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물길
“지금의 나를 만들어 온 것들” _박병상
양지원
게시일 2021.10.22  | 최종수정일 2022.08.25

지금의 나를 만들어 온 것들

 
 




구술자 : 박병상 (63, 1960년대 주안동 거주
 
- 채록일 : 20191018() 오후6 
- 채록자 : 남희현 
- 채록 장소 : 학산지속발전협의회 

 




이 동네에서 그런 기억이 나요. 정월 대보름에 어느
집이었는데 울타리가 나무 판자였어요. 그걸 잘라서
쥐불놀이를 했지요. 아주머니가 화가 나서 막 나오는데
다 도망가잖아요. 난 안 도망갔어요. 그럼 쥐불놀이 한
애들 어디 있냐고 물어봐요. 그럼 나는 다른 방향 알려주고.
나는 장난기 있어 보이지 않으니까 그런 적이 있어요.
거기가 밭이었고, 그게 주안사거리 쪽이지요. 논과 밭이
섞여 있었고, 개울이 있었고 물이 늘 흘렀어요. 폭이
50cm 되려나. 깊이는 1m도 안 되는데, 개구리도 많았어요.
그 물길이 아래로 내려갔지요. 비가 오면 늘 물이 고이고 그랬으니까.”

 

 

선생님 소개 부탁드립니다
저는 박병상입니다. 나이는 우리 나이로 63세입니다. 대학에서 환경 관련 강의도 하고 글을 씁니다. 미추홀구에서 자랐어요, 제 첫 기억이 있는 곳이니까요. 주안사거리. 농협 있는 쪽 그 언저리에 살았어요. 주안감리교회가 있는 데니까. 지금의 국제성서박물관이 주안감리교회 자리예요. 여기 집이 있었고, 아버지가 길 건너에서 약국을 했어요나중에 약국을 옮기기는 했는데 내 첫 기억이 거기에 있어요. 그때의 주안사거리, 예전에 수도국이 있고 그 언저리에서 살았지요.

여기가 전부 길 건너 쪽은 밭이었고, 교회 옆에는 논이 좀 있었어요. 그때의 교회는 동네마다 작은, 요즘 작은 교회는 건물 위에 있던데, 예전 그 교회에 1백명정도 들어가려나? 조그만 시골 교회였어 요. 60년대 초였어요. 돌아다니며 놀 때였으니까 초등학교 가기 전의 그 시절이죠. 이 일대에서 많이 놀았지요. 꼬맹이들에게 석바위 쪽도 멀다고 생각했고, 가끔 가던 신기촌 쪽은 논이었고요. 승기천에서 나온, 논마다 물 웅덩이가 있어서 빗물을 모아 놓았던 거겠지만 이 길이 복개한 거잖아요.

겨울에 스케이트 타고 놀았어요. 겨울에 솜씨 좋은 사람들이 논에 얼음을 깨면 물이 늘 있었고, 그걸 퍼다 가죽 뿌려서 큰 링크를 만들었고 건장한 사람들이 스피드 스케이트를 타면 우리 같은 아이들은 뒤뚱거리며 가운데서 놀았지요. 스케이트 날가는 사람들, ‘야끼만두라는 얇은 만두를 파는 사람도 있고, 당시 논 어느 곳이든 얼음을 깨서 물을 퍼서 뿌리면 다시 얼지요. 빙질이 요즘 같지는 않겠지만 꽤 컸어요.

시민회관 쪽 물웅덩이 말고, 작은 하천이라고 해야 하나? 조그마한 개울, 우리가 붕 뛰어서 건너기는 어려웠지만 개구리도 많았고, 논밭 사이로 작은 물길 같은 게 있었어요. 까마중도 많았어요. 작은 분꽃 씨 같은 크기의 포도 색깔 나는, 별로 맛도 없는데 다 먹고. 그걸로 개구리 잡는다고 그랬어요. 낚싯대에 껴서 개구리 앞에서 까부리는 거지. 개구리가 까마중을 보고 그런 게 아니라 앞에서 뭐가 알짱거리니까 물은 거지. 개구리가 많았고 개구리 잡는 건 일도 아니었지. 나는 얌전해서 같이 어울리긴 했어도 그거 잡는 거 보기만 하고, 친구들은 그걸 잡아서 패대기쳐서 닭 주거나 뒷다리 넓적다리 부분을 구워 먹기도 하고.

이 동네에서 그런 기억이 나요. 정월 대보름에 어느 집이었는데 울타리가 나무 판자였어요. 그걸 잘라서 쥐불놀이를 했지요. 아주머니가 화가 나서 막 나오는데 다 도망가잖아요. 난 안 도망갔어요. 지나가는 사람처럼. 그럼 쥐불놀이한 얘들 어디로 갔느냐고 물어봐요. 그럼 나는 다른 방향 알려주고 딴청을 하죠. 그러자 의심 없이 그쪽으로 달려가더군요. 나는 장난기 있어 보이지 않으니까 그랬나 봐요. 암튼 그런 적이 있어요. 거기가 밭이었고, 그게 주안사거리 쪽이지요논과 밭이 섞여 있었고, 개울이 있었고 물이 늘 흘렀어요. 폭이 50cm 되려나. 깊이는 1m도 안 되는데, 개구리도 많았어요. 그 물길이 아래로 내려갔지요. 비가 오면 늘 물이 고이고 그랬으니까.

어렸을때 본일인데,할머니한 분이 비 오는데 우산 쓰고 우리들 다가오지 못하게 하더군요. 빗물이 맨홀 뚜껑을 밀어내고 땅밑에서도 올라오니까 우리 꼬마들 빠지지 말라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이 물은 승기천 물은 아닐지 모르지만 농협에서 주안으로 가는 쪽은 언덕으로 좀 높으니까 흐르는 물이 있었어요. 길에 보도블록 같은게 없으니까 비 오면 장화 신고 다녀야 하고. 길 가장자리마다 소들이 끌고 다니는 똥마차라 해야 하나, 그런 게 흔했죠. 당시 밭 가장자리에 웅덩이를 파서 똥을 모아놓았지요. 가을 되면 삭으니까 김장 배추 심기 전에 뿌리고, 겨울 되면 또 거기에 눈도 쌓이고, 동네  개구쟁이들은  눈을 쓸어내 거기에 길을 내요. 길 가던 사람이 빠지기도 하고. 난 한 적은 없고, 친구들이 우리 삽으로 그걸 했는데 거기 빠진 사람이 화가 나가지고 삽을 가지고 가버렸지요. 난 삽만 빌려준건데. 장난꾸러기들이 거기 함정을 파기도 하고 장난치고 그러고 놀았지요. 지금처럼 학원 가지 않았으니까 다들 그러고 놀았어요. 그때 물이 흘렀던 거. 어디에나 모래가 있었고. 초등학교는 교대 부속초등학교(교대부국) 나왔어요. 걸어서 40분 걸렸으려나. 버스도 다녔어요. 3원 내고 다녔지요.

외삼촌이 살던 외갓집이 제물포 선인재단 쪽에 있었어요. 가던 길에 물길이 있었어요. 물가에 텐트 같은 건 아니고, 발 같은 걸 쳐놓고, 물가에 앉아 할머니들이랑 아주머니랑 이야기하던 기억이 있어요세 살이나 되었을까? 아주 어릴 적 어머니 따라서 외할아버지 댁에 갔던 기억이겠지요. 띄엄띄엄 기억이 나는데 나를 어머니가 데리고 가면 무릎에 앉아서 이야기를 듣던 기억이지요. 외삼촌댁에 가던 그 길이, 배성수(인천도시역사박물관)씨가 이야기하길 제물포에서 내려서 서울까지 괴나리 봇짐지고 가던 그 길이라고 하더라구요. 그럼 그 길에 물길이 있었어요. 그 언저리는 밭이 있었고. 개울이라 봐야 2~3m 폭이었고, 아이들이 종아리에 물을 담글 정도의 깊이는 되는 그런 물길이 있었어요. 시원하니까 자리 깔고 앉아있었던 거지요.

양장점 있으면 밤에 불을 켜놓잖아요. 그럼 땅강아지들을 다섯 살 아이 손으로 잡으면 네다섯 마리 잡고 그랬어요. 특별히 징그럽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영화 공간 주안 있는 시민회관 자리에 물웅덩이에서 물잠자리를 잡고, 노래 불렀던 기억이 나요. 작대기에 명주실을 매고. 묵찌빠 놀이를 양지바른 곳에서 하고 있으면 중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데 어떤 형이 학교 안가고 왕잠자리 두 마리 잡아서 싸움을 시키고 있거든요. 우리도 잡고 싶으니 부러웠죠. 왕잠자리는 빨라서 우린 못 잡았거든요. 불량끼가 있어 보이는데 용기를 내서 잡아달라고 했죠. 그러자 지금 생각하면 테니스라켓 같다고 해야겠는데, 굵은 철사로 두꺼운 테두리를 가진 채를 만들어서 대나무에 매달아 오라고 그래요. 얇은 철사를 사다가 꽁꽁 묶어서 테니스라켓 가장자리처럼 만들어가는 거죠. 그러면 온 동네 거미줄을 다 묻혀요. 집집마다 있는 거미줄을 묻혀서. 다가오는 왕잠자리를 휘둘러 잡는 게 아니에요. 야구선수가 가볍게 번트 하듯이 가져다 대는 거죠. 그럼 잠자리가 탁 붙어요. 그 형은 명주실 묶은 다른 작대기를 준비해  실을 잠자리 다리에 묶는 거죠. 그러더니 잡힌 왕잠자리 옆구리에 호박잎 암술을 옆구리에 비벼요. 그럼 옆구리가 분홍색으로 변하겠죠? 수컷은 하늘색 옆구리를 가졌는데 분홍색으로 변했으니  암컷처럼 보이는 거죠. 분홍으로 변한 왕잠자리가 묶인 작대기를  돌리면  다른 수컷이 딱 붙어요. 그 형이 잡아 떼려고 해도 여간해선 안 떨어져요. 그걸 떼어내면 두 마리의 왕잠자리를 잡는 거죠. 이제 왕잠자리 묶은 작대기가 두 개로 늘고, 두 개를 우리에게 나눠주죠, 우리가 분양받은 작대기를 휘두르면 또 딱 붙거든요. 그럼 네 마리가 되지요. 또 여덟 마리 되고, 그러면 우리 다 하나씩 가지는 거지요. 그럼 논두렁 돌면서 불렀던 노래가 있어요. ‘야모 이모하면서 놀았어요. 경기도 일대에서도 그러고 놀았다더군요. 밀잠자리는 흔했고, 고추잠자리는 귀찮았고. 정신이 빠진다고  잠자리 앞에서 손가락 돌리기도 하고. 물웅덩이에 각시붕어, 버들붕어, 묵납자루 같은 것들, 그때는 이름을 몰랐지만 많았어요. 미꾸라지 잡고, 논둑에 족대를 몰고 오면 찌그러진 주전자에 바글바글하게 잡기도 하고 그랬지요. 그거 가져가면 집에선 안 좋아했지요.
 
그때 생각하면 어떠세요?
그때 다 그러고 놀았으니까. 아련한데 내가 지금까지 생태적인 글을 쓰게 된 거, 개발, 발전, 매립 뭐 이런 거 별로 좋지 않게 본 건 그때 기억이 있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한 친구는 송림동에서 살았는데 중심지 사람들에 비해 살림살이가 쳐지는 사람들이 살았고 열등감, 분노, 아쉬움이 저변에 깔려 있는 부모들이 살았죠. 일제가 항만도 만들고 공장도 가동하고 일꾼으로 살았던 사람이 많았으니까 성공하려면 공부해야 하고 이런 게 많았겠지만 난 그런 게 별로 많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억지로 공부시키고 그랬지만.

아버지는 강화 분이었는데 집에 땅이 많았다고 해요. 큰아버지는 교토대 경제학부 나왔는데 그 어마어마한 땅을 다 팔고 다 쓰고 돌아가셨다고 그래요. 할머니가 우리 집에 계시다 나 스무 살 때 돌아가셨는데. 그때 94,   대학 1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그때 오신 친척들이 너네 집에 그렇게 돈이 많았다 그런 말을 했어요. 우린 몰랐는데 그 돈이 다 없어졌을까? 그때 좌파 지식인으로 돈을 가마니로 싸서 북으로 보냈다는 설이 있었대요. 아버지는 경성약전, 서울 대학교가 된 거죠. 아버지가 약사 번호가 100번 대니까. 내 동생이 공부를 좀 했죠. 난 숙제 생각나면 아무렇게나 1,2,3번 적어서 내고, 그러면 반 친구들이 아침에 그걸 또 베껴 적고. 베끼다 시간이 부족해 못 베끼는 놈. 공부할 시간이 어디 있어요. 다 놀기 바빴지요.

이런 이야기 하면 밤새가며 하는 거지요. 그때 기억들, 흙에서 놀던 기억들이 그런 게 내 글에 녹아있지요.
나는 보는걸 좋아했지 잡지는 않았는데 주안역 넘어서 염전에서 망둥어 잡는데. 물웅덩이 있으니까 가장자리에서 수영도 하고. 인천사람들이 수영을 잘 못하는 게 물에 동동 뜨니까 허우적거릴 필요가 없지. 갯벌에서 낚시하고. 여기서 개구리 잡으면 닭들한테 주고. 나는 하는 거 봤고. 개구리 뒷다리를 누가 입에 넣어주길래 맛있더라구. 개구리 뒷다리라고 하길래 뱉어버렸지. 여기서 소 몰고, 농사짓는 거 보고. 나중에 원고 쓸 거 생각하고 본 게 아닐텐데, 그냥 바라봤어요. 이렇게. 주변 지나면서 천천히 봤지요.

여기 떠난 게 사거리 쪽에 집을 지어서 그때 흙벽, 초가집인데 상권이 좋은 데였어요. 낡은 집인데 막걸리도 팔고 그런 집인데 그걸 아버지가 사가지고 약국을 하셨어요. 비가 오니까 천장이 내려앉더라고. 그래서 부셔서 건물을 다시 지었지요. 여기는 주택들이 빼곡히 들어섰어요. 공단에 사는 사람들을 수용하는 집이었지요. 염전은 초등학교 끝날즈음에 메워졌고, 성냥갑 같은 십평도 안되는 게 딱지같은 집들을 지어서 노동자들을 수용하는 거였지요. 겨울에 놀던 곳인데 트럭 뒤로 흙을 내려서 다 메워 버렸어요.

나는 고등학교 때도 공부보다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고. 아버지는 나를 미덥게 생각하기는 했는데 동생처럼 공부를 잘 하길 바랐지요. 나는 조용하긴 했지만 많이 돌아다녔어요. 고등학교 때 단체 영화를 그렇게 보러 다녔어요. 중학교 들어가면서는 동네에서 안 노는 거예요. 동네 이야기는 할 게 없어요. 다 매립되고 다다다닥 집 짓고. 주안역 갈 일도 없고.

아버지가 60세 되셔서 약국을 그만두고 그다음부터는 아파트를 전전해서 다녔지요. 마음은 늘 주안에 있어요. 지금 가도 아련하고, 혹시 나 아는 사람을 만나려나 두리번거리게 되고. 지금 주안 일대가  재개발계획이 있잖아요. 거기 내가 도시 개발 위원회에 있는데 거기에서 들었어요. 지금주안에 어마하게 빼곡하게 다세대 주택이 있는데 초고층 아파트로 바꾸려 합니다. 그런 정책도 참 웃기지만 이걸 열 몇 개의 재개발 구역으로 나눠 가지고 한단 말이에요. 부정부패도 어마어마하고. 어린이 공원이나 놀이터가 필요하니까 제일 후미진데 놀이터를 만들어요. 너나없이 만들어서 전혀 계통도 없고 정말 엉망이거든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열여덟 개의 놀이터의 띠를 만들어서 특색 있게,흐름이 있게 해야한다고 반려 시킨적이 있어요. 거기에 3,40층 아파트로 꽂아 놓을 거예요. 그럼 더 삭막한 거예요. 지금 주택들 끔찍하게 있지만 그래도 거기 있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하고 알아요. 그런데 그렇게 지어 놓으면 아무도 모르는 데가 되는 거지요. 여기도 분명히 논이 있었고, 역사나 이런걸 보면 물길을 만들 수 있을 것 같고.

요즘은 아파트를 만들 때 정화조를 안 만들 거예요. 종말 처리장으로 빼니까. 그러면 그 공간을 활용할 수 있어요. 빗물을 채워두면 돼요. 그 물을 저장할 뿐 아니라 바깥에서 내놓는다면 더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죠. 재해를 완충도 해줄 수 있어요. 일부는 계속 정화하면서 흘려주고, 갈수기에 모아둔 빗물을 강물로 흘려줄 수 있겠죠. 제가 사는 데가 송도비치호텔 건너편, 송도에 버스 차고지로 썼던 곳 전에 소암마을이라 하던 곳 근처인데 그 아파트 한가운데 넓게 물을 채워놨어요. 빗물을 완충하는 거죠. 그런 게 필요하거든요. 멋도 필요하겠지만 재해에 대해 완충할 수 있어요. 상가의 일부를 운하처럼 만드는 곳도 있어요. 싱가포르에 가면 그렇게 물을 모아 건물 안에 넓게 담아 놓고 배도 다녀요.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어요빗물을 담아 재해를 완충할 수 있고, 사용할 수도 있지요. 다만 들고는 빗물을 배제해야지만 처음부터 설계한다면 가능하거든요. 그러려면 전체를 개념도를 그리면서 체계적인 연구와 설계가 필요하겠죠. 공원도 배치하고, 바람골도 생각하고, 빗물로 승기천도 흐르게 하면 돼요. 주안 재개발 지역은 난장판입니다. 업자들이 이쪽 구역은 왜 허가를 빨리 안내주냐고 난리를 치고, 이쪽은 소송 걸려있고 그러니까 잘 안되지요. 그러니까 전체 그림을 그리고 체계적으로 해야 하는데 지금처럼 한다면 주안 일대는 버림받을 거예요.

여기저기 쓴 글로 책을 내기도 하는데 요즘엔 사람들이 책을 안 보니까. 안타깝지요. 눈앞에 A4용지로 내용을 요약해서 대령해도 제목만 보죠. 책은 안 보지요. 어디에서 들었는지 인천시에서 바람 골이라는 걸 이야기하는데 그걸 누구한테 맡겨야 할까요? 인천발전연구원에 생태 연구하는 사람이 한 명이에요. 바다 연구자는 아예 없고. 내가 바람골 이야기 인천에서 먼저 말했는데 인천시는 나한테는 안 물어봐요. 이런 이야기 나오면 갑자기 전문가들이 나타나지요. 연구비 준다면 다 나오는 거겠지요. 제대로만 하면 괜찮지만, 그럴 거 같지 않아요. 예를 들어 경인고속도로도 녹지로 만들자고 했는데, 좀 충분히 의논해서 계획했으면 좋았을텐데 후닥닥 해버렸잖아요. 두고두고 아쉬울 거란 말이에요. 가끔가다 생태 연결로를 만들기도 하지만 사람이랑 같이 다니게 했잖아요. 그러면 사람이랑 같이 가려고 너구리가 기다리다 사람 손 잡고 건너겠어요? 사람을 배제하고 냄새나 빛이나 소음을 차단할 수 있는, 사람이 근처 도 안 온다는 확신이 들어야 동물이 지나다닐 텐데. 엉터립니다. 어떤 동물이 지나다니는지도 조사해야 할 것이고, 그런 거 하나 없으니. 인천시장이 이야기해서 그런지, 바람골이니 먼지를 제거하는 습지 이야기가 특집으로 나왔던데 외지에서 연구진 데려와서 또 하겠지요. 외국에 근사한 거 흉내 내겠죠. 어쩌면 싱가포르의 건물 안의 물길 같은 거 해놓겠지요. 시민들이 참여하는 과정이 중요해요. 이 과정을 시민과 공유하고, 그러면 기대하게 하고, 완성을 기다리고, 도시에 물길이 생기면 여기 살고 싶고. 이사 가고 싶지 않고. 이걸 만들려면 시민들과 충분한 논의가 필요하지요

내 삶에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동네를 만들 수 있어야 할 텐데. 아파트 세워놓으면 어떤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살까? 어찌 되었든 누군가는 살 텐데 이 지역에 관심이 있을까? 저는 GTX도 반대하고 있는데 그런 걸 만들면 만들수록 지역 정서는 제자리에 남지 않아요. 일어나자마자 출근해서, 파김치가 돼서 돌아오고, 자고 또 내일 아침에 나가야 하는데 빨리 갔다 빨리 오는 게 중요한 사람이 되고 말죠그런 시민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봤자 하품하고 졸립겠지.

다만 살아있을 때까지 행복하고, 사과나무를 심는 마음으로 살 뿐. 우리의 삶이 기억에 정착될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역 사람의 이야기(text)를 듣고, 그런 게 있구나 알게되니까.

그때 주안에서 같이 놀던 친구 부모 중에 의사도 있었고, 장롱 같은 거 의탁 받아서 문지르고 광내는 일을 하는 분이었는데 가난했다는 기억입니다. 그때 배고프면 누구네 집에라도 들어갔죠. 밥 먹으라며 귀 붙들려 친구 딸려들어가서 밥 얻어먹었지요. 누구네는 계란 하나 얹어주고, 저쪽 집에서는 짠지 하나 주고, 밥을 이만큼. 우리는 누구네 집이 가난하고 부자고 알았지만 같이 노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어요. 그때 우리 사회가 이렇게 급속하게 바뀔 거라고는 생각 안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