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구국선언』의 산실 – 갈릴리 교회

당신께!

 

앞에 떠 놓은 냉수 한 모금 마시고 오늘의 글발 시작. 물맛이 그렇게 좋을 수 없군요. 물이 달다면 과장벽이 심하다고 할 테니 달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적어도 달다는 말을 하고 싶을 정도. 나의 혓바닥에서 ‘난 이렇게 살아 있다네’ 하며 생명의 찬가라도 부를 듯한 물맛. 이재룡 부장 왈, 물이 맛있으면 살이 찐다고 합니다. 또다시 한 모금 마시고 그 싱싱한 맛으로 붓을 달리는 나의 행복, 이건 분명 건강의 축복이겠지요. 이 건강, 이 감사, 이 기쁨, 만인의 것이 될지이다!

이해영 목사, 갈릴리교회를 같이 세우신 창립 멤버였지요. 갈릴리교회 창립 멤버 안병무·서남동·이문영·이우정·문동환이 다 서명자 명단에 들었는데, 거기 들지 못해 서러워하면서 눈을 감으신 이해영 목사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찡하군요. 심장이 너무 병약해서 빼 드린 건데. 창립 멤버 가운데서 공덕귀 여사는 윤보선 씨가 들었기 때문에 빠졌고, 나는 성서 번역을 계속해야 하겠기 때문에 빠졌구요.

이해영 목사 이야기를 쓰다 보니, 갈릴리교회 이야기를 해야 하겠네요. 그것도 75년에 있었던 꽤 큰 사건이었으니까요. 반정부 활동을 학원에서 뿌리 뽑으려고 모모한 교수들을 무더기로 해직시킨 사건이 있었지요. 그 가운데 기독교인 교수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시작하자는 의견이 모여서 시작된 것이 갈릴리교회였지요. 흥사단 (그때 명동에 있었죠) 강당을 빌려서 첫 예배를 드린 것이 공교롭게도 75년 8월 17일, 장준하 씨의 그 소중한 목숨이 민족 제단에 바쳐진 날이었거든요.

박형규 목사도 꽤 서운했던가 본데, 그는 우리가 일부러 빼 드렸죠. 너무 여러 차례 징역살이를 했고, 그때는 나와서 얼마되지 않은 때였을 거예요. 3월 2일 내가 일부러 그를 찾아가서 성명서 한 장을 줄 정도, 그는 우리의 소중한 동지요 선두 주자였죠.

천관우 씨는 너무 통분해서 일 년 동안 깡소주만 통음했다는 말을 후에 전해 듣고 내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던지. 역사가로서 그 성명서의 역사적인 의미를 아주 높이 평가했던 거로 보이는군요. 그때의 천관우 씨는 재야 지도자로서 거목이었지요. 그의 서명을 꼭 받으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전연 내 발이 그를 찾아볼 시간을 내지 못하고 말았으니. 그때 그가 서명자의 명단에 올라 있어서 증인이 아니라 피고로서 우리와 같이 법정에 섰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동지가 되어 우리와 같이 민족 운동의 선에 커다란 기둥으로 지금도 버티고 서 있었을 것 같지 않아요? 그러니 내 마음이 어찌 무겁지 않으리오! 78년 그는 안국동 윤보선 씨 댁에서 모임이 있을 때마다 우리와 자리를 같이 했고 성명서를 같이 발표했고 기자회견도 같이 했지만, 뜨거운 동지 관계는 끝내 이루어 내지 못하고 어느 샌 지 우리 대열에서 멀어져 가고 말았지요. 이번에는 내가 서운하다고 말을 해야겠군요.

 

1992. 2. 27.

 

 이해영 목사, 박형규 목사, 천관우 선생이 『민주구국선언』서명에 포함되지 않은 배경과 그로 인한 아쉬움을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