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문익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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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 문익환(ISSN 2951-2115 eISSN 2951-2123) 2025년 11월호 [🔗pdf 다운받기]  

  • 월간 문익환

    전태일의 불꽃과 문익환의 깨달음 (2025년 11월호)

    병실찾은 문익환 “전태일이야 말로 예수였다”   ◇마석 모란공원 전태일 묘소 앞에서 노래하는 문익환 목사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70년대 민족사의 새장을 연 것은 전태일”    ▲가장 낮은 곳에서 직시한 시대의 진실   문익환 목사는 아내 박용길 장로와 함께 전태일 열사가 누워있던 병실을 방문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문 목사의 회고처럼, 이 경험은 그가 가장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절박한 삶을 직시하게 만든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전태일의 죽음을 통해 노동자와 청년의 고통을 자신의 신앙과 시, 그리고 실천 속에 담기 시작하였다. 문익환은 이후 노동자 투쟁 현장에 직접 나섰고, 청계천 미싱사들의 삶을 시로 옮기며 그들의 목소리를 세상에 알렸다. 시 는 청계천 미싱사로 대표되는 여성 노동자의 절박한 심정을 담아낸 작품이다.   “사실 70년대는 인권 운동의 시대였지요. 그 인권 운동의 발화점은 물론 전태일이었구요. …이땅의 지성인들의 눈을 뜨게 했죠….70년대 민족사의 새 장을 연 것이 전태일이었다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지요.” (1992.2.24)   전태일의 불꽃은 안온한 강단에 머물러 있던 지성인들에게 산업화가 드리운 어두운 그늘과 마주 서게 하는 양심의 회초리였다. 그의 희생은 이후 전개된 한국 인권 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출발점을 제시하였다.   “전태일의 충격이 나의 눈을 경제문제로 돌려” ▲정치 민주화 너머의 ‘경제 정의’를 깨닫다.  전태일의 충격은 문 목사의 사유를 정치적 민주화 투쟁을 넘어 경제적 정의라는 핵심 문제로 이끌었다. 문목사는 1992년 편지에서 이 깨달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정치적인 민주화만 가지고는 안된다는 것이 분명히 보이기 시작한 때였지요. 급속도로 건설되어 가는 산업화가 몰고 올 노동자들의 생존권 문제가 심각해지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환했거든요. 그래서 부익부 빈익빈의 경제 부조리를 시정하려는 것이 선언문의 둘째 대목이었지요. 역시 전태일 충격이 나의 눈을 경제문제에 돌리게 한 것이 아닌가 싶군요.” (1992.2.25)   전태일이 외친 것은 오직 노동자의 생존권이었지만, 문익환 목사는 그 절규 속에서 ‘민주화’ 운동이 결코 외면해서는 안 될 경제 정의라는 본질을 포착하였다. 이 깨달음은 1976년 3.1구국 선언의 핵심에 경제 정의가 포함되는 데 영향을 미쳤다.       ◇ 노동자 시민강연회와 공연에 참석해 앞에 앉아 있는 문익환 목사와 박용길 장로      “전태일의 불티가 민주화-통일의 불길로” ▲민주와 통일, 그 모든 투쟁의 본질이 되다.  전태일의 죽음은 단지 노동 해방을 위한 것이었으나, 그 불티는 놀랍게도 민족의 모든 해방 운동으로 번져나갔다. 문 목사는 전태일 희생의 본질이 모든 투쟁의 핵심임을 강조한다.   전태일은 민주도 통일도 자주도 외치지 않았죠. 오직 공순이들, 공돌이들의 생존권, 오로지 그것만을 위한 죽음이었는데, 그 불티가 번지다 보니 그게 민주화의 불길, 통일의 불길, 민족자주의 불길로 번진 것 아닙니까? 민주도 자주도 통일도 그 핵심은 그 본질은 공순이, 공돌이가 대표하는 민중의 생존 자체라는 것을 뜻하는 것이죠.” (1989.9.22)   가장 낮은 곳을 향하는 실천 ▲양심에 따라 역사를 사는 삶 : 실천 양심이란 남의 아픔을 아는 마음으로 반드시 사회적인 분석 비판 종합을 해낼 수 있어야 개인적인 도덕적인 감성에 빠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통찰력으로 역사를 살아야 한다고 하였다. 역사를 산다는 것은 우리 역사에 지금 주어진 과제가 무엇이냐, 그 과제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것이 역사를 사는 것이라고 하였다. 나라를 잃었을 때는 독립운동을 독재정권 하에서는 민주화운동을 분단 조국에서는 분단을 극복하는 일이 과제였다. 평생을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한 두 분의 삶이 남긴 교훈은 명확하다. 지식과 믿음은 현실의 고통과 연대할 때 비로소 가치를 얻으며, 가장 낮은 곳을 향하는 실천만이 거짓을 이기고 역사를 진보하게 한다는 것이다. 문익환의 양심처럼, 우리 역시 안일함에서 벗어나 시대의 부조리에 응답하며 ‘전태일의 원점’을 잊지 않는 치열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 월간 문익환_<현장탐방>

    전태일 거리와 한울삶 (2025년 11월호)

    청계천엔 스물두 살 전태일이 있다   “물 좀...” “물 좀...” 온몸이 시커멓게 숯덩이가 된 전태일의 절규였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온몸을 불사른 스물두 살 청년의 외침... 그리고 또 하나의 목소리, “아......목이 마르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마지막 외침이었습니다. 문익환은 이 두 목소리를 하나로 들었습니다. 인간과 사랑을 위한 처절한 생명의 외침으로. 그리곤 선언합니다 “전태일이야말로 예수였다”.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문익환 목사는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씩 청계피복 노조를 찾았고 1983년 초대 전태일건립위원회 회장이 됩니다. “노동자도 사람이다.” 너무나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는 현실을 바꾸고자 문익환은 그후 20여년 동안 노동자와 함께 가장 낮은 곳으로 향했습니다. 1970년 11월, 불길속에서 스러진 청계천의 전태일. 그리고 2025년 11월, 여전히 고통받는 이땅의 노동자. 이들을 생각하며 11월호는 ‘늦봄과 노동자’를 이야기 합니다.     가을빛이 깊어가는 날, 청계천엔 전태일의 숨결이 담겨있다.  1970년 늦가을, 스물두 살 청년 전태일은 불꽃이 되어 세상의 양심을 깨웠고, 그 불씨는 늦봄 문익환 목사의 가슴으로 옮겨 타 세상을 향한 사랑과 실천으로 피어났다.  전태일은 늦봄에게 양심을 일깨우고 역사를 살게 한 예수였다 누군가의 죽음이 또 다른 누군가의 깨어남이 되었던 그때를 떠올리며, 전태일이 스러진 청계천 거리를 찾아갔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전태일거리  1970년 11월 13일 청년 노동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치르기로 한 날 집회, 시위가 경찰에 의해 막히자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치며 분신으로 항거했다.  그의 죽음은 한국 노동 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으며, 지식인과 종교인들의 양심을 일깨우는 강력한 반향을 일으켰다.   ◇전태일 동상     전태일의 희생을 기억하고 정신을 계승하고자 2005년 서울시는 청계천 일대에 전태일 거리를 조성하였으며, 노동자들이 주축이 되어 봉제 노동자 작업복 차림의 동상과 함께 4,000여 개의 동판을 설치했다. 동상이 위치한 버들다리는 2010년부터 역사성을 인정받아 전태일다리와 함께 적어 부르고 있으며, 2013년에는 전태일 분신 장소 일대(평화시장 A동과 B동 사이 대로변)가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전태일다리(버들다리)   ◇후원인들의 이름이 새겨져 동판.   ◇전태일 분신 현장. 동판엔 ‘평화시장재단사 전태일, 여기서 근로기준법을 외치다’라고 적혀있다.   ◇동상 주변 바닥에 있는 기념동판으로 약 4,000여개가 있으며, 후원자들의 이름 또는 짧은 메시지가 새겨져 있다.   ◇청계천변에 위치한 🔗전태일기념관.      문익환 목사가 초대 후원회장 맡아 ▶한울삶 : 한국 민주주의의 산증인이자 기억의 공간   ◇한울삶     1986년 8월 12일, 전태일기념사업회 창립총회에서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를 발족했으며 초대 회장으로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선출되었다.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희생된 시민, 학생, 노동자, 군인 등의 유가족들이 모여 만든 단체다. 유가협은 1989년 창신동 봉제공장 골목에 보금자리를 마련하여 ‘한울삶’이라 이름 지었다.    ◇전태일 기념관에 전시된 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현판식 사진. 현판 뒤로 어머니 이소선과 동생 전태삼. 박용길 장로의 얼굴도 보인다(오른쪽에서 세번째).     한울삶은 ‘한 울타리의 삶’이라는 뜻으로, 민주화의 나날에 자녀들이 희생당한 상처 깊은 유가족들이 모여 생활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공간이다. 처음에는 작은 사무실 하나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생을 마감한 사람들의 영정이 모셔진, 영혼이 깃들어있는 하나의 공동체가 된 셈이다. 1990년 8월 후원회를 창립하고 문익환 목사가 초대 후원회장으로 활동하였다.    ◇전국민주화운동 유가족 협의회 현판식에서 한울삶 입구에 현판을 거는 문익환 목사와 계훈제 선생 (1990. 11. 24)      설립 취지는 유가협 없는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창립 선언문에는 “고인들이 하나뿐인 생명을 바쳐가면서까지 목말라 외치던 바를 살아가는 가족들이 함께 실천해 나가는 것만이 그들의 원혼을 위로해 줄 수 있는 길”이라고 밝히고 있다. 2013년 서울시 미래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한울삶으로 가는 길목 바닥에 1970, 1980, 1990년대 별로  글귀들이 새겨져 있다     ◇1970년대: 유신독재의 짙은 어둠 속 희망을 일군 선구자들    ◇1980년대: 5공 독재에 맞선 민중들의 6월 항쟁 그 앞자리의 열사들    ◇1990년대: 민주 인권 통일을 향한 더딘 전진 그러나…   ◇이소선 여사와 박용길 장로.   월간 문익환_

  • 월간 문익환_<늦봄의 말과 글>

    늦봄과 노동자 (2025년 11월호)

    ‘일하는 사람들의 나라를 일으키는 것이 우리의 꿈’   노동자 전태일, 그 이름은 늦봄 문익환의 삶의 방향을 송두리째 바꿔놓았습니다. 이후 20여 년 동안, 그는 노동자와 함께 걷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가 노동자의 곁에 서서 함께 외치고, 농성하고, 격려하며 남긴 말과 글의 몇몇 흔적을 더듬어 봅니다.    '최고의 가치가 물방울 다이아가 아니라 노동인 나라'   ▲ 시 「일하는 사람들의 나라」   우리는 일하는 사람들의 나라를 세우려고 몸부림이다 일해도 몸으로 손발로 일하는 사람들의 나라를 일으키는 것이 우리의 꿈이다 (시 「일하는 사람들의 나라」) 이 시는 늦봄이 ‘어느 노동자들의 모임에 보낸 격려사’(1984년 전후 추정)의 첫머리입니다. 노동자들에게 ‘일하는 사람들의 나라’가 우리의 꿈이라고 전한 이 말은, 결코 단순한 수사나 상징이 아니었습니다.   ◇ 노동자 대회에 참가하여 행진 중인 문익환 목사   그가 민주주의를 외칠 때도, 통일을 외칠 때도, 그 중심에는 언제나 '일하는 사람'의 존엄이 있었습니다. 전태일 열사 이후 줄곧 노동 현장을 바라보며 노동자 곁에 섰던 그에게, 민주주의란 제도나 체제가 아니라 바로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주인 되는 사회였습니다. 시 「일하는 사람들의 나라」에는 그가 꿈꾼 세계가 응축되어 있습니다. ‘놀고먹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나라,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천대하고 짓밟는 나라는 저주를 받아라’고 외치면서도, '그러나 이 나라가 저주받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의 조국이기 때문에'라고 노래합니다. 분노와 사랑이 함께 배어 있는 것입니다. '최고의 가치가 물방울 다이아가 아니라 노동인 나라', 노동의 깃발 아래 모여 하나 되는 나라. 이것은 늦봄이 꿈꾼 조국의 모습이자, 그의 가치관의 핵심적인 선언이었습니다.   ‘노동자는 겨레다, 민족이다’    ▲ 1978년 동일방직 투쟁   ◇ 동일방직 노동조합운동사 출판기념회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한 문익환 목사   1978년,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은 똥물을 뒤집어쓰며 해고당하고, 다른 직장에서조차 '전과자'라 불리며 쫓겨났습니다. 이때 늦봄은 교회 지도자의 일원으로서 라는 아픈 호소문을 내놓았습니다.   노동자는 겨레다, 민족이다. 우리는 이들 없이 살 수도 없다. 우리는 신앙 양심과 인간적 양심으로 동일방직 해고근로자를 지원한다. … 민주회복, 인권회복, 독재타도의 모든 근간은 노동자의 인권이 보장될 때에 이룩된다고 믿는다. 그런데 오늘의 노동자들에 대한 탄압은 단순한 인권 억압이 아니라 그들의 목을 조르는 생명에 대한 위협이라고 본다. (오픈아카이브. 1978)   이 성명에서 그는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울부짖음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서 지르는 비명소리'에 비유했습니다. 인간 생명에 대한 도전은 곧 하느님에 대한 도전이라고 규정한 늦봄에게, 인권은 곧 '노동자의 생명권'이었습니다. 또한 '민족'이란 그저 혈연이나 영토로 묶인 공동체가 아니라, 바로 '일하는 사람들의 연대체'라는 깊은 깨달음을 보여줍니다. 똥물 투척과 해고, 취업 거부라는 야만적 학대를 겪은 노동자들과 연대하면서, 늦봄은 민주화와 통일사상이란 '노동자의 생명권이 보장될 때 이루어지는 민족의 해방'이라는 신념을 더욱 굳게 다진 것이 아닐까요?   ‘농민과 노동자, 그 가족이 모두 민중’    ▲1988년 시민학교 강연   1988년 8월, 늦봄은 민통련 민주통일시민학교에서 ‘자주·민주·통일의 새 지평을 연다’는 주제로 강연했습니다. 강연 서두에서 그는 3백 척 땅 밑, 40도 열기 속에서 연탄 가루를 마시며 일하는 광부들을 언급했습니다. 광부들의 살 점, 광부들의 핏덩어리로 우리는 방을 데우고, 밥을 해 먹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느끼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이것을 알고 느끼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광부들과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문익환. 1999)   그러면서 ‘민족통일이란 먼데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이런 데 있다’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그는 또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농민 8백만, 노동자 1천만 … 그 가족이 모두 민중입니다. 우리를 먹여 살리고 집을 지어 살 수 있도록 해주고 … 전깃불을 보게 해주기 위해서 일하는 노동자들 … 이 민중을 주인의 자리로 모시고 살게 하자는 것이 바로 민주화운동입니다. (문익환. 1999)   이처럼 늦봄의 민주주의는 추상적 이념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광부의 핏덩어리'를 느끼는 민중의 땀과 숨결에 관한 구체적인 이야기였습니다. 그에게 노동의 현장은 신앙과 사랑이 만나는 자리였고, 통일은 바로 그들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느끼는 '하나됨'에서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노동자들에게 미안, 미안, 미안’   ▲옥중의 회한   1989년 방북 후 수감된 늦봄은 옥중에서도 밖에서 들려오는 소식에 마음을 졸였습니다. 자신의 방북으로 인해 노동자들의 ㅇ임금 협상이 불리해졌다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나의 방북이 금년 봄 노동자들의 임금 투쟁에 손해가 되었다는 지적은 정말 뼈아픈 지적이군요. 노동자들에게 미안, 미안, 미안. 금년에는 임투에 차질이 있겠지만, 먼눈으로 내다보고 양해해 주었으면… (옥중 편지. 1989년 6월 16일)   ◇ 노동자와 포옹하고 있는 문익환 목사   이후 편지(8월 3일)에서 그는 노동자들이 자기 뜻을 알아주어 용기를 얻었다고, 그렇게 통일운동이 확산되는 것이라고 기뻐했습니다. 이 대목은 그의 통일운동이 '정치적 합의' 이전에 '민중이 숨 쉴 수 있는 평화의 회복'을 지향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거대한 통일 담론이 노동자의 구체적인 삶(임금 투쟁)에 미치는 영향을 아파하고 미안해하는 그의 깊은 양심과 책임감을 엿보게 합니다. '하나가 되는 것은 더욱 커지는 일'이라고 했을 때, 그 '하나됨'의 중심에는 언제나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새 시대를 여는 사람은 노동   ‘청와대의 그 누구누구뿐이겠느냐 … 이 문익환이도 … 김승훈이도 밀어젖히랴 그리고 밟고 넘어가라 … 그대들의 발바닥에서 새 시대의 아침이 동터 온다 (시 「일하는 사람들의 나라」)   늦봄은 노동자를 단순히 보호받아야 할 약자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새 시대를 여는 주체이자, 역사의 중심이었습니다. 나아가 신앙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는 기꺼이 자신을 '밀어젖히고 밟고 넘어가라’고 말합니다. 노동자, 그들의 발바닥이야말로 통일 조국의 문을 여는 '새 시대의 아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노동 현실이 과거와 다른 듯하면서도 본질은 다르지 않습니다. 광부들의 핏덩어리는 발전소 노동자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대체되고, 똥물 세례의 폭력을 받던 여성 노동자는 지금 수많은 하청 구조 아래 목숨을 담보하고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로 대체되었습니다. 만약 늦봄이 지금, 이 현실을 본다면 무어라 할까요? '목을 조르는 생명에 대한 위협'을 교회와 우리 사회가 더는 외면해서는 안 된다고, 다시 한번 절규하지 않았을까요?     [참고 문헌] 문익환 (1999).『문익환 전집』 시집2. 통일2. 사계절출판사 문익환 옥중서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00836829.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1978.9.1., ‘동일방직해고노동자들의 호소’   월간 문익환_  

  • 월간 문익환_<이 한 장의 사진>

    전태일 묘소의 늦봄 (2025년 11월호)

    “전태일 아닌 것들아, 다들 물러가라”   경기도 남양주 화도읍 모란공원. 공원 내 네번째 계단을 올라서면 전태일 열사의 묘소가 있다. 묘 뒤에는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잠들어 있다. 문익환 목사는 1983년 11월 전태일 13주기 때 전태일 묘역 앞에서 시 을 카랑카랑하게 낭독했다. 사진은 문익환 목사가 묘소앞에서 동지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청계천 피복 공장에서 죽음과 맞서 싸우는 미싱사들 시다들의 숨소리들아 ... 우리의 맥박도 야위어 병들어 가는 살갗도 허파도 염통도 발바닥의 무좀도 햇빛 하나 안 드는 이 방도 ... 무엇 하나 전태일 아닌 것이 없다 ... 전태일 아닌 것들아 다들 물러가거라 눈물 아닌 것 아픔 아닌 것 절망 아닌 것 모든 허접쓰레기들아 모든 거짓들아 당장 물러들 가거라 온 강산이 한바탕 큰 울음 터뜨리게 (시 중)   월간 문익환_  

  • 월간 문익환_<아카데미 칼럼>

    6강 난민과 세계평화 (라연우) (2025년 11월호)

    “태어난 곳은 알레포, 고향은 제주” 누군가에게 ‘고향’이 되어 주는 사회가 우리 모두의 희망 [2025 늦봄 평화·통일 아카데미 칼럼] 라연우 (통번역가/활동가)   ◇지난 6월 24일 전태일기념관에서 “태어난 곳은 알레포, 고향은 제주”라는 주제로 강의를 진행한 라연우 강사     지난 6월 24일, 저는 “태어난 곳은 알레포, 고향은 제주”라는 주제로 강의를 진행했습니다. 이 강의는 난민 문제를 보다 개인의 이야기와 현실 속에서 이해해보고자 마련되었으며, 시리아에서 한국에 이르기까지 저의 여정과 함께 한국 사회가 마주한 난민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시리아 내전 시리아 내전은 저와 제 가족, 그리고 수많은 이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습니다. 민주화를 외치던 ‘아랍의 봄’은 곧 독재정권의 탄압, 종파 갈등, 끝없는 무력 충돌로 이어졌고, 도시와 사람들, 삶의 터전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결국 저도 군대 징집과 억압을 피해 나라를 떠나야 했고, 2012년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난민 심사와 오랜 기다림 끝에 인도적 체류허가를 받고, 2020년에는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기까지 적잖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두려움과 낯섦의 대상 ‘난민’ 강의에서는 시리아의 상황뿐 아니라 ‘난민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난민은 본인의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결단으로, 누구든 언제든 난민이 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한국에서 난민은 여전히 두려움과 낯섦의 대상으로 여겨지곤 합니다. 특히 예멘 난민 사태와 제주 사례는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고, 언론이 부정적 이미지를 부추기기도 했습니다. 난민이 범죄자이거나 문화적 충돌을 일으킬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은 공존을 가로막는 큰 벽이 되고 있습니다.   한국도 다문화 다인종 사회로 그러나 현실은 이미 한국이 다문화, 다인종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일은 과거 혈통 중심의 사회였지만 이제는 시민으로서의 가치를 공유하며 난민과 함께 살아가는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저출산과 인구 감소가 심각한 한국 사회에도 이는 중요한 과제입니다. 서로 다른 배경을 지닌 이들이 ‘우리’가 되는 길은 제도적 개선뿐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고 돌보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난민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강의 말미에는 “누구든 난민이 될 수 있다”는 말을 두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난민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결국 이 시대 모두가 함께 고민해야 할 물음이라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 안에서 저도 여전히 ‘이방인’일 때가 많지만, 동시에 저의 고향은 이제 제주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고향’이 되어 주는 사회가 우리 모두의 희망이 아닐까요? 감사합니다            🌻2025 늦봄 평화·통일 아카데미 칼럼🌻 ▶️ 시작하며_모두는 모두로부터 평화를 배운다/ 피스모모 문아영 대표 ▶️ 1강_일상 속 권력/ 피스모모 가지 ▶️ 2강_코리안 디아스포라/ 박동찬 경계인의몫소리연구소 소장 ▶️ 3강_이주와 노동/ 우춘희 이주인권 활동가·연구자 ▶️ 4강_이주를 선택하지 않은 이주인/ 김사강 이주와인권연구소 ▶️ 5강_북한이탈청소년/ 조명숙 여명학교 교장 월간 문익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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