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0805 선으로 악을 정복하는 싸움

당신에게





오늘 아침에 젊은 여류 시인 양애경 씨의 「연금술사」를 읽다가 여기에 또 하나 빛나는 ‘기다림’이 있는 걸 발견하고 여기 적어 보기로 했소.





순금 같은 영혼을 가지고 싶어라.



바위틈에서 노랗게 광맥을 드러내고 싶어라.



물에 씻겨 하류로 내려가 모래에 섞여도



햇빛과 만나 부드럽게 빛의 파동을 이루는



투명한 말을 뱉고 싶어라.





여섯 연으로 되어 있는 시의 첫 연이오. 양애경 씨도 민 양과 같은 입장에 놓여서 12년을 기다리고도 앞으로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모르는 형편이라면 어떨까요? 그때에도 그 기다림이 원망과 저주와 욕설과 미움이 되지 않을 건가요?



양애경 씨는 세상이 아무리 지저분하고 원망스럽고 저주하고 싶고, 미운 심정으로 말한다면 칼을 들어 저 어두움의 가슴 한복판을 찌르고 싶겠지만, 끝까지 황금빛을 잃지 않겠다는 것 아니겠소? 아무리 억울해도 미움으로 마음이 일그러지고 빛을 잃는 일이 있다면, 그건 지금까지 참고 기다린 걸 제 손으로 무너뜨리는 일, 제 손으로 순금 같은 영혼에 먹칠하는 일이니까요.



사랑으로 시작된 일이 미움으로 끝나서는 안 되겠다는 것 아니겠소. 사랑으로 시작된 일 죽는 한이 있어도 사랑으로 일관하고 싶다는 것이 아니겠소.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바울의 말을 양 시인은 이렇게 뼈아프게 노래하고 있군요. 미움에 지는 일은 곧 그 미움을 미움으로 갚는 일이거든요. 미움을 이기는 일은 나를 집어삼킬 듯이 달려드는 미움의 물결들에 내 발을 적시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그 미움의 물결을 내 발 앞에 굴복시키는 일이지요.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을 돌려대라는 예수의 가르침이 패자의 자기 위로 외에 아무것도 아니라고들 생각하지만, 양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오늘 아침에 그게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었소. 이렇게 기다림이란 치열한 싸움이군요. 미움을 굴복시켜 정복하는 사랑의 치열한 싸움이군요. 그 싸움은 저 어두움과 싸우는 일이기 전에 악으로, 아니 미움으로 변질하려는, 약해지는 자기의 마음과 싸우는 일이군요. 지금은 기다리는 사람들,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 있는 사람들이 언젠가 새 시대의 깃발을 드날릴 때, 그들은 패배자여서는 안 되는 것 아니겠소? 먼지를 탁탁 털고 시냇물에 몸을 씻고 나서면, 그 오랜 기다림, 그 오랜 시련으로 단련된 더 맑은, 더 빛나는 사랑으로, 빛나는 몸으로 웃으며 나설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니겠어요?



진정으로 치열한 참 싸움은 악으로 악을 정복하는 싸움이 아니고, 선으로 악을 정복하는 싸움인 거죠. 우리의 기다림은 이렇듯이 치열한 싸움이군요. 다음 주일 갈릴리교회의 명상에 양 시인의 이 시 첫 연을 실었으면 좋겠소.



20세기 한국 지성의 절정이라고 자처하던 최남선이나 이광수의 변질에 비해서 끝까지 일본 호적에 이름을 올리는 걸 거부하고 산 한용운 스님의 시구 “님은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았습니다”는 햇빛과 만나 부드럽게 빛의 파동을 일으키는 순금 같은 영혼이 내뱉는 투명한 말인 거죠.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을 읊조리며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둔 윤동주의 영혼도 끝까지 순금 같은 영혼을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어두워 가는 조국의 역사를 빛내고 있는 것 아니겠소?



기다림에 지쳐 쓰러지지도 않고 기다림에 절망해서 어두움에 항복하지도 않은 영혼, (민)향숙의 영혼의 승리를 노래할 날이 오고야 말 테지요. 그걸 못 믿는다면 우리 모두 인생 폐업을 선언하는 것이 낫지 않겠소? 오늘도 이렇게 빛나는 영혼을 만나게 해주신 하느님께 감사, 감사.



1986. 8. 5. 당신의 늦봄






참 싸움은 악으로 악을 정복하는 것이 아니고, 선으로 악을 정복하는 것이라는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