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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되니까 전기불이 들어오니까 번쩍번쩍하고 굉장했지” _김원균
양지원
게시일 2021.10.22  | 최종수정일 2022.04.26

밤이 되니까 전기불이 들어오니까
번쩍번쩍하고 굉장했지


 
 

구술자 : 김원균 (60, 1970년대 숭의동 거주)
 
- 채록일 : 20191029() 오후3
- 채록자 : 남희현
- 채록 장소 : 엄지식당
 
 
 
그때 당시에 미추홀구청도 인천교육대학자리였어. 그 옆에 부속
초등학교 있어서 앞길이 다 학교로 되어 있어서 살기 조용한 동네였
. 자식 공부시키기엔 좋은 동네였지. 작은 집이 있으니까 우리 고
모들도 이곳 주변에 자리를 잡았고, 제물포 뒷역은 있지도 않았어.
금 같은 이런 게 아니라 옛날 시골길 역처럼 기와로 이은 역이었어.
려서 뒷역 가려면 철도길 지나서 뒷역으로 넘어갔지.”
 

자기 소개 부탁드릴게요.
대청도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를 거기에서 졸업하고, 72년에 상인천중학교(간석동)로 전학와서 지금까지 이 동네에서 살고 있습니다. 태어난 해는 60년생입니다. 고모(55년생)와 함께 유학을 왔지요. 고모는 인화여고 다녔고. 둘째 작은 아버지가 숭의초등학교 후문 있는데서 살았고 그래서 이 동네에서 살게 되었어요. 작은 아버지 집에서 15m 떨어진 곳에서 고모와 함께 살았지요.
 
미추홀구는 그때 어땠나요?
남구청(미추홀구청)은 지금 보건소 자리에 있었어요. 그때는 이 동네가 인천 시내에서는 숭의초등학교도 있고, 인천남중학교도 있고 했기 때문에 굉장히 조용하고 괜찮은 동네였어요. 그때 남중학교 앞에 집이 있는데 그 당시에도 2층 집이었다고그 집들이 인천에서 알아줬다구. 개인주택이 2층 집이 거의 없었으니까. 쫙 붙어서 남중 학교 담으로 해서 똑같은 디자인으로 쭈욱 있었으니까. 새마을주택이라고 해서 수봉산에 지은 집들도 도면 하나로 지었는데 그것도 단층집이었지. 우리 시골집도 똑같은 도면으로 지었어. 중학교 나오고 여기서 살다가 86년에 결혼해서 지금 이 집으로 이사 왔어. 초등학교 졸업하고 나오고, 방학되면 잠깐 들어가고 해서 대청도에 있었지만 집사람을 알지는 못했어
한 동네하고 너머 동네니까 잘 몰랐어여동생이랑 자석식 전화기5) 교환수로 일하는 친구를 소개받았어.
 
당시, 72년도 기억에 대해서 이야기해주시겠어요.
그때 당시에 미추홀구청도 인천교육대학자리였어. 그 옆에 부속초등학교 있어서 앞길이 다 학교로 되어 있어서 살기 조용한 동네였어. 자식 공부시키기엔 좋은 동네였지. 작은 집이 있으니까 우리 고모들도 이곳 주변에 자리를 잡았고, 제물포 뒷역은 있지도 않았어. 지금 같은 이런 게 아니라 옛날 시골길 역처럼 기와로 이은 역이었어. 내려서 뒷역 가려면 철도길 지나서 뒷역으로 넘어갔지. 나 같은 경우에는 시골에서 나왔으니까 이 동네에 친구도 없고, 학교 갔다가 집으로 오고. 섬이 지금은 많이 발전했다고 하지만 그 당시 본 게 없었으니까 물정이나 아무 것도 몰랐지. 학교 다녀오면 집에 오고, 집에서도 텔레비도 흔치 않으니까 작은집에서 눈치 보며 텔레비 보다가 시간되면 집에 와서 자고 하니까 텔레비 갖고 있는 게 선망의 대상이었지. 어디 다니고 그러지 못했어.
 
혹시, 사는 부근이나 물길 기억나는 거 있으세요?
까치사거리에 개천이 있었지. 폭이 5m 되고, 내가 쓰레빠 신고 뛰어가다가 쓰레빠 빠트려서 잃어버렸지. 조그만 장천사거리 왼쪽에 있는 까치 식당이라고 했어. 기사식당을 하니까 까치사거리라고 하면 거기로 왔어.
 
그 길이라면 수봉산에서 내려온 물줄기 일 수도 있겠어요.
다녔으면 알았을텐데 그건 잘 모르겠어. 까치사거리에서 전화국 쪽으로 물길이 있었어. 깊이는 하수도처럼 평상시에는 바닥이 보였고, 지저분했어요. 양 옆에 도로가 있었으니까 집들이 그렇게 썩 좋지는 않았어. 흙길이었어. 내가 중학교 때 그쪽으로 다니면서 친구들하고 공부하기 싫으니까 왔다 갔다 했던 기억밖에 없어. 숭의초등학교로 직진으로 내려오는 길이었지. 지금도 숭의초등학교 쪽이 좀 높았고 여기가 낮으니까 흘렀던 거 같어. 76, 2 정도 되었지. 시골에서 할머니가 나왔고, 할머니가 밥해주고 우리 형제들이랑 사촌들이 초등학교 마치고 이리 와서 살았지. 맏이로 여동생 둘이 있고, 막내, 셋째 작은집 얘 둘도 여기서 학교 다녔고. 막내 작은집 큰아들도 여기서 다녔지.
 
맏이로 인천 미추홀구에 자리를 잡고 아이들을 건사하신 거네요.
여기가 말 마굿간이었다구요?
여기 주차장이 마굿간이었고, 우리 집이 지금은 도로가 났는데 그때는 부광유치원 내려오는 길에 작은 골목이 있다고. 그리로 다녔지. 우리 집은 말죽 쑤는 집인데 그걸 개조해서 살았지. 말 마굿간이 주인집 할머니 집이랑 우리 집이 한 폭 정도의 차이거든. 여기 말 마굿간을 막아서 방으로 꾸며서 월세, 전세로 고쳐서 사람을 들였어.
우리 집도 전기선을 보려고 천장을 뜯어보는데 서까래로 큰 소나무가 들어 있더라구. 기와집 살았지. 주차장 벽으로 보이는 곳은 사택이었대요. 관사 같은. 왜정시대니까 왜놈들이 살았겠지.
 
그럼 말똥도 개울로 흐르고 그랬겠네요.
우리 있을 때 화장실이 차고 있는데 있었단 말이야. 그때는 밑에 큰 통이 있었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어.
 
인분 모으는 장소가 숭의초등학교 옆쪽으로 있었다고 하는 분도
만난 적이 있어요. 수도는 어땠어요?
우리 집엔 수도 있었어요. 70년대니까 온돌도 구공탄, 십공탄으로 했고 밥도 거기다 앉혀서 했지. 나중엔 곤로도 놓고 그랬지.
 
혼자 외지로 나와서 살면서 미추홀구하면 드는 느낌, 인상이 있
으실 것 같아요.
우리 시골에는 전기가 안들어 왔어요. 초등학교 되면 호야등6)을 썼는데 어른들은 손이 크니까 뛰어노는데 불러서 닦으라고 시켰어요. 하게 되면 물로 쑤세미로 깨끗하게 닦아야 하는데 놀 욕심에 신문지 같은 거로 대충 닦고 그랬지. 그런데 여기 나오니까 110V 있으니까 초등학교 기억으로는 밤이 되니까 전기불이 들어오니까 번쩍번쩍하고 굉장히 깜짝 놀랐지. 그때 당시만 해도 인천시내 중심가가 동인천이었으니까 주안역 있었지만 뒤쪽은 다 염전이었고, 지금 시청있는 곳도 밭이니까. 중학교 가려면 버스 타고 석바위 쪽으로 구월동 들어가는 입구 쪽으로 오면, 비포장도로에 나무가 엄청 많았고 그쪽은 아주 낙후되어 있었던 곳이었어. 그때 당시는 거기는 촌이었어. 그때는 여기가 학교도 있고, 조용하고 참 좋았어요. 선인재단에 운봉이 있었고,선인중,고등학교 있었고, 효열 있었고. 거기 학교 있지 여기 교대 있지 굉장히 좋은 학군이었어요우리 시골사람들은 독정이 고개에서 많이 살았어요. 거기가 쌌거든요. 수봉산도 앞뒤로 판잣집이었어요. 76년도인가 독정이고개 친구네 집에 갔는데 하꼬방집7)이라고 창틀도 제대로 된 것도 아니고 방이 두 개인데 골방 같은 조그만 집이었어.
 
그때 당시에 가족과 떨어져서 살기가 힘들지는 않으셨어요?
방학만 기다렸지. 고등학교 되니까 가기 싫더라구. 시골집에서는 할아버지도 있고 부모님도 있으니까 내려오라고 하는데 딴 데로 놀러 가고 싶었지. 기차 타고 가거나 버스도 있었으니까. 구터미널 엑술루트타워 있는데 고속버스 있으니까. 동인천도 멀지 않고 했으니까 꽤 발전한 곳이었지. 그 전에는 여기도 밭이었다는데. 미나리밭이었대. 여기가 산은 아니고 언덕처럼 되어 있으니까 나무도 많지 않고, 판자촌이었어.
 
물길이 있었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내 기억으로는 까치사거리에서 전화국, 고은산부인과 있는 오거리까지 직진해서 가는 길이 생겼으니까. 그 전에는 숭의로타리 가는 길밖에 없었으니까. 물길은 잘 상상이 안돼.
 
미추홀구가 새로운 터전으로, 동생들하고 자리를 잡은 곳인데 선생님께는 어떤 곳인가요?
청소년 시절부터 여기서 살았으니까 시골보다도 여기가 더 고향같지.
 
어떻게 다른 곳으로 이사도 안가시고 여기서 사셨어요?
돈이 없어서 그랬지. 그때만 해도 돈 벌려고 했으면 이 집을 팔고, 넘기고 넘기고 했어야 했는데 그때는 그렇게 했어. 나 같은 경우에는 증식하는게 없었지. 아버지 이름으로 되어 있으니까 맘대로 못했지. 내년부터 이주 이야기가 있어. 두산에서 아파트 만든다고 하는데 고은산부인과 자리부터 장천사거리까지, 남중학교 골목까지,
숭의초등학교 후문에서 삼각형모양까지 수용이 되었다고 들었어요. 개발된다고. 오래되었어요. 처음에는 동네가 좀 시끄러웠지. 우리는 여기가 집이고, 앞에 주차공간도 있고 안 가면 좋겠어. 시골에서 나와서 이 동네에 살면서 도로까지 가면 아스팔트가 있는데 울퉁불퉁 했거든. 그때는 거기가 굉장히 넓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면은 아주 좁아. 그 당시엔 뛰어다니고 했는데 어떻게 다녔나 몰라. 그런 추억이 남아있는 곳이지. 어디든 가면 먹고는 살겠지만 50년이 되게 살았는데 새로 또 시작해야 하니까 여기가 좋기는 좋지. 그때 당시 살기 힘들었지만 인간적이었고 아쉽지. 세상이 전부 변하는데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