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월간 문익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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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 문익환(ISSN 2951-2115 eISSN 2951-2123) 2025년 12월호 [🔗pdf 다운받기]  

  • 월간 문익환_<늦봄의 서재>

    임길택 『탄광마을 아이들』 (2025년 12월호)

    늦봄 “이 시들을 손주들에게 읽히고 싶군요”   늦봄은 75세인 1992년 7월 21일, 봄길에게 보낸 옥중 편지에 동화 작가 임길택에게 보내는 편지를 덧붙였다. 1976년 58세로 감옥생활을 시작한 늦봄에게 1992년은 수감생활의 마지막인 6번째 구속이었다. 그때 당시 갇혀있었던 안동교도소에서 보낸 편지다.  늦봄은 봄길에게 성근이 진행하는 프로 「그것이 알고 싶다」에 대한 이야기, 성근이 출연한 연극 ‘칠수와 만수’는 언제까지 하는지 등 짧은 안부를 묻고, ‘오늘은 경남 거창군 중앙리 궁전아파트 603호에 사시는 임길택이라는 분에게 편지를 써야겠군요. 어린이 읽을 감으로 쓴 “윤동주”라는 책을 보내면서 이것저것 문의한 것들이 있어서,’ 라면서 임길택에게 보낼 편지를 언급했다. 아마도 임길택이 늦봄에게 『정진구 인물 이야기 윤동주』(산하/1992.2.1.)를 보내며 내용에 대해 질문을 한 것 같다. 늦봄은 대체로 정진구의 책을 칭찬하면서 단, 명동을 떠나게 된 원인은 중국 마적단 때문이 아니라 사회주의 세력과 비기독교 지식층의 유입이었다고 정정한다. 임길택(1952~1997)은 동화작가로 강원도 탄광마을과 산골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사북초 아이들과 만든 학급 문집 는 탄광에서 일하는 아버지, 고단한 어머니의 삶들이 숨김없이 기록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어 아이들이 쓴 시 112편을 엮은 시집 (보리)는 뮤지컬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늦봄은 임길택에게 동주에 대해 더 알고 싶으면 『월간 중앙』 1976년 4월호에 동주에 관한 글을 썼다면 찾아서 읽어보라고 한다.  임길택과 관련된 옥중 편지는 1990년 5월 24일에 봄길에게 보낸 편지 마지막에 “임길택 시집 『탄광 마을 아이들』을 손주들에게 읽히고 싶군요.”로 끝맺음한다.  이 한 줄의 글에 가슴 뭉클해진다. 손주들에 대한 사랑과 손주들이 이 시집을 보는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진다. 월간 문익환_  

  • 월간 문익환_<아카이브 5주년>

    늦봄 아카이브와 나: 조만석 (2025년 12월호)

    아카이브, 늦봄을 만나는 가장 즐거운 ‘놀이터’   ▲낯선 단어가 ‘배움터’가 되기까지 ‘아카이브(Archive)’.  이 낯선 단어가 제 삶 깊숙이 들어와 비로소 그 뜻을 피워낸 건 늦봄문익환아카이브 덕분입니다. 30여 년 전 직장 생활을 하며 무수히 스쳐 지나갔던 건조한 단어였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늦봄아카이브를 만난 지 어느덧 4년, 기록물과 공간으로서의 아카이브는 저에게 설렘 가득한 ‘즐거운 배움터’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월간 문익환’ 제작팀으로서 ‘시 속의 인물’ 시리즈를 23회나 연재했습니다. 늦봄의 시구 하나하나를 이정표 삼아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인물들을 처음으로, 혹은 새롭게 다시 만나는 여정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치열했던 삶, 헌신과 희생의 내막을 깊이 들여다볼 때마다 제 마음은 자주 울렸고, 또 시려왔습니다.     ◇조만석 선생님은 뛰어난 한자 능력을 바탕으로 40~50년대 암호문 수준의 편지를 거의 ‘해독’하는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다. 『월간 문익환』에서는 , 등을 연재하고 있다.     ▲오해의 벽을 넘어 진실과 마주하다 늦봄의 시가 아니었다면 영영 닫혀 있었을 제 마음의 빗장을 열어젖힌 분, 바로 조화순 목사님입니다. 늦봄의 시 제목은 ‘나는 보았다 – 조화순 목사에게 바치는 시’였습니다. 처음 듣는 낯선 이름에 난해한 시 내용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검색창을 두드렸습니다. 아, 그런데 먼저 눈에 뜨인 단어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와 ‘동일방직’이었습니다.   ◇ 문익환 목사 석방 환영 모임에서의 조화순 목사(1993년 3월) ⓒ늦봄문익환기념사업회   ‘도산(都産)’이라 불렸던 도시산업선교회. 고등학교 시절 뇌리에 박힌 강렬한 낙인이 즉각적으로 떠올랐습니다. 흑백 TV 화면 위로 섬뜩하게 찍혔던 자막, ‘도산(都産)이 들어오면 기업은 도산(倒産)한다’라는 문구가 어제 일처럼 생생히 되살아났습니다. 아마 동일방직 투쟁이 한창이던 시절이었겠지요. 독재 권력과 언론은 산업선교회를 ‘노동자를 포섭하여 의식화하는 공포의 존재’로 호도했고, 그 거짓된 프레임은 어린 제 머릿속에 공포로 각인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외면하고 싶은 두려움’ 대학 시절, 도시산업선교회와 노동자가 연관된 시위에서 주변을 서성이다 사복전경들의 거친 손아귀에 걸려들었습니다. 다행히 연행은 피했지만, 지인 2명은 정학을 당했지요. 식겁했던 그날 밤의 트라우마로 인해 크리스천이 아니었던 저에게 산업선교 활동은 오랫동안 ‘외면하고 싶은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하지만 40여 년이 흘러 아카이브에서 뒤늦게 발견한 늦봄의 시는 그 어둠을 가르는 한 줄기 빛이 되었습니다. ‘시 속의 인물-조화순 목사’ 편을 집필하며 조 목사님의 저서와 동일방직 투쟁의 피어린 증언들, 그리고 여전히 공장 앞에서 복직을 외치는 사람들을 마주하게 되었으니까요. 아카이브 속의 기록들은 제 안의 편견을 산산조각 냈습니다. 그 깨달음의 연장선에서, 지난 9월 영등포산업선교회 손은정 목사님의 강의(통일의집 영성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노동자를 향한 늦봄의 시를 함께 낭독하고 감상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현장을 지키는 손 목사님을 통해 ‘노동자를 향한 늦봄의 애끓는 마음’을 생생히 느끼고, 손 목사님 자신의 ‘각성’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문 목사님이 들었던 70년대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절규’를, 손 목사님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아들을 잃은 ‘김용균 어머니의 절규’로 대입하여 말씀하시더군요. 또, 45년 전 하루 16시간 뼈 빠지게 일해야 했던 화물터미널 노동자 정병환 씨의 고단함은(시 ‘정병환 씨’, 1980), 오늘날 새벽 배송을 하다 쓰러지는 택배 노동자의 죽음과 다르지 않았고요. 강의를 듣는 내내, 그동안 제가 늦봄의 시를 수박 겉핥기로 읽었다는 부끄러움이 밀려왔습니다. “책을 백 번 읽어 뜻을 깨친다”라는 옛말처럼, 늦봄의 시를 읽고 또 읽어 그분의 마음 깊은 곳으로 한 발 더 들어가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사료 하나하나가 내겐 살아있는 스승” 늦봄이 남긴 단 한 편의 시에서도 저는 인생의 교과서를 발견합니다. 시의 배경이 된 그 시절의 암울함, 그 인물이 감내했던 고통을 되새김질합니다. 그리고 그 과거가 여전히 되풀이되는 오늘을 아프게 성찰하게 됩니다. 늦봄이 남긴 400여 편의 시와 800여 통의 옥중 편지, 그리고 박용길 장로님의 3,000여 통의 편지. 아카이브의 이 방대한 사료 하나하나가 제게는 살아있는 스승입니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나이, 배워도 지식으로 쌓이지 않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도 있지만, 문익환 전집 수필 편에서 만난 구절이 저를 따뜻하게 위로합니다. 읽고 잊고, 읽고 잊으면서도 읽는 일은 여전히 좋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잊혀진다는 것은 읽은 것이 잠재의식 속으로 두엄처럼 녹아들면서 나의 세계를 풍성하게 만들 수도 있거든요. (문익환, 1999. 「감옥에서 깨달은 생명에 대한 외경」) 감옥에서 수없이 책을 읽어도 기억에 남는 게 없어 시큰둥했다던 늦봄조차, 결국엔 그것이 ‘나의 세계를 풍성하게 하는 거름(두엄)’이 됨을 깨달으셨다니! 이 얼마나 신나고 반가운 위로인가요.   ▲과거와 현재가 대화하는 보물창고 이처럼 아카이브에서 늦봄의 말과 글을 만나는 일은 그 자체로 가슴 벅찬 즐거움입니다. 더 나아가 ‘월간 문익환’이라는 콘텐츠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이 늦봄을 친근하게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작업에 동참하고 있으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을까요. 지난 가을, 인터뷰에서 “나에게 수장고(늦봄문익환아카이브)는 OOO이다?”라는 돌발 질문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급히 이렇게 얼버무렸죠. “직장 생활 30년만큼이나 보람을 느꼈던, 지난 3년의 일터.” 자원봉사 중인 늦봄문익환아카이브가 어떤 곳인가 다시 생각해 봅니다. 현재의 우리를 위로하고, 미래를 꿈꾸게 하는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놀이터’이자 ‘보물창고’임에 틀림없습니다. 늦봄문익환아카이브 5주년, 이 보물창고의 문은 언제나 활짝 열려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곳에서 ‘두엄’처럼 삶을 풍성하게 할 보물 하나쯤 찾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참고 문헌] 문익환 (1999) 『문익환 전집』6 수필. 사계절출판사 월간 문익횐_

  • 월간 문익환_<아카이브 5주년>

    늦봄아카이브 오늘이 있기까지: 문영금 통일의집 관장 (2025년 12월호)

    박용길이 살아서 아키비스트와 함께 했다면…   ◇통일의집 거실에 걸려있는 문익환 목사의 판화 앞에서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문영금 통일의집 관장.   박용길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유품 정리 생각 나의 어머니 박용길이 살아계실 때 통일의 집은 온 집안에 빽빽하게 유품이 전시되어 있었고 박스와 책꽂이에도 자료들이 쌓여있었다. 어머니는 돌아가시기 몇 년 전부터 그동안 간직하셨던 유품들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하셨다. 어머니는 신학서적들은 한신대에 기증하시고 민주화운동 관련자료 등은 당시 문익환 목사의 기념사업을 하던 통일맞이를 통해 민주화기념사업회(이하 민기사)에 기증하셨고(2002), 문 목사 옷들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나누어 주시기도 하였다. 바자회에 붓글씨나 두루마기를 내놓아 파시기도 했다. 그때 한 바자회에 내놓았던 두루마기는 우원식 국회의장의 아내 신경혜 님이 구입했고 최근에 기념사업회에 다시 기증해 주시기도 했다.   어머니와 내가 정리하기에는 사료와 유품들이 너무 많았고 하는 방법도 몰라 역부족이었다. 나는 좀 더 체계적으로 자료를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에 민기사에 연락하여 자료 정리를 부탁하였다. 민기사에서 사료를 담당하던 홍계신 선생님과 직원들이 일주일 동안 와서 관련자료 수십 상자를 싣고 갔다. 나는 자료들을 보내며 스캔과 목록화 작업을 하면 공유받기로 하고 유품은 우리가 나중에 박물관을 할 수도 있으니 필요할 때 찾아오기로 하고 위탁 형식으로 맡겼다(2004, 2009). 민기사에서는 김근태의 아내인 인재근과 딸 김병민을 집으로 보내 박용길의 사진설명을 적고 녹화도 하였다. 그때 사진설명만 듣고 유물 설명을 녹화를 해 놓지 않은 것이 두고 두고 후회가 된다. 유물에 얽힌 사연들을 이제는 알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통일의집에 방문한 손님에게 유물을 소개하는 박용길 장로(2004)    박용길이 모은 자료로 탄생 100주년에 박물관으로 재개관  박용길은 정말 많은 자료를 모아놓았다. 1940년대 두 분이 주고 받았던 연애 편지부터, 북간도 명동촌 시절 사진, 각종 성명서들과 갈릴리 교회 주보 등 다양한 행사프로그램들, 문 목사의 설교노트와 원고들과 저서들. 사소한 것 하나도 버리지 못하고 모아두시는 성격이셨다.  감옥에서 온 문익환 목사의 편지 800여 통과 당신이 감옥으로 보낸 편지 2300여 통을 날짜순으로 파일에 넣은 앨범과 주제별로 제목을 붙인 사진첩이 수십 권이었다. 우리의 대표 유물인 이 편지들과 앨범들을 것을 2023년도에 국가지정기록물로 등록하였다.  2011년 박용길 돌아가신 후 2018년 문익환 통일의집을 박물관으로 재개관 하였다. 이때 우리는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자료 정리를 어떻게 해야할지 고심이 깊었다. 이때 이연창 소장이 한국문헌정보기술 대표로 있었을 때 임종철 이사와 직원들이 와서 유물을 박스에 넣어서 이웃에 있는 한신대 수유리 캠퍼스 임시 수장고에 옮겨주었다. 체계적으로 정리를 할 수는 없었지만 거실 한 벽면에 위치해있던 물건들을 사진찍고 리스트를 만들어 한 박스에 넣는 식으로 정리해 이후 찾을 수 있게 하였다. 눈이 내린 추운 겨울날 박스를 싣고 한신대 강의실로 옮기던 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한국문헌정보기술에서는 그 이후에도 박물관 훈증소독이나 보존용품 지원으로 도움을 주셨다.    ◇통일의집 박물관 복원공사를 위해 사료가 수장고로 이사하는 날(2017. 12. 28)   유물 이전과 개관전 개막에는 김민정 학예사가 큰 역할을 했다. 박물관 재개관을 앞두고 심하게 훼손된 붓글씨 액자와 피아노, 문익환 목사님의 의류 등을 선별하여 보존처리 또는 복원하였다. 석주선기념박물관의 채정민 선생님과 복원가 김겸, 자개 전문가 배근혁님이 도움을 주셨다.    그러나 대부분의 자료들은 목록화 되어 있지 않아 수량조차 파악이 불가능했다. 민기사에서는 자료를 스캔만 했지 분류는 되어있지 않았고 그나마 민주화운동 부분만이어서 통일운동이나 기독교, 가족역사등은 손도 대지 못했다. 이 일을 하려면 비용도 엄청나고 인력도 필요한데 엄두가 나지 않았다.    ◇문익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복원공사를 마치고 개관식을 개최한 통일의집(2018. 6. 1)      민주화기념사업회 지원으로 아카이브 작업 착수 다행히 민기사 프로젝트로 3년간 지원을 받아 자료 목록화 작업을 착수할 수 있었다. 그때 연세대 박물관 이원규 선생님의 소개로 오명진 교수가 파트타임 직원으로 들어와 늦봄 문익환 온라인 아카이브를 함께 만들었다. 오명진 아키비스트와 함께 온라인 아카이브를 어떻게 만들지, 키워드를 어떻게 잡을지 등을 놓고 많은 토론을 거치며 서로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아카이브 웹사이트는 아카이브센터의 도움으로 구동할 수 있었다.    2020년에는 창동에 있는 50+서울 북부 캠퍼스에서 통일의집과 함께 하는 디지털 기록지원단 교육 강좌를 개설하여 두 차례 교육을 시켰다. 이때 수강했던 분들이 자원봉사자로 오셔서 5년째 사료정리와 월간 문익환 제작을 맡아주셨다. 오명진 교수 제자들이 실습을 나와 배우면서 손을 보태기도 하였다.   오명진 교수 뒤를 이어 박선정 아키비스트가 오셔서 4년간 수고해주셨다. 박선정 아키비스트는 월간 문익환을 만드는 콘텐츠 플러스팀과 자원봉사자들을 빈틈없이 챙기며 월간지가 33호와 이라는 자원봉사자들의 경험을 담은 단행본이 나올 수 있도록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하였다. 또한 과 등 여러 전시와 행사를 기획하고 진행하였다. 여러차례 외부에 나가 늦봄 문익환아카이브를 알리고 교육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제 우리 아카이브는 새로 생기는 민간 아카이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자 벤치마킹하러 오는 곳이 되었다.       2025년 11월부터 김가영 아키비스트가 새로 왔다. 3대 아키비스트로 부담감도 있겠지만 젊은 패기로 참신하고도 신선한 변화를 만들어가리라고 믿는다. 부디 오랫동안 함께 해주셨으면 좋겠다. 여기에서 다 말하지 못했지만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으로 우리 아카이브도 이제 조금씩 틀을 갖추어 가는 것 같다. 월간 문익환도 3 시즌 동안 다양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아카이브에서 발굴한 내용으로 문익환과 사료들을 풍성하게 만들어주었다.    전에는 무엇 하나 찾으려면 몇시간을 컴퓨터와 자료들을 뒤졌는데 이제는 아키비스트에게 부탁하면 금방 찾아준다. 아직도 목록화 되어있지 않고, 위치를 알 수 없는 자료들이 많이 남아있다. 또한 한신대에서 빌려주시는 공간이 더 없이 감사하지만, 아무래도 강의실이다 보니 추위와 더위와 습도 변화에 취약한 상태이다. 소중한 자료들을 항온항습이 되는 공간에 보관해야하는 숙제도 남아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9여년간 많은 일들을 이루었고, 이뤄져 가고 있어 기쁘다.   박용길과 함께 작업한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고해 주신 모든 분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특히 아키비스트 오명진과 박선정의 열정과 헌신이 없었으면 결코 이룰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의 기록가였던 나의 어머니 박용길이 기록학을 공부해서 아키비스트가 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니면 아직 살아계셔서 아키비스트들과 함께 아카이브 작업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가끔 나는 꿈 같은 생각을 해본다.    ◇ 박용길 장로가 전시한 흔적을 유지한 예전 통일의집 모습(2017. 12. 9) 월간 문익환_  

  • 월간 문익환_<아카이브 5주년>

    1-2-3대 늦봄아키비스트 좌담회 (2025년 12월호)

    “문익환 목사의 편지는 내게 큰 울림” “기록물들 일반대중들에게 공개할 필요”    김가영: 안녕하세요. 저는 11월부터 문익환 아카이브에서 아키비스트로 근무하게 된 김가영(이하 김)이라고 합니다. 현재 제 선임이신 박선정 선생님(이하 박)과 함께 근무하며 열심히 배우고 익히고 있습니다. 이번 호에는 문익환 온라인 아카이브 5주년을 맞아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를 주제로 이 아카이브를 꾸려온 오명진(이하 오), 박선정(이하 박) 두 아키비스트 분들에게 신입인 제가 평소 궁금했던 질문을 하고 두 분께서 답하는 좌담회 형식의 인터뷰를 마련했습니다.      ◇늦봄아카이브의 간판인 1-2-3대 아키비스트가 한자리에 모였다. ‘과거’를 담당했던 초대 오명진 아키비스트(왼쪽)는 2019년 9월부터 2022년 2월까지, ‘현재’를 담당하는 2대 박선정 아키비스트(가운데) 는2022년 2월부터 2026년 2월까지, ‘미래’를 책임질 3대 김가영 아키비스트(오른쪽)는 지난달부터 아카이브를 담당하고 있다.      오: 소장품-기록물 등 목록화 기초 공사  박: 보존-전시로 확장 아카이브 환경구축   김: 첫 번째 질문입니다. ‘문익환 아카이브’의 특징과 다른 기관과 구분되는 우리 아카이브만의 차별점이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오: 제가 초대 아키비스트로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를 꾸리면서 다양한 소장품과 기록물들을 정리하고 분류해 목록화하는 기초 공사를 했고, 제 후임 아키비스트인 박선정 선생님께서 아카이브 환경 구축과 기록 보존 및 전시 등 다방면에서 많은 힘을 써주셨어요. 그 결과로 현재의 문익환 아카이브는 단순히 기록 보존소로의 역할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분야와 접목하는 아카이브로, 민간 영역에서는 꽤나 알아주는 아카이브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습니다. 박: 저도 그 말에 동감합니다. 얼마 전에 국가기록원에서 특강을 했는데, 저희 아카이브 보존 환경을 보여주고 관리 상태에 대해 여쭤보니 민간 아카이브로는 상위 10퍼센트 안에 든다고 하더라고요. 그 과정에서 말 못 할 우여곡절은 참 많았지만…(웃음). 업계 대표 격 기관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니 참 뿌듯했습니다.    오: 문익환 목사의 편지가 제일 인상적  박: 기증전 감사한 마음   김: 다음으로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에서 일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기록물이나 업무가 있다면 소개 부탁드립니다.   오: 처음 이곳에 있던 기록물들을 직접 만지며 정리한 터라 기억에 남는 기록물이 너무 많은데… 그래도 한 가지를 꼽자면 전 편지가 제일 인상 깊었던 거 같아요. 특히 문익환 목사님이 쓰신 편지. 제가 사람들한테도 많이 얘기했는데 문익환 목사님이 편지에 쓰신 말씀들이 제게 울림을 주는 것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저는 편지들과 편지를 엮어 편지집 2권을 낸 것이 가장 기억에 남네요. 박: 저는 기증전 를 했던 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기증자들이 여러 수고와 부담을 안고 건네준 기증품을 주제로 올린 전시라 의미가 컸던 거 같고, 기증자분들께 전시 도록을 만들어 건네주는 것으로 작게나마 감사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문익환 아카이브 내 기증품 분류 체계를 직접 만들고 정리할 수 있었던 것도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오: 아직 정리되지 못한 기록물들 목록화 작업해야  박: 기록물 목록을 공개할 때 늦봄아카이브 더 확장   김: 문익환 아카이브가 다양한 활동을 펼쳐 왔고, 두 분이 그 중심에서 이끌어왔다는 게 잘 느껴지는 답변이네요. 그렇다면 앞으로 문익환 아카이브에서 했으면 하는 활동이나 업무가 있을까요? 오: 일단 미정리 기록물들을 정리하는 것을 우선으로 둬야 할 것 같아요. 이제껏 문익환 아카이브는 가장 중요한 것들부터 차례대로 기록물을 정리해 오고 있기 때문에 아직 저희의 손길이 닿지 못한 기록들도 많이 있거든요. 그 기록을 정리하고 번호를 매기고 목록화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기록을 만지다 보면 자연스레 문익환 아카이브의 또다른 방향이 보일 것 같아요.   ◇오늘의 늦봄아카이브를 만든 두 주역. 오명진 아키비스트(왼쪽)와 박선정 아키비스트. 박: 저는 문익환 아카이브 소장 기록물 목록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일을 추천해 드리고 싶어요. 현재 저희 아카이브가 소장하고 있는 기록물 중 정리된 20,000여 건에 대한 목록 정보는 내부에서만 볼 수 있고, 일반 대중에겐 공개되어 있지 않은 상태라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 문익환 아카이브 사이트를 통해 기록물 목록을 일반 대중에게 공유한다면, 문익환 아카이브는 그 영역을 한 단계 더 확장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오: 기록 너무 많은데 혼자 담당하느라 어려움  박: 전시회 등 소장품 꺼내느라 육체적 힘들어    김: 좋은 의견 제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무엇이든 문익환 아카이브의 ‘기록’을 중심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터뷰하면서 아카이브를 위한 두 선생님의 열정과 고민이 느껴지는데, 아카이브를 구축하기까지 많은 노력이 있었을 것 같아요. 문익환 아카이브 일을 하며 지치거나 힘들었던 순간이 있었을까요?   오: 저는 아무래도 아카이브 시작할 때 함께 했던 아키비스트라 그런지 봐야 할 기록이 너무 많고 정리해야 할 것도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근무시간 외에도 출근해서 일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점이 조금 힘들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아카이브 담당이 저 혼자라 혼자 일하는 것에서 오는 외로움도 있었고요. 박: 전 육체적으로 힘들 때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좀 왔던 거 같아요(웃음). 특히 전시 때 아카이브에 있는 기록과 소장품들이 활용되니까 보존 박스에 있는 것들을 꺼내야 하거든요. 그때마다 보존 박스를 혼자서 내렸다가 올렸다 하는데…그런 부분이 힘들다고 느꼈어요. 오명진 선생님 말씀처럼 아카이브에 배당된 일을 혼자서 처리하는 것 역시 벅차다고 느낄 때가 있었습니다.   오: 혼자서 모두 다 하려고 하면 안 돼  박: 통일의집과 함께 어려움 헤쳐가야 김: 선생님들의 생생한 실무 경험 공유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렇다면 문익환 아카이브의 아키비스트로 새로 시작하는 저에게 해주실 조언이나 팁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오: ‘혼자서 다 하려고 하지 마라!’ 이게 제 팁입니다. 힘든 점이 있다면 혼자 끙끙대면서 다 책임지려 하지 말고 통일의집 팀과 공유하면서 잘 헤쳐나가길 바랍니다. 박: 저도 오 교수님 말씀에 완전 동의합니다, 혼자서 다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못했다고 해서 자괴감 가지고 괴로워할 필요 없습니다. 아카이브 업무와 그 필요성에 공감해 주는 통일의집 일원들이 있으니 어려울 땐 도움을 구하시길 바랍니다.  ◇미래의 늦봄아카이브를 책임질 김가영 아키비스트.   김: 선생님들이 인터뷰에서 해주신 이야기와 조언들 참고해 문익환 아카이브가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 이곳에서 한 달여를 일하며 낯설지만 흥미로운 ‘아카이브’라는 공간에 대한 여러 감정과 고민이 오갔는데 이 인터뷰를 통해 제가 평소 궁금했던 부분과 고민한 지점이 조금이나마 해소된 거 같아 저 역시 이 자리가 참 가치 있게 느껴집니다. 좋은 인터뷰를 해주신 오명진 선생님과 박선정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아키비스트 좌담회를 마칩니다.    월간 문익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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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봄 아카이브와 나: 오남경 (2025년 12월호)

    수장고, 늦봄의 숨결을 잇는 ‘기억의 저장소’     서울 강북구 수유동, 한신대학교 서울캠퍼스 장공 도서관 2층과 3층에는 늦봄 문익환 아카이브 수장고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문익환 목사와 박용길 장로의 치열했던 삶, 그리고 그분들이 걸어온 시대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더 나아가 한국 현대사의 핵심인 민주화·통일운동의 역사적 증거가 보관되어 있는 기억의 저장소이자, 나에게는 불의한 시대를 헤쳐나갈 용기와 위안을 주는 귀한 공간이다.   ▲수장고와의 첫 인연 수장고와의 첫 인연은 지난 2021년 9월 우연히 찾아왔다. 서울시 50플러스재단의 디지털기록지원단 활동을 계기로 ‘통일의집’ 봉사를 시작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2년여간 매주 한 번씩 수장고를 찾아 꾸준히 봉사를 이어오면서 다양한 활동을 경험하였다. 처음 맡은 일은 박용길 장로님의 편지를 보존 봉투에 담고 번호를 기록하는 단순한 보존 작업이었다. 그러나 낡고 바랜 실물 편지 한 장 한 장을 봉투에 넣을 때마다 내 마음이 절로 숙연해졌다. 그 얇은 종이에서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관통해 온 가장 진실하고도 생생한 역사의 증언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옥중의 남편에게 소식이 닿기를 바라며 편지마다 날짜와 번호가 꼼꼼히 적혀 있다. 봄길의 편지들에는 삭막했을 옥중 생활에 계절의 변화와 아름다움을 전하려는 듯, 붉게 물든 단풍 배경, 계절 과일 그림, 한여름에는 서늘한 눈 덮인 산 풍경까지 등장했다. 말린 꽃잎, 시, 악보 등 온갖 재료를 활용해서 보낸, 이토록 정성스러운 편지는 소소한 일상사를 전달하면서도 엄혹했던 현실을 묵묵히 증언하고 있었다. 검열을 피하고자 사용된 암호 같은 문구들이나, 흐릿하지만 선명한 ‘검열필’ 글자에서는 당시의 엄혹함을 보여주었다.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사랑과 희망을 놓지 않았던 봄길의 간절한 위로와 꿋꿋한 강인함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엄혹했던 상황을 사랑과 헌신으로 극복해 나간 두 분에게서 위대한 삶의 자세를 배웠다. 이 감동은 기록이 널리 공유되어야 의미가 있다는 절실한 깨달음으로 이어졌다. 이에 봄길의 편지를 전사하고 온라인 아카이브에 직접 올리는 경험을 하였으며, 온라인 아카이브와 오프라인 수장고의 풍부한 자료를 기반으로 한 오프라인 콘텐츠 『월간 문익환』발간에도 참여하였다. 매월 발행되는 『월간 문익환』에 실을 글을 쓰기 위해 자료를 찾고 맥락을 파악하는 과정에서, 단순한 봉사를 넘어 늦봄의 시대를 공부하고 역사적인 사건들을 깊게 이해하고 들여다보는 계기가 되었다. 살아오면서 제대로 보지 못했던 역사의 순간들을 다시 바라볼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수장고에 보존된 사료들 수장고에는 국가지정물 15호로 지정된 옥중서신 및 사진첩을 비롯해 다양한 유형의 사료가 보존 보관되어 있다. 주요 기록 유형은 다음과 같이 7가지로 나뉜다.   • 문서류: 서신, 설교문, 원고 등 개인적인 기록과 공적인 기록. • 사진류: 사진, 필름, 슬라이드 등 시각 자료. • 박물류: 도장, 안경, 시계, 가구, 여권 등 생활 유품과 기념물. • 도서간행물류: 단행본, 논문, 신문 스크랩 등 출판 자료. • 서화류: 그림, 글씨, 족자, 자수 등 예술 관련 자료. • 영상음성류: 비디오테이프, CD, TAPE 등 시청각 자료. • 복식류: 의류, 지팡이, 구두 등 착용했던 물품.   ▲기록을 지켜내는 책임과 바람 이곳에는 편지뿐 아니라 문 목사의 옷가지, 손길이 닿은 가구, 친필 원고, 수많은 사진과 앨범 등 방대한 사료가 보관되어 있다. 여러 뜻있는 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많은 부분이 정리되었지만, 늦봄 아카이브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아직 분류되지 않은 채 상자 속에 잠들어 있는 귀중한 기록들이 많기 때문이다. 사료를 파악해 정보를 정리하고, 디지털 작업을 거쳐 보존 봉투에 담아 안전하게 지켜내는 일. 이 과정은 막대한 시간과 정성을 필요로 한다. 만약 지금 이 기록을 정리하지 않고 방치한다면, 사료는 그 가치를 잃고 결국 잊히고 말 것이다. 기록이 사라진다는 것은 그 안에 담긴 정신과 메시지 또한 소멸한다는 의미와 같다고 생각한다. 민주화와 통일 운동의 증거를 보존하고, 늦봄의 삶을 널리 알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다시 수장고로 향했다. 나의 작은 봉사가 늦봄의 큰 정신을 다음 세대로 이어주는 튼튼한 끈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보존 상자에 담겨 있는 서신   ◇서화류: 그림, 글씨, 액자 등   ◇박물류: 가구    ◇서적류 월간 문익환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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