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길님
(6월6일)“어쩌다 이런 때도 있었군!” 그야말로 망중한(忙中閑)이었군요. 성수, 문칠 부자가 탁구 치는 걸 구경하면서. “때르릉” 장기표 씨의 전화, 백병원으로 빨리 나오라고. 경찰과 학생들의 충돌로 불상사라도 생기면 큰일이라는. (김)귀정이 때문에 또 학생이 하나라도 죽는다면 큰일이라는 거였소. 자지러드는 몸 좀 뉘었다가 귀정의 어머니에게 부검을 받으라고 권해야겠다며 옷을 주섬주섬 입고 나서는 나의 다리는 왠지 좀 떨리더군요. 택시를 잡으려고 두리번거리는데, 와락 달려드는 사복들, 난 담담하기만 했었다오. 인천으로 내려오는 줄 알았지요. 그런데 인천이 아니고 영등포 교도소, 또 새 교도소의 새 경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군요. 가부좌(跏趺坐)하고 앉아 눈을 감으니, 세상만사 내 생활권 밖으로 밀려나는 듯하더니, 깜깜한 나의 기도 속으로 밀려 들어오더군요. 모든 생명의 생명이시여, 모든 진실의 진실이시여, 모든 사랑의 사랑이시여! 모든 아름다움의 아름다움이시여!!! 모은 아픔의 아픔이시여!
한참 누워서 쉬는데 접견이라고 해서 이 시간에 누가? 하면서 나가 보았더니, 북부서 사람들. 조사할 게 있다나, 한심 한심 한심. 물론 수사에 불응했죠. 이리하여 영등포 교도소 첫날이 밤낮 하루가 지났군요.
영금아
(6월7일)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니, 무얼 보고 그런 느낌이 들었지? 사복들은 모두 철수하고 없었을 텐데. 육감이란 묘한 거구나. 접견장 저편에 나타난 엄마는 그저께도 어제도 왔던 듯 태연하기만 한데, 네 얼굴에는 안쓰러운 기색이 약간 스치더구나. 엄마에게 너의 정이 더 필요할 거로구나.
봄길님
(6월8일) 옷가지들과 함께 책들이 들어왔다오. 새누리 신문에 히브리 민중사 속편을 쓰느라고 만져 보았을 뿐, 반년 동안 거의 내 손이 닿지 않던 공동번역 가죽 성서를 만지면서 나는 그동안 그렇게도 성서를 떠나 살았던가? 하는 생각마저 들더군요.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거든요. 우리가 읽어야 할 본문(text)은 사실 책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니까요. 오늘의 아픔, 오늘의 절망에서 하느님의 아픔과 절망을 읽고 그것을 딛고 일어서시는 하느님의 몸부림을 읽는 일에 정말 정말 정신이 없었던 것 아닐까요? 여기라고 오늘의 아픔과 절망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천 년, 삼천 년 전 팔레스틴, 지중해 둘레의 현실 속에서 하느님의 발자국을 다시 더듬는 일을 할 수 있으리만큼 시간의 여유가 생긴 거죠.
은숙이, 성심이
(6월9일) 밖에 있을 때는 교회에 나가도 소리가 나지 않아 찬송가라고 부를 수 없었는데, 오랜만에 “어디로 가서 사랑을 숨 쉬며 살 수 있을까”를 쉰 목소리로라도 부르자니까 성악가 며느리들 생각이 났던 거야. 마음이 기뻐질 때 온몸의 세포들이 얼마나 기뻐하고 얼마나 왕성해지느냐는 걸 나는 알거든. 그런데 몸과 마음을 동시에 기쁘게 하는 것 중에 즐거운 노래를 부르는 일만큼 더 좋은 게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프로 의식을 가지고 노래를 부르는 전문가에서 그냥 즐겨 노래를 무르는 아마츄어의 세계로 돌아와 보라고. 온몸의 세포들이 깔깔대며 좋아하도록 풀린 마음으로 노래를 불러봐요. 얼마나 좋은가! 눈을 감고 허밍으로 온몸의 세포들을 향해서 노래를 불러 보라고. 세포들은 그냥 청중이 아니야. 온몸의 대합창이 되지. 프로로써 부르는 노래도 그런 노래가 돼야 하지 않을까?
유(원규) 목사님
온 교회가 저를 위해서 드리는 뜨거운 기도가 가슴에 물결쳐 오는 걸 느꼈습니다. 모두 날벼락 맞은 심정이겠지요. 그런데 저는 전혀 그게 아닙니다. 저는 또다시 두려움은 적게 가지고 기대는 크게 가지고 여섯 번째 징역살이를 시작했습니다. 하느님은 무언가 생각할 수 없이 큰 걸 가지고 저를 기다리고 계시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나갈 때는 또 커다란 선물을 안고 나갈 테니까 기대해 주세요.
(6월10일) 내 감방문 밖에 “문익환, 국보 2호”라고 팻말이 붙어 있는 걸 보고 나는 그지없이 흐뭇했다구요. 이관복 선생님.
성근아
(6월11일) 머리를 빡빡 깎고 나타난 애비 모습이 한심하다고 느끼지 않았니? 아니요, 그냥 무덤덤했어요. 그럴 테지. 나도 배터랑이지만, 너도 이제 베터랑일 테니까. X평방(방 크기 검열에서 삭제) 하나도 답답하지 않다. 눈만 감으면 나는 무한 공간 안에 앉아 있는 거니까. 무한 공간에 가득한 氣를 마시는 나의 자유와 특권을 내게서 빼앗아 갈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으니까 말이다.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말 알지? 그건 결코 오기가 아니다. 스크린에 객관화된 너 자신을 깨는 일, 깨고 또 깨는 일 없이 너는 자라지 못한다. 죽는 날까지 자란다고 생각해 봐라.
1991.06.06-06.11
가족들과 한빛교회 유 목사님에게 여섯 번째 감옥살이를 시작하는 심정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