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문익환_<나와 늦봄>

    신경호, 문목사가 1989년 4월 13일 방북 후 귀국하는 날

    검은색 차가 출구로 향하자 기자들이 소리쳤다 “잡아! 잡아!”   ◇문익환 목사가 방북후 귀국하는 날 김포공항 청사에 마중나온 가족들. 문동환 목사와 박용길 여사.    사복경찰, 버스를 세운후 가방을 열다 1. 김포공항 가는 길  1989년 4월 13일은 문익환 목사가 방북을 하고 귀국하는 날이다. 나는 카메라를 챙겨 집을 나섰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무거웠다. 문익환 목사의 입국이 예정되어 있는 김포공항은 경비가 삼엄하리라는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전 해에 집회 현장에서 사진 촬영중 전경에게 필름을 빼앗겨본 경험이 있는 나로서는 공항이라는 제한된 공간과 경찰들의 삼엄한 경비속에서  무사히 사진촬영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게다가 나는 당시에 군 입대를 한 달여 앞둔 시점이라 심적 부담은 더했다. 카메라 가방을 메고 공항버스 정류장에 와서도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버스를 타지 못하고 2-3대를 보낼 정도로 마지막까지 고민을 한 끝에 버스에 올랐다. 공항으로 가는 도중 버스는 한 번인가 두 번 불심검문을 받았다. 사복 경찰이 버스를 세운 후 버스에 올라와 뒷좌석부터 승객들의 휴대품 검사를 했다. 검문을 하던 경찰은 내 옆에 오더니 카메라 가방을 열어보라고 했다.  카메라를 보더니 카메라를 왜 가져가는지 물었다. 사진이 취미라고 대답하자 이번에는 공항에 왜 가느냐고 물었다. 대만에서 친구가 오기로 되어 있어 마중 나가는 중이라고 했다.  사실 버스를 타기 전에 공항에 왜 가는지 물으면 무어라 대답할 지 고민하다가 예상 답변(?)을 정하지 못하고 버스를 탔는데 막상 경찰이 물으니 다행히 친구 마중 간다는 말이 툭! 튀어 나왔다.  경찰은 별 말 없이 버스에서 내렸고 버스는 다시 공항으로 출발했다.. 그렇게 나는 김포공항으로 가고 있었다.   ”문목사 처단하라” 현수막도 2. 청사 앞에서 막히다    버스가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은 이미 청사 게이트, 주차장 등 곳곳에 많은 경찰들이 배치되어 있어 긴장감이 감돌았다.  버스에서 내려 입국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청사 앞에 있던 사복 경찰이 나에게 여권을 보여 달라고 했다.  그는 여권이 있어야 청사 출입이 가능하다고 하여 청사로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다행히 청사 앞에서 촬영을 해도 경찰들은 제지를 하지 않았다. 주차장 입구가 시끄러웠다. 2층에서 주차장 쪽을 보니 몇몇 청년들이 '문익환목사 처단하라. 전국실향민청년연합'이라고 씌여진 현수막을 들고 서 있었다. 많은 기자들이 몰려와 그들을 촬영하였고 잠시 후 경찰들이 와서 그들을 해산시켰다. 그들이 유인물도 뿌렸는지(아니면 뿌리려다 실패했는지) 몇몇 기자들 손에 유인물 뭉치가 들려 있었다. 나는 청사 앞에서 사복 경찰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서 있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다시 청사 아래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검은색(으로 기억함) 차가 청사 앞을 지나 출구 쪽을 향하고 있었고 몇몇 기자들이 "잡아! 잡아!"를 외치며 그 차를 쫓아가고 있었다.  당시에는 그것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없었다. 잠시 후 내 앞에 있던 사복 경찰은 나에게 이제 청사에 들어가도 된다고 말해 주었다.   귀국환영 현수막을 펼치자 달려든 경찰 3. 청사 안으로 들어가다    나는 사복 경찰이 뜻밖에 청사 출입을 허용하는 바람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청사로 들어가 왼쪽으로 걷고 있었는데, 문득 사람들이 오른쪽으로 모이는 느낌을 받았다.  나도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어 걷기 시작했다.  앞에 기자들이 모여 있었고 그곳에 마중 나온 문익환 목사 가족들이 앉아있었다. 문익환 목사의 어머니와, 부인 그리고 동생 문동환 목사였다. 기자들은 가족 주변에 모여 열심히 취재를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전학련 소속(으로 기억함) 회원들이 가족들 주변에서 문익환 목사의 귀국을 환영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을 펼쳤다. 현수막이 펼쳐지자 경찰들이 몰려와 현수막을 철거하려고 하였다. 경찰과 전학련 회원들이 현수막 양쪽을 붙잡고 줄다리기를 하듯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경찰이 현수막을 철거했다. 문익환 목사를 마중 나온 가족들은 아쉽게도 문익환 목사를 만나지 못하고 공항을 떠났다.    ◇전국실향민청년연합이 펼친 ‘문익환을 처단하라’ 현수막.   ◇문익환 목사가 귀국하는 날 김포공항 청사에 집결한 경찰들이 삼엄한 경비를 펼쳤다.    신경호는? 사진이 취미인 사람. 문익환 목사가 방북 후 김포공항을 통해 귀국하던 순간, 그 현장에 있었다. 통일의집에 방문하여, 문익환 목사 귀국 당시 찍었던 사진들의 기증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 월간 문익환_<늦봄과 이해찬>

    송경용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올리는 글 (2026년 2월호)

    제도밖에서 시대의 진실을 말한 문익환 현실정치 안에서 개혁을 추구한 이해찬   ◇1987년 감옥에서 석방된 문익환이 민통련 사무실로 이동할 때 공항에 마중나온 젊은 이해찬 전 총리가 부축하고 있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이해찬 전총리의 서거를 애도하며… 이해찬 전 총리님의 서거를 애도합니다. 문익환 목사님, 문동환 목사님 추모식에는 추운 날씨에도 불구히고 불편한 몸을 이끄시고 함께 해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사단법인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서, 사적으로도 여러모로 깊은 인연이 있었던 두분의 삶을 간략하게 비교해봅니다. (이해찬 전 총리님은 통일맞이 이사장을 역임하셨고, 늦봄문익환목사님기념사업회 고문이십니다) 문 목사님은 목사, 시인, 민주화와 통일 운동가로서 독재에 맞선 양심의 목소리로 분단을 넘어선 평화와 통일의 상상력을 확장 시키셨고, 거리와 감옥을 오가며 '말하는 양심'으로 시대를 흔들며 우리 사회의 도덕적 기준과 영적 깊이를 남기셨지요. 제도 밖에서 누구보다 선명하게 시대의 진실을 말한 분으로서, 시적 언어로 말씀하시고 글을 쓰셨으며, 예언자적으로 행동 하셨지요. 이해찬 전 총리님은 사회운동가, 정치인, 행정가로서 민주화 운동에도 기여했지만 민주화 이후 국가 운영의 현실정치를 책임진 전략가였습니다.  문 목사님과 달리 제도 안에서 개혁을 추구했던 전략가이자 실무형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치와 정책, 시스템을 통해 민주주의가 지속 가능하도록 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이해찬의 언어나 행동은 감성적이거나 감정에 호소하지 않았고 전략, 정책, 구조로, 선언이 아니라 제도로 움직인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문익환 목사님과 이해찬 전 총리는 반독재,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한반도 평화에 대한 일관된 열망이라는 관점에서 세대와 시대를 넘어 같은 시대, 같은 방향의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나라 민주주의는 제도권 밖에서 흔드는 힘(재야라고도 했지요)과 안에서 고쳐나가는 힘이 함께 작동하면서 성장했다고 생각합니다.  문익환 목사님은 양심/영성/시적 언어/예언자적 풍모와 행동으로 밖에서, 광야에서 외치고 흔드는 역할을 하셨다면, 이해찬 총리는 정치 안에서 행정, 제도적 실행을 통해 민주주의 발전과 성숙에 기여했다고 할 수있을 것입니다.  문익환 목사님이(문 목사님과 함께 하셨던 재야 인사들이) 길을 불러냈다면, 이해찬 전 총리는(우리가 기억해야하는 민주/진보 정치인들) 그 길을 닦아나가는 역할을 했습니다.  문익환 목사님 등이 열어젖힌 금기와 상상력의 공간 위에서 이해찬 세대는 법과 제도, 행정과 정책으로 그 공간을 현실화 했습니다. 문익환 등 재야,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없었다면 이해찬 세대가 움직일 정치적, 도덕적 지평 자체가 훨씬 좁았을 것입니다.  시대의 양심이라 불리우던 광야의 목소리 문익환, 그 양심과 목소리가 시대의 기준이 되었다면, 그 기준을 정치와 국가의 언어로 해석하고 설계하고, 만들어간 사람, 그 사람들 중에서 가장 크게 역할을 해낸 정치인으로서 이해찬 전 총리님을 기억합니다.  카랑카랑하고 날카로웠던 겉 모습과 함께, 때로는 소년 같은 천진함, 격의 없는 친근함과 다정함을 지니셨던 이해찬 전 총리님의 서거를 애도하며, 주님의 은총으로 영원한 안식과 평안에 이르시기를 기도합니다.    ◇김포공항의 석방 환영 인파를 뚫고 지나가는 문익환 목사와 이해찬 전 총리.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 월간 문익환_<현장탐방>

    마석 모란공원 늦봄 문익환 32주기 기념식 (2026년 2월호)

    다른 빛깔로 다르게 빛난다   “누군가 이런 말을 했지요. '문익환의 생애는 단 하나였지만,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각기 다른 빛깔로 다르게 빛난다. 저마다 목사님의 표정을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넓게, 우리가 잘 모르는 곳까지 손길이 담았다는 뜻이겠지요.” -최교진 교육부 장관 기념사로 나왔던 이야기 중 기억에 남는 한 문장을 옮겨 봅니다. 기념식을 찾아와 주신 분들이 떠올리고 추억하는 문익환의 모습은 각각 다를 수 있지만 그의 이름이 여전히 각각의 삶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기에 오늘날에도 그를 이정표 삼아 살아가고 있는 이들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 1월 17일, 마석모란공원 통일동산에서 ‘늦봄 문익환 32주기 기념식’이 열렸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200 명 가량의 시민이 모여 늦봄 문익환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부는 한빛교회의 예배가, 2부에는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가 준비한 기념식이 진행됐습니다.  올해는 이영 전 민가협 상임의장, 최교진 교육부 장관, 늦봄학교 졸업생 이수명 세 분이 대표로 기념사를 통해 늦봄 문익환이 어떤 사람이고 사람들의 삶에 어떤 의미로 자리매김하고 있는지 되새길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함께 운동했던 동지, 후배들의 운동에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선배, 떠난 뒤에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사람. 기념사를 들으며 우리는 문익환의 여러 모습을 떠올려 볼 수 있었습니다. 다음 순서로 종합 예술단 봄날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마지막에는 행사에 참여한 모두가 손을 잡고 ‘아침이슬’을 따라 부르며 행사가 마무리되었습니다.    

  • 월간 문익환_<3·1민주구국선언>

    빅토리숄 직접 떠 보기 (2026년 2월호)

    한땀 한땀, 보라색 숄에 담긴 승리의 약속    ◇1976년 ‘3·1민주구국선언 사건’ 구속자 가족들이 ‘민주회복’ 구호를 내걸고 보라색 실로 빅토리숄을 뜨개질하고 있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민주주의를 향한 고요하지만 뜨거운 저항, ‘빅토리숄’을 기억하십니까? 1976년 3월 1일, 명동성당에서 울려 퍼진 ‘민주구국선언’은 유신정권의 서슬 퍼런 칼날 아래서 민주주의를 외친 용기 있는 외침이었습니다. 선언에 참여한 이들이 차례로 구속되자, 그들의 곁을 지키던 부인들은 슬퍼하는 대신 보라색 실을 손에 들었습니다. 고난과 수난, 그리고 최후의 승리를 상징하는 보라색. 그녀들은 이 보라색 실로 정성껏 숄을 떠서 어깨에 둘렀습니다. 앞모습이 승리의 ‘V(Victory)’자를 그리도록 만들어진 이 숄은 법정의 차가운 공기를 뚫고 구속자들에게는 위로를, 정권에게는 굴하지 않는 저항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함께 한 뼘씩 보랏빛 물결을 만들어 주세요 작은 조각들이 모여 보랏빛 승리의 약속으로  ▲우리가 다시 ‘빅토리숄’을 뜨는 이유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의 온기는 누군가가 묵묵히 짜 내려간 보라색 편물 조각들이 모여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날의 정신을 작은 손뜨개로 되살려보려 합니다.    ․ 기억의 연대: 한 코 한 코 올을 올리며,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던 이들의 이름을 기억합니다.  ․ 일상의 실천: 거창한 구호가 아니더라도, 우리가 만드는 작은 숄 하나가 민주주의를 향한 일상의 다짐이 됩니다.  ․ 나눔의 온기: 함께 모여 뜨개질하며, 그날의 여성들이 보여주었던 강인한 연대 의식을 공유합니다. 함께 한 뼘씩, 보랏빛 물결을 만들어주세요 커다란 숄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가방에 달 수 있는 작은 미니어처 숄도, 따뜻한 목도리도 좋습니다. 보라색 실에 각자의 염원을 담아 함께 떠봅시다. 우리가 뜬 이 작은 조각들이 모일 때, 세상은 다시 한번 보랏빛 승리의 약속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승리를 믿었던 그 마음, 이제 우리의 손끝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빅토리숄을 걸치고 뜨개질 하는 있는 3.1 민주구국선언관련 가족들. 김석중, 고귀손, 박용길, 공덕귀, 이우정, 이태영, 이종옥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 월간 문익환_<늦봄의 서재>

    송기숙 『녹두장군』 (2026년 2월호)

    “난 역적에서 통일꾼으로 1년도 안 걸리더군”   늦봄은 투옥 중 송기숙과 편지를 주고받기도 하고, 봄길에게 송기숙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1990년 6월 22일 전주교도소에서 봄길에게 보낸 편지에는 녹두장군을 읽기 시작했으며, 송기숙 교수의 익살스러운 모습이 떠오른다고 한다. 1992년 7월 6일. 안동교도소에서 송기숙에게 보낸 편지는 ‘마냥 거칠기만 한 사내 이름이 어쩌면 그렇게 여성적인 이름인지’로 시작하는데 이를 보면 두 분의 사이가 격의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어 『녹두장군』을 읽고 난 감상으로 주인공 ‘전봉준 장군이 난적에서 혁명가로 명예 회복하는 데 한 세기가 걸렸는데, 나는 역적에서 통일꾼으로 회복하는 데 일 년도 안 걸리더군요.’ 라며 역사의 빨라진 템포를 실감한다고 전한다.  이어 시인은 소설가들 앞에서 주눅이 드는 때가 있는데 이는 소설가들은 사실을 다각도로 조명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시인은 그 점이 부족하기 때문인 것 같다고 한다. 늦봄은 1990년 6월부터 『녹두장군』을 읽기 시작해 1~9권까지 읽었고, 이날 편지에서 나머지 3권이 곧 나올 때가 됐는데 기다려진다고 한다. 송기숙은 『녹두장군』을 쓰기 위해 동학농민전쟁 전적지를 찾아다니며 지명을 확인하고, 현장을 관찰하고, 그 지방에 전해 내려오는 구전을 듣는다. 그리고 12권을 한꺼번에 발간한 것이 아니라 1989년 10월에 시작해서 1994년 1월까지 4년 3개월 만에 끝낸다.  늦봄은 1994년 1월 18일에 돌아가셨는데 12권을 다 읽으셨을까?

  • 월간 문익환_<보존연구실 601호> (2026년 2월호)

    3.1구국선언 50주년 맞은 복식 유물

    반백년 세월의 때를 한올 한올 복원하기    안녕하세요. 점점 연구실다운 면모를 갖춰가는 보존연구실 601(가상공간)입니다. 3.1민주구국선언 50주년을 맞아 사건과 관계된 복식 유물을 살펴보겠습니다.    ◇문익환 목사의 갈색 수의. 수감번호 6943번이 달려있다.   문익환 목사는 ‘3.1민주구국선언문’ 초안을 작성하여 ‘긴급조치9호(비방금지)’ 위반 혐의로 만 57세에 첫 감옥을 경험합니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가 소장한 문익환 목사의 갈색 수의(囚衣)는 수감번호 6943번을 달고 있는데요, 바로 첫 감옥 서울구치소(서대문)에서 배급받은 것입니다.  형행법시행령(1969~1979)에 따르면 실내의, 작업의를 1벌씩 계절에 맞게 급여한다고 했으니 서울구치소 재소 시기 3~8월에 맞는 봄, 가을용 실내복쯤 되겠습니다. 재소자가 석방될 때 수의를 지참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으나 입고 나올 변변한 옷이 없던 탓에 전주교도소에서 수의를 입은 채 출소하여 소장하게 된 역사적인 사료입니다.    “그날[1977년 12월 31일] 찍은 사진에 자유의 새벽이라고 쓴 거 보니까 새벽이야. 아무런 기별을 못 받았으니까 제대로 입고 나올 옷도 못 넣어줬거든. 그랬더니 수감자 옷을 그대로 입고 나오셨더라고. 그마저도 작아진 것을 입고는…” (정경아, 『봄길 박용길』 중에서)   다음은 감옥 밖에서 싸운 여성들의 활약을 보여주는 보라색 원피스와 빅토리숄입니다. 민주인사들이 감옥에서 투쟁할 때 여성들은 의상과 소품을 제작하여 재판날마다 퍼포먼스를 곁들인 시위를 계획했습니다. 기독교에서 고난과 승리를 상징하는 보라색으로 색을 맞추었습니다.    ◇1976년 6월 시청앞에서 열린 구속자 가족들의 시위. 저항의 상징으로 보라색 한복을 맞춰 입었다.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빅토리숄.   박용길의 보라색 원피스 왼쪽 주머니에는 남편의 전주교도소 수번 2020을 작은 구슬로 장식했습니다. 빅토리숄은 시위용품이면서 무연고 재소자들을 구호를 위한 판매물품이기도 했습니다. 여성들은 길고 긴 대기 시간 틈틈이 코바늘과 실을 손에서 놓지 않고 ‘민주회복’을 되뇌이며 부지런히 한 코 한 코 떠 나갔습니다.  만든 지 40여 년이 지난 의복류는 세월의 때가 묻고 재질이 약해지고, 모양이 조금 틀어져 있었습니다. 2018년 통일의집 재개관 기념전시를 위해 복식 유물 전문가인 채정민 학예사(단국대 석주선기념박물관)에게 보존처리를 의뢰했습니다.  보존처리는 보관상태가 아주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오염을 제거하고 형태를 바로잡아 관리 및 전시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진행했습니다. 당시 처리 작업을 채 학예사는 다음과 같이 기억합니다.       ◇의류를 포함한 직물 사료를 살펴보는 채정민 학예사(오른쪽에서 두번째)   “대부분 근현대 유물이라서 처리 전에 필요한 자료들을 열심히 찾아보고 공부했던 기억이 납니다. 문 목사님이 제가 다니던 대학을 방문하셨을 때 연설을 참관한 적도 있어서 느낌이 남달랐지요. 앞으로도 유품이 잘 보존되어서 많은 분들과 함께 그 가치를 오래도록 나누었으면 합니다. 그게 제 임무이기도 하고요.”   한 땀 한 땀을 복원할 뿐 아니라 그 가치까지 되살리는 복원가의 전문성에 경의를 표하며 그 결과물인 소중한 유물이 잘 있는지 확인하러 오늘도 수장고에 갑니다.      ◇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직원 대상으로 보존 교육을 실시하는 채정민 학예사(가운데)      [참고자료] 정경아(2020). 『봄길 박용길』. 삼인 채정민 외(2018). 『통일의집 소장 복식자료 보존처리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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