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께!
오늘 새벽에는 꿈속으로 자맥질해 들어갔다가는 물 위로 머리를 쳐들고 또다시 꿈속으로, 이러기를 세 차례나 꿈과 현실이 하나로 이어졌는데, 나의 마음은 혜화동성당 주위를 맴돌고 있었군요. 여섯 시에는 방학동에서 합류해서 저녁을 먹어야 하는데, 나의 몸은 그 시간에 혜화동에 있었어요. 집에 전화해야지 하는데 집 전화번호가 생각나야지. 902-1623이던가 1509던가 그러는데 웬 여성이 지나가다가 “문동환 목사의 아드님 아니세요?” 하더군요. “나를 그렇게 젊게 봐주어서 고맙긴 한데, 난 문익환입니다” 했더니, 얼굴이 빨개져서 가버리더군요. 다음 꿈은 당신과 내가 창근의 외할머니가 마련해 준 저녁을 잘 먹고 같이 혜화동성당으로 들어가는 장면…….
1976년 3월 1일, 그날 나는 성남 이해학 목사의 주민교회로 삼일절 기념 강연을 하러 갔었죠. 함 선생님 대신으로. 함 선생님이 어찌 될지 몰라서 대기하시라고 하고 그 대신 내가 갔었죠. 이제 모든 것은 내 손에서 떠났다는, 꽤나 홀가분한 심정으로 명동성당으로 갔지요. 당신이 정서해 준 선언문을 가슴에 품고. 미사 시작되기 전에 함 신부를 만나서 그 선언문을 넘기지요.
그날 김승훈 신부의 강론은 퍽 인상적이었어요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내일 신문에 보도된다면, 이 땅에 언론의 자유가 있는 겁니다.” 이 구절이 지금도 귀에 쟁쟁하군요. 동환이가 출애굽 역사와 기독교 신앙이라는 퍽 원론적인 내용으로 설교를 했지요. 강론이 둘인 미사였지요. 끝날 무렵 이우정 선생의 기도 순서인데, 그때 선언문이 낭독되기로 되어 있었죠. 이우정 선생이 등단해서 함 신부에게서 선언문을 넘겨받아서 낭독하게 되지요.
우리 겨레는 월남 사람들처럼 불행한 선택을 강요당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절박감과 장준하의 목소리를 되살려내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쓰여진 선언문이 이우정 씨의 떨리는 목소리로 낭독되어 내려가는 것을 들으면서 나는 속으로 뜨거운 눈물을 안 삼킬 수 없었죠. 장준하 씨의 생명이라도 살려낸 것 같은 마음이 들어 이만하면 내가 할 일을 해냈지 싶은 흐뭇한 심정이 되기도 했구요. “어찌 긴장했던지, 다리가 다 뻣뻣해요.”라는 말을 남기고 이우정 씨는 공덕귀 여사와 함께 어두움 속으로 사라지더군요. ‘가녀린 여자의 몸으로 앞으로 얼마나 시달릴까?’ 이런 안쓰러운 심정 금할 길이 없었죠. 난 무사할 줄 알고. 어림도 없는 소리였죠.
선언문이 완성된 뒤 이를 안국동 윤보선 씨에게 알리는 일도 이우정 씨에게 부탁했지요. 당신을 내세워도 되는 일이었지만, 그럴 생각이 안 되어서요. 3·1 선언문이 안국동에서 준비되고 있다는 걸 내게 처음 알려준 것이 이우정 씨였지요. 그 연락은 이태영 박사가 하고 있으니 그를 만나라고 하더군요.
1992. 2. 29.
『민주구국선언』이 발표된 명동성당의 삼일절 기념 미사 광경을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