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운 발바닥

당신에게





(11월8일) 오늘 아침에 시편 131~136편까지 히브리 성서로 읽고 고린도 후서 11장을 읽고는, 너무 햇빛이 좋아서 팬티만 입고 일광욕을 하면서 예배 시간을 보냈구먼요. 지금은 오후, 사랑하는 벗들과 같이 예배하는 심정으로 편지를 쓰는 거요.



햇빛을 받으며 손바닥으로 온몸을 문지르는 일이 그대로 하느님을 예배하는 일이 되는 것을 나는 요사이 절실히 느끼는 거요. 이 질그릇이 그렇게 소중해지는 거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얼마나 실감 나는 말인지!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두 손바닥으로 애정을 담아 문지르다 보면 내 몸을, 아니 이 질그릇을 두 손으로 정성껏 문지르듯 이웃을 살뜰히 사랑한다면, 거기가 바로 하늘나라가 아니겠소? 그렇게 내 몸을 문지르다가 나의 두 손바닥은 마침내 발바닥을 문지르게 되었지요. 발바닥을 문지르다가 나는 정말 가슴이 뭉클하는 것을 느끼는 것이오. 거의 햇빛을 못 보고, 온갖 굳은 땅을 밟고 다니는 발바닥, 냄새나는 신발 속에서 무좀이 나서 귀찮아 죽을 지경이 되기 일쑤인, 나 자신도 거의 알아주지 못하는 발바닥, 나의 인생의 맨 밑바닥인 발바닥이 갑자기 눈물겹도록 고마워지는 거지요. 63년 동안 한 번도 고마움을 알아주지 않았는데, 불평 없이 나를 오늘까지 지고 다녀 준 발바닥이 고마워 더욱 뜨겁게 만져 주다가는 입술을 대고 키스해 주곤 하지요.



그럴 때면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작은 발바닥으로 대한민국 천지가 좁다고 돌아다니는 당신을 생각하고, 나가는 날로 당신의 발바닥을 눈물로 닦아주고 싶어지는 거예요. 키스도 해주고. 성경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고?”라는 말이 있지만 ‘발’이 아니라 ‘발바닥’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는지? 전할 좋은 소식도 없으면서 애가 타서 돌아다니는 발은 어떻다고 해야 할까요? 아마 “얼마나 서러운고”라고 해야 하겠지요. 이만하면 나의 오늘 아침 예배의 뜻이 무엇인지 알만하겠지요?



어제 새벽에는 윤반웅 목사님과 같이 임자 없는 새 무덤에 둘러서서 장례식 예배를 드리는 꿈을 꾸다가 깨었군요. 윤 목사님 찬송가를 인도하시면서 나더러 성경을 읽고 증언해 달라는 것이었소. 그래서 성경을 뒤적이다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과 십자가의 경험을 하신 다음에 이야기하셨다면, 그 이야기는 그전에 하신 이야기와는 퍽 달라지지 않았을까?” 우리가 찾아내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꿈에서 깨었더니, 창에 새벽 푸른 빛깔이 물들어 있었소. 그 절망적인 터널을 통과해나가신 예수의 마음을 불러내는 일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을 깨달은 셈이지요.  



나는 동주가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기 전에 피눈물로 읊조리기만 하고 종이에 옮기지 못하고 간 시들을 어떻게 살려낼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오고 있었는데, 우리와 예수와의 관계도 그와 같은 것이 아닐는지? 누가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비는 마음에서 절망적인 어두움을 뚫고 나간 예수의 마음을 읽었던 것이 아닐까요? 스테판이야말로 그 예수의 마음의 울림으로 생을 끝냈다고 누가는 믿었던 것이 아닐까요? 십자가란 하느님이 인류에게 용서를 비는 사건인 거죠. 그런 방식으로 인류에게 사죄를 선포하시는 거구요. 제4복음서 저자는 ‘사랑’밖에는 할 말이 없었던 거구요.



그런데 나는 요새 슬픔이 씻겨진 사랑(헬라 문명을 통과하면서)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히브리인들의 하느님은 은총과 긍휼과 자비로 참고 참고 또 참으시는 분이셨어요. 제 태에서 나온 자식이 실패하고 고생하고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애를 태우고 가슴 아파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긍휼이라고 한다면, 이건 사랑이기보다는 슬픔이지요. 그러나 그냥 슬픔이 아니라 사랑으로 푹 젖어 있는 슬픔이지요. 슬프다 못해 가슴이 찢어져 피를 쏟는 사랑이지요. 불교에서 말하는 대자대비도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닐는지?



그동안 우리의 주석은 문자에 너무 얽매여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우리는 예수의, 하느님의 마음을 우려내는 일을 주석의 과제로 삼아야 하지 않을는지? 그런 점에서 참 좋은 주석은 성서 학자들에게서 보다 예술이나 문학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고 성서학자들의 공적을 전적으로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어제는 ‘악에서 구해 주소서’를 기도하는 날인데, 저녁에 자리에 들어 이 기도를 드리다가 깨달은 것은, 악을 쳐부수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건져 달라고 비는 것은 소극적이 아닐까 하는 것이었소. 분명히 소극적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악과 싸우는 것을 우리 기도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핵심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이라는 것을 어제야 깨달을 수 있었어요. 오늘은 이만큼 쓰기로 하지요.





(11월14일) 어제는 좀 서글픈 접견이었던 같군요. 약해지신 어머님의 얼굴만 쳐다보고, 손 한 번 만져보지도 못하는 접견이어서 그랬던지, 마음껏 이야기도 못 한 것 같은 아쉬움이 남았군요.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리신 어머님이나 당신, 성근, 또 같이 오셨던 두 분의 심정은 나보다 더했겠지만.



저녁때 두둑한 세타를 받아 입었더니, 얼마나 따뜻한지 몰라, 고마워요. 어제도 말했지만, 잠자리에 들어서 발이 녹지 않아 잠을 못 자던 고통이 갔기 때문에, 겨울을 나기가 훨씬 쉬워진 셈이지요. 



하루 두 끼니 내 몸에 채우는 열에너지는 바로 쌀 한 톨 한 톨에 담겨 있는 이 땅의 가난한 농민들의 애타는 염원이요, 그 염원으로 불타오르는 하느님 사랑의 뜨거움이기 때문에 요까짓 추위쯤이냐고 생각하며 이 겨울 추위를 녹여 버릴 거예요.



마침 오늘 당신의 편지가 곁들인 백두산 천지 사진이 들어와서 흐뭇했어요. 그 추운 백두산 꼭대기 흰 눈 위에 피어있는 노랑꽃 나무의 싱싱한 푸르름, 그 그림을 벽에 붙여 놓고 보면서 나도 저 강인한 생명의 아름다움으로 이 겨울 추위를 웃어줄 것이오. 또다시 고맙군요. 그 그림에 딸린 시도 좋았구요. 이역만리 타향에서 고국의 통일을 비는 그 애타는 마음으로 내 가슴도 탈 테니까…….이스라엘의 구원을 보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었던 시몬, 안나처럼 이 나라의 구원, 곧 이 나라의 통일을 보시기 전에는 우리 아버님, 어머님도 눈을 감으실 수 없죠. 이제 아버님, 어머님도 그 확신을 하느님께 받으셨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이오. 찬양, 찬양.



어쩌다 보니 용서를 비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거의 매번 언급하는 것 같군요. 눈만 감으면 그런 하느님의 모습이 언뜻언뜻 비치고, 그 모습이 내 마음에 깊이 파고드는 때문인가 보오. 본 회퍼는 ‘하느님의 무력’을 말했는데, 그 의미는 별로 밝히지 못했던 것이 아닐는지? 나는 그걸 이렇게 이해하고 싶군요. 하느님은 무력하신 것이 아니라, 다만 손을 쓰실 수 없는 거라고. 왜? 우리의 운명, 역사의 운명을 사람들에게 완전히 맡기셨기 때문이지요. 가슴이 터지는 아픔을 겪으시면서도 다만 보고 계실 수밖에 없죠. 그러니 가슴이 터지는 아픔으로 용서를 빌 수밖에 없죠.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슬픔이 아니겠소?



동양에서 부모상을 당하면 자식은 죄인이 되죠. 부모의 은혜를, 그 엄청난 빚을 다 갚았다고 장담할 수 있는 자식이 없지요. 절대로 그러한 부모상을 당해서 죄인이 되지 않을 자식이 없지요. 그러나 그 마음과, 자식에게 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은 또 다른 것 같아요. 자식에게 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은 그냥 아픈 거예요. 그것이 하느님의 마음일 것 같군요. 그 하느님의 슬픔이 때로는 무서운 분노로 폭발하면서 역사 속을 흐르는 거죠. 하느님의 마음에 가슴을 열고 있는 사람들(역사의 주인)의 마음에 울리면서!



하느님이 역사를 이끄신다면 사람들의 마음에 울리는 당신의 슬픔으로 이끄신다고 믿어야 할 것 같군요. 찢어지는 가슴에서 당신의 뜨거운 피를 역사 속에 쏟아부으시면서, 그 아픔과 슬픔으로 역사를 움직여 나가신다고 나는 믿어요.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몰트만이 생각하듯 성부와 성자 사이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비는 하느님의 슬픔으로 역사의 한복판에 서있는 거죠.



십자가는 인간의 절망과 고뇌를 메고 어두움에 도전한 사건이라는 면과 함께, 용서를 비는 하느님의 아픔과 슬픔이라는 두 면을 지니고 있는 거요. 그런데 이 둘은 하나인 거요. 하느님의 마음이, 그의 슬픔이 인간의 절망과 고뇌를 외면할 수 없었던 거죠. 그 마음이 곧 용서를 비는 마음이오. 인류에게 사죄를 선포하는 것이었죠. 이렇게 진정 아프고 슬픈 사랑만이 맺힌 매듭을 풀고 막힌 담을 허물고 가슴과 가슴으로 만나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를 하느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화해라고 본 바울은 십자가의 뜻의 깊이를 바로 들여다보았다고 하겠지요. 민족 화해라는 것도 말이야 쉽지만, 진정 십자가의 절망과 고뇌, 그 아픔과 슬픔, 모든 것을 용서하고 용서받는 하늘 같은 마음에서만 울려 나올 수 있는 말이겠지요.



1981년 크리스마스에 사랑하는 이들에게 주고 싶은 나의 마음은 어제 말했지만, 잘 모를 것 같아서 여기 다시 적지요. “이 슬픈 땅 산허리에서 뿜어내는 아침 햇살이어라. 아침 햇살을 숨 쉬는 사랑의 눈물이어라. 진실의 반짝임이어라.” 사랑과 진실이 하나가 될 때, 그것은 끝도 없는, 깊이 모를 슬픔이 되는 것 같소. 그런 슬픔만이 역사를 움직이는 힘인 거고, 그런 슬픔이 역사를 움직이게 되어야 하느님의 마음이 역사에서 실현된다고 말해야 할 것 같구려. 오늘은 이만큼 쓰지요.





(11월16일) 어제 주일 날 아침 꿈 이야기부터 쓸까요? 어느 교회에 갔는데, 나의 제자가 새로 취임하는 날이었어요. 그런데 그 교회 마당에 내려갔더니, 거기 하늘을 덮는 큰 나무가 서 있었어요. 자그마한 숲 정도 큰 나무였소. 세상에 그렇게 큰 나무가 있을 수 없지요. 그런 고목인데, 마른 잔가지 하나 없는 싱싱하게 젊은 나무였어요. 옆으로 뻗었던 가지들이 아래로 굽어서 온 공간을 감싸 주었는데, 불이 켜진 듯 속이 환했어요. 눈을 들어보니, 그 나무가 끝나는데, 같은 나무들이 끝없이 이어져 있는 것이었소. 장관이었소. 꿈을 깨었더니, 비닐 창이 푸르스름 새벽을 알려주고 있었소. 이제 완전히 터널을 통과한 것 같은 느낌이었소. 마음에 우러나는 감사 기도로 주일을 맞았지요. 



아침을 먹고 앉아 찬송을 부르는데 내 귀를 의심할 정도로 나의 목소리가 부드럽고 여유 있고 우렁차지 않겠소? 나의 한창 시절이었던 20대에도 이런 목소리는 내게서 나 본 일이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해방의 종소리」, 「뜨거운 마음」, 「맑은 샘 줄기 용 솟아」 등을 부르다가, 또 허밍으로 부르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시오? 찬송가를 들여다보며 가사에 정신이 빨려 옆에 있는 사람도, 하느님도 잊고 찬송을 부르는 예배 형식을, 허밍만으로 하늘의 마음, 형제들의 마음과 같이 울리는 경험을 하는 예배로 형식을 바꾸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작곡가들이 제목만 있고 가사가 없는 허밍용 찬송을 작곡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글자에서 풀려나서 옆의 사람과 손을 잡고 어깨를 걸고 몸을 흔들면서, 때로는 손뼉을 치면서, 옆의 사람 어깨를 툭툭 치면서 마음과 마음이 울려 찬송을 부른다고 생각해 보세요. 바싹바싹 마른 목소리가 물기 오른 싱싱한 젊은 목소리가 되니까, 미친 소리 같지만, 두 며느리의 지도를 받아 가면서 성악 훈련을 본격적으로 받아 보고 싶은 생각이 다 드는군요. 오페라는 무리지만 성심에게서 가곡을 배우고 싶어졌구요. 오현명 선생에게서 한국 가요 창법도 배우고.



지난번 금식 기도 후로 나는 몸과 마음이 이렇게 새로워지고 젊어졌군요. 그동안 당신이 육감이 있어서 노래들을 들여보내 주었나 보죠? 지금도 나의 코끝에는 포스터(Foster)의 「Beautiful dreamer」가 향내처럼 묻어 있어요. 그렇게 배우고 싶으면서도 못 외던 「개척자」도 3절까지 보지 않고 부를 수 있게 되었구요. 박태기 선생 작사, 작곡인 「은진 교가」를 부르면서는 좀 눈물을 흘리기도 하구요. 쪼깐이들과 같이 부르던 노래들을 흥얼거리면서는 콧날이 찡해 오기도 하구요.



난 요새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다”는 한국 속담을 회의하기 시작했어요. 이건 군주 시대의 속담이에요. 민주주의 시대에는 “아랫물이 맑아야 윗물이 맑다”로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소. 윗물이 맑기를 기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연목구어(緣木求魚)가 아니겠소? 아버님이나 동환이가 생각하는 ‘국민교육’, ‘민중교육’, 안(병무) 박사나 서(남동) 목사가 생각하는 ‘민중신학’, 내가 깨친 ‘새살의 생명’ 등은 다 아랫물을 맑게 하자는 것이 아닐까요? 맑은 호수에 비친 제 얼굴을 보고 사람들이 그 호숫물로 얼굴을 씻게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 일을 위해서 한국에서 기독교와 불교는 손을 잡아야 할 것 같군요. 하느님의 나라와 함께 회개를 외치신 예수의 심정을 이제야 겨우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내 혈압 때문에 모두 걱정을 할 것 같은데, 오늘 아침 의무과장 이야기는 추위에 몸이 적응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과도기적인 현상이라는 거였소. 내 생각에도 그런 것 같고. 뒤통수가 굳어진다든가, 머리가 아프다든가, 그런 일이 전혀 없고, 몸은 가볍고 머리는 맑기만 하기 때문에 나는 하나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어요. 오늘 아침에도 170-120, 체중은 66 kg. 그러나 안심해서는 안 되지요. 나는 건강관리에는 도사니까 안심, 안심. 어머님 건강을 위해서 더 신경을 써 주시오. 내 생각에는 콩을 여러 가지로 많이 먹는 것이 좋을 것 같군요. 콩가루, 콩비지, 콩죽 등등. 화분에다 콩나물을 길러 먹어도 좋고요. 들깨도 상비해 두면 좋을 것 같군요. 성심이는 꼭 한약으로 보해 주도록 하시오. 할머님이 ‘부디’ 이야기를 시작하시다가 마셨는데, 바우가 비운 자리를 보라가 훌륭히 채우는 것 같아서 정말 정말 흐뭇하군요. 채원이 미국 갔다 온 소식을 가지고 오는 줄 알았는데, 못 보아서 좀 서운했군요. 독일에서는 호근이가 보냈다는 편지와 사진이 아직도 미달. 그렇게 쉽게 편지를 잘 쓰는 호근이가 그 정도 바쁘다면, 그만큼 성과가 많은 거겠지요. 당신이 들여보낸 그림 (웃으시는 예수)는 보기만 하고 영치시켰소. 그것도 편지로 부쳤으면 들어오는 건데. 영미의 그림도 그런 식으로 들어와야 내가 받을 수 있을 거로구만요. 이제 한 달 남짓하면 크리스마스인데, 감옥 안팎, 국내 국외의 친지들에게 뜻깊은 성탄이 되기를 빌고 또 빌 뿐이요. 모두 모두에게 나의 뜨거운 마음을,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마음을 보내 주시오. 그들의 뜨거운 마음으로 나의 몸과 마음도 뜨거워질 거구요. ‘성령’도 한문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마 ‘하느님의 뜨거운 마음’이라고 밖에 번역할 길이 없었지 않았을까? 나에게 이 뜨거운 마음을 안겨준 당신은 나에게 하느님의 사도인 거죠. 그 불덩어리를 뜨겁게 안고 이 겨울 추위쯤 간단히 이겨 내는 거죠. 만세, 만세. 저녁이 들어왔군요. 입에 침이 돌아서 이만. 사랑,





1981. 11.






기도의 의미에 대한 명상과, 아내가 보낸 그림과 통일을 노래하는 시에 대한 감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