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가 바라던 민족해방은 아직 오지 않았다.

당신께!

 

벌써 쉰한 번을 안동으로 행차했다구요? 팔순을 바라본다는 말은 지나친 말이었죠? 그래 칠순 중턱을 바라보는 나이라고 정확하게 이야기하죠. 그 나이에 열 달 동안 안동에 쉰한 번 행차했다니, 그러고도 피곤한 줄 모르고 지낸다니. 이런 일 저런 일 1인 10역을 하면서, 하루에 한 장씩 편지를 거르지 않고 쓰면서.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는데. 당신의 건강을 어떻게 다 감사할 수 있으리오. “나의 건강을 만인에게”라는 나의 기도가 이제는 “우리의 건강을 만인에게”로 바뀌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날 서울구치소에서 깎은 나의 머리카락을 얻어다가 당신에게 전해준 그분─ 지금 어디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텐데. 김근태는 머리 깎이는 것을 인간적인 모욕으로 느낀다고 했다지만, 나의 그때의 심정은 비장 그것이었지요. 담당이 놀라 뛰어와서 “웬일입니까?” 했을 때는 나의 앞머리에 깊은 고랑이 파여진 때였지요. “왜 안 돼? 난 기결수야. 이것이 여기서 내가 행사할 수 있는 마지막 자유야.” 웃으면서 던진 나의 말이었죠. 민둥머리를 만지다 보니 내가 꼭 중학교 시절로 돌아간 것 같더군요.

“그래, 그때도 한반도가 송두리째 일본놈들의 감옥이었으니까.” 머리를 빡빡 깎은 유난히 크고 잘생긴 동주의 머리가 눈앞에 나타났어요. 민족해방을 못 보고 빡빡 깎은 머리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눈을 뜬 채 마지막 숨을 내쉰 동주가 바라던 민족해방이 아직도 오지 않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울컥해졌어요.

다음으로 눈앞에 떠오르는 것은 장준하의 민둥 대가리였어요. 준하도 이 서대문구치소 어디에선가 살았을 텐데 조국의 허리가 사슬에 묶여 있는 한 민족해방이 없다고 생각하고 통일에 신명을 바치다가 그 일로 산중 고혼이 된 장준하─ ‘나도 너처럼 여기서 머리를 깎았다’고 속으로 외쳐 주었죠. 그 이후로 자리에 들 때는 흔히 오른쪽에 동주가, 왼쪽엔 준하가 누워 있다는 환각에 빠지곤 했어요.

성경에 손을 얹고 하느님께 맹세까지 해놓고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하고 머리를 기르게 된 것은 이희호 여사의 간청 때문이었죠. 78년에는 밖에서 머리를 깎고 지냈는데, 80년 서울의 봄을 노래하던 꿈같은 시절이었지요. “목사님, 머리를 기르세요. 목사님의 머리가 자라지 않는 걸 보면, 우리의 민주주의도 안 자란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건 정말 간절한 부탁이었지요. ‘그래 머리를 깎고 지낸다는 것도 형식주의지. 문제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느냐는 거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의 간청을 받아들여 머리를 다시 길렀죠. 너무 유별나게 구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구요.

내가 머리를 깎은 다음 날, 서남동, 이문영, 문정현, 신현봉, 함세웅, 이해동, 김대중, 우리 형제 해서 아홉 사람이 한 차를 타고 대전교도소로 갔다가 거기서 여기저기로 흩어졌지요. 나는 전주교도소 보안과장에게 넘겨져서 전주로 갔어요. 화창한 봄날이었죠. 오랜만에 수정도 안 차고 들판을 달리는 기분, 거의 해방감 같은 걸 느꼈거든요.

1992. 4. 10.

 

 대법원 판결 후에 삭발을 하고 윤동주장준하의 삭발한 모습을 생각했고그후 이희호 여사의 간청으로 머리를 기르기 시작한 일 등을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