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통일은 세계사적 과제

당신께

 

오늘부터 오후에 운동하기로 하고 서늘한 아침 맑은 머리로 편지를 쓰는 거예요. 이번 추석에는 내가 생각했던 대로 추석 전날 성묘를 하러 갔더군요. 문칠이가 외증조부모를 생각하면서 기도를 올렸다니, 놀라운 뿐이군요.

당신 사마귀라는 벌레 모르죠? 사마귀 중에서도 이름이 끔찍한 사마귀가 내 창틀에 날아들어 나와 마음을 주고받는 시간이 있었다오. 이 사마귀는 서울에서는 송장 사마귀라고 하고 여기서는 상주 사마귀라고 한다는군요. 내 앞에 나타난 상주 사마귀는 까만빛이었어요. 까만 옷을 입은 서양식 상주를 생각했는데, 이 부장의 말을 들으면, 이 사마귀는 젊었을 적에는 누리끼리한 상복을 입고 있다는군요. 한국 상복 색깔이지요.

난 그 사마귀가 죽으러 온 줄 알았어요. 내가 건드려도 날아갈 생각을 않는 걸 보아서. 그런데 밤새 어딘가 날아가 버렸거든요. “날 좀 잘 봐주세요. 내가 얼마나 멋집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나를 송장 사마귀니, 상주 사마귀니 하니 얼마나 억울합니까?” 이런 호소를 하러 왔었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자세히 보니, 무당벌레와는 비교할 수 없이 멋진 몸매였거든요. 유럽 중세기의 무사 같은 품위마저 지니고 있는데, 사람들은 자신의 추한 내면을 그 벌레에게 씌워 흉측한 이름을 붙여 주었으니.

흑인들은 흑인만의 아름다움과 멋이 있듯이 세상에 아름답지 않은 생명이 있을 수 없다는 걸, 그 사마귀는 내게 깨우쳐 주고 갔어요. LA에서 엉뚱하게 우리 겨레에게 보복한 흑인들의 억울함이 그런 거였겠지요.

산소에 갔던 이야기 편지로 읽어 대강 알았지만,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직접 들었어야 했는데, 그 이야기를 못 듣고 헤어져서 좀 아쉽군요. 피곤한 몸 푹 쉬면서 올라가기를 빌면서. 

당신의 사랑 늦봄

 

 

백낙청 교수님

 

 한겨레신문에서 독일에서 모인 “통일 합동 토론회” 기사를 잘 읽었습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대종합이 마르크스의 나라 독일에서 이루어질 것을 기대했는데, 그게 아니어서 실망이 자못 컸습니다. 그러나 흡수 통일의 심각한 후유증을 보면서 독일의 지성이 문제를 다시 보지 않나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그 기대마저 무너지는 느낌입니다.

독일의 지성들도 대세론 앞에서 무기력하기 그지없군요. 그런데 그 대세론이라는 게 세계사는 백인 손안에 있다는 백인 우월주의가 아닐까 싶군요. 히틀러의 아리안족 우월주의가 백인 우월주의가 되었다는 점이 발전이라면 발전일는지요?

그 모임에서도 한국의 통일은 흡수 통일일 수 없다는 결론이 났군요. 그건 여기서만은 대종합이 불가피한 역사의 요청이라는 말이 아닐까요? 이 땅의 지성들에게 짊어 지워진 세계사적인 과제가 바로 거기 있는 것이 아닐까요?

통일된 조국이 어떤 민주 국가여야 하는지를 백 교수님이 민족의 과제로 제시하시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바로 대종합일 수밖에 없겠지요. 그것은 바로 통일을 위한, 통일을 향한 민주주의의 모습일 수밖에 없기도 하고요.

나는 이것이 우리에게 지워진 세계사적인 과제라고 했습니다. 그 까닭은 이것은 제일 세계와 제이 세계가 제삼 세계에 떠넘긴 과제라는 데 있죠. 한국과 꼭 마찬가지로 제삼 세계 나라들은 하나같이 백인들의 지배 아래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종합이 역사의 필연이라는 말이죠.

이번 창작과 비평 가을호의 통일 특집 논문을 다 읽었습니다. 좋은 기획이었고, 좋은 논문이었습니다. 그 논문들에 대한 나의 소감은 이미 아내에게 써 보냈습니다. 필요하면 복사를 요청하시지요. 백 교수에게 기대하는 바가 큽니다. 이만 총총. 안동에서. 늦봄 드림

1992.0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