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문익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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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 문익환(ISSN 2951-2115 eISSN 2951-2123) 2025년 6월호 [🔗pdf 다운받기]  

  • 월간 문익환_<현장 탐방>

    파주 도라산역 ‘늦봄 시비를 찾아서’ (2025년 6월호)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피맺힌 목사님의 절규가 들렸다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그것은 글이 아니라 절규였습니다. 소리 없는 외침이자 아우성이었습니다. 수십 년을 저렇게 목청껏 토해내는 문익환 목사님의 생생한 육성이었습니다. 외치고 또 외치다 돌이 되어 굳어버린 피맺힌 염원입니다. 철망을 넘어야 가볼 수 있는 도라산역. 목사님의 시비를 만나러 『월간 문익환』이 다녀왔습니다. ‘남쪽의 마지막역이 아니라, 북으로 가는 첫번째 역입니다’. 역내에 걸려있는 글귀처럼 하루 빨리 이 땅에 평화가 와서 다 함께 평양행 티켓을 예매하고 싶습니다. 6월호는 평화를 모티브로 지면을 꾸렸습니다. 2025년 늦봄통일상의 주인공들도 만났습니다.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지난 5월 2일. 전날 비가 온 뒤라 하늘은 더할 나위 없이 맑고 화창했다. 『월간 문익환』이 도라산역과 임진각 일대를 찾아갔다. 이번 방문의 주목적은 평화의 상징인 도라산역과, 그곳에 설치된 문익환 목사님의 시비를 직접 마주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우리 팀 3명은 ‘DMZ 평화의 길’ 방문 코스 중 파주 코스를 예약했다. ‘평화의 길’은 이름 그대로 평화에 다가가고자 하는 발걸음을 의미하는 여정이었다. 임진각 집결지에서 출발해 민통선 안쪽 생태길, 제3땅굴, 도라산역, 경의선도로남북출입사무소에 이르기까지, 대결의 시간 속 어디엔가 살아있는 평화의 흔적을 찾아보는 3시간의 순례길이었다.     ▶ 임진각  경의선 철교에는 과거와 현재 두 개의 시간이 임진각 옥상에서 내려다본 경의선 철교에는 과거와 현재, 두 개의 시간이 공존하고 있었다. 전쟁으로 끊어져 낡은 교각만 남은 상행선, 그리고 2000년 이후 복원되어 현재 임진강역과 도라산역 간 셔틀 열차가 겨우 월 1회 운행되는 하행선. 전쟁이 남긴 상처 및 단절의 모습과 함께, 만남과 교류의 실낱같은 희망이 나란히 누워있는 풍경이었다.  경의선 하행선 철교는 1990년대까지 남북 간을 왕래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박용길 장로가 이곳 임진각에 와서 북측대표단을 기다렸던 장면(1990년 7월 26일)도 이곳의 역사성과 상징성을 말해준다. (당시 범민족대회 2차 예비회담이 열리는 서울을 방문하려고 판문점까지 왔던 북측 대표단은 숙소 등에 관한 남북 간 합의 불발로 개성으로 돌아갔다)  임진각 건너편은 민간인의 자유로운 접근이 허용되지 않는 민통선 지역이라, 임진각이 심리적인 휴전선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관광지화로 사람들이 북적이기 전에는 많은 이들이 임진강 너머를 북한이라 여겼다는 말이 실감 났다. 이곳은 자유롭게 넘을 수 없는 마음의 경계였다.      ◇임진각 옥상에서 바라본 망배단 너머 경의선 상하행선. 한쪽은 이어졌고 한쪽은 끊어졌다.      마당으로 내려와 망배단에 올라서니 명절마다 텔레비전에서 차례상을 올리는 실향민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임진각과 망배단과 실향민은 거의 동의어에 가깝다. 실향민들이 가족 친지와 만날 수 있게 되는 것이 평화의 시작일 것이다.    ◇1995년 7월 방북 후 돌아오는 박용길 장로를 임진각에서 기다리며 망배단을 바라보고 있는 아들 문성근.        통일을 기원하는 평화의 소녀상 망배단 오른쪽에는 소녀상 한 쌍이 세워져 있다. '통일로 가는 평화의 소녀상'이다. 이 쌍둥이 소녀상은, 위안부 문제가 민족 공통의 아픔임을 공유하고 민족 통일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2019년 4월 설치되었다. 소녀상 2기 중 1기는 평안북도 출신 길원옥 할머니를 상징하는 것으로, 바닥에도 길 할머니의 시를 새겨놓았다.    ◇임진각 맞은편 철길 조형물 옆에 위치한 '통일로 가는 평화의 소녀상'  당초에는 소녀상 1기를 길 할머니의 고향으로 보내고 빈자리에 북한 제작 소녀상을 가져와 설치하는 걸 추진했지만 몇 년 동안 중단 상태다. 올해 광복 80주년을 맞아 처음 목적대로 북한 설치를 재추진하는 모양이다. 민족 공통의 아픔을 함께 치유하는 것도 평화의 과제임을 깨닫게 된다.       ▶ 철책과 땅굴  ‘대치의 상징’ 철책을 걷고, 땅굴을 보다 방문자 집결지에 도착, 신분증을 목에 걸고 방문자 식별용 녹색 조끼를 착용한 채 2시부터 일정을 시작했다. 첫 번째 코스는 임진강 생태길. 민통선 철책 안쪽 약 1.4km의 짧은 길을 걸었다. 왼쪽은 임진강, 오른쪽 철책 너머는 임진각 관광지다. 좌우로 탁 트인 강변길이라 시야가 넓고 편안했다. 고요히 흐르는 강물, 평평한 흙길, 초록색 강변 풍경이 조화를 이뤄 조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풀 베는 장병들과 예초기 소리조차 그 풍경의 일부였다. 관광 해설사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며 걷는 우리는 그 순간 평화를 향한 순례자였다.    ◇임진각 철책을 배경으로 개성과 서울까지의 거리를 보여주는 상징적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다음으로 도착한 제3땅굴. 이곳을 포함한 DMZ관광이 외국인 선정 한국 10대 관광코스 중 하나라고 해설사가 설명해주었다. 세계 유일의 분단 지역인 한반도의 군사적 대결 상황을 체감할 수 있는 곳이니 그들에게나 우리에게나 특별한 관광지임은 부인할 수 없지만, 별로 달갑지 않고 씁쓸할 뿐이었다. 지하 73m에 자리 잡은 땅굴. 벽면 곳곳에 뚫린 폭약 구멍, 천장에 부딪치는 헬멧 소리, 지하수가 저벅저벅한 바닥 등이 오랫동안의 대결 시대를 증언해 주고 있었다.      ▶ 도라산역  남쪽의 마지막 역이 아니라 북으로 가는 첫 번째 역   ◇‘타는 곳 평양 방면’. 기차표만 있다면 갈 수 있을까?    ◇남쪽의 마지막 역이 아니라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입니다. 도라산역에 걸려있는 글귀.    벽면에는 '남쪽의 마지막 역이 아니라 북쪽으로 가는 첫 번째 역입니다.'라는 글귀가 걸려 있었다. 옆에 걸린 유라시아 횡단철도 노선도는 도라산역에서 북한으로 들어간 철도가 중국과 러시아를 거쳐 유럽 끝까지 이어질 거라는 희망을 보여주고 있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명한 침목.  뒤로 돌아서자, 김대중 대통령과 조지 부시 대통령이 다른 날짜에 각각 서명한 침목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었다. 김 대통령은 '평화와 번영의 한반도 시대', 부시 대통령은 'May This Railroad Unite Korean Families'(남북한 이산가족들이 하나가 되기를)라 적었다. 이 침목들도 도라산역이 평화, 만남, 통일을 상징하는 곳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건만….  하지만 정작 우리가 찾던 문 목사님의 시비는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철로 주변에 있을 거라 상상하고 왔는데 접근이 불가했고, 설명을 끝낸 해설사는 버스로 돌아가자고 했다. 나는 바로 옆에 있던 미화원에게 물었다. “문익환 목사님 시비는 어디 있나요?” 미화원이 역사 바깥 버스 뒤편을 가리켰다. 조급한 마음에 급히 달려갔다.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라는 강렬한 문구가 커다란 울림처럼 다가왔다.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가슴 뭉클 드디어 시비가 눈에 들어왔다.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라는 문구, 그건 글이 아니라 절규였다. 가로로 쓰인 큰 조형물에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가까이 다가가 사진을 찍으며 마음 한편이 뭉클하게 저렸다. 목사님의 절박한 목소리, 수십 년을 저렇게 외치고 계신 중이다. “하나도 평화, 둘도 평화, 셋도 평화입니다.” 그토록 평화를 염원했던 목사님이 끝내 다녀오신 이후 36년, 평양 가는 평화의 기차표는 아직이다.   ◇시비 바닥에 새겨진 목사님의 얼굴과 ‘잠꼬대 아닌 잠꼬대’ 시. 시비 바닥에는 목사님의 얼굴과 ‘잠꼬대 아닌 잠꼬대’가 새겨져 있었다. 시를 읽어볼 틈도 없이 해설사의 이동 재촉에 밀려 우리 팀은 아쉬워하며 발걸음을 돌렸다.      ▶ 남북출입사무소  출입국사무소가 아닌, 출입사무소 마지막 방문지는 남북출입사무소. 출입국이 아니라 출입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출국과 입국 아닌 출경과 입경이란 생경한 표현. 그런 낯섦이 곧 이 땅의 분단 현실이다. 개성공단 가동 시기에는 하루 최대 약 700명, 차량 900대가 출입사무소를 통해 남북을 왕래했다고 한다. 지금은 단 한 명도 오가지 않는 막힌 길, 언제 평화의 길로 다시 열릴 것인가?    ◇아무도 찾는 이 없는 남북출입사무소.    모든 출입 절차를 체험해 본 후, 잠시 기념 촬영 시간을 가졌다. 방문 기념으로 받은, 북한 지역 방문증명서 견본품을 손에 쥐고서, 서울과 개성 이정표를 배경으로 몇 장의 사진을 남겼다. 사진을 찍으며 들었던 어색함, 그건 대결과 긴장의 공기를 느끼는 곳이라 스스로 위축되어 그랬을 것이다. 남북 관계의 단절과 굴곡 속에서 내 안에 쌓인 벽이 더 높고 두꺼워진 듯하다.  개성 공단 폐쇄 후 강산이 한번 바뀐다는 시간이 흘렀으니 곧 변화가 찾아올 것인가? 이럴 때 다시 문 목사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벽을 문으로 알고 박차고 나가라.” 우리의 이날 방문은 잠시였지만 목사님의 말씀은 오래 머물렀다. 도라산역, 이곳이 평화를 여는 희망이기를, 끝이 아닌 시작이기를 기원하며, 평화의 순례를 마무리했다. 월간 문익환_  

  • 월간 문익환_<늦봄통일상>

    제27회 늦봄통일상: 내란청산·사회대개혁 비상행동 (2025년 6월호)

    “늦봄처럼, 꿈을 비는 마음으로 모두가 하나였습니다”   지난 6월 1일, 문익환 목사의 107번째 생일을 맞아 제27회 늦봄통일상 수상식이 한빛교회에서 열렸다. 이 상은 생명과 평화의 가치를 몸소 실천한 늦봄 문익환 목사의 뜻을 이어가고자 1996년 제정되었으며,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위한 개인과 단체의 활동을 기리는 상이다. 올해는 특히, 정치의 위기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지켜낸 시민들의 연대와 실천이 주목받았다. 2024년 12월 3일, 윤석열 전 대통령의 위헌적 계엄 선포에 맞서 전국 1,700여 개(2025년 4월 기준) 단체가 모인 범시민 연대체 ‘내란청산·사회대개혁 비상행동(전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은 손에 손에 응원봉을 든 시민들과 함께 광장을 열고 국회를 움직여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까지 이끌어 냈다. 비상행동은 “늦봄 문익환 목사가 그토록 강조했던 ‘민중의 힘’이 되살아나는 계기를 만들어 냈다”는 심사위원의 평가를 받으며 제27회 늦봄통일상 수상 단체로 선정되었다. 단체를 대표한 진영종 공동의장(참여연대 공동대표)은 늦봄통일상이 ‘광장의 시민들 모두의 것’이라 강조했다.   “이 상은 광장의 시민 모두의 것” ▲ 수상 소감은? 놀랐습니다. 12월 3일 비상계엄 선포 후 시민들이 광장에서 보여준 놀라운 활약에 주는 상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활동이 상을 주고받을 성격인가 생각해 보면, 모두가 함께 분노하고 기뻐하고 토론한 자리였기에, 상을 받는다는 것이 당혹스럽기도 했습니다. 이 상은 광장 시민 모두가 서로를 격려하며 즐기라는 의미인데, 제가 이를 대표해도 되나 싶기도 합니다. 비상행동은 윤석열의 12.3 비상계엄 선언으로 만들어진 단체이고, 활동기간도 짧습니다. 그동안 오랫동안 활동해 온 분들과 단체들에 미안한 마음도 큽니다. 그래도 한국사회에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했다는 격려로 생각하고, 함께한 모든 광장 시민들에게 이 소식을 알리고 싶습니다.    “민주, 평화, 상생의 가치가 가야할 길” ▲12. 3 비상계엄부터 탄핵 정국의 의미와 앞으로 나아갈 방향은? 계엄령과 같은 폭거는 시민들이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점이 이번 탄핵정국에서 가장 중요한 의미였습니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이를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이는 보수, 진보를 떠나서 모두가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러한 교훈을 배우지 못한 자는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이 없는 것이고, 이 정신을 품은 시민들은 자부심과 자신감을 갖고 모든 일에 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대개혁의 방향은 다양하지만, 우선 합의가 되는 것부터 하나씩 해결해 나가야 합니다. 민주, 평화, 상생의 가치가 앞으로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장은 함께 공부하는 곳이었습니다” ▲시위의 변화 양상과 기억에 남는 순간은? 초반에는 집회가 이렇게 길게 이어질 줄 몰랐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민주발전과 사회개혁에 저항하는 세력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났습니다. 광장을 통하여 모든 구성원이 함께 우리 사회를 공부했다고 생각합니다.  감동적인 순간은 너무 많았습니다. 집회를 주최하며 걱정이 생기면 다음 집회에서 바로 해결되었습니다. 인원이 걱정되면 시민들이 운집해 주셨고, 재정이 부족하면 모금해 주셨습니다. 모두가 하나라는 것을 실감했고, 시민을 믿으면 못 할 것이 없다는 사실에 무척 감동했습니다.  한남동에서 철야집회를 할 때 우리와 정반대의 입장을 가진 사람들도 지척에서 철야를 했습니다. 우리는 많은 의료진들이 자발적으로 의료부스를 차리고 있었는데 저쪽은 그렇지 못했죠. 몸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우리 쪽으로 와서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하신 말씀이 기억에 남네요. “여긴 너무 인간적이고 좋구나!”       ⓒ내란청산·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집회 준비하면서 늦봄의 ‘꿈을 비는 마음’ 생각” ▲문익환 목사에 대한 생각, 그리고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에 바라는 점은? 목사님 생전에 여러 차례 직접 뵌 적이 있습니다. 이번 집회를 준비하면서도 늘 목사님의 ‘꿈을 비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사님은 ‘소중한 일을 꿈을 비는 마음으로 이루어 내자’, ‘성과는 누가 가져가든 신경쓰지 말자’는 말씀을 자주 하셨지요. 현재 사회활동하는 사람들 모두가 꼭 마음에 새겨야 할 말씀입니다. 기념사업회가 목사님의 활동을 사회적으로 더 널리 알리는 데 힘을 쏟으면 좋겠습니다. 특히 젊은 세대와 어린이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늦봄 문익환’을 만들어가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후원회원으로서 목사님의 섬세함과 결단력을 널리 알려주시기를 기대합니다.      “이제는 기록과 확산의 시간” ▲앞으로의 활동 계획은? 비상행동은 시민의 힘을 하나로 모아  윤석열 전 대통령을 탄핵시켰고, 광장에서 사회대개혁에 관한 다양한 의제를 최대한 모았습니다. 구체적인 방안에는 사소한 차이가 있었지만, 모든 과제가 소중하다는 점에는 생각을 함께 했습니다. 이후 활동은 각 단체가 자신들의 역사성과 정체성에 맞게 계속 매진하되, 함께할 것은 함께하고, 각자 할 것은 각자 해야 한다고 봅니다. 비상행동의 향후 방향에 대해서는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지지 않았지만,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제 거대한 조직인 비상행동은 해소하고, 그동안의 활동을 통해 배운 시민의 힘, 사회대개혁 과제, 연대의 위력 등을 간직한 채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비상행동과 시민의 위대한 활동 기록을 자료화하고 열람할 수 있게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광장의 감격을 영상으로 언제든 볼 수 있고, 현장에서 논의된 쟁점을 자유롭게 열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평화로운 광장으로 돌아가도 그 의미가 시민 개개인에게 다가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내란청산·사회대개혁 비상행동    ⓒ내란청산·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월간 문익환_

  • 월간 문익환_<늦봄통일상>

    제27회 늦봄통일상 특별상: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K) (2025년 6월호)

    “생명과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위해”    올해 신설된 ‘늦봄통일상 특별상’은 청년 세대의 평화와 통일을 향한 독창적인 실천을 격려하기 위한 상이다. 수상자는 49년간 정의와 평화를 위해 흔들림 없이 걸어온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K, Ecumenical Youth Council in Korea)’다. 종교의 보수화와 정치화 속에서도 에큐메니컬 정신을 지켜내며 청년 중심의 통일·평화 운동을 꾸준히 이어온 점이 높게 평가됐다. EYCK는 1976년 창립 이래 억압받는 사람들의 곁에서 예수의 길을 실천하며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 그리고 통일운동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생명과 평화가 넘치는 세상’을 목표로 활동해 온 이 단체는 한국교회의 갱신을 촉구하며 생명과 평화를 주제로 다양한 교육·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심사위원단은 “교회 내 청년 활동이 점차 위축되는 가운데에서도 한국기독청년협의회는 고군분투하며 풀뿌리 통일·평화 운동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며 “앞으로도 기독청년 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K) 월간 문익환_

  • 월간 문익환_<이달의 기록>

    1964년 6월에 떠난 늦봄과 봄길의 ‘허니문’ (2025년 6월호)

    “결혼 20년 만에, 신혼여행 떠나듯…” 대구, 해인사 거쳐 마산 3·15의거탑과 거제 애광원 방문  1964년 6월 13일 늦봄과 봄길은 결혼 20년 만에 기회를 얻어 여행길에 올랐다. 서울역을 출발, 대구, 해인사, 마산과 진해, 거제도(애광원)를 잇는 여정이었다. 21일에도 거제 장승포 거리를 거닐었다는 걸 보면 10일 정도의 긴 여행이었을 것이다. 아래는 여행기의 일부다.    “언젠가 다시 해인사를 찾을 생각을 다짐하면서 우리는 다시 버스로 마산을 향해 떠났다. 여행을 별로 즐기지 않는 나는 곧장 마산에서 배를 타고 최종 목적지 거제도로 가려고 서둘렀다. 그러나 여행의 매 순간을 즐기는 아내는 마산에서 보고 가야 할 것을 벌써 단단히 마음에 간직하고 왔던 것 같았다. 그것은 4·19의거탑이었다.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던 자신이 좀 어처구니없게 부끄러웠다. 의거탑 쪽으로 가는 합승을 타는 아내의 얼굴에는 벌써 흥분과 감격의 홍조가 감도는 것이었다. 그러나 4·19의거탑을 찾아간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은 뜻밖에도 3·15의거탑이 아닌가? 3·15는 우리에게 치욕의 날이지만 마산 사람들에게 그것은 영광의 날이었다. 마산에서는 3월 15일 투표함이 개표소로 가는 도중에 이미 ‘의로운’ 불길이 일어났다고 일러주는 사진사는 퍽 자랑스러워 보였다. 지금은 고요한 이 마산의 지층 속에선 3·15의 의로운 일이 지금도 뜨겁게 굽이치렷다. 생각이 이에 미치자 내 발에서 신을 벗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옛 어른들이 거룩한 곳을 찾아 순례 행각을 한 뜻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문익환 전집6』 수필3. 「보고 듣고 느끼고」 1964년 6월)       ◇늦봄과 봄길이 4·19의거탑으로 알고 찾아갔던 3·15의거탑. 창원시 마산합포구 소재. 의거 2년 후 1962년 7월에 세워졌다.      “한 여인의 무서운 뜻으로 이룩된 애광원의 친절과 환대는 거제도의 명물 중에도 명물이다. 나는 그 애광원에 넘치는 뜻을 ‘무섭다’는 말 한마디로밖에 나타낼 길이 없다. 한 여인의 정성 어린 뜻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느냐는 것을 이처럼 강렬하게 보여 주는 것이 또 어디 있으랴! 유산될 수 없는 풍만한 뜻의 잉태, 이것이 때늦은 허니문에서 받은 귀중한 선물, 실의의 시대에 주고 싶은 우리의 선물이다.”(『문익환 전집6』 수필3. 「보고 듣고 느끼고」 1964년 6월)      ◇  1964년 6월 여행 후 봄길이 남긴 거제도 애광원 방문기.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던 『새가정』 1964년 9월호에 실렸다. 글 속의 김인순(김임순의 오기임) 애광원장은 1925년생으로, 2024년 한신대학교에서 ‘한신상’을 수상했다.   ◇ 2006년 7월 19일 다시 애광원을 방문한 박용길 장로가 김임순 원장과 방문 기념사진을 찍었다.     ◇박용길이 1987년 옥중의 문익환 목사에게 보낸 편지.   애광원 아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하고 있다.   월간 문익환_

  • 월간 문익환_<아카데미 칼럼>

    1강 일상 속 권력(피스모모) (2025년 6월호)

    무심히 지나치는 일상의 폭력 낯설게 보기 안녕하세요. 저는 피스모모 교육연수실 실장 가지입니다. 저는 모두가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상상하면서 피스모모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물론 종종 현실에서 절망하는 순간도 있지만, 현실과 평화의 경계를 왔다갔다하다 보면 그 간격이 좁혀지는 순간을 만나게 되겠지요.       ◇지난 5월 20일 전태일기념관 4층 교육실에서 ‘2025 늦봄 평화·통일 아카데미 : 이주하는 사람 그리고 연대’ 첫 번째 강의 ‘일상 속 권력’이 진행됐다.     ‘우리’와 ‘그들’이라는 경계 피스모모의 활동 중에 ‘태풍이 몰아치는 섬’이 있습니다. 활동을 설명하면, 진행자는 참여자를 세 개의 섬으로 이동시키고 노래와 동작을 전수해줍니다. 섬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섬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상황에서 오랜 시간 자신의 섬 안에서 문화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태풍이 몰아치면 사람들이 다른 섬으로 이동하게 됩니다. 다른 섬으로 이동해도 자신들의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다른 섬의 문화로 변경할 수 없습니다. 활동 이후에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해봅니다. 대다수의 참여자들은 아주 짧은 시간의 활동 속에서도 나와 다른 몸짓, 다른 소리를 가진 다른 섬의 사람을 만날 때 나도 모르게 나와 그들, 우리와 그들이라는 경계가 빠르게 만들어졌습니다. 그 경계는 나와 같은 섬에 있는 사람들과 “우리”를 강화하면서 다른 섬의 사람들을 위축시켜도 되는 존재로 만들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런 경험을 사회와 연결해 본다면, 어떤 것들이 연상되나요?   나와 다른 ‘타자’ 구분하는 위험성 나와 다른 존재, 충분히 만남을 경험하지 못한 존재, 낯설고 불분명한 모습으로 가득한 존재에 대해 불편한 기분을 느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를 낯설어하는 마음이 불편함을 넘어 누군가를 적대화하는 혐오와 증오로서 표출되는 방식은 반복되고 강화되면서 문화와 구조 속에서 폭력은 정당화됩니다. 특히 한국사회는 분단이라는 실제로 인해서 북한을 적으로 상정하고 적대시했던 이분화된 구조가 우리의 일상속에서도 나와 다른 타자를 구분하고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타자는  폭력을 가해도 되는 분단체제로서 더욱 강화되어왔습니다.      소속감은 안정감 주지만 위험할 수도 소속감은 일종의 안정감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동시에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의 집단에 배타적으로 소속되면 바로 우리-그들 이라는 경계설정이 작동하면서 우리 집단은 우월해야 하며 타 집단은 열등해야 한다고 여기게 됩니다. 이에 따라 우리 집단에 소속되지 않는 사람에 대한 폭력이 정당화되고 차별과 악마화가 뒤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서로의 다름이 세상을 흥미롭고 다채롭게 만들어갈 수 있음에도 이러한 개개인의 차이를 무화시키고 “우리”로 묶어낼 때, 고유한 존재로서의 개인은 사라지고 뭉뚱그려진 “우리”와 우리 밖의 “그들”로 양분화될 수 있습니다. 나와 타자의 다양한 차이가, “우리”와 “그들”을 가르는 차이로 규정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라는 공동체 안에 속할 때 안전한 느낌을 받을 수 있지만, “우리”가 닫힌 공동체로 작동할 때 어떤 갈등과 폭력이 일어날 수 있는지 1회차 이후의 교육과 연결하고 성찰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적대-혐오 아닌 환대-공존의 가치를 차별은 다름으로부터 오는 낯섦, 그 낯섦이 만들어내는 불편함과 두려움, 그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어기제로 정당화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차별’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지금, 여기’에 자리하고 있음에도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무심히 지나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무심히 지나치는 일상의 폭력들을 낯설게 보고 나와 내 주변의 관계를 새롭게 볼 수 있는 시선을 가질 수 있다면 적대와 혐오가 아닌 환대와 공존의 가치로 확장할 수 있는 변화의 힘으로 연결될 것입니다.    🌻2025 늦봄 평화·통일 아카데미 칼럼🌻 ▶️ 시작하며_모두는 모두로부터 평화를 배운다/ 피스모모 문아영 대표 ▶️ 1강_일상 속 권력/ 피스모모 가지   월간 문익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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