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준하가 살아 있으면 할 일을 대신 해 주겠수?”

당신께!

 

오늘 새벽에는 신·구교와 재야가 한자리에 앉아 무언가 토론하는 꿈을 꾸었군요. 인상에 남는 두 분, 하나는 계훈제 선생, 하나는 함세웅 신부. 계 선생은 아마도 40대 정도 아니었을까 싶군요. 깨끗한 양복 차림에 머리를 깨끗이 빗질한 한창 나이, 뜨거운 열기와 확신에 찬 목소리로 계속 열띤 발언을 하고 계셨구요, 함 신부는 30대 초반의 젊음을 풍기고 있었다오. 지금 그의 눈에는 좀 비관적인 빛이 어려 있는데, 오늘 새벽에 본 그의 눈에는 밝은 희망이 마구 불타고 있었어요. 다른 사람이 나를 보았다면 나도 50대쯤의 한창 나이였겠지요. 아무튼 모두 젊어지고 밝아지고 힘이 넘쳐나고 있어서 얼마나 신났던지.

어제 희선이한테서 편지가 왔는데 통일 운동의 진로로 고민하나 본데, 그동안 내가 써 내보낸 편지를 보여주고 호근이가 한번 만나 이야기를 하는 게 좋지 않을까 몰라. 안면 근육이 마비되어 간다는데, 손톱을 눌러 주고 발바닥을 두들겨 주고 주물러 주고 문질러 주라고 하세요. 발을 뜨거운 물에 담그고, 머리를 찬물에 (얼음을 넣어서) 하루 한 번씩 담그는 것도 좋을 텐데, 초기에는 침을 맞는 것도 좋을 텐데.

광주의 계림교회 임명휴 목사, 원주의 서재일 목사에게서 영치금이 왔으니까 책을 보내 드리도록. 당신의 2월 14일 편지가 254신.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일이 있으니까요.

장준하 씨를 매개로 하고 백기완 씨와 내가 그렇게도 마음이 통해 있었다니. 그때만 해도 나의 시야는 국내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의 시야는 바깥으로 열려 있더군요. 미국과 중국의 관계가 긍정적이요, 전향적으로 변해 가고 있는 이 국제적인 대변동기에 때맞추어 민족의 문제를 밝히는 성명서가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더군요. 그의 생각은 구체적이었어요. 그 성명서는 윤보선 전 대통령, 함석헌 옹, 김수환 추기경 세 분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장 영감이 살아 있으면 그 일을 할 텐데, 문 형이 나서서 그 일을 해줄 수 없겠수?”

이 제안을 나는 두말하지 않고 받아들였지요. 그 정도의 심부름이야 못 할 것도 없다 싶었고, 성명서의 내용도 이미 머릿속에 그려져 있던 참이었고. 그래서 그러마 하고 돌아와 우선 성명서를 기초했죠. 그 기초한 걸 가지고 제일 먼저 찾아간 것이 동환이었어요. 사실 그때는 3·1 성명서가 윤보선 씨와 김대중 씨 사이에서 준비되고 있었고, 동환이는 그 서명자로서 교섭까지 받고 있었거든요. 그때 그 이야기만 해주었으면 나는 일을 중단했겠죠. 그런데 동환이는 그 이야기를 내게 하지 않았어요. 형은 빠지고 자기만 그 교섭을 받은 게 좀 거북스러웠는지도 모르죠.

그 순간이 나의 인생의 중대한 갈림길이었죠. 그때 동환이가 그 이야기를 해주었더라면, 나는 성서 번역을 완결하고 글쟁이로 여생을 보냈을지도 모르죠. 감옥 구경 한번 못 하고 운동권의 박수 부대 정도로 남아 있었을지도 모르죠. 다음으로 찾은 것이 함 선생님이었어요. 기독교서회 뒤에 있는 다방으로 나오라고 해서 나갔는데, 함 선생님을 감시하는 눈초리가 빛나고 있는 것을 느껴서 다방에서 나와 원효로 댁으로 모시고 갔지요.

 

1992. 2. 22.

 

 1976년 삼일절을
앞두고 백기완으로부터 성명서 발표하는 일에 나서달라는 제의를 받고 수락 후의 과정을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