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인천의 범시민운동

    인천의 범시민운동 ‘범시민운동 불붙는다.’ 2005년 10월 10일 경인일보 1면 머리기사의 제목이에요. 그날 아침, 인천의 94개 기관·단체가 송도 갯벌타워에 모이기로 돼 있었습니다. 범시민운동이 무엇이길래 신문 1면에 올랐을까요? 우리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가 남긴 기록으로 그때와 지금의 운동을 살펴봅니다. 2005년 10월 10일 경인일보 1면 (출처: 「[2005] 인천경제청 특별지자체 전환 반대 '범시민운동 불붙는다'」) 범시민운동이 뭐예요? ‘범(汎)’은 ‘넓다, 두루 아우른다’는 뜻이에요. 범시민운동은 몇몇 단체의 행사가 아니라 시민 모두가 함께하는 운동이라는 말입니다. 2003년 1월 협의회 창립준비단은 인천사랑운동을 “명실상부한 범시민운동으로” 펼치겠다고 계획서에 적고, 이 운동이 지켜야 할 것을 세 가지로 정리했어요. 주인의식: “시민이 이 도시의 주인이란 생각을 가져야” 인천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 스스로: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 참여하는 자율적인 운동”이어야 한다. 작은 실천: “이 운동은 어떤 이론이나 캠페인 행사가 되어서는 안됨.” 작은 일부터 찾아서 하는 실천이어야 한다. (출처: 「인천사랑 시민운동 종합추진계획안」 3·19쪽)   2003년, 묵묵히 실천한 사람을 찾아서 창립 첫해 겨울, 우리는 ‘인천사랑 우수실천사례’ 상을 만들었어요. 받을 사람은 이름난 사람이 아니라 “어려운 곳에서 인천사랑 및 발전을 위해 묵묵히 실천하고 있는 개인, 단체”였습니다. 일반 시민도 추천할 수 있게 했고, 현장을 찾아가 사실인지 확인했어요. 12월 23일 첫 시상식의 수상자는 다섯. 홀로 사는 어르신 150여 가구에 다달이 후원 물품을 전한 후원회, 일요일마다 거리를 청소한 봉사단, 인천 역사 연표를 처음 만든 고등학교 교사가 그 안에 있었어요. 이 상은 2004년과 2005년에도 이어졌습니다. 제1회 인천사랑 우수실천사례 수상자 사진 (2003) (출처: 「인천사랑 우수실천사례 계획안」 2~4쪽, 「인천사랑 우수사례 팜플렛 (시상식 일정)」 3·5·6쪽)   2004~2011년, 세어 보고 물어보고 인사를 건네다 2004년 12월 14일, 우리는 ‘깨끗한 생활문화 운동의 실천방안 모색 토론회’를 열었어요. 대기 환경, 화장실, 간판, 쓰레기 같은 생활 속 문제를 이야기한 자리였습니다. 토론으로 끝내지 않고, 2006년에는 회원 동호회들이 직접 거리로 나갔어요. 화장실 800여 곳에서 설문했더니, 청소할 때 가장 큰 문제로 593명(74.1%)이 ‘이용자의 시민의식 부족’을 꼽았어요. 문예회관 사거리에서 세어 보니 평균 71%의 차가 정지선을 지켰어요. 817명에게 인사를 건넸더니 231명이 반갑게 받아 줬고, 229명은 반응이 없었어요. 2011년 11월에는 회원 17명이 점검표와 카메라를 들고 공중화장실과 개방화장실 77곳을 13일 동안 찾아다녔습니다. 청결 상태는 ‘상’ 38%, ‘중’ 45.2%, ‘하’ 17%였다고 있는 그대로 적었어요. 생활문화 실천 토론회 현장사진 (2004. 12. 14.) (출처: 「생활문화 실천 토론회 현장사진」, 「생활문화 토론회자료집」 17·19·33·36쪽, 「2011 공중화장실 관리보고서」 3~5쪽)   2005년, 경제자유구역청 앞에 서다 2005년 가을, 재정경제부가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을 인천시에서 떼어 ‘특별지방자치단체’로 바꾸는 방안을 추진했어요. 10월 25일 우리 협의회를 첫머리로 10개 단체가 성명서를 내고 전환 시도를 멈추라고 요구했습니다. 기자회견을 열고, 손팻말을 들고 경제자유구역청 앞에도 섰어요. 함께 낸 결의문은 이곳을 “넓디넓은 갯벌을 메워 땅을 일구고 그 위에 마련한 인천시민의 땀과 노력이 배어 있는” 곳이라고 불렀어요. 그 뒤에도 전환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2010년 같은 논의가 다시 나왔다가 중단됐을 때에도 인천경제자유구역청은 인천시 산하 기관이었습니다. 인천경제자유구역청 반대집회 사진 (2005) (출처: 「인천경제자유구역청 특별지차체 반대 성명서」, 「인천경제자유구역청 반대기자회견 사진」, 「인천경제자유구역청 반대집회 사진」, 「서울신문」 2010. 3. 12.)   2012년, 183만 명이 이름을 적었습니다 2012년 6월, 인천시 재정이 위기에 놓이자 우리 협의회를 비롯한 6개 단체가 중심이 되어 범시민협의회를 꾸렸어요. 여성·종교·경제·노동 단체로 참여가 넓어졌고, 6월 28일 ‘인천시 재정위기 비상대책 범시민협의회’가 발족하면서 중앙정부의 지원을 촉구하는 200만 서명운동이 시작됐습니다. 2014 인천아시안게임 국비 지원을 평창동계올림픽 수준으로 늘려 달라는 것이 핵심 요구였어요. 서명은 거리에서만 받지 않았어요. 집집마다 찾아가고, 공장과 교회, 성당, 사찰도 찾아갔습니다. 10월 결산 때 모인 서명은 183만여 명. 목표였던 200만에는 못 미쳤지만, 범시민협의회는 이를 “시민들 스스로 인천의 문제를 해결하는 주인의식을 세우는 커다란 전기”라고 평가했어요. 인천시 재정위기극복 서명운동 (2012), 서명 부스 (출처: 「[2012] 인천 재정위기 극복 범시민협의회 결성」, 「[2012] 인천 재정위기 극복 서명운동에 183만명 동참」 1~2쪽, 「인천시 재정위기극복 서명운동」) 그 뒤로도 범시민운동은 여러 모습이었어요. 2017년 11월에는 1,100여 명이 문학경기장에 모여 김장 38,630kg을 담갔고, 2019년에는 지역화폐 인천e음을 쓰자는 ‘1인 1카드 운동’을 계획했어요. (출처: 「[2017] 제1회 애인(愛仁) 김장 대축제」, 「인천e음 사용 홍보계획」 2~3쪽)   지금 우리가 하는 일 2023년 2025 APEC 정상회의, 인천고등법원, 해사전문법원을 인천에 유치하자는 100만 서명운동을 벌였어요. 그 뒤 인천고등법원 설치법이 2024년 11월에, 해사법원 설치법이 2026년 2월에 국회를 통과했고, APEC 정상회의는 경주로 결정됐습니다. 2025년 6월, 민·관·산·학 127개 기관·단체가 ‘인천사랑 범시민네트워크’로 모였어요. 2026년 4월, 인천국제공항 통합 반대와 공공기관 이전 저지를 내건 범시민운동본부가 출범했고, 5월 10일 인천시청 애뜰광장에서 궐기대회가 열렸어요. 지금도 진행 중인 운동이에요. (출처: 인천사랑운동 연혁, 「법률신문」 2024. 11. 30., 「헤럴드경제」 2026. 2. 11., 「뉴스서울」 2024. 6. 27.·2025. 9. 3., 「경향신문」 2026. 4. 2., 「경기일보」 2026. 5. 10.)   달라진 것 하나, 그대로인 것 하나 달라진 것은 모이는 크기와 주제예요. 2005년에는 94개 기관·단체가 한 가지 현안을 놓고 모였고, 2025년에는 127개 기관·단체가 "인천사랑 범시민네트워크"로 모였어요. 주제도 인사와 화장실 같은 생활 습관에서 법원과 공항 같은 도시의 현안으로 넓어졌습니다. 그대로인 것은 ‘주인의식’이라는 낱말이에요. 2003년 우리는 이 운동을 ‘시민의 주인의식 갖기 운동’이라고 불렀고, 9년 뒤 183만 명의 서명을 마주한 범시민협의회도 같은 낱말을 골랐습니다. (출처: 「인천사랑 시민운동 종합추진계획안」 19쪽, 「[2012] 인천 재정위기 극복 서명운동에 183만명 동참」 2쪽) 오늘 인천을 위해 한 일이 하나 있다면 무엇인가요? 거창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2003년의 계획서도 작은 일부터 찾아서 하는 실천이면 된다고 했으니까요. 집에 그때의 서명 용지나 전단, 사진이 남아 있다면 아카이브의 ‘기록 기증’으로 알려 주세요.

  • 문학산을 다시 부르다

    문학산 역사공원화 운동

    인천의 발상지, 문학산을 다시 부르다 2005 ~ 2006 문학산 역사공원화 운동의 기록   문학산 정상 출처 -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공공누리(https://www.kogl.or.kr/recommend/recommendDivView.do?oc=&recommendIdx=177634&division=img)] 문학산은 ‘인천의 발상지’로 불리는 산이에요. 하지만 2005년 당시 이 산의 정상은 군부대가 위치하고 있어 시민이 올라갈 수 없었고, 산자락은 고속도로와 터널, 경기장 공사로 곳곳이 훼손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는 이 산을 ‘역사공원’으로 가꾸자는 운동을 벌였어요. 학계에 묻고, 시민에게 묻고, 시에 건의하기까지 — 그 과정을 우리가 남긴 기록으로 되짚어 봅니다. 2005. 6 학술 심포지엄 2005. 11 시민공청회·설명회 2006. 1 시장에게 건의서 전달 2015. 10 정상 개방 왜 ‘인천의 발상지’일까 ‘발상지’는 무언가가 처음 시작된 곳을 말해요. 문학산이 인천이 시작된 곳으로 불리는 까닭을, 우리가 심포지엄과 설명회 자료집, 건의서에 정리해 둔 내용으로 모아 보면 크게 세 가지예요. 1 인천의 옛 이름, 미추홀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소성현은 본래 고구려 매소홀현이다. … 지금은 인주이다(… 매소는 미추라고도 쓴다)”라는 기록이 있어요. 여기서 인주는 지금의 인천이에요. 그래서 인천은 고구려 때 매소홀 또는 미추홀로 불렸다고 봅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를 세운 온조의 형 비류가 바로 이 미추홀에 자리를 잡았다고 나와요. (출처:「학술심포지엄 자료집」 18쪽 ·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조) 2 비류와 이어져 온 문학산성 인천 안에서도 비류의 중심지로 주목받아 온 곳이 문학산 일대예요. 조선 초 『세종실록』 지리지부터 문학산성을 비류와 관련된 유적으로 꼽았고, 이후 『동사강목』·『여지도서』·『경기읍지』도 이 산성을 ‘비류성’으로 여겼어요. 산 주변에는 비류가 미추홀을 세운 뒤 쓰던 우물이라 전하는 ‘백제우물’도 있고, 『인천읍지』에는 문학산에 미추홀왕릉이 있다고 적혀 있어요. (출처:「학술심포지엄 자료집」 18쪽 · 「문학산 역사공원 설명회 자료집」 11·16쪽) 3 오랫동안 인천 고을의 중심 이 일대는 고구려의 매소홀현, 신라의 소성현, 고려의 경원군·인주·경원부를 거쳐 조선의 인천도호부에 이르기까지 인천의 행정·문화·생활의 중심지였어요. 우리는 건의서에서 이 일대의 지정문화재로 인천도호부 청사(시 유형문화재 제1호), 인천향교(시 유형문화재 제11호), 문학산성(시 기념물 제1호) 등을 꼽았어요. 1883년 개항 이후 인천의 중심이 옮겨 가면서, 이 일대는 점차 도시의 변두리가 됐습니다. (출처:「문학산 역사공원사업」 3쪽 · 「문학산 역사공원 추진 건의서」 3쪽) 다만 문학산에서 미추홀을 직접 증명하는 유적이 발굴된 것은 아니에요. 우리도 설명회 자료집에서 『인천읍지』의 미추홀왕릉 기록을 소개하며 “이를 확증할 발굴자료가 없어 앞으로 구체적인 고고학적 연구를 통한 발굴조사가 필요하다”고 적었어요. 이 숙제는 아래 심포지엄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출처:「문학산 역사공원 설명회 자료집」 16쪽) 건의서에는 여기에 더해, 임진왜란 때 인천부사 김민선이 문학산 전투에서 왜군을 물리친 곳이라는 점도 문학산의 중요한 역사로 함께 담았어요. (출처:「문학산 역사공원 추진 건의서」 3쪽) 정상에 오를 수 없던 산 (2005) 그렇다면 당시 문학산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그해 11월 우리가 연 시민공청회에서, 조우 교수는 ‘문학산 자연환경 보전 방안’을 발표하며 당시의 문학산을 이렇게 전했어요. “해방후 군부대가 주둔하여 산 정상을 기지로 사용하면서 각종 유적지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 시민들은 정상부 출입을 할 수 없어 이용에 불편을 초래하고 있다.” (출처:「문학산 시민공청회 자료집」 47쪽) ‘인천의 발상지’로 불리는 산인데, 정작 시민은 그 정상에 오를 수 없었던 거예요. 우리는 2004년 12월 ‘문학산역사공원 만들기 추진위원회’를 꾸렸고, 2005년 5월에는 남구청과 남구의제21의 공동 주최로 문학산 포럼이 두 차례 열렸어요. (출처:「인천사랑운동 연혁」 · 「문학산 역사공원 설명회 자료집」 9쪽) 학계에 묻다 (2005. 6) 2005년 6월 22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실에서 ‘백제건국기의 인천’을 주제로 한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습니다. 우리는 백제사 관련 연구자 10명을 초청해 기조강연과 주제발표, 토론을 맡겼고, 1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5시간에 걸쳐 진행됐어요. (출처:「문학산 학술심포지엄 결과보고서」 3·5쪽 · 「학술심포지엄 자료집」 1쪽) 문학산 시민공청회 현장사진 심포지엄을 마친 뒤, 우리는 결과보고서에 종합의견을 세 가지로 정리했어요. 하나. 비류가 개국한 미추홀은 인천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둘. 백제 관련 유물의 출토 빈도가 가장 높은 문학산 일대를 발굴·조사해야 한다. 셋. 백제 유물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행정적인 보호 조치가 필요하다. (출처:「문학산 학술심포지엄 결과보고서」 5쪽) 보고서에는 그동안 이 문제에 다른 의견이 있었던 까닭도 함께 적어 두었어요. 문헌 기록을 뒷받침할 유적과 유물이 충분히 발굴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토론에서도 서울역사박물관 김기섭 전문위원이 “인천지역에서는 아직 정치체의 성립·유지를 입증할 만한 유적이 발견되었다고 보기 어렵다”며 신중한 의견을 냈고, 다음 날 인천일보는 ‘문학산 일대 발굴유적 보호를’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고고학적 연구 백지상태…학술 조사 시급’이라고 전했습니다. 결국 심포지엄이 남긴 숙제는 문학산을 제대로 조사하고, 더 훼손되지 않게 지키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우리는 다음 계획으로 시민 공청회 개최, 시민단체 중심의 서명운동, 시에 대한 건의를 보고서에 적어 두었어요. 공청회는 계획(9월경)보다 늦은 11월에 열렸고, 이듬해 1월 건의서가 시장에게 전달됩니다. (출처:「문학산 학술심포지엄 결과보고서」 3·5·8쪽 · 「인천일보」 2005. 6. 23. 17면) 시민에게 묻고, 알리다 (2005. 10~11) 10월 12일 공동대표 회의에서 역사공원화 사업과 공청회 추진을 논의했고, 14일에는 공청회 추진위원회를 꾸렸어요. 이어 500개 단체에 의견 수렴안을 보내 25일에 답을 거둬들였습니다. 같은 25일에는 안상수 인천시장을 만나 사업에 대한 시의 협조를 당부했고, 이튿날인 26일에는 우리가 마련한 역사공원화 방안이 신문에 보도됐어요. (출처:「문학산 역사공원사업」 1·6쪽 · 「문학산 역사공원 설명회 자료집」 9쪽 · 「경기일보」 2005. 11. 17. · 「서울경제」 2005. 10. 26.) 그리고 11월 18일, 인천종합문화예술회관 국제회의실에서 시민공청회가 열렸습니다. 가톨릭환경연대, 시립인천학연구원, 인천향토문화사학회, 인천시립박물관, 함께그린 남구의제21이 주관을 맡았고, 세 사람이 주제 발표를 했어요. 역사유적 김성태 (기전문화재연구원) 발굴조사가 시급한 유적지 10곳을 추려 제시하고, 문학산 일대에서 공사 전 지표조사를 의무로 하는 제도를 명문화하자고 주장 지표조사: 땅을 파지 않고 땅 위에 드러난 유물과 지형을 살펴 유적이 있는지 확인하는 조사 기념관·조형물 이현식 (인천문화재단) 관문도시 인천에 걸맞은 ‘문(門)’ 조형물을 세우자고 제안하고, 조형물과 사료관을 시민 참여로 만들어 가자고 강조 자연환경 조우 (상지대) 수도권 도시지역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피나무 군집을 철저히 보호하고, 등산로 복원을 위해 샛길 등산로를 막자고 제안 (출처:「문학산 시민공청회 자료집」 1·10·31·43·65·66쪽) 닷새 뒤인 11월 23일에는 인천로얄호텔 영빈관에서 설명회를 열어, 공청회 경과와 역사공원화 추진 사업을 보고했습니다. (출처:「문학산 역사공원 설명회 자료집」 1·5쪽) 문학산 시민공청회 현장사진 문학산 역사공원 설명회 현장사진 시에 건의하다 (2006. 1) 2006년 1월 18일, 우리는 ‘인천의 발상지 문학산 역사공원화 추진 건의서’를 안상수 인천시장에게 전달합니다. 건의 사항은 세 가지였어요. 1. 인천의 발상지 문학산을 역사공원으로 지정해, 인천의 역사적 정체성을 바로잡는다. 2. 문학산 역사공원화 사업이 빨리 추진될 수 있도록 구체적인 대책을 마련한다. 3. 시민의 관심과 참여, 지혜를 모으는 범시민적 사업이 되도록 한다. (출처:「문학산 역사공원 추진 건의서(2006. 1. 18)」 2쪽) 문학산 역사공원 추진 건의서 제출 사진 건의서 제출 — 민선 3기 안상수 시장과 인천 시민단체장들 (2006. 1. 18) 우리 아카이브에 남아 있는 건의서 자료에는 ‘문학산 역사공원화 서명 현황’도 함께 들어 있어요. 기관단체장부터 경제·교육·여성·언론·종교·문화예술·향토사학계, 시민단체까지 모두 125명이 이름을 올렸습니다. 문학산 역사공원화 서명 현황 (총 125명) 시민단체 53명 교육계 18명 기관단체장 10명 문화예술계 10명 경제계 9명 종교계 8명 여성계 7명 언론계 6명 향토사학계 4명 기관단체장: 국회의원, 구청장, 구의회 의원 등  (출처:「문학산 역사공원 추진 건의서」 19~21쪽) 우리가 건의서에 그린 역사공원은 문학산 전체를 공원으로 지정하고, 그 안을 세 구역으로 나눠 가꾸는 모습이었어요. 문화유적지 유적 조사·발굴과 복원, 사적지 표지석, 조형물과 역사교육관 수림녹지 생태공원 피나무 군집 보존, 계곡 습지 복원, 생태관찰로 생활체육시설 공원 쉼터와 관망대, 등산로 복원, 생활체육 공간 (출처:「문학산 역사공원 추진 건의서」 5~7쪽) 건의서의 구체 계획에는 우리가 복원하자고 제안한 곳들도 담았어요. 이 목록을 보면 문학산에 무엇이 있었고, 무엇이 사라졌는지가 함께 보입니다. 삼호현 백제 사신들이 중국으로 가는 배를 타기 전 마지막 작별을 나누던 옛 고개 고인돌 훼손되고 사라져 3기만 남았는데, 그마저 제자리를 잃고 방치된 선사 유적 안관당 김민선 부사를 기려 인천 부민들이 200여 년간 제를 올렸지만, 근대에 들어 끊긴 사당 학산서원 1708년 완성돼 인천의 인재를 기른 서원. 문학터널 공사로 터의 자취마저 사라짐 문학산성 복원은 현실적으로 어렵지만 “언젠가는 인천시민의 품으로 되돌아 와야 할” 곳이라며, 장기적인 복원 준비를 제안 (출처:「문학산 역사공원 추진 건의서」 12~14쪽) 그리고 10년 뒤 (2015) 문학산 정상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닫혀 있었어요. 우리가 모아 둔 2015년의 신문 기사들을 보면, 정상이 열리기까지의 마지막 몇 달이 보여요. 6월 29일에는 인천시가 군 당국과 정상부 개방을 협의하고 있다는 기사가, 7월 31일에는 시와 국방부가 개방에 합의해 10월에 정상을 연다는 기사가 신문 1면에 실렸어요. (출처:「연합뉴스」 2015. 6. 29. · 「경인일보」 2015. 7. 31. 1면) 그리고 2015년 10월 15일, 제51회 인천시민의 날에 문학산 정상부가 시민에게 열렸습니다. 이때 먼저 열린 곳은 정상부의 일부였고, 나머지 구역은 이듬해 상반기까지 추가로 열 계획이었어요. 그날 아침 동아일보는 ‘문학산 정상, 50년만에 시민품으로’라는 제목으로, 시민 700여 명이 정상까지 걸어 오르는 길놀이와 ‘문학산 정상 개방 고유제’ 등 이날의 행사 계획을 전했어요. 고유제(告由祭)는 중요한 일을 조상에게 알리는 제례예요. (출처:「동아일보」 2015. 10. 15. · 「오마이뉴스」 2015. 10. 16.) 문학산정상개방고유제포스터 문학산 정상 개방 고유제 포스터 (2015) 문학산 정상 개방을 우리 운동 하나의 결과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개방은 인천시와 군 당국의 협의로 추진됐으며, 지역 시민단체들 역시 개방이 필요성을 제기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남긴 2005년의 기록들은, 정상에 오를 수 없던 문학산을 ‘인천의 발상지’로 다시 불러내려던 시민들의 목소리가 그때 분명히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출처:「연합뉴스」 2015. 6. 29.) 학계에 묻고, 시민에게 묻고, 시에 건의하기까지, 우리가 함께한 문학산 역사공원화 운동은 자료집과 회의자료, 사진과 125명의 서명으로 남았습니다. 오늘 문학산 정상에 오르는 시민들과 함께 나누고 싶은 기록입니다.

  • 인천 바로알기

    이름 부자, 부평의 개명 변천사

    부평 사람, 인천 사람 따로 있나    "나는 부평 사람이지, 인천 사람이 아니다."     30~40여 년 전만 해도 부평 토박이들 사이에서 흔히 나오던 말이에요. 실제로 부평은 아주 오랫동안 인천과는 다른 행정구역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오히려 부평이 인천보다 훨씬 큰 고을이어서, 『세종실록지리지』를 보면 부평도호부가 인천, 해풍, 김포, 교동, 양천, 통진까지 거느린 기록이 나올 정도예요. 인천의 남쪽 동네와 부평을 택시로 오갈 때 '시외' 취급을 받아 할증요금을 더 냈다는 이야기, 간석오거리에서 동암역을 지나 서울로 향하는 국도변의 '원통이고개'가 두 지역의 경계로 여겨졌다는 이야기도 전해질 정도로, 이 정서는 꽤 뿌리 깊었습니다.   (작자미상, 18세기)에 나타난 부평부와 인천부.  부평부는 현재의 부평구·계양구·서구 일대, 인천부는 미추홀구·연수구·남동구를 포함한다.  부평부 지도 상부에는 옛 지명인 '수주·안남·계양·길주·장제'가 기입되어 있다. 오른쪽 여백에는 도성(한성부)까지의 거리를 반나절(半日), 하루(一日) 등으로 표시했다.  (이미지 출처: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부평이 인천에 완전히 편입된 건 일제강점기인 1930~1940년대의 일이에요. '부평(富平)'이라는 이름이 붙기까지, 이 땅은 무려 여섯 번 넘게 이름을 바꿔왔어요. 주부토군에서 장제군으로, 수주로, 안남도호부로, 계양도호부로, 길주목으로, 그리고 마지막에 부평으로. 이름이 바뀔 때마다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요?      주부토 → 장제군 → 수주 → 안남도호부 → 계양도호부 → 길주목 → 부평      1. 주부토군에서 수주까지 — '임금의 땅'이라 불린 사연 부평의 가장 오래된 이름은 삼국시대 고구려의 '주부토군(主夫吐郡)'이에요. 『삼국사기』에는 이 이름이 통일신라 경덕왕 때 '장제군(長堤郡)'으로 바뀌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장제군(長堤郡)은 본래 고구려(高句麗) 주부토군(主夫吐郡)이었는데, 경덕왕(景德王)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은 수주(樹州)이다. 거느리는 현(領縣)은 4개이다." ― 『삼국사기』본서 권35 잡지4 지리2 신라(新羅) 중   『삼국사기』(김부식, 1145,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본서 권35 잡지4 지리2 신라(新羅) 장제군 부분.  (이미지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그런데 이 '주부토'라는 이름, 한자 뜻 그대로 읽으면 도무지 해석이 안 돼요. 한글이 없던 시절이라 우리말 이름을 한자의 소리와 뜻을 빌려 표현했기 때문이에요. 이두나 향찰처럼요. 그래서 지금 한자 뜻으로 풀면 안 되고, 당시 어떤 우리말 소리를 나타내려 했는지를 따져봐야 합니다. 국어학자들이 가장 유력하게 보는 해석은 '주(主)'는 '님'이라는 뜻을 가진 고대어 '나마' 혹은 '니마'를 표현한 글자이고, '토(吐)'는 '터(땅)'를 뜻하는 말이라는 것이에요. 신라 향가 「서동요」에 나오는 "선화공주님은…"이라는 구절에서 '主'가 '님'으로 쓰인 것이 그 근거입니다. 이렇게 보면 '주부토'는 '주인의 땅' 또는 '임금의 땅' 정도의 뜻이 됩니다. 이후 경덕왕 때 이름이 '장제군'으로 바뀌는데, 여기서도 '장(長)'은 '주부'와 같이 '님'이라는 뜻으로, '제(堤)'는 역시 '땅'을 나타낸 글자로 해석돼요. 그러니 '장제' 역시 '임금의 땅'이라는 같은 뜻을 이어받은 셈이죠. 이 이름은 고려 초기인 940년에 다시 '수주(樹州)'로 바뀌는데, '수(樹)'가 '나마'라는 발음을, '주(州)'가 '땅'이라는 뜻을 나타낸 것으로 보면 이것 역시 '임금의 땅'이라는 뜻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2. 안남도호부와 계양도호부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와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라는 군사 행정기구의 이름을 갖게 됩니다.   *도호부(都護府):  국경 지역이나 군사적으로 중요한 곳에 설치해 군사 업무와 함께 행정 업무까지 함께 관할하게 한 관청. 고려와 조선 모두 지방을 통제하고 방어하기 위해 여러 곳에 도호부를 둠.   '안남'은 한자 뜻 그대로 풀면 "남쪽을 편안하게 다스린다"는 말이에요.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을 기준으로 남쪽에 있는 이 지역을 다스린다는 뜻이었죠. 그런데 이 이름, 사실은 중국에서 먼저 쓰던 이름을 빌려온 것일 가능성이 커요. 중국 당나라가 지금의 베트남 하노이 지역에 '안남도호부'를 두고 다스렸던 전례가 있거든요.    한편 언어학적으로는 조금 다르게 해석하기도 해요. '安(안)'을 임금이나 주인을 뜻하는 우리말 '아라'를 표현한 글자로 보고, '南(남)'은 '님'을 뜻하는 고대어 '나마'를 발음이 비슷한 한자로 옮긴 것으로 보는 거죠. 이렇게 보면 '안남도호부' 역시 '주인의 땅' 또는 '임금의 땅'이라는, 앞서 나온 이름들과 똑같은 뜻이 됩니다.   이후 이름이 바뀐 '계양도호부'는 '계양산'이라는 산 이름 때문에 생긴 이름이에요. 그런데 여기서 '계(桂)'자가 흥미롭습니다. 흔히 '계수나무가 많아서'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계수나무는 따뜻한 지역에서 자라는 나무라 이 산에 많았을 리 없어요. 언어학적으로는 '계(桂)'가 '높은 곳'을 뜻하는 옛말 '돌(달)'을 한자로 옮긴 것이라 봅니다. 산이니까 높은 곳이라는 뜻에서 이 글자를 쓴 거예요. 결국 계양이라는 이름 역시 '높은 곳(산)' 혹은 '높은 사람(임금)이 사는 땅'이라는 뜻으로 볼 수 있어, 앞선 이름들의 계보와 이어집니다.     3. 길주목에서 부평까지    고려 충렬왕 때 이 지역은 '길주목(吉州牧)'이라는 이름을 갖게 됩니다. 흔히 충렬왕이 이곳에 매 사육장을 만들어 사냥을 즐겼기에 '길(吉)한 땅'이라는 뜻으로 붙은 이름이라고 설명해요. 하지만 언어학적으로 보면 조금 다른 결론이 나옵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영동군은 본래 길동군이다", "영풍군은 본래 대곡군이다" 같은 기록을 비교해보면 '영(永)=길(吉)=대(大)'라는 관계가 성립하고, 여기서 '길(吉)'이 '크다'는 뜻을 가졌음을 알 수 있어요. 그러니 '길주'는 '큰 고을'이라는 뜻이 되는 거죠. 그리고 마침내 고려 충선왕 때인 1310년, 이 길주목이 '부평부(富平府)'로 이름을 바꾸면서 처음으로 '부평'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부평'에 대한 일반적인 해석은 "수확이 많은(富)넓은 들(平)"이라는 뜻이에요. 실제로 부평 일대에 넓은 평야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요. 하지만 옛 기록들을 살펴보면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 전까지도 바닷물이 밀려들어 오는 저지대였고, 곡식이 풍부하게 나는 땅이었다는 기록도 딱히 없습니다. 그러니 '풍요로운 들판'이라는 해석은 조금 의심스러워요. 그래서 언어학적으로는 다르게 봅니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강원도 김화군 기록을 보면 "부평군은 본래 고구려의 부여군인데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다. 지금의 김화현이다"라는 내용이 있어요. 이를 통해 '부(富)=금(金)'이라는 관계를 추론할 수 있는데, 땅 이름에서 '금'은 흔히 '신(神)'이나 '거룩한 존재'를 뜻하는 옛말 '금'을 한자로 옮긴 것이거든요. 그러니 부평의 '부(富)'도 이와 같은 뜻으로 볼 수 있고, 결국 '부평'은 '거룩한 땅', '높은 사람이 다스리는 땅' 정도로 해석됩니다. 앞서 나온 주부토, 장제, 수주, 안남, 계양의 뜻과 크게 다르지 않은 셈이에요. 이렇게 이름을 얻은 '부평'은 조선시대까지 도호부·현·부 등의 이름으로 계속 이어졌고, 일제강점기와 광복을 거치며 부평동, 부평구로 자리 잡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910년 측도, 1913년에 제판된 인천 지도(부분) 오른쪽 위에 경기도 내에 인천부, ​부평군, 안산군이 속해있다고 표시되어 있다. 1914년 부군면 통폐합으로 부평군은 부천군에 통합되었다.  (이미지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부평, 이름 변천 한눈에 보기 ―  이름은 바뀌어도 뜻은 하나    시기 이름 뜻 설명 삼국시대(고구려) 주부토군(主夫吐郡) 주인(임금)의 땅 주(主) = 님(나마) 토(吐) = 터(땅)  통일신라 경덕왕(757년) 장제군(長堤郡) 주인(임금)의 땅 장(長) = 님 제(堤) = 땅 고려 초(940년) 수주(樹州) 임금(님)의 땅 수소(樹蘇) 지역 호족 이희목이 태조 왕건에게 귀순하며 지역이 한 등급 올라 붙은 이름 고려(1018년경)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 남쪽을 다스리는 땅 / (언어학적으로) 임금의 땅 개경을 중심으로 사방에 둔 도호부 중 하나. 중국 당나라의 '안남도호부' 명칭을 본떴을 가능성도 있음 고려(시기 미상) 계양도호부(桂陽都護府) 높은 곳(산)의 땅 계양산 이름에서 유래.  계(桂) = 돌/달(높은 곳) 고려 충렬왕 때 길주목(吉州牧) 큰 고을 길(吉) = 크다  고려 충선왕(1310년) 부평부(富平府) 거룩한 땅 / (일반적으로) 풍요로운 들판 부(富)=금(金)  '신성한 땅'이라는 해석이 유력. '수확 많은 넓은 들'이라는 통설도 있음 일제강점기~현재 부평(富平) (위와 동일) 1914년 부천군에 편입 →  1936·1940년 인천부로 재편입 → 1968년 북구 부평동 → 1995년 부평구           *이 기록콘텐츠는 최재용 저 『주부토는 신성한 땅: 인천, 그 이름에  얽힌 역사Ⅱ』(사)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 2025)의 'Intro'와 '부평'을 AI로 요약·재구성한 뒤 아키비스트가 검수하고 원본 기록물을 첨부한 것입니다.   

  • 인천사랑 아카데미

    인천사랑운동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

    인천사랑 운동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인천사랑 지도자아카데미 1기 단체사진    2002  |  아카데미를 열었다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가 정식으로 창립총회를 연 것은 2003년 5월입니다.  ‘인천사랑 지도자아카데미’는 그보다 한 해 앞선 2002년에 먼저 문을 열었어요.  운동은 이렇게, 번듯한 간판이 아니라 강의실에서 시작됐습니다.     2005년 인천사랑운동지도자 아카데미 교육-전일과정. 3일 간의 교육은 이론강의, 토론, 워크샵, 현장답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출처: 「2005 인천사랑 지도자아카데미 종합보고서」 12쪽)     2003  |  첫해부터, 불씨를 지피다 출범과 함께 아카데미는 쉼 없이 기수를 이어갔습니다. 초기부터 여러 기수가 잇달아 문을 열었고, 당시 한 언론은 그 열기를 이렇게 표현했어요.   “지도자아카데미를 통해 불씨를 지피다” ― 인천일보 2003년 1월 21일자 17면 기사 제목 중    [2002] 인천사랑운동 불 지핀다 [2003] 지도자 아카데미 통해 불씨 지펴     인천사랑 지도자아카데미 초기 기수 단체사진 (2~7기) 2기 3기 4기 5기 6기 7기    그저 강의를 듣고 끝나는 자리가 아니었어요. 수강생들은 분과별 토론을 벌였고, 심화과정을 거쳐 각자의 생활 현장으로 흩어졌습니다. 이들이 바로, 인천사랑을 가르치고 퍼뜨릴 ‘지도자’였습니다.     2002~2009  |  81번의 아카데미, 2,671명 그리고 이 열기는 한두 해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아카데미는 2009년까지 기수를 거듭해, 81기에 이르렀어요. 처음 문을 연 뒤 8년 동안, 이 아카데는 이렇게 성장했습니다.   2002 ~ 2009  ·  총 81회 개최  ·  2,671명 수료    인천을 사랑하고 그 마음을 이웃에게 전할 준비가 된 사람이 2,671명 — 이 강의실을 거쳐 인천 곳곳으로 흩어졌다는 뜻이니까요.   제79기 인천사랑 지도자아카데미 (2009. 11. 20) (출처: (사)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 「인천사랑지도자아카데미 종합보고서」 66쪽)    배운 것을, 실천으로 — 네 개의 모임이 태어나다 이 아카데에서 가장 인상적인 변화는, 배움이 정말로 실천으로 이어졌다는 점이에요. 수료자들은 교육을 통해 인천에 대한 자부심을 키웠고,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한 번 배우고 끝낼 게 아니라, 꾸준히 인천사랑을 실천하자는 데 마음을 모은 거죠.   이야기는 강의실 안에만 머물지 않았어요. 인천의 정체성과 애향심은 물론 환경, 교통질서, 아파트 공동체까지 다양한 주제로 분과토의를 이어가며, ‘거창한 일보다, 내가 살아가는 일상에서 작은 것부터 실천하자’는 공감대가 만들어졌습니다. 관심은 자연스럽게 나 자신에서 이웃과 공동체로 넓어졌고요.   그리고 그 마음은 곧 행동이 됐습니다. 수료자들은 ‘인천사랑을 좀 더 구체적으로 실천해보자’며 스스로 동호회 활동을 제안했고, 관심사가 비슷한 시민들이 모여 네 개의 실천 모임을 꾸렸어요.   인천바로알기  ·  생활환경가꾸기  ·  아파트문화가꾸기  ·  교통문화가꾸기    배운 것을 함께 나누고, 생활 속 작은 행동으로 옮기고, 다시 이웃과 지역사회로 퍼뜨리는 것. 아카데미는 이렇게 교육을 넘어, 시민들이 스스로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2016  |  그리고, 인천사랑 아카데미로 이어지다 지도자아카데미가 2009년 막을 내린 뒤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어요. 2016년, 인천사랑운동은 이 대표적인 시민 실천 운동을 계승하고 한 단계 발전시킨 ‘인천사랑 아카데미’ 제1기를 열었습니다.   2016 인천사랑아카데미 강좌안내 인천사랑운동 ? 지역을 깊이 이해하는 '배움', 내 삶의 터전에서 작은 것부터 시작하는 '일상의 실천', 그리고 뜻을 함께하는 이웃들과 모여 지역사회 전체로 '퍼뜨리는 과정' 그 자체입니다. 강의실에서 피어오른 작은 불씨가 시민 각자의 삶 현장에서 실천으로 이어질 때, 인천사랑 운동은 지속 가능한 시민 운동으로 완성됩니다.

  • 인천사랑운동의 시작

    인천사랑운동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 설립 과정    제안 →  연구 →의견 수렴 (공청회)→ 조례 제정→협의회 구성→사업 계획 수립      인천사랑운동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게 아니에요. 하나의 제안에서 출발해 연구와 시민 의견 수렴, 조례 제정, 협의회 구성까지 여러 단계를 차근차근 밟으며 기틀을 다졌습니다. 2001년의 제안에서 2004년 본격적인 사업 전개의 과정을, 남아 있는 기록으로 하나씩 따라가 봅니다.   운동 방향 연구와 교육 기틀 마련 (2001~2002) 이야기의 출발은 2001년 12월로 거슬러 갑니다. 제2건국범국민추진위원회(김대중 대통령 직속 범국민 운동 기구)가 인천에 ‘인천사랑운동’을 제안하면서 첫 단추가 끼워졌죠. 먼저 운동의 목표와 방향부터 정하기로 하고, 인천발전연구원에 연구를 맡겼습니다. 연구원에서 제시한 인천사랑운동의 지향과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천사랑운동의 지향과 원칙 ✅애향심과 주체성 ✅시민의, 시민을 위한 운동 ✅탈정치적 자율성 ✅지속성과 안정성    또한 시민이 참여하는 인천사랑운동이 되기 위해서, '(가칭)인천사랑운동 시민협의회'를 조직할 것을 제안했습니다. 운동의 방향을 준비하는 한편, 운동에 참여할 사람을 기르는 일도 함께 시작했어요. 바로 2002년에 개설한 '인천사랑 지도자아카데미'입니다. 수강생 모집 공고가 동네 반상회보에까지 실릴 만큼, 시민들 곁에 다가가며 출발했습니다.     인천사랑 지도자아카데미 강의 사진 시민 공청회와 조례 제정 (2002) 방향과 사람의 밑그림이 갖춰지자, 이번엔 시민의 목소리를 직접 듣기 위해, 2002년 7월에 열린 시민 공청회가 열렸습니다. 시민과 각계 전문가가 함께 모인 자리에서, 안상수 인천시장은 "인천사랑 시민운동은 모든 시민들이 주인의식을 가지고 참여하는 민간주도 운동으로서 범시민운동으로 정착되어야 할 운동"임을 강조했습니다.   인천사랑 범시민운동 전개 시민공청회 (2002. 7)    4개월 뒤 인천사랑운동조직의 설립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인천사랑운동실천지원조례」(인천광역시조례 제3638호, 2002.11.25.)가 제정되었습니다.   인천사랑운동실천 지원조례(3638)    협의회 창립과 사업 추진 (2003~2004) 제도적 기반을 갖춘 후, 본격적으로 운동을 이끌 민간 협의회를 구성했어요. 2003년 1월 창립준비단, 4월 발기인대회, 5월 창립총회가 이어졌고, 참여단체는 발기인대회 때 80여 개로 시작해서 창립총회에 이르러 97개로 늘었어요. 그렇게 '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가 정식으로 출범했습니다. 👏🎉     인천사랑운동 창립총회 사진   ○ 참여단체 명단 ○ (총 97단체) (사)인천광역시 여성단체협의회, (사)6.25참전전우 기념사업회 남구지회, (사)가천 미추홀 청소년봉사단, (사)교육을 사랑하는 사람들21, (사)대한노인회 인천광역시연합회, (사)대한어머니회 인천광역시연합회, (사)열린문화 진흥회 인천지부, (사)인천 지체장애인협회 연수구지회, (사)인천광역시 정신지체인애호협회, (사)인천광역시 지방행정동우회, (사)인천광역시의정회, (사)인천시민자원봉사회, (사)인천장애인 단체 총연합회, (사)자연보호중앙회 인천서구협의회, (사)한국국악협회 인천광역시지부, (사)한국사진작가협회 인천광역시지회, (사)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인천광역시연합회, (사)한국유격군 백호부대전우회, (사)해병대전우회 인천광역시 남동구회, (사)해병대전우회 인천광역시남회, (사)환경보호 국민운동 부평구지회, (재)가천문화재단, (주)신세계백화점인천점“늘 푸른 청량산 가꾸는 사람”, (주)코아 사무용가구, 21C강화발전 협의회, 6.25참전전우 기념사업회 인천광역시지부, 6.25참전전우 기념사업회연수지구회, YWCA, 감리교 사회연대, 감리교사회복지선교회, 강화군 농업경영인 연합회, 농협인천지역본부, 대한민국 상이군경회 인천광역시지부, 대한전문건설인협회 인천광역시회, 동인천상공회의소, 민족통일 인천광역시 중구협의회, 민족통일 인천광역시 협의회, 바르게살기 남동구 협의회, 바르게살기 운동협회 주안3동 위원회, 바르게살기운동 숭의1동위원회, 바르게 살기운동협의회 인천광역시지회, 부평문화원, 부평청년회의소, 비씨카드(주)인천지점   사랑의 네트워크, 사회복지법인 모퉁이복지재단, 사회복지법인 해망복지재단 인천지부, 새날을 여는 사람들, 새마을운동 인천광역시 계양구지회, 새얼문화재단, 서인천상공회의소, 숭의4동 바르게 살기위원회, 연수구 발전협의회, 오병이어선교회, 월드컵병아리예술단, 의료법인 인천사랑병원, 인천 교육대학교 총동문회 인천지역회, 인천 인성개발연구원, 인천경영포럼, 인천계양상공회의소, 인천광역시 동구 노인봉사대협의회, 인천광역시 사회복지협의회, 인천광역시 새마을회, 인천광역시 음악협회, 인천광역시 인쇄정보산업협동조합, 인천광역시 축구협회, 인천광역시 학원연합회, 인천상공회의소, 인천기독교 윤리실천운동, 인천기독교 직장선교연합회, 인천기독교청년회(YMCA), 인천남동상공회의소, 인천녹색소비자연대, 인천바다 시낭송회, 인천서부청년회의소, 인천여성단체협의회, 인천여성문학인회, 인천여성문화회, 인천연수청년회의소, 인천예절원, 인천예총 미추홀문화회관, 인천일보사, 인천전문대 총동문회, 인천지구황해도민회, 인천지체장애인 협회 중구지회, 인천청년회의소(JC), 친환경생활 국민운동 인천광역시본부, 통일여성협의회 인천광역시지부, 학익1동 바르게 살기위원회, 한국무용협회 인천광역시지회, 한국아마추어무선연맹 인천지부, 한국음식업중앙회 인천광역시지회, 한국자유총연맹 인천광역시지부, 한국자유총연맹 인천광역시지회, 한국전력 인천지사 여직원회(인향회), 한국청소년 인천광역시 연맹, 한국OB인천지회 부설 iTV경인방송 유소년축구, 한미은행 경인영업본부        그리고, 그해 8월 첫 소식지 『인천사랑 이야기』 창간호가 발간됩니다. 협의회가 스스로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한 출발점이지요. 인천사랑 이야기 창간호 (2003. 8)   "인천사랑운동의 정신 정체성 - 나는 인천 사람이다. 주인의식 - 내가 인천의 주인이다. 시민화합 - 나부터 마음을 열고 나누며 하나되자."   ―인천사랑 이야기 창간호 중―    이어서 종합추진계획과 연차별 사업계획서도 마련됐어요. 이를 바탕으로 건강걷기대회, 생활문화 캠페인, 지도자 양성 같은 구체적인 사업들이 본격적으로 펼쳐졌고, 일부 사업들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천사랑 시민운동 종합추진계획안 제안에서 연구와 교육으로, 공청회와 조례로, 다시 협의회 창립과 사업으로 — 인천사랑운동의 시작은 이렇게 한 단계씩 기틀을 다져 갔습니다. 지금 우리가 아카이브에서 보는 기록들에 그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 인천 바로알기

    인주(仁州)가 인천(仁川)이 된 사연

      비류 백제의 전설이 얽힌 유서깊은 도시  '인천'.  이 이름을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어진(仁) 내(川)'가 되는데요,  이 지명은 어떻게 생겨났을까요?       조선시대에 제작된 의 '인천부' 부분. 붉은 점은 인천도호부관아 위치이며 현재 미추홀구 관교동이다.  (출처: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태종 13년, 주州를 천川과 산山으로 고치다    사실 인천은 원래 '인주(仁州)'라고 불렸던 곳이에요. 인천이라는 이름은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처음 만들어졌지요. 이 해에 조정에서는 전국의 행정구역 이름을 대대적으로 새로 정하는 작업을 했어요.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26권, 태종 13년(영락(永樂) 11년) 10월 15일 신유 1번째 기사 지방 행정 구역의 명칭을 개정하다  ​(​​​​​원본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11책 26권 30장 A면)     "凡郡縣號帶州字者, 皆改以山字川字, 寧州改寧山, 衿州改衿川, 其例也。 무릇 군(郡)·현(縣)의 이름 가운데 주(州)자를 띤 것은 모두 산(山)자, 천(川)자로 고쳤으니,  영주(寧州)를 영산(寧山)으로 고치고, 금주(衿州)를 금천(衿川)으로 고친 것이 그 예이다." ―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26권, 태종 13년 10월 15일  신유 첫번째 기사 중         「조선왕조실록」 태종 13년 10월 15일자 기록을 보면, 태종이 하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전주를 완산부로 고쳤는데도 사람들이 여전히 전라도라고 부르고, 경주를 계림부로 고쳤는데도 여전히 경상도라고 부르니 이름을 다시 고치는 게 맞겠다"고요. 그러자 하륜이 "다른 지역 이름도 함께 정리하는 게 좋겠습니다" 하고 답했고, 태종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전국적인 지명 개편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었어요. 고을 이름에 '주(州)'자가 들어간 곳은 모두 '산(山)'자나 '천(川)'자로 바꾸기로 한 거예요. 물가에 가까운 고을에는 '천(川)'을, 산이 많은 고을에는 '산(山)'을 붙이는 방식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영주(寧州)는 영산(寧山)으로, 금주(衿州)는 금천(衿川)으로 바뀌었죠. 그리고 바로 이 원칙에 따라 바닷가에 있던 '인주(仁州)'가 '인천(仁川)'이 된 거예요. 인천시는 이 날, 즉 10월 15일을 '시민의 날'로 정해 기념하고 있답니다(태종 때는 음력을 사용했지만요.😅).      인주는 왜 '인주'였을까 — 왕비를 배출한 고을    그렇다면 인천의 원래 이름이었던 '인주(仁州)'는 어디서 온 이름일까요? 이걸 알려면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해요.   인주는 원래 고구려 때 매소홀현이라 불리던 곳이었고, 신라 경덕왕 때 소성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고려시대에 들어와 '인주'라는 이름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이름이 붙은 데는 특별한 사연이 있어요.   고려 문종부터 인종 임금까지, 무려 7대에 걸쳐 이곳에 살던 인주 이씨 집안이 왕의 외가이거나 왕비의 친정이 되었거든요. 이를 '7대 어향(七代御鄕)'이라고 부릅니다. 왕실과 인연이 깊은 특별한 고을이었기 때문에 '어질 인(仁)'자를 붙여 인주라 불렀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에요.   실제로 「고려사」에도 이곳이 황비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경원군, 경원부 등으로 높여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조선이 세워진 뒤, 정도전이 함경도 지역을 '경원부'라고 이름 붙이면서 원래 경원부였던 이곳은 다시 '인주'로 돌아가야 했어요. 고려 왕실과 친했던 고을이 조선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렇게 다시 인주로 불리다가, 태종 때 '인천'이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된 것입니다.      仁의 숨은 뜻 — 어진 고을? 큰 고을!   '인천(仁川)'을 한자 그대로 풀면 '어진 내'가 되는데, 냇물이 어질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일까요?   사실 '천(川)'은 원래의 '주(州)'자가 가진 뜻, 즉 '고을'이라는 의미를 그대로 이어받은 글자예요. 그러니 '냇물'이 아니라 '고을'로 봐야 합니다. '인(仁)'이라는 글자는 '어질 인'으로 읽히죠. 그래서 인천은 흔히 '어진 고을'이라고 풀이됩니다. 그런데 여기에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仁'이라는 글자가 우리 중세 국어에서는 '어질다'가 아니라 '크다'는 뜻으로 쓰였다는 근거가 있거든요. 조선 중종 때 최세진이 지은 한자 학습서 「훈몽자회」를 보면, '仁'을 '클 인'이라고 풀이해 놓았습니다. 반면 진짜 '어질다'는 뜻을 가진 '賢'자는 '어딜(어질) 현'이라고 따로 풀이해 놓았어요. 즉 당시 사람들은 '仁'과 '어질다'를 곧바로 연결 짓지 않았다는 뜻이에요. 이렇게 보면 인천은 '어진 고을'이 아니라, '여러 왕비를 배출한 덕망 있는 큰 고을'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게 더 타당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덕망이 있는 사람을 두고 '큰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처럼요. '어진 고을'이라는 해석이 완전히 틀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글자의 옛 뜻과 어감을 생각하면 '큰 고을'이라는 풀이가 조금 더 설득력 있어 보입니다. 인천은, 결국 '큰 고을'입니다. 🤗    *이 기록콘텐츠는 최재용 저 『미추홀은 물골이다: 인천, 그 이름에  얽힌 역사』(사)인천사랑운동시민협의회, 2020)의 'Intro' 를 AI로 요약·재구성한 뒤 아키비스트가 검수하고 원본 기록물을 첨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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