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문익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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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 문익환(ISSN 2951-2115 eISSN 2951-2123) 2025년 9월호 [🔗pdf 다운받기]  

  • 월간 문익환_<늦봄의 말과 글>

    연대의 언어와 하나됨의 길 (2025년 9월호)

    식민지역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 전시회 입구에 들어서면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 강렬한 외침이 눈에 띕니다. “연대야말로 힘이다.” 그렇습니다. 12.3 계엄 정국에 거리로 나선 시민들에겐 광장이 학교였고 서로가 서로의 교과서였습니다. MZ들과 5060이 세대를 넘어 어깨걸고 ‘다시 만난 세계’를 합창했고, 남태령으로 달려나간 어린 여학생들은 농민들의 트랙터 행렬에 합류했습니다. 거리의 연대가 승리의 역사로 기록되는 순간들이었습니다. 늦봄의 삶도 연대 그 자체였습니다. 노동자든 농민이든 학생이든, 부르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 그들과 어깨를 걸었습니다. 연대를 통한 하나 됨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놓치지 않은 신념이었습니다. 9월호에선 ‘민주주의와 연대’, 그 깊은 의미들을 함께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부르면 달려갔다”...노동자-청년-학생 끌어안기  독재정권 폭압 맞서 ‘연대’ 절실  1985년 민주화세력 통합 위해 주위 만류에도 ‘민통련’ 조직   ‘시인 특유의 자유인적 기질을 가져서 어른들 속에서도 좀처럼 ‘조직적 실천’에 응하기가 쉽지 않은 스타일이었다. 도대체가 틀에 묶이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 (김형수. 2018)    틀을 넘어선 연대의 선택 김형수 작가가 묘사했듯 늦봄은 ‘조직적 실천’보다는 자유로운 사유와 삶을 추구했던 사람이다. 그에게 ‘무슨 파’니 ‘무슨 그룹’이니 하고 구분되는 틀은 억압과도 같았다. 분통 터지게 하는 그런 틀에서 우리 모두 걸어나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 하지만 그는 1985년, 민주화운동 세력의 통합을 위해 자발적으로 ‘민통련’이라는 틀 안으로 들어갔다. 이는 통합(재야 명망가들이 모인 민주통일국민회의와 젊은 층 중심의 민중민주운동협의회의 통합)을 둘러싼 질서와, 기존 동료들과의 갈등을 감내한 결단이었다. 안병무에 의하면, 늦봄이 통합 조직을 만들기로 마음을 굳힐 때 민주화 동료들은 그를 말렸다고 한다.   옛 동료들은 강력히 만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점점 의견 차이가 커지자, 그는 젊은이들이냐 동료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 몇 차례 곡절을 겪은 끝에 결국 아들 또래의 동지들과 의기투합하여 품이 넓은 조직을 건설하고 의장이 되었다. … 신기하게도 그는 그곳에서 놀랄 만한 지도력을 펼쳐가기 시작했다. (김형수. 2018)   독재정권의 폭압에 맞서 ‘연대’가 절실했던 시기, 늦봄은 그의 아들뻘 동지들과 함께 품 넓은 조직을 만들어냈고, 그 안에서 연대의 균형을 무너뜨리지 않는 놀라운 리더십을 발휘해 냈다. 그의 연대는 타협이 아닌, 깊은 확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85년 1월 민통련 창립대회에서 젊은 노동자의 어깨에 두손을 올리고 반가워하는 문익환 목사.      청년에 대한 신뢰와 연대 늦봄은 청년과 학생들을 깊이 신뢰했다. 그들이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희생의 선봉에 있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했다. 특히 전태일 분신 이후 발현된 그들의 연대 의식에 감동하며 이렇게 언급했다.   학생 운동이야 일제 때도 있었지만, 4·19에서 터졌다가 5·16 군사쿠데타 이후로 잠들었던 것이 되살아난 건데, 그 특징은 노학연대에 있죠. 요새는 농학연대로까지 뻗어 나가게 되구요. 과학 정신으로 무장된 이념 운동으로까지 번져 나가게 되는데… (1992. 2. 8 옥중 편지) 늦봄은 학생과 노동자들이 부르면 언제 어디로든 달려갔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애타는 마음을 나누었다. 학생 노동자 열사들의 장례위원장이 되어주었고, 유가족들의 울타리이자 정신적 지주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연대는 단순한 지지의 표현이 아니라, 삶으로 증명된 실천이었다.     노동자들의 울타리가 된 연대   ◇노동자들이 부르면 어디든 달려갔다. 1985년 7월 20일 동일방직 노동조합운동사 출판기념회를 찾은 문익환 목사가 다함께 어깨동무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학생 시절 늦봄을 만났다는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 손은정 목사는, “문 목사님은 노동운동에도 깊게 연대하셨다”라며, 늦봄의 신앙 강좌와 노동자교육을 들었다는 그 선배(송효순 목사)의 회고담을 직접 들려주었다. (2025 통일의집 ‘영성 프로그램’ 강의)    당시 군부 독재 상황에서 미가서와 출애굽기 이야기를 많이 하셨던 기억이 나요. 참 설득력이 있었어요. 목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그리고 우리 편이구나 싶었어요. 울타리 같은 분이었다는 기억이 있어요.   손 목사는 늦봄이 쓴 여러 시에서도 그의 노동자 연대 의식이 드러난다고 소개했다. 도 그중의 하나다.   난 어젯밤 노동문학을 읽다가 한 노동자의 뒤통수를 함마처럼 내려친 졸리움에 함마처럼 뒤통수를 얻어맞았다 함마처럼 뒤통수를 내리치는 졸리움 상상할 수 있니    노동문학을 읽다 깊은 졸음에 빠진 자기 모습과 노동자의 고단함에 대한 미안함을 표현했지만, 단순한 피곤함의 묘사를 넘어, 노동자들의 삶에 공감하려는 시인의 고백으로 읽힌다. 늦봄은 연대의 언어를 시로도 썼다.   연대를 이루지 못한 좌절 1987년 대선, 늦봄과 민통련은 후보 단일화를 이루기 위해 마지막까지 애썼지만, 분열은 막지 못했고, 패배는 현실이 되었다. 그는 자책하며 16일간 단식을 감행했고, 상처 입은 동지들을 추슬렀다. 그러나 민통련은 1년 뒤 해체되었다. 이 경험은 그에게 연대의 절실함과, 이를 이루지 못했을 때의 뼈아픈 대가를 새기게 했다.   ◇1988년 5월 19일 조성만 열사 장례식에 참석한 문익환 목사와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 1987년 대선에서 끝내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했다.    하나됨을 향한 외침 1989년 방북 이후 늦봄은 ‘하나됨’을 더욱 강하게 강조하기 시작했다. 상고이유서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0.5+0.5=1 … 이 1은 그냥 하나가 아닙니다. 이 하나는 찢김으로 해서 죽었던 겨레가 살아나 한 공동체, 한 생활 공동체가 되는 걸 말합니다. … 통일은 우리가 커진다는 걸 말합니다. 아니, 이미 커졌다는 걸 말합니다. (문익환. 1999)   그는 하나됨을 단지 민족의 통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존재론적 성장, 우리 자신이 더 커지는 과정이었다. 안병무와 결혼으로 하나 된 후 박영숙이 더 커졌고, 자신도 봄길과 결혼하여 커지지 않았느냐고 설명하는가 하면, 리얼리즘이 추구하는 삶의 참에 관한 이야기 속에서도 ‘나누임은 거짓이고 악이요, 하나가 되는 것은 참이요 선이요’ 라 언급하기도 했다. 즉, 하나됨이 삶의 철학이자 실천의 기준이 된 것이었다.      마지막 편지- 마지막 연대의 호소 하나됨에 대한 늦봄의 의지가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별세 당일 오전 범민련 남·북·해외 본부로 보낸 마지막 편지에 쓴 간곡한 호소가 아닌가 한다. 그는 통일운동이 시련을 겪는 상황을 타개하려면 범민련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남한 정부를 포함한 남쪽의 통일운동을 더 크게 하나로 묶어내야 한다고 설득했다.   우리는 이 벽을 돌파하지 못하면 한을 천추에 남길 것입니다. … 통일운동 자체를 하나로 묶어내지 못하면서 반세기에 걸친 민족 분단의 역사를 청산하고 갈라진 민족을 하나로 묶는 일을 하겠다고 어찌 감히 말인들 할 수 있겠습니까? … 좌도 우도 다 같이 한겨레가 되어 분단의 장벽에 온몸 부딪쳐 가야 합니다. … 7.4공동성명을 받아들이고 남북기본합의서를 지지하는 모든 개인과 단체는 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 1월 18일 편지. (문익환. 1999)   ◇돌아가시기 전날 밤인 1994년 1월 17일, 통일의 집을 방문한 민통련 사람들을 대문까지 나와서 배웅하는 문익환 목사.    1월 12일 마지막 인터뷰에서도 늦봄은 남한 정부와 주변 단체들을 포용하지 못하고 배제하는 것은 결코 통일운동의 진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모두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가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신념이었다.     하나됨은 지금 여기의 과제 전태일 이후 별세까지 늦봄의 삶은 연대의 실천으로 이어졌다. 그에게 연대는 형식이나 이상이 아니라 가장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길이었다. 그의 연대는 결국 하나됨을 향해 있었다. 오늘 우리가 ‘일상 속 민주주의’를 이야기한다면, 그 출발점은 늦봄이 보여준 연대의 행동, 하나됨의 의지일 것이다. 민주주의는 거리에서의 외침뿐만 아니라, 서로를 포용하고 신뢰하는 작고 단단한 실천들 속에서 자라난다. 그것이 늦봄이 보여준 민주주의의 얼굴이다.   [참고 문헌] 문익환 (1999). 『문익환 전집』. 서울: 사계절출판사 김형수 (2018). 『문익환 평전』. 파주: 다산북스 문익환 옥중 편지 월간 문익환_

  • 월간 문익환_<특별기고>

    식민지역사박물관 <민주주의와 깃발>전 (2025년 9월호)

    “광장은 학교였고, 우리는 서로의 교과서였다” 연대야말로 힘이었다         민주주의에서 연대가 왜 필요한지, 그리고 연대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우리는 거리에서 목격했다. 12.3 계엄이후 청년과 노동자, 농민과 시민, 남녀노소, 이들을 한데 얽혀 민주주의를 수호했다. 그들에게 광장은 학교였고, 서로는 서로의 교과서였다. 그중 응원봉을 들고 “다시 만난 세계’를 외치며 거리로 나선 청년들의 연대는 특히 주목할 만하다.     지난 8월 15일 광복절을 맞아 『월간 문익환』이 식민지역사박물관이 개최한 ‘민주주의와 깃발’ 전시회를 찾았다. 지난 겨울과 봄 ‘빛의 혁명’ 과정에서 청년들이 광장으로 들고 나온 수많은 깃발들이 바로 ‘연대’의 상징이 아닌가 라는 생각에서였다.    청년 개개인들은 실제로 어떻게 연대할 수 있었는가도 궁금했다. 전시장에 들어서자 ‘연대야 말로 힘이다’라는 안내판 글귀가 ‘정말 잘 찾아왔구나’ 하는 확신을 주었다. 참관 도중 김승은 학예실장과 대화를 나눴다.   ‘실제 흩어져 있는 청년 개개인들이 어떻게 서로 연대할 수 있었나요?’라는 질문에 김실장은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청년들의 연대 통로는 온라인 공간이었습니다. SNS, 특히 X(옛 트위터)를 통해 이루어졌죠. 1인 또는 모임 대표가 집회 관련 의견을 올리면 다른 청년들이 댓글을 달아서 의견을 주고받는 형태로요. X 공간에서의 의견 개진은 타인을 향한 적극적 자기주장이면서 동시에 타인의 반응을 타진하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이게 바로 청년의 활발한 소통이며 연대였습니다. 소통 결과는 각자의 집회 방향과 방법에 피드백 했고요. 그들에게 직접 들은 피드백 속도와 참여 의지는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김 학예실장은 청년들이 그들만의 연대에 그치지 않았음도 강조했다. 탄핵 소추 당시 민주노총이 앞장서겠다며 집회 및 행진 공간을 만들어내자, 청년들이 환호했고, 남태령에서 밤새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동안 들어주고 공감하며 지켜봐 준 농민들과도 뜨거운 마음을 나눔으로써, 청년들의 연대 의식이 기성세대로까지 확장되어 나갔다고 덧붙였다.   이에 식민지역사박물관의 ‘민주주의와 깃발’ 전시를 추천한다. 전시물 하나하나 진중한 메시지를 번뜩이는 재치에 담았다. 민주주의와 연대가 무엇인가를 한눈에 캐치할 수 있다. 전시회를 담당하는 김승은 학예실장의 소개글을 게재한다.   지난 5월 16일 개막한 전시는 8월 23일부터 시즌2로 전시가 진행중이다.   긴급전시행동, 518명과 함께 기록한 민주주의  〈민주주의와 깃발〉 전시는 2024년 12월 3일의 불법 비상계엄 선포에 맞서 대통령 파면까지 123일간 이어진 시민 저항을 기록한 ‘긴급전시행동’이다. 전시가 열린 식민지역사박물관은 민족문제연구소의 주도로 2011년부터 국내외 시민들의 성금을 모아 2018년 설립되었다. 박근혜 탄핵 정국에서 뉴라이트 교과서 반대와 국정교과서 개악 시도 저지를 위한 역사운동을 벌였고, 이 박물관은 역사가 권력에 농단되는 것을 막아내자는 시민의 열망으로 만들어졌다. 그래서 식민지역사박물관과 민족문제연구소는 지금의 역사적 위기 속에서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는 것을 넘어, 현재의 문제에 ‘개입하고 발언하며 실천하는’ 주체여야 했다.    ‘당신의 민주주의를 기증받습니다’라는 작은 명함을 건네면서 광장의 시민들과 만났고 그들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담아내면서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이어졌다. 이 캠페인은 시민들이 단순히 물건 즉 시위용품을 기증하는 것을 넘어, 민주주의에 대한 각자의 경험과 신념, 실천을 박물관에 영원한 기록으로 남기는 행위로 여기도록 했다.  관심과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2025년 1월 23일부터 4월 14일까지 총 518명의 시민이 깃발, 피켓, 응원봉은 물론, 손으로 직접 만든 인형, 공예품, ‘뜨개질로 만든 피켓’ 등 2,300여 점에 달하는 물품을 기증했다. 박물관은 모든 기증자 518명을 전시의 ‘공동주최자’로 명시하여 역사 기록의 권한을 민주화하고, 소수의 엘리트나 전문가가 아닌 시민들 스스로가 역사의 중요한 주체임을 공식화했다.               새로운 깃발, 새로운 연대 시위용품 가운데 가장 비중을 차지한 것은 깃발이었다. 이번 투쟁에서 등장한 깃발들은 과거와 질적으로 달랐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저항의 깃발이 공식적인 조직 또는 거대한 집단을 대표했다면, 2024-25년의 깃발들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즉흥적이며, 때로는 가상의 공동체를 대변했다. 깃발들은 집단적 이념보다 개인의 정체성, 취미, 일상을 표현의 자원으로 활용했다. 기증 사연에 담긴 깃발의 의미에는 시민들의 누려온 일상, 민주주의의 파괴에 대한 공포와 분노, 그리고 고립감을 딛고 민주주의를 회복하려는 헌신과 희망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모든 깃발은 저마다의 비장함과 세계관을 품고 있다.  깃발은 광장의 익명성 속에서 ‘동지애’를 확인하고 연대감을 형성하는 중요한 ‘매개’ 역할을 했다. 시위 참여자들은 기발하고 독특한 깃발들을 보며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얻고 두려움을 극복했으며, 그 안에서 안전함을 느꼈다. 이는 거대한 광장에서 서로에 대한 환대하는 신호이자, 함께하겠다는 ‘연대의 약속’이었다.        ‘과거가 현재를 돕는다’-저항의 역사와 마주하다  전시의 구성은 총 3부로 구성되었다.  1부 〈어제와 다른 날들, 어제와 다른 나들〉은 2024년 12월 3일부터 2025년 4월 4일까지 123일간 이어진 대규모 시민 저항을 타임라인 형식으로 보여준다. 이 기간 여의도, 광화문, 남태령, 한강진 등 전국의 광장은 민주주의 회복을 염원하는 시민들의 투쟁 공간이 되었고, 전시는 바로 이 123일간의 기록을 담았다.  당시 윤석열 대통령 탄핵이 가장 중심적인 이슈였지만, 광장의 ‘사회대개혁’ 요구는 8년 전과 달리 ‘지금 여기에서’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는 다양한 목소리가 평등하게 울려 퍼졌음을 보여준다. 광장에서 ‘나’는 농민, 여성, 청소년, 성소수자, 전세사기 피해자, 일자리를 뺏긴 노동자, ‘폭도’로 악마화되었던 동덕여대 학생이었다. 8년 전에는 ‘나중’으로 미뤄졌던, 온갖 혐오와 차별, 불평등에 억눌렸던 이들이 서로의 존재 자체를 환대한 것이다. 오랜 투쟁의 역사를 알게 된 그들은 달려가 새로운 광장을 열었다.  2부 〈광장은 학교였고, 서로의 교과서였다〉는 기존 사회운동과의 연대를 통해 촉발된 학습과 실천의 공간으로 만들어 나간 현장들을 담았다. 시민연대자들은 자신을 ‘말벌 동지’라 부르며, 연대가 필요한 투쟁 현장으로 신속하게 달려가 지지를 표명했다. 이는 연대가 추상적인 구호가 아니라 구체적인 실천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전시는 사진과 인터뷰를 통해 이러한 연대의 순간들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3부 〈과거가 현재를 돕는다,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는 동학농민혁명부터 독립전쟁, 4월민주혁명과 5·18민주화운동, 6월민주항쟁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독립운동과 민주주의 운동사 관련 사료들을 전시했다. 특히 2024-25년의 투쟁을 다루는 1부 맞은 편에 3부를 배치하여, ‘과거와 현재가 서로 마주 보는’ 듯한 시각적, 주제적 대화를 유도했다. 이러한 공간 배치는 관람객이 최근의 사건을 고립된 사건이 아닌, 억압에 맞서 싸워온 민중 저항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해하도록 돕는다. 즉 2024-25년의 광장은 독립과 민주주의를 위해 한 세기에 걸친 저항의 연장선에 있음을 보여준다.         깃발전은 박물관의 선언이자 실천  식민지역사박물관의 긴급전시행동 〈민주주의와 깃발〉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통해 ‘민중의 아카이브’를 구축하고 연대의 정신을 확장하며, 그 기록을 우리 사회의 공공역사로 남기겠다는 박물관의 선언이자 실천이었다. 이는 박물관이 과거를 박제하는 공간을 넘어, 현재의 역사 만들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정치적, 문화적 주체임을 증명하고, 기억 투쟁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자한 시도였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자신의 소중한 시위용품과 기록을 기꺼이 내어준 시민들이었다. 박물관은 온전히 그 존재이유를 〈민주주의와 깃발〉 전시로 확인했다.      ※김승은 식민지역사박물관 학예실장 식민지역사박물관과 문익환 통일의집 등 8개 작은박물관은 스탬프투어를 공동 운영하며 역사와 인권, 민주주의의 공간인 작은박물관들을 널리 알려나가는데 함께 힘쓰고 있다.     식민지역사박물관 홈페이지 🔗https://historymuseum.or.kr/  월간 문익환_

  • 월간 문익환

    문동환·문혜림 <움직이는 공동체> 전시 개막식 (2025년 9월호)

    “전시로 되살아난 문동환-문혜림의 공동체” 전, 9일 한신대서울캠퍼스서 개막식        ◇9월 9일 한신대 서울킴퍼스 내 카페 고운울림에서 열린 개막식에서 가족을 대표해 문영미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문영미 이사가 참석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있다.     문동환 목사와 문혜림 선생의 공동체적 삶을 조명하는 전시 가 9월 9일 한신대 서울캠퍼스 내 카페 고운울림에서 열렸다. 개막식에는 우원식 국회의장, 김상근 목사(전 KBS이사장), 가족 대표 문영미 이사(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를 비롯해 학계와 정계, 시민사회 인사들이 참석해 두 분의 발자취를 함께 기렸다. 아카이브 사진 작품으로 전시에 참여한 김진주 작가는 개막식에서 “이번 전시를 통해 문동환, 문혜림 선생님이 지향한 공동체 정신을 오늘날에도 다양한 모양과 순간으로 발견하기 바란다”라고 밝혔다. 우원식 의장은 “두 분의 기억전을 이제야 열게 돼 후배로서 죄송한 마음이 들며,  ‘움직이는 공동체’를 만들어 가셨던 뜻을 기억하고 펼쳐 나가기 위한 노력을 해야 될 때”라고 말했다. 김상근 목사도 “문동환 목사님을 만난 것은 큰 복이었으며, 그분들의 삶은 공동체적 헌신의 모범”이라며 축사를 전했다. 학계 인사들은 이번 전시가 단순한 회고가 아닌 오늘날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 될 것이라 강조했다. 가족 대표 문영미 이사는 "공동체라는 키워드로 부모님의 삶을 되돌아보며 큰 위로가 되었고, 많은 분들의 도움이 힘이 되었다"고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행사 초, 따뜻한 분위기 속에서 펼쳐진 살로하 팀의 훌라춤 공연은 두 분이 살아낸 공동체적 삶의 따뜻하고 자유로운 기운을 상징하듯 관객들의 미소를 자아냈다. 이어 관객들은 민경찬의 인도에 따라 공동체에서 자주 부른 노래 ‘쿰바야’와 문혜림의 애창곡 ‘비가 오는데’를 함께 불렀다. 고운울림 카페에서는 문혜림이 기지촌 여성 자활 사업으로 판매했던 두레방 당근빵을 새롭게 재현해 함께 맛보았다.     개막식은 박수 속에 마무리되었으며, 참석자들은 전시장을 둘러보며 문동환·문혜림 부부가 남긴 공동체 정신을 되새겼다. 전시는 8월 29일부터 11월 21일까지 동시에 두 곳에서 진행된다. 한신대 고운울림에서는 김진주 작가의 ‘아카이브 사진작품’ 전시를, 문익환 통일의집에서는 ‘박물과 기록’ 전시를 관람할 수 있다.    

  • 월간 문익환_<아카데미 칼럼>

    5강 북한이탈청소년(조명숙) (2025년 9월호)

    진보가 탈북자 인권을 이야기하고, 보수가 평화적 통일을 이야기하는, 내가 꿈꾸는 그날이 가까워진 듯…  [2025 늦봄 평화·통일 아카데미 칼럼] 조명숙 여명학교 교장   ◇지난 6월 17일 전태일 기념관에서 열린 2025 늦봄 평화·통일 아카데미에서 조명숙 교장이 강의를 하고 있다.    나는 지난 6월 17일 전태일 기념관에서 늦봄 문익환 기념회에서 주관하는 늦봄 평화-통일 아카데미에 강사로 강의를 하였다. 늦봄의 존재감이 주는 무게감과 더불어, 강의 장소인 전태일 기념관의 무게감까지 더해 나는 다른 어떤 강의보다 조심스러웠다. 그리고 마음 한구석에는 뭔가 가슴 찡한 느낌이 올라왔다.  나는 90년대 초반부터 외국인 노동자들을 돕는 일을 했었다. 그때 외국인노동자들의 존재감은 적었기에 우리는 노동절이나 11월 13일 전태일 열사가 사망한 날에 노동자 대회가 열리면 그 날 외국인 노동자들과 참석하여 그날의 의미를 이야기해 주곤 하였다. 그리고 90년대 후반부터 중국과 북한의 국경에서 탈북자들을 만나 너무나도 열악한 동포의 모습을 보며 외국인 노동자에서 탈북민들을 돕는 일로 전환하였다.  초창기 탈북민들은 누구나 문익환 목사님과 임수경에 대해 내게 물었다. 그들이 무사한지 그 가족들이 안전한지를 물었던 것이다. 그때 나는 한국의 법이나 행정적인 절차로 인해 그분들이 약간의 불편함을 겪겠지만 곧 회복될 것이며 역사와 국민들은 문익환 목사님과 임수경씨를 “통일의 물꼬를 튼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말에 탈북민들은 북한같으면 소리소문없이 모든 가족들이 사라졌을 것이라며 이야기했다. 그들은 탈북과 동시에 사랑하는 가족과의 이산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사람들로서 “남북한이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시대가 언제 오겠느냐?”며 북에 두고 온 가족들이 벌써 보고싶다며 울었었다.  한국 사회에서는 탈북자 문제와 통일에 대한 시각이 진보와 보수의 차이가 극명하다. 보수는 북한정권에 핍박받는 북한 인민 및 탈북자 인권에 집중하고, 진보는 한반도의 긴장을 완화하며 평화와 통일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미워도 북한정권과 논의해야 하기에 북한인권에 대해 간과하는 듯 했다.  내가 외국인 노동자들을 돕던 때에는 내 주변에는 주로 진보적인 사람들과 함께 일을 했었는데 탈북자들을 도울 때에는 주변이 온통 보수적인 사람들이었다. 나는 보수나 진보가 모두 함께 하는 것이 평화고 또 통일의 바람직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혼자 꿈꾸곤 하였다. 진보적인 사람들이 탈북자들의 인권을 이야기하고, 보수적인 사람들이 북한 정권과 평화적인 통일의 방법을 논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러다 6월 17일 전태일 기념관을 들어서며 늦봄 문익환 기념회의 평화-통일 아카데미 강사로 회원들 앞에 서며 내가 꿈꾸던 그날이 가까워 진 것 같아 가슴 찡한 느낌이 올라왔던 것이다. 이런 기회를 만들어 주신 늦봄 문익환 기념회에 감사를 드린다.      ※조명숙 외국인 노동자 피난처 간사를 하다 탈북민 구호를 위한 ‘통일강냉이’ 단체에서 간사로 일했다. ‘피난처’와 ‘자유터’를 설립해 활동하다가 2004년부터 여명학교에 합류해 2021년부터 여명학교 교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2014년 통일문화 대상을, 2023년엔 우당 이회영 기념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사랑으로 행군하다』 『여기가 당신의 피난처입니다』 등이 있다.         🌻2025 늦봄 평화·통일 아카데미 칼럼🌻 ▶️ 시작하며_모두는 모두로부터 평화를 배운다/ 피스모모 문아영 대표 ▶️ 1강_일상 속 권력/ 피스모모 가지 ▶️ 2강_코리안 디아스포라/ 박동찬 경계인의몫소리연구소 소장 ▶️ 3강_이주와 노동/ 우춘희 이주인권 활동가·연구자 월간 문익환_

  • 월간 문익환_<보존연구실 601호>

    수해기록 분리: 물과 종이 사이 (2025년 9월호)

    물에 불어 붙어버린  늦봄의 편지 35년 만에 ‘뚝 끊긴’ 사연의 복원       안녕하세요. 기록이 더 나은 상태로 남아주도록 궁리하는 보존연구실입니다. 오늘 소개할 기록은 물에 젖어서 딱 붙어버린 종이 뭉치입니다. 습기로 우글쭈글 종이가 우는 건 그렇다 치고 뒷면이 완전히 들러붙어 편지 앞면만 겨우 확인할 수 있는 상태였는데요. 국가기록원 지원사업으로 보존처리를 거친 결과, 종이가 분리되어 반듯한 모양을 되찾았습니다!     ◇물에 젖어 울고 붙어버린 여러 겹의 종이 앞면(왼쪽, 편지)과 뒷면(오른쪽, 한빛교회 주보)     드러난 뒷면에는 ‘전국 청년단체 대표자 협의회 만세!’ 가려진 내용 중 더 궁금한 쪽은 아무래도 ‘사랑하는 동지들’로 시작해 중간에 뚝 끊겨버린 문익환 목사의 편지겠지요. 전국청년대표자협의회(약칭 전청협, 전청대협)라고 쓴 박용길 장로의 메모가 있어 받는 이는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습니다.    앞면에서는 1990년을 ‘통일 원년’이라고 선언하며, 통일에 미친 사랑으로 뛰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드러난 뒷면에서는 통일, 민주화, 민족 자주를 하나의 목표로 보고, 세 가지를 함께 실현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마지막에 ‘전국 청년단체 대표자 협의회 만세!’로 글을 맺고 있습니다.      ◇수해로 붙은 종이를 떼어내니 마침내 드러난 편지의 나머지 내용     병원 입원 중 병상에서 보낸 편지  날짜는 1990년 1월 20일. 전년도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을 만난 일로 다섯 번째 옥살이를 하던 시기입니다. 옥중편지인데 왜 규정에 따라 봉함엽서(접어서 내용을 가리고 봉투도 되는 편지지)에 쓰지 않고 일반 공책에 썼을까요?    같은 시기 박용길의 편지를 아카이브에서 검색해 보니, 일기처럼 매일 적어 보내던 편지가 열흘이나 비어 있었습니다. 편지 분석도 어느덧 수년째. 이 커플은 ‘같이 지내면 기록이 남지 않는다’라는 과거 데이터에 근거해, 편지 공백기에 부부가 ‘함께 있었을 것’이라는 가설이 자연스레 떠올랐습니다. 어느 정도 확신을 갖고 기록을 뒤져보니 역시나, 1월 16일부터 24일까지 문 목사는 심혈관 질환 검사차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고 있었습니다.    1990년 1월 20일은 전청협 1주년 기념대회에서 박용길 장로가 규탄연설을 맡기로 한 날인데 편지 날짜와 수신인이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문 목사가 병상에서 전청협 1주년을 축하하고 모인 청년들을 격려하기 위해 글을 썼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국청년대표자협의회는 1989년 결성된 14개 민주화운동 청년단체의 연대 조직입니다. 2년 뒤에는 더 크고 강하게 결속하여 42개 진보 청년단체가 참여한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약칭 한청협)’로 발전하게 됩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청협 1주년 기념 청년대회 행사 책자 표지(좌)와 박용길의 규탄연설이 포함된 식순(우)   ◇입원 검사 중인 서울대병원 병실에서 문익환 목사와 가족들(왼쪽부터 며느리 정은숙, 동생 문동환, 문익환, 어머니 김신묵, 아내 박용길, 1990년 1월)     최근 저력 보여준 청년들의 연대 요즘 청년들은 SNS로 관계맺고 해시태그로 연결되며 온라인 플랫폼에서 활동합니다. 한 이념과 목적을 갖고 전국적으로 움직인 30년 전 거대조직의 단결력과 진지함에 압도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2024년 12월 이래, 청년들은 ‘느슨한 연대’의 저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마치 붙일 수도 있고 떨어뜨릴 수도 있는 종이 사이의 물처럼 말이지요.    해체와 연결을 오가는 물 종이를 이루는 셀룰로오스 섬유는 물에 닿으면 섬유 간 결합이 느슨해지면서 주변의 다른 종이 섬유와 뒤엉깁니다. 마르면 수축하면서 얽힌 채 고정돼버리죠. 이 상태에서 억지로 떼어내면 종이는 찢어지고 글자는 지워집니다. 그런데 다시 물이 닿으면 섬유 사이의 수소 결합이 약해지고 섬유가 유연해져, 붙었던 종이가 부드럽게 떨어져 나옵니다.    훼손과 복원 과정을 짚어보니 기록물을 붙인 것도, 떨어뜨린 것도 물이었습니다. 해체와 연결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물. 틈 사이사이를 메우고 굳은 것을 풀어주는 물은 훼손된 기록뿐 아니라 경직된 사회와 인간관계 사이에도 필요해 보입니다.  오늘은 물길과 보존가의 손길을 거쳐 복원된 수침피해 기록물을 살펴봤습니다. 다음 호도 기대해 주세요!      ◇나무로 된 구두주걱으로 수침 기록물 낱장을 분리하는 모습(국가기록원 재난피해기록물 응급조치 매뉴얼, 2022)    월간 문익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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