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문익환_<늦봄의 말과 글>
청년에게 주는 늦봄의 편지 (2025년 4월호)
“나 아니면 안 될 일을 찾아라” ‘하고 싶은 일 중에서 사회가 내게 기대하는 일을 선택하라’ ‘나를 온갖 기회에 개방하여 세상이 나를 알게 해라’ 지난 몇 달 동안 탄핵정국에서 이 땅의 청년들은 너무나 믿음직하고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자신과 공동체의 평범하면서도 소중한 일상을 지켜내기 위해 광장으로 나왔고 흔들리는 민주주의를 지켜내는 힘이 되었다. 개인적 어려움과 고민에 골몰하던 현실을 떨치고 일어나, 함께 소통하고 연대하는 데 조금도 주저함이 없었다. 우리 공동체의 장래에 매우 긍정적인 징조다. 다른 한편, 경쟁 속에서 생존을 위해 몸부림쳐야 하는 청년들의 구체적 현실은 매우 안쓰럽다. N포 세대라 불린 지 오래다. 현재의 삶도 어려운데 그들의 먼 노후까지도 걱정의 대상이다. ‘각자도생’이란 말을 청년들이 내뱉으면 더 애처롭게 들리는 게 사실이다. 늦봄이 오늘의 청년들을 보았다면 어떤 위로와 응원을 보낼까? 자신의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청년들, ‘매일 똑같은 출근길, 나는 지금 바르게 가고 있는 걸까’라는 의구심을 가진 청년들,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면서도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고민해 볼 틈조차 빼앗기는 청소년. 이들에게 조언이 되는 늦봄의 옥중 편지를 소개한다. ◇문익환 목사가 조카 영혜에게 쓴 옥중 편지(1986. 10. 13.) 늦봄이 1986년 10월 옥중에서 조카 영혜에게 쓴 편지. 큰아버지로서, 몇 달 전 졸업하여 곧 사회로 나가게 될 조카에게 쓴 글이다. 늦봄은, 인생에서 겪는 문제는 남의 도움을 받아 풀어낼 수 있음을 짚어준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몇 가지 있다면 그중에서 사회가 자신에게 기대하는 일을 선택하라고 주문한다. 그렇게 하려면 모든 걸 새 마음 새 눈으로 바라보는 ‘열린 마음’이 중요하고, 자신을 온갖 기회에 개방하고 ‘열린 감수성’으로 검진해야 한다는 말을 더한다. 잔잔하고 따뜻한 늦봄의 조언에 집중해 보자. 💌 영혜야 네 편지를 잘 받았다. 나로서는 네 편지를 처음 받은 셈이구나. 아직 우리말을 마음대로 쓸 수는 없겠지만, 내 편지의 뜻은 읽어서 알 수 있는지 모르겠구나. 더구나 큰아버지의 글씨는 익숙한 큰어머니도 읽기 힘든 때가 가끔 있으니까. 내가 저번에 너한테 쓴 편지에 무엇을 썼는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네 편지를 받고 이번에 네게 쓰고 싶은 이야기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생을 책임지고 사는 건데,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다 각기 다른 문제를 안겨주시고, 그걸 풀어갈 힘을 주셨다는 걸 우선 말하고 싶다. 다음으로는 우리 모두는 무언가 나에게만 있는 무엇을 타고났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를 찾고 풀어나가고 키워나가는 데 나만의 인생이 있다는 점이다. 마지막으로 그것을 찾고 키우고 풀어가는 일은 남과 같이 살아가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이제 생각나는구나. 미국에 가서 네가 태어난 한국을 건너다보는 시야가 열렸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쓴 것 말이다. 맞지? 밖에 나가서 내가 태어난 나라 내가 살아갈 나라를 건너다본 결과 무엇이 보이게 되었느냐고 물으면, 아직은 딱히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렵겠지. 서두를 거 없다. 날이 가면서, 네 마음이 자라면서, 네 판단력이 뚜렷해지면서, 슬슬 그것이 네 눈앞에 보이기 시작할 테니까. 그러나 한 가지 뚜렷한 것은 미국 사람들은 저희들 나름의 문제, 우리 한국 사람들로서는 발언권도 없고, 어찌해 볼 길 없는 그들의 문제가 있고, 우리는 우리의 문제가 있는 거지. 사람들도, 개인 개인으로서는 다 그런 것이란 말이다. 인생이란 주어진 문제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재미로 사는 거고. 우리 각자가 가진 문제라는 게 모두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생기는 문제 아닌 것이 없으니까, 나의 문제는 내가 푸는 것이기는 해도, 남의 도움이 없으면 안 되는 것 아니겠니? 그때 중요한 건 열린 마음이다. 열린 마음이라는 건, 어쩌면, 간단한 일인지도 모르지. 탁탁 털어버리고, 모든 걸 새 마음으로, 새 눈으로 보면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남과 같이 살아야 하고, 남의 얼굴을 쳐다보며 살아야 하지만, 남만 쳐다보느라고 자기를 못 보는 것도 바보지. 남들 앞에서 우월감으로 우쭐대는 것도 못난이지만, 괜히 주눅이 들어서 열등감으로 자학에 빠지는 것도 어이없는 일이지. 그런 점에서는, 어디까지나 너는 너고, 나는 나인 거야. 나하고 네 아빠 사이도 그런 거다. 너의 아빠가 아무리 나보다 잘났고, 머리도 더 좋지만, 네 아빠가 못 할 일, 내가 아니고는 못 할 일이 있거든. 그렇게 나 아니면 안 될 일을 찾아 자랑스럽게 살아가면서도, 나 아니면 안 될 나만의 일을 하면서 머리를 쳐들고 어깨를 펴고 살아가면서도, 남의 살아가는 일, 나는 어림도 없는 일을 높이며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그러면, 나 아니면 안 될 일을 찾는 데는 나를 온갖 기회에 개방하고 열린 감수성으로 검진해야 할 거야. 자기 자신을. 내가 무슨 일에 가장 몰두할 수 있을 것인가를. 다음으로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필요한 사람이냐는 것을 찾는 일이 중요한 거지. 대개는 나 아니면 안 되는 나만의 것, 바로 그것이 남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이라는 게 칠십 평생을 살면서 발견한 사실이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꼭 안 맞을 때가 있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사회가 내게 기대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생기는 일 말이다. 그런데, 내 경험은 그때 어느 것이 더 중요하냐 하면, 사회가 내게 기대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라는 걸 말해준다. 우선 내가 아는 나는 그리 정확한 것이 못 되는 것이기 때문이지. 물론 사회가 요구하는 것이 나의 생의 원칙과 다른데도 그쪽을 택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내가 제일 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요, 다음으로 하고 싶은 것은, 혹은 셋째, 넷째로라도 하는 것이 의미 있는 일일 때, 어느 것이냐를 결정하는 건 사회의 요구하고 생각한다. 나는 그걸 역사의 명령이라고도 하고, 하느님의 뜻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세상이 나에게 무언가 기대하고 요구하려면, 세상이 나를 알아야 하지 않겠니? 그걸 알리는 길은 그들과 같이 사는 일이지. 어울리고 섞여서 좋은 일, 궂은일, 슬픈 일, 기쁜 일을 같이 헤쳐나가다 보면, 내가 어느 구석에서 무엇을 하는 것이 제일 보람 있고, 남의 기대에도 맞느냐는 게 드러나기 마련이지. 열린 마음으로 같이 터놓고 살아간다는 게, 자기를 알고, 사회가 자기에게 기대하고 요구하는 일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고, 그걸 살아가는 일이 보람차고 기쁘게 되는 거지. 내가 이렇게 징역을 살면서도 기쁘기만 한 것처럼 말이다. 열심으로 공부하고 열심으로 놀고 열심으로 살아라. 큰아버지 씀 월간 문익환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