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0624 장준하의 『돌베개』

당신께 





강경대 군의 죽음 후에 10여 명이나 소중한 젊은이들이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민족의 제단에 바쳤는데, 그 결과가 이 모양이니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겠어요? 그 죽음들 앞에서 일흔이 넘도록 살아 있다는 일이 부끄러울 뿐인데, 천 번, 만 번 죄인이 되어도 시원치 않은데, 이게 무슨 꼴이람. 그 억울하고 처절하고 값진 죽음 앞에서 이 무거운 책임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 건가? 이 감옥에서 내가 해야 할 일,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만 하면… 죽는 길 밖에 무엇이 있으랴 싶지만, 그것 역시 책임을 벗어 던지는 일 같고.



이번 선거에서 국민은 또 무언가 해내리라고 기대했었는데, 그게 기상천외였군요. 내가 생각하고 기대했던 일과는 180도 반대 방향이었군요. 국민은 재야 민주 세력과 야당에 매서운 채찍을 내렸군요. 조그마한 차이를 가지고 내 편이니 네 편이니 하는 좀스럽고 용렬한 분열을 해 온 우리들에게 국민은 호된 심판을 내린 거죠.



정신을 차려야 하는 건데, 아직도 정신이 덜 든 것 같아서 울고 싶다기보다는 죽고 싶은 심정이 되는군요.



내일 온다는 소식이군요. 내일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로 하죠. 이만 총총. 



당신의 늦봄





김희숙 여사여





말로만 듣던 옥도미를 그렇게 많이 주셔서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모릅니다. 장(준하) 형에게 대접하고 싶은 굴뚝 같은 심정으로 제게 주신 거라고 생각하며 먹었습니다.



문익환이 여섯번째로 감옥에 다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어떤 심정이 되셨습니까? 죽는 것보다야 백 배나 나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내에게서 매일 편지도 받고 가끔 찾아오면 반갑게 만나기도 하니까요.



그러나 요새는 일흔이 넘도록 살아 있다는 일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는 심정입니다. 숫제 죄인이라고 하는 게 옳은 말입니다. 얼마 전 서울에서는 열사들의 합동 추모제가 있었습니다. 용길이가 장형 사진을 안고 거리를 행진했다는군요. 전태일에서 시작해서 김귀정 양까지 열사가 30년 동안 141명이나 나왔답니다. 그지없이 부끄럽고 처절하면서도 한편으론 그지없이 자랑스러운 역사가 아닙니까?



모리다 쇼이치(森田宗一)라는 일본인 법률가로 일생 청소년 문제를 가지고 씨름한 분의 책을 요 며칠 읽고 있습니다. 허무주의에 빠져 자살하는 일본 청소년들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젊은이들은 나라와 겨레를 위해서 그 소중한 목숨들을 바칩니다. 그 가운데 장 형만이 젊은이가 아니고 어른이었군요.



지난 21일 이후로 저는 퍽 처참한 심정이 되었습니다. 그런 때에 마침 장 형이 쓴 『돌베개』를 읽으면서 용기를 다시 얻고 좌절감을 털어 버릴 수 있었습니다. 『돌베개』는 『사상계』에 연재될 때에 띄엄띄엄 읽었는데 단숨에 처음부터 끝까지 한 자 빼놓지 않고 다시 읽었더니, 정말정말 감개가 깊었습니다.



장 형은 정말 투철하게 살았군요. 어쩌면 그렇게 한순간도 느슨한 데가 없이 살 수 있었을까요? 절벽과 같은 현실을 번번이 다이아몬드의 날카로움으로 뚫고 나간 그 기백과 의지 ─ 그냥 감탄할 뿐입니다. 활자 하나하나에서 다이아몬드처럼 맑은 빛이 터져 나오는군요. 저도 언젠가 회고록을 내야 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용기가 안 나는군요. 내 붓끝에선 도저히 그런 회고록이 안 나올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장 형의 문장이 어떠냐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저도 문장력이라는 점에선 꽤 자신이 있었거든요. 문제는 문장력이 아닙니다. 문장에 담길 생이 문제인데, 장 형의 생을 들여다보면서 저의 생은 너무나 느슨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돌베개』를 읽으면서 용기를 얻었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시겠지요. 6천 리 죽음의 길을 걸어 중경에 가서 겪었던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좌절이 아니던가요? 그리고 그리던 조국에 돌아와서 겪었던 것 또한 엄청난 좌절 아니던가요? 그 후 30년 장 형의 생은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나지 않았던가요? 그 이후로 26년에 걸친 피나는 민족의 역정 또한 좌절에 좌절을 거듭하는 것이 아니던가요.



여기까지 써놓고 보니 제 아버님, 어머님의 생애가 눈앞에 떠오릅니다. 한 세기에 걸친 민족 해방을 기다리며 사시다가 그걸 못 보고 가셨거든요. 제 아버님이나 어머님, 김구 선생이나 장 형은 바라던 민족해방을 못 보고 가셨지만, 그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이 어둠을 뚫고 나가는 후세인들에게는 별빛처럼 빛나기 때문에 저는 장 형의 『돌베개』를 읽으며 용기를 얻었다는 겁니다.



아이들한테서는 좋은 소식이 늘 날아오겠지요. 외손자들도 예쁘게 씩씩하게 잘 자라겠지요.



건강하시고 보람 있는 나날을 보내시기를 빌면서. 



익환 올림



 1991. 6. 24. 





 아내에게는 선거에서 패배한 것에 대한 자책을, 장준하의 미망인에게는 돌베개를 읽고 용기를 얻었다는 내용을 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