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부모님, 재소자들의 부모님아버지 문재린, 어머니 김신묵, 아내 박용길

당신에게

 

접견장에서 건너다보던 당신의 밝은 미소가 지금도 망막에 코스모스 꽃잎처럼 사뿐히 남아 있어요. 아버님, 어머님, 성근이가 보이지 않아 좀 섭섭하기는 했지만, 우리는 눈만 감으면 언제 나 만날 수 있고, 고요히 귀만 기울이면 기도 소리가 쟁쟁히 울려오는 사이니까 그런 아쉬움 정도야 다른 아픔에 비하면 문제도 안 되는 거 아니겠소.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라고 한 요한복음서 저자의 심정이 날이 갈수록 절실해지는 것 같구려. 보라 외조부님의 건강은 어떠신지? 내 담당이 그날 당신을 처음 보고 어쩌면 그리 젊을 수 있느냐고 감탄해 마지않는구려. 부디 그 젊음을 길이……. 나도 당신의 젊음에 못지않은 젊음을 유지하리다.

어제는 동환의 환갑날이었군. 늦게나마 축하를 보내 주시오. 나이 먹어 가는 것을 서운해하는 것은 그동안의 생이 익지 않았다는 말이 되겠지요. 기쁨의 신학으로 익어 가는 나이를 조금도 서운해할 것 없는 거 아니겠소. 뒤이어 올라오는 세대가 시원치 않다면 그것도 서운할 이유가 되겠지만 우리의 다음 세대는 분명히 우리보다 더 훌륭하고 더 성숙해 있으니 이 또한 서운하기는커녕 기뻐할 일인 거죠.

동환의 편지에 자기의 ‘아픔’과 나의 ‘슬픔’은 서로 통한다고 했더군요. 당연한 이야기지요. 한데 내 생각으로는 ‘한’이나 ‘아픔’은 ‘슬픔’이 되어야 인식이 되고 그것을 넘어가는 용서와 사랑과 화해의 길이 열리는 것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윤의 결혼 소식은 정말 나를 기쁘게 해주었소. 육군교도소에 있을 때 꾼 꿈 이야기를 적어 보지요. 여기서 보낼 수 있는 최상의 선물로서. 때는 겨울이 아직도 다 물러가기 전이었소. 앞에 넓은 마당이 있고, 그 마당을 굽어보는 자리에 봄기운이라고는 조금도 서려 있지 않은 큰 나무 두 그루가 서 있었소. 그 마당 저쪽에서 윤의 어머니가 두 팔을 휘휘 저으면서 오고 있는 것이 아니겠소(그때는 윤의 어머니가 밖에 나올 수 없는 때였죠). 그는 나를 보고 손을 저어 즐거운 인사를 보내 주었고 나도 손을 흔들어 답례했지요. 그러고 돌아섰더니 앙상하던 두 나무에 철쭉 같은 꽃이 환히 만발해 있더군요. 지금 생각하니, 그 두 나무가 강 군과 윤이었던 거죠. 정말 이 꿈과 함께 나의 사랑을 보내오.

그동안 성수, 영금의 편지도 받았고 선희 편지도 몇 차례 받았어요. 선희에게서 부활절 카드도. 의근에게서는 알래스카, 프린스턴 카드, 또 성심이와 같이 보내 준 부활절 카드도 받았지요.

나의 혈압은 약을 계속 먹으면서도 180-120선을 유지하고 있다면 적잖이 높은 편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별 굴곡이 없어서 다행인 거죠. 요사이는 혈압을 낮추는 일을 요가로 해보려고 시도하고 있는데, 그것만 성공한다면 또 하나 중요한 소득을 올리는 일이 되겠지요. 조금 자신이 생기는 것 같소. 당신은 저혈압인데 어떤지?

식생활에 관한 일 하나. 사람의 몸을 산성화시키는 비싼 고기보다 콩을 많이 먹는 것이 좋은데, 콩을 밥에 두어 먹기가 안 되었으면 삶아서 믹서에 갈아 비지를 해 먹거나 콩국을 해 먹는 것이 좋을 것 같구려. 노인들에게도 좋고 당신이나 바우에게도 좋을 것이오.

백기완 씨는 믿지도 않는 하느님께 나는 그를 위해서 열심히 기도하고 있어요. 고은 씨의 수술비, 치료비는 어떻게 되는지? 안(병무) 박사의 건강 회복이 현재대로 순조롭기를 빌고 또 빌지요. 모두 모두에게 문안을.

당신의 사랑, 늦봄

 

아버님, 어머님께

 

여기 오셨던 날 용길이는 지쳐서 누웠는데 아버님, 어머님은 눕지도 않으시고 일을 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동안 몇 차례 주신 아버님 글월에 적혀 있는 말씀 잘 명심하겠습니다. 남을 가르친다는 생각 없이 담담하게 성경을 읽어가면서 명상에 잠기다 보면 늘 무언가 새것을 느끼고 깨닫고 하는 지금의 하루하루는 너무나 큰 축복입니다. 이런 벅찬 삶과, 빨리 나가서 이것을 쓰고 싶다는 생각 사이에서 일종의 갈등 같은 것을 느낍니다.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말한 갈등과도 같은 거죠. 아무튼 어느 편이든, 감사하는 심정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아버님, 어머님이 원하시는 장학회에 관한 저의 생각은 이미 용길에게 말했기에 들어서 아실 줄 압니다만, 이제 그걸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려고 생각합니다. 아버님, 어머님 결혼 70주년을 기해서 혈육의 자녀들보다 조금도 못 하지 않은 마음의 자녀들이 그리 많다는 것이 드러나서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제게는 그만큼 많은 형제가 생긴 거구요. 혈육의 자녀들과 마음의 자녀들의 성의를 모아서 장학회를 만들겠다는 것 또한 얼마나 아름답고 보람된 일입니까? 요는 인물을, 일꾼을 기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버님이 생각하고 계시는 국민 교육을 위한 일꾼, 곧 교육가를 기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국민 가운데서 예수님처럼 우리는 맨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거기서 교육을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학적으로 말해서 의식화는 거기서 시작되어야 하고 거기서 제일 의식화가 빨리 된다는 것인데, 이 사회의 밑바닥은 전과자들이라는 것이야 아무도 부인 못 하는 일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전주에 있을 때부터 전과자들 갱생의 문제를 생각해 온 것입니다.

요새는 이들이 새사람이 되어 주어야 이 사회가 밑바닥에서부터 새로워진다고 생각을 하면서 푹푹 썩어 냄새나는 바로 그 밑바닥에서 밀고 올라오는 새살이 바로 새로워진 전과자들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어떻게 자기를 이 사회의 새살로 자각하게 하느냐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입니다. 죄인, 세리, 창녀들이, 그 당시 밑바닥 인생들이 하늘나라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저는 얼마 전부터 “건축가들에게 버림받은 돌이 집 모퉁이의 초석이 되었다”는 성경 말씀이 바로 이들을 두고 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성서는 예수가 바로 그 돌이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밑바닥 인생이 바로 그 돌이라고 믿고 사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들을 새 사회의 초석이 되게 하느냐 하면, 저는 그것은 제가 배고파 봤기 때문에 남의 배고픔을 알아주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헐벗어 봤기 때문에, 제가 외로워 봤기 때문에, 제가 절망의 구렁에서 헤매 봤기 때문에, 남의 헐벗음, 외로움, 절망의 암담함을 알아주는 마음, 그것이 바로 새 사회의 초석이 되는 마음 아니겠습니까? 아버님이 말씀하시는 지상 천국의 불씨는 바로 이들 가슴속에 있습니다. 그것을 일깨워 주어서 천국 백성으로서 긍지를 가지고 일어서게 해주는 것입니다. 고름이 고인 바로 그 밑바닥에서 새살이 되어 밀고 올라오게 해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일깨워 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을 정말 도와서 일어서 걷게 해주는 것은 그들 자신입니다. 저는 그것을 『말콤 엑스』에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 가운데서 작가, 교육가, 목사, 지도자 될 만한 사람을 찾아서 키워 주어야 합니다.

저는 우선 작가(소설가나 시인, 극작가) 될 소질이 있는 사람을 전과자들 가운데서 찾아내어 작가로 키워 보고 싶습니다. 호근이나 성근이는 그들을 데리고 극단을 조직해 보는 것도 좋은 일이겠지요. 그들의 절망적인 아픔을 스스로 표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 자신의 구원의 길이 되는 동시에 그들의 아픔에 사회의 눈을 동정적인 방향으로 돌리게 하는 일도 되는 것입니다. 이 사회의 음지와 양지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일이 되는 겁니다.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아마 난사(難事) 중의 난사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일은 누군가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이 누구인가요? 그것은 예수의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가 만일 예수의 마음을 만에 하나라도 가지려고 한다면 이 일을 남에게 미룰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와 함께, 그의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면서 믿고 해나간다면, 그 일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예수는 천국 백성의 자각만을 주고 가셨습니다. 갈릴리의 친구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셨습니다. 우리가 할 일도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 사회의 독버섯이라고 생각되어 외면받던 사람들이 새 사회의 건실한 일원이 되죠. 이 일은 전 사회의 관심사여야 하지만, 우선 예수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 보려는 우리가 그 관심을 보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모인 정성이 그런 관심의 시초가 될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 저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그래서 교도소 안팎에 있는 많은 전과자의 아버지, 어머니가 되신다면 얼마나 보람찬 일이겠습니까? 일반 사회가 백안시하던 사람들이 사회에서 떳떳하고 구김살 없는 견실한 시민으로 서게 될 때, 사회의 양지에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들도 그것에 많은 자극을 받고 반성하게 되지 않겠습니까? 물론 자각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는 부족할 것입니다. 비비댈 언덕도 마련해 주어야지요. 한국의 교회가 이 일에 눈을 떠 준다면 엄청난 일을 할 수 있을 텐데! 이 편지를 보면 동환에게서도 무슨 응답이 있을 것입니다. 충분한 의논 끝에 시작해야 하겠지요. 기도하면서.

이상으로 그동안 제가 생각하던 점의 일단을 펼쳐 보았습니다. 아버님, 어머님 그리고 가까운 이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전과자들의 갱생을 위해서 무언가 하지 않고는 죽을 수 없는 심정이었는데, 그런 계기가 오지 않아서 좀 안타까운 심정이었는데, 그 계기가 아버님, 어머님 결혼 70주년에 모인 아름다운 성의로 마련되는 것 같아서 저는 지금 퍽 흥분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온 가족이 달라붙어 씨름해 볼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동환이네까지. 아버님이 오신 후에 어머님이 생기가 도시는 것 같아서 정말정말 기쁩니다.

 

걱정만 끼치는 익환

 

다시 당신에게

 

‘막달라 마리아의 눈물’, ‘막달라 마리아의 부활’이라는 찬송가 가사를 집에서 못 찾았으면, 찬송가 위원회의 김성호 목사를 찾아서 알아보시오. 거기도 없으면, 나(운영) 선생에게 그 가사가 가 있을 거요. 

요새는 새살들과 같이 부를 찬송가 가사에 마음을 쏟고 있어요. 곪아 터진 상처 바로 그 밑바닥에서 밀어 올리는 새살을 주제로 하는 가사 하나를 당신을 만나던 날 밤에 지었지요. 그들이야말로 곪아 터진 상처이니까, 그 속에서 썩고 말지 않는다는 다짐을 하고 “나는 새살이다”라고 외치게 하는 노래지요.

또 하나는 햇빛, 달빛, 별빛을 어루만지며 흐느끼는 멍든 가슴들, 같이 흐느끼다가 하느님의 따뜻한 마음, 서늘한 마음, 빛나는 마음을 깊숙이 들이마신다는 내용이지요. 사회의 음지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이들이 거기서 일어나서 사회의 양지를 향해서 마음의 발길을 옮기고 싶게 하는 찬송가 가사가 속속 나오도록 기도해 주시오. ‘노래가 되는 시’ 쪽으로 지금 마음이 기울어지고 있어요.

그동안 며칠 바람이 몹시 불어서 마음이 안 좋았었는데, 어제부터 따뜻해져서 기분이 맑아졌소. 오늘 (목요일) 오후에 한 주일에 한 번 하는 더운물 목욕이 있어요. 목욕한 물로 좀 큰 빨래를 하는데, 이제 곧 얇은 내복도 벗게 되겠지요. 

바우, 보라가 얼싸안은 사진은 정말 두 천사의 모습 그대로군요. 언제나 우리 집 두 천사를 안아 보나? 노래도 같이 부르고. 바다 건너에서 커가는 조카들의 믿음직한 모습들이 마음을 든든하게 해주지요. 창근, 문규 대학 진학은 어찌 되었는지. 정말 노석의 편지는 너무너무 반가웠소. 노인들은 다 가셨지만, 동기들은 아직 살아 있다니 반가웠소. 이 나라가 어서 통일되어 서로 만나 얼싸안아야 할 텐데.

1981. 5. 6. 사랑

 

백기완, 고은 시인, 안병무 박사

부모님의 결혼 70주년을 계기로 그동안 생각하던 재소자들의 교화 사업을 본격화하고 싶다는 소망을 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