시작했던 거죠. 통일이 그의 사상의 제1주제가 되면서 자유가 전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거든요. 자유는 민주의 원칙으로서도 중요하지만, 통일운동의 자유로서 중요하다고 그는 갈파하거든요.

1992. 2. 20.

 

 월남전 종식과
장준하의 죽음에서 받은 충격
, 책출판을 위해 장준하의 글을 모아 읽고 느낀 점 등을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