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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 잡고, 싱아 뜯어먹던” _박광현
양지원
게시일 2021.10.22  | 최종수정일 2022.08.25

가재 잡고싱아 뜯어먹던

 



구술자 : 박광현 (71, 1960년대 문학동 거주)
 
- 채록일 : 20191127() 오후7, 1215() 오전 830
- 채록자 : 남희현
- 채록 장소 : 문학동 호산아파트 인근 카페

 

수로에서 여름이면 물놀이 하기도 하고. 첨벙첨벙하는 거지
리 어렸을 때는 꽤 깊었어요. 비가 오면 논둑들이 다 허물어지고 
타까웠지. 둑도 잘 무너졌지. 다시 해가지고. 비가 와야 농사를 하니.
내가 왜 이걸 기억하냐면 논에 가면 할머니 할아버지, 어르신들이 
심부름을 시키는 거야. 주전자 갖고 장다리를 건너서 주전자에서 
막걸리 사오고. 그런 게 있었지. 그래서 장다리라는 데가 중요한
다리였어요. 사람이 왕래할 수 있는 다리였지요. 술도 사갔지만 
기 대장간이 있어서 일보러 가고. 그래서 기억이 나지.”
 
 
 
소개부탁드립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문학이라는 고장에서 3대가, 아니 4대구나. 4대가 살아왔고, 그 기간이 100년이 넘었지요? 49년생 박광현입니다. 누구보담도 많은 사람들이 미추홀구를 사랑하지만 특히 저는 더 미추홀구도, 문학동도 사랑하고. 내가 죽음으로써 모든 후세들에게 남겨 줄 것이 있다면 앞으로도 앞장설 사람이에요. 그로 인해서 했는지는 몰라도 어린시절의 어려움을 갖다보니까 문학산에 애정을 뒀고, 또 애정을 두다보니까 문학산이라는 역사적인 전통을 우리 후세들에게 못 물려주는 것이 굉장히 안타까워요.왜냐하면 이 문학산성이 인천광역시기념물 제1호예요. 그래서 우리 인천시가 그렇게 넉넉하지 못하잖아요. 그러나 지금은 옛날에 비해서 300만 시민이 비축되어 있고. 그래서 우리 문학산성을 국가 지정으로다 해놔야 국가의 돈으로 복원을 할 수 있어요그래서 지금도 그걸 추진하고 있어요. 근데 이제 마음속으로만 하지 옛날 같지 않고. 나이가 인제 먹다보니까 너무 안타까운 게 많아요.
 
선생님이 4대에 걸쳐 이곳에 살고 계시다고 했는데 그럼 첫 세대가 몇 년인가요?
우리 외갓집은 부평 이씨로써 파는 다른데 새미 이씨가 있고, 관교동에 신비 이씨가 있고. 거기도 부평 이씨예요
그리고 학익동 너머에 가면 거기에도 부평 이씨가 있어요. 문학동에도 있고. 파들이 다 달라요. 줄기는 하나인데 파는 달라요. 우리 외가댁은 200년이 넘었지요. 친가, 우리 고조할아버지는 벼슬을 했어요. 벼슬을 하셔가지고 막내아들이어서 이쪽 일대에 땅이 많았나봐요. 신세계 터미널 쪽. 내가 어렸을 때 거기 땅이 있었어요. 논이. 그래서 내가 승기천에 대해서 관심이 있고 알고 있는 거예요. 왜냐면 어린시절 거기에서 물장구를 치고 놀았으니까. 그분이 여기서 땅 관리를 하니라고, 지주지. 여기서 터를 잡게 된거지. 그 이후로 내가 태어난 거로 생각이 되고. 저는 할아버지를 뵙지는 못했어요. 할머니한테 들었지. 내가 애정을 가지고 있는 문학이라는 곳에서. 남구가 미추홀구로 바꾸는데 일조를 하기도 했어요. 제가 초선의원(2002년 제4대 남구의회 의원)으로 명칭변경 발의를 하기도 했어요. 동서남북으로 인해서 명칭이 됐었는데 인제는 우리도 주소를 바뀌니까 구도 명칭을 바꾸자 했지요. 이렇게 애정을 갖다보니까 문학산이라는데는 내가 가재잡고, 싱아 뜯어먹고. 싱아는 일종의 풀인데 아주 깨끗한 산에서만, 공기 좋은 데서만 나는 풀인데 그게 지금의 비타민C가 들었다 하나 아주 시고. 그 시절엔 배가 고팠어요. 봄이면 칡뿌리 캐서 먹고 소나무 새순을 짤라서 껍데기를 벗겨서 배고프니 먹었어. 그 당시에는 간식이라는 게 없으니까. 꼭대기를 뛰어올라갔던 게 기억이 나요.
 
어릴 때면 언제의 기억인가요?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이에요. 62년도에 초등학교 졸업을 했어요. 62년도에 졸업사진을 찍었어요. 운동장에서 사진을 찍는데 저쪽, 문학산을 봐라 했던 기억이 나요. 그 시절에 헬리콥터가 와서 앉은 거야. 그 당시 자동차도 못 보는 시절인데 헬리곱터가 오니 얼마나 좋아. 우리 전교생이 전부 뛰어올라갔을 거야. 그때만 해도 저 사람들이 왜 왔는지, 미군부대가 들어왔는지도 모르고 비행기가 왔으니까 그냥 쫓아갔던 기억이 나고. 미군이 들어오면서 내가 중학교 다닐 때, 저게 산이 깎아진 거야. 10m가 넘게 깎인 걸 거야. 옛날에는 봉우리에, 멀리서 보면 무덤 같았어요. 그때 당시에는 인천시내 사람들은 배꼽산이라고 그랬어. 무덤같이 동글게 있어가지고 멀리서 보는 사람은 배꼽산이라고 그랬거든. 인천 시내 소풍을 여기로 왔어. 우리는 송도 산으로 갔고. 그러다 보니까 옛날 추억이 많이 생기는 거예요내가 성장을 해도 거길(문학산) 갈 수가 없는 거야. 미국이 철조망을 다 하니. 철조망까지 가면은 내가 철이 들고 문학산성이 보이잖아. 산을 깎다 보니까 화약을 넣고 폭파를 시켰어. 그러면 문학산성의 바위가, 집채만 한 바위덜()이 많아요. 그게 다 동네로. 그때만 해도 산꼭대기에서 화약을 터뜨려서 폭파를 하면은 동네사람들이 위험하니까 남포, 남포소리를 질렀어. 그러면 동네사람들이 집에 가서 숨던지 그랬어. 폭파를 하면 큰 것도 떨어지지만 작은 것들은 동네까지 떨어지니까. 길거리에서 맞으면 큰 사고가 나니까. 근데 저렇게 미군이 한 50년 주둔을 하다 보니까 그 와중에 내가 나이가 들었단 말이야. 민주화가 돼서 그때만 해도 난 정치에 꿈도 없었어. 그냥 오직 내 고향에 열심히 봉사하는 그런 사람이었지.
 
고향에 대한 애착심을 가지고 일을 하셨는지 궁금해요. 아쉬움이나 문학산에 대한 애정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내가 자라는 과정이 올바르게 자라질 못했어. 사춘기라 그럴까. 사춘기에 그런 게 있잖아요. 사춘기에는 남이 안하는 못된 짓은 다 했어.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한 것은 아니고. 젊은 시절 혈기에 대한 과시라 해야 할까. 괜히 얘들하고 몰려다니면서 주먹질하고, 여기서 동인천 신포동, 하인천 피난민들이 억세었거든. 부모가 먹고 살아야 하니까 얘들은 내동댕이치니까 얘들은 몰려다닌 거야. 내 자식이 크면서 내가 우리 아이들한테 뭔가는 놓고 가야겠다 생각한 거야. 누구 자식하면 저거 맨날 껄떡대던 누구 자식이야하는 거 보단 그래도 누구의 자식이야라고 들려주고 싶은 거야. 그래서 내가 좋은 일만 하려고 노력했어요. 하다보니까 지방자치라는 게 생겨가지고 정치권에 발을 놓게 된 거야. 군대 갔다 와서 가정을 갖고 애를 낳고 보니까 고게 한 30대 초반인데 그러다 보니까 우리 아이들한테 뭔가를 해야겠다 싶어서 지역의 많은 일을 내가 했어요. 문학동이 인구가 천 명도 안되었어요. 다 토착 사람이야. 누구네 젓가락이 몇 개, 누구네 생일도 알 정도니까. 내가 어떤 행위를 못하겠더라구. 그 사람들이 나를 알잖아. 내가 그래서 열심히 했어. 옛날에 초상이 나면 상여를 맸어요. 누가 돌아가시면 마당에 체를 쳤는데 내가 앞장섰어요. 내가 동네일을 하다보니 역사적인 것이 내게 어떻게 왔냐면 우리 얘가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 책에 보니까 문학산성이 나온 거야. 사회생활인가에 문학산성이 나온 거야. 내가 그걸 봤어. 내가 그때만 해도 관심이 없었는데 그렇게 관심을 갖게 되었어. 산성에 대해서 공부를 했고,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산성을 보러 가니까 안으로 못 들어가는 거야. 민간인은.
 
어린 시절엔 칡뿌리도 먹고 싱아도 먹던 그곳을 못가게 되신 거군요.
그렇지. 이 미군이 있음으로 해서 그 근처를 못가는 거야. 안타까운 거지. 민주화가 되면서 문학산 저기에 올라가야겠는데 내가 혼자서 여기서 서명 받고 그랬어요. 시민단체가 와서 협력하자고 왔더라구. 난 시민단체가 뭔지도 모르고 저거(문학산 개방) 하는데 좋은 거니까 토론회도 나가고 그랬어요. 그러다 의원이 되면서 문학산 파트에서 일하다 보니까 1년에 두 번씩 올라가게 되는 거야. 그때는 미군은 없는데 허가를 받아서 구석구석 가게 되더라구. 가서 보니까 다 깨졌어. 문학산성이 다 무너졌어. 옛날에 내가 기억하던 게 하나도 없는 거야. 옛날에 물 나왔던 자리도 없어.
 
문학산에서도 지류가 흘러 승기천으로 내려왔을까요?
내가 알기로는 승기천은 하나의 개울이야. 큰 개울도 아니고, 그 독쟁이(독정이) 쪽에서 조그맣게 내려오다가 동양장 와서는 큰 하수도라 해야 하나 아주 큰 개천이었어요. 동양장사거리 있잖아요. 옛날엔 그게 장다리라고 했어요.
 
동양장사거리에 승기천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장다리라고 했어요?
그게 석바위로 가는, 장다리를 지나 이 도로로 가면 석바위로 가는 거 아니에요. 이게. 이걸 장다리라고 했어. 그때는 동양장이 없었고 거기는 논밭이었으니까 마차가 다닐 정도의 다리였어. 그러니까 다리, 장다리라고 했어
이쪽은 관교동이고 장다리를 넘으면 주안이야. 석바위사거리 쪽으로 해서 여기가 산이었어. 석바위사거리에서 구월동으로 가는 절이 하나 있어. 그게 장다리해서 절로 갔어. 절 밑에 대장간도 있었고. 그러니까 주도로니까. 지금은 관교동이라고 했지만 그때는 신비라고 했어. 장다리를 지나서 글루(그리로) 가다보면 주도로가 되다보니까 대장간도 있고, 술집도 있었고, 지금의 절도 있었던 거야. 동양장사거리는 변화가 오면서 생긴 거구 옛날엔 장다리라고 불린 거지.
 
선생님 그럼 그때가 몇 년도일까요?
그 전에도 있었던 거지. 여기서 그쪽으로 갔을 때는 어렸을 때야. 신비, 관교동 아이들이 승학산 넘어서 문학초등학교를 다녔으니까 내가 기억하는 것은 내가 어려서 우리 순복음교회 앞에 중앙공원 그쪽이 우리 땅이었어. 논이었어. 관교동 개발이 되기 전에 먼저 순복음교회가 논 한가운데, 길도 없을 때 들어왔어. 거기에 둑이 있었어. 큰 둑이 있고, 개울은 아니고 아주 큰 저수지라고 해야 하나 그게 있었어. 승기천 물줄기가 이쪽으로도 같이 돌았으니까 그 물로 농사를 지은 거니까. 그래가지고 동양장에서 인천시청 큰 도로로 해서 이쪽으로 빠진 거 아니예요.
 
선생님 댁은 어디신 거지요?
우리집은 문학동이고, 농사 때문에 다닌 거야. 인천시청은 예전에 다 배밭이었어. 이제 다 개발되었지만. 신세계, 남동경찰서 있고, 농수산물 있는데 조그만 마을이었어. 석말이라고. 그 마을로 가는 다리도 있었어. 그것도 마차가 다닐 수 있는 다리였어. 가구수가 많지는 않았어요. 한 열댓 가구에 양지바른 동네였어.
 
그 다리 이름도 있었어요?
석말이라는 동네 있으니까 석말다리라고 그랬겄지.
 
승기천에 대한 기억이 있다면?
수로에서 여름이면 물놀이 하기도 하고. 첨벙첨벙하는 거지. 우리 어렸을 때는 꽤 깊었어요. 비가 오면 논둑들이 다 허물어지고 안타까웠지. 둑도 잘 무너졌지. 다시 해가지고. 비가 와야 농사를 하니까. 내가 왜 이걸 기억하냐면 논에 가면 할머니 할아버지, 어르신들이 심부름을 시키는 거야. 주전자 갖고 장다리를 건너서 주전자에서 막걸리 사오고. 그런 게 있었지. 그래서 장다리라는 데가 중요한 다리였어요. 사람이 왕래할 수 있는 다리였지요. 술도 사갔지만 거기 대장간이 있어서 일보러 가고. 그래서 기억이 나지. 동양장은 개발이 되고 한참 있다가예요. 동양장이 뭐냐면 여관이에요. 그건 아주 뒤예요.
 
또 다른 거 기억나는 거 있으세요?
거기 대장간 있고, 술집 있고, 솜틀집도 있었고. 거기가 주도로다 보니까. 석바위도 옛날엔 흙이 빨개서 비 오는 날이면 첨벙첨벙 논밭이라고. 간석 전화국 앞쪽으로 옛날엔 벽돌공장이 있었어요. 빨간 벽돌있죠? 거기서 찍어냈던 거예요. 우리 외사촌이 거기 사셨는데 빨간 벽돌공장 공장장이었어. 그래서 내가 거기 많이갔어. 시멘트블록 나오기 전에는 빨간 벽돌을 썼지요. 거기에 토박이로 살고 있는 친구도 있어. 그쪽은 그 사람이 잘 알거야. 가을에는 참게도 나왔어. 참게라는 건 민물에 사는 거예요. 그전에는 그게 농수로에 있었단 말이야. 강아지풀을 달랑달랑 하면 요놈이 딱 물어. 그걸 잘 잡는 얘도 있었어. 그래서 우리 문학에 손주들 데리고 문학산에 데리고 가는데 가재가 있었단 말이야. 옛날에는 개울에서 빨래하고 그랬단 말이야. 그만큼 자연이 살아 있었단 말이야. 문학산에 결혼하고 첫 애 낳았을 때만 해도 송이버섯도 있었어. 비만 오면은 버섯 따려고 산으로 올라갔어. 그만큼 자연이 좋았어. 그리고 이 승학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림도 그리고 자연생태계도 내려다보고 그랬어. 정확하지는 않은데 산꼭대기 올라가서 인천에서 서울까지 마라톤을 하는데 그걸 산에 올라가서 봤던 기억도 나. 초등학교 때인가. 이 승학산이 인천 시내 사람들의 놀이터였어. 승학산 둘레길을 내가 현역에 있을 때 내가 만든 거야. 내가 다 해놓고 정치 그만뒀는데. 승학산이 약수터라고 그랬어물줄기가 풍부했었어요. 샘물도 많고, 두 군데에서 샘물이 나왔는데 위에 샘물은 마시는 샘물이고 아래는 냉장고가 없으니까 과일 같은 거 넣어서 먹고 그랬어요. 이 물이 내려서 승기천 하고도 만났을 거야. 이 물줄기를 돌려서 도호부청사 옆으로 흐르게 하자는 이야기도 있었어. 도호부청사에 오는 관광객이나 모든 거를 물줄기가 흐르면 생태계가 사니까. 이 물줄기가 생기면 반딧불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역사와 문화를 우리 아이들이 배우고 느끼고, 우리 조상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아야 할 거 아니야. 문학산에 고속도로도 아쉬워요. 여기든 거기든 생태계를 살리면 좋겠어. 옛날 장수벌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