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의 우리
“동네 형들하고 붕어잡고 미꾸라지 잡고” _고병선
양지원
게시일 2021.10.22  | 최종수정일 2022.08.25

동네 형들하고
붕어잡고 미꾸라지 잡고

 


구술자 : 고병선 (53, 1970년대 주안동 거주)
 
- 채록일 : 20191024() 오후4
- 채록자 : 문성예
- 채록 장소 : 학산지속발전협의회
 

 


미추홀구가 너무 개발보다는,
좀 역사적으로 가지고 있을 만한 거는 가지고 있고.
개발도 중요하고. 두 개 다 공존할 수 있는 그런 마을,
도시가 됐으면 좋겠어요.”
 
 
 
자기소개 먼저 부탁드리겠습니다.
저는 미추홀구청 기획예산실 기획팀장입니다. 고병선이고요.
 
미추홀구청에서 근무 중이신 거예요?
, 여기 91년도부터 근무했죠.
 
승기천에 대해서 혹시 기억나는 게 있으신가요?
많죠. 유년시절을 거기서 살았으니까요. 그 자리가 현재 주안2동 자리에요주안2동하고 그 인주로에 지금 인천남부초등학교 있잖아요. 거기가 다 논이었거든요그리고 지금 인주대로 자체가 복개한 거예요, 승기천을. 그래서 거기서 어렸을 때는 특별히 놀만한 장소가 없으니까. 주로 그쪽에서 많이 놀았죠.
 
뭐 하고 노셨나요?
비슷해요. 그 비 좀 많이 오고 그러면 장마 지고 나서 보면 거기 승기천에 가서, 그때는 승기천인지도 사실 몰랐던 거야, 이름 자체를. 그냥 모르고 나가서 동네 형들 애들하고 붕어 잡고 미꾸라지 잡고. 그거 잡아다가 닭 주고.
 
다들 그러더라고요? 닭한테 줬다고..
. 닭 줬어요. 미꾸라지 같은 것도 잡고. 어르신들하고 같이. 논에서.
 
그러면 그때 당시에는 승기천이라고 안 불렀잖아요. 물길이 어떤 모양이었어요?
그때는 자연제방이죠, 자연제방.
 
자연제방이요? 뚝 같은거?
그렇죠. 다리도 있었어요. 왜냐면 그 다리를 건너가야지 현재의 그 복개한 건너편의 초등학교 그쪽이 논이었는데, 그쪽으로 갈 수가 있었어요. 그 주변이 다 논밭이에요. 어렸을 때는 거의 다 논밭이었어요.
 
동이나 이런 것은 모르시죠? 주소지는?
주소지가 어, 정확히 기억이 안 나네.
 
그때가 언제, 몇 살 때 이셨나요?
제가 거기 주안2동에 개발하기 전, 제가 이제 고등학교를 인천고등학교를 나왔는데 1학년 때까지도 복개를 안했었어요. 1 때까지도 복개가 안됐었어.
 
실례지만 몇 년생이세요?
67년생이요. 그래가지고 그때까지도 복개가 안 되어 있었는데 제가 한 초등학교 때까지밖에 못 놀았던 것 같아요. 오염 되가지고.

하수구 냄새가 났었나요?
그때는 마을 전체에서 하수가 거기로 다 들어갔었으니까 처리과정 없이. 쓰레기도 거기에 막 갖다버리는 장소가 천 주변에 있었고. 살기는 제가 주안2동에 결혼해서까지 살았으니까. 32년 정도 살았죠. 이제 집은 바뀌었지만 기존에 있던 기와집 같은 데서 전세 살다가 아파트로 이사 가고, 단독 주택으로 이사 가고. 주거가 아마 주안2동에서 세 번 정도 바뀌었어요. 거기서 한 32년 정도. 결혼해서 1년 정도 더 거기서 살았으니까.
 
진짜 여기 토박이시네요.
그렇죠. 요 동네에서 벗어나지를 못했었어요. 32년 동안.
 
결혼해서도 이 쪽에서 사신 거예요?
노인네들이 거기 사시니까, 전세방을 그 근처에다 얻어가지고 일 년 정도 살았고.
 
승기천에 대해서 냄새났다, 오염됐다 이런 얘기는?
나중에는.
 
처음에는 안 그랬는데 나중에는, 그럼 복개한 이유가 그것 때문인가요? 냄새나서?
글쎄요, 복개한 이유는 잘 모르겠어요. 거기로 주요 도로가 여기 독쟁이(독정이)부터 시작된 거잖아요. 독쟁이(독정이)가 이렇게 언덕이었으니까 그게 물이 흘러서 저쪽에서 승기천이 이제 남동 그쪽으로 내려가는 거니까 전체가 복개가 되었던 거죠. 왜 복개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거기로 이제 주 도로가 났으니까.
 
그럼 복개했을 때 당시에 복개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나요?
글쎄요, 오래한 거 같은데. 잠깐 한 거는 아닌 거 같고. 구간별로 워낙 구간이 기니까. 그 안에다가 내가 알기로 박스 묻어놓고, 덮고 아스콘 하고. 그랬던 걸로 기억하고.
 
그때 당시 만약에 승기천이 복개가 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었다면 어떤 모습일지 한번 상상이 되세요?
그거 친수공간으로 참 좋은 건데.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 이렇게 복개를 뜯어낸다는 이야기도 있죠.
 
. 여기 지금 공사하는 데가 용일사거리부터 승기사거리까지 복원 공사한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정확히는 모르고, 그런 이야기가 들렸던 것 같은데, 복개 안했으면 잘 보존하고 가꿨으면 참 좋은 그런 어떤 여가시설이나 공원녹지 이런 게 조성되었으면 더 좋았을 거 같아. 지금 와서 생각하니 뭐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으니까. 지금 와서.
 
강폭도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여기(주안동)는 조금 달랐으려나요?
폭이요? 폭 그렇게 안 넓었어요. , 이쪽도요? 이렇게 모여서 내려오는 지점이 10m 정도?
 
10m? 폭이요?
. 다리를 건너갔으니까.
 
다리를 건너갔다고 하면, 물 위에 다리가 있었다는 건가요?
그렇죠, 다리가 있었죠. 몇 개가 있었어요. 다리가.
 
누구는 다리라고 표현을 안 하고 둑이라고 표현하더라고요.
? 둑은 양쪽에 있었고 다리가 있었어요.
 
이름 같은 게 있거나 이런 건 아니고요?
다리 이름? 그런 건 기억 안나요.
 
그럼 거기서 낚시나 이런 것들도 했었어요?
낚시는 안 했어요.
 
그러니까 물이 이렇게 좀 차면, 들어가서 아이들하고 진짜 친수공간이라는 의미 자체가 지금처럼 물을 멀리서 보는 그런 게 아니라 되게 첨벙첨벙 바지 걷어서 건너고 할 수 있고, 거기서 물고기 같은 것도 손으로 잡는다는 뜻이네요?
손으로 잡고. 그러면은 이렇게 친구들하고 장난쳐서 잡는 거는 닭 모이 주고 이런 식으로 하고. 그때는 먹으려고 잡지는 않았죠.
 
노느라고 그랬던 건가요?
그렇죠. 그리고 이제 건너 일대가 다 논이었어요. 논에서 미꾸라지 잡아다가 어른들이 끓여먹고 그랬죠. 솥 걸고.
 
, 솥 걸고? 그 때 당시에는 집집마다 닭집, 닭장이 있었어요?
제 기억으로는 그 일대가 다 농사, 밭 농사일을 하는 데고, 돼지도 데가 있었고, 우물도 있었고. 우리는 닭을 안 길렀는데, 우리 외갓집이 그 동네에 있었는데 외갓집은 닭도 기르고 돼지도 기르고 그랬어요. 뒤뜰이 넓어가지고. 그거 잡아다가 가축들 다 주는 거지요. 개구리 잡아다 주고, 붕어 잡아다 주고.
 
그때 당시에 가장 기억나는 게 뭐가 있으세요? 유년 시절 때?
기억나는 거요? 추억이라고 딱 생각나는 게. 추억이라는 것보다 학교 갔다 오면 친구들하고 거기 내려갔으니까 거기가 놀이터였죠. 뚝 같은 데서 개구리 잡고 놀고. 예전에는 물에 빠지고 그러면 젖으면 엄마한테 혼나니까 불 피워서 양말 말리 다 양말 막 부러지고.
 
불도 피우고 그러셨어요?
그렇죠. 불도 피우고.
 
불을 어떻게 피우셨어요? 성냥으로?
그렇죠. 그런데는 장작으로 땔 것들이 많으니까 막. 불장난한다고 그러죠 불장난.
 
거기가 이제 오염되기 시작하면서 놀이터를 뺏긴 느낌이었겠어요? 오염됐으면 그 근처에서 안 놀았을 것 같은데...
시간이 지나니까 놀이 문화가 바뀐 거죠. 거기 가서 그런 놀이를 안 하고, 야구를 하는 거지 야구를. 초등학교 고학년 쯤 되고, 중학교 올라가면서는 거기 안 내려가고 야구를 하는 거지 공터에서.
 
공터 같은 것도 있고 그랬어요? 동네에?
그렇죠. 그때 당시에 이렇게 보면 벽돌을 찍는 공장 같은 데 들이 있는데 거기가 넓은 공터가 있었어요. 그런데서 놀고 그랬죠. 남부초등학교가 내 바로 밑에 동생이 70년생인데 걔가 거기 주안초등학교에서 3학년 때 거기로 분교가 되면서 걔가 들어갔으니까. 70년생이니까 78, 81, 2? 이 때 초등학교가 거기 생긴 거거든요. 남부초등학교가 개교된 게. 그때부터 이제 개발이 된 거예요. 막 그쪽에. 로열아파트 생기고 아파트가 생긴 거야, 논바닥에. 초등학교 생기고 아파트 생기고, 이쪽 우리 살던 동네도 막 논, 밭 다 밀고 거기다가 새로 집 짓고 그러니까. 이제 승기천이 복개가 되기 시작하는 거지. 그때부터.
 
그때 무슨 느낌이 드셨어요? 좋으셨어요,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었죠. 환경에 대한 그런 것, 하면 하나보다 하고. 그것에 대해서 우리가 이걸 왜 하지? 지금처럼 환경의식 같은 것도 없던 상황이고.
 
그렇죠. 그런데 그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약간 놀이터를 뺏긴 느낌이었다. 그때 아주 나이 드신 분들의 이야기는.
그분들은 저보다 더할 수도 있죠. 왜냐면 그분들은 거기서 사시면서 농사를 직접 막 지으시고 그러신 분들이고. 거기가 그분들의 유년시절에는 더 깨끗했었을 거라고. 깨끗하고 아마 거기 내려가서 빨래도 하고 그랬을 거야. 우리는, 저 어렸을 때는 상하수도가 있었을 때니까. 상하수도가 보급이 됐으니까 그런 건 없었는데 그 전에는 그랬을 수도 있죠.
 
근데 왜 미추홀구에 계속 계세요?
그거는 뭐, 살다보니까 그렇기도 하고. 친인척들이 다 미추홀구에 계시고 여기 떠나서, 떠나기도 했었어요. 뭐 여기만 산 게 아니고. 저기 서구에도 잠시 살아보고.
 
인천을 벗어나지는 않으셨던 거네요?
직장이 여기니까, 딴 데 갈 생각은 안하죠.
 
미추홀구 토박이시잖아요? 그럼 인천과 미추홀구가 어떤 의미에요?
저한테요? 어떻게 보면은 저희 조상 대대로 우리 아버님도 동춘동이 고향이세요. 거기도 옛날에는 남구였지. 연수구로 분구되기 전에. 어머니는 여기 주안2동 토박이고 외가는 완전 토박이고. 그리고 이제 주변에 아는 사람들이 거의 8~90%가 다 인천에 사시고. 여기 떠난다는 것은 사실 생각을 거의 안 해봤다고 봐야죠. 그렇다고 뭐 여기 애착이 있어서 안 떠나고 그러는 것은 아니고. 생활터전이 되어 버린 거죠. 어떻게 보면.
 
아무래도 전혀 생뚱맞은 곳에서 무엇을 시작하는 것도 그렇고, 워낙 일 자체도 공무원 하시면서 자리를 옮길 수도 없는 거고.
그렇죠 이 지역을 못 벗어나니까 그렇게 된 거죠.
 
저는 잘 상상이 안 되거든요. 여기가 논밭이었다는 것도. 이게 어느 순간 막 길이 되고. 그런 거를 언뜻언뜻이라도 보신 거잖아요. 학교 다니면서 학교 다닐 때에는 늦게 다니기도 하고 그러니까 더 눈여겨볼 수 없었을 테지만 이렇게 변화되는 것을 다 보신 분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그렇죠. 많이 봤죠.
 
어떤 기분이세요? 나이 드신 분들 같은 경우에는 밭이 갑자기 뭐가 됐다 그런 이야기도 하시기도 하는데...
사실 좀 그립죠. 그런 게 있었다는 것이 그립고. 저는 또 이제 아버님, 아버지 고향이 동춘동이다 보니까 그쪽도 이제 다 매립해서 흔적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아파트가 다 들어서가지고. 어렸을 때도 저희 할아버지 같은 경우에는 바다에 나가서 그물을 매고 마차 끌고 나가서 생선 이렇게 해서 신포동에다가 가져다 팔고. 저도 그래서 그 마차를 타고 바다로 막 들어갔는데. 그물 맸던 장소가 지금 LNG기지 있는 데야. 그리고 그때는 먹을 게 바다에 가면 지금은 귀해서 못 먹는 생선이나 조개 같은 게 지천이었으니까. 그런 거 이렇게 생각해보면 야~ 이렇게 개발을. 그때는 개발이 우선이었겠죠. 그런데 개발을 하기 전에 좀 외국 같은 사례 같은 것을 좀 참고해서 개발을 좀 제한적으로 했으면 더 좋은 자원이 됐을 텐데. 그런 게 좀 안타깝더라고. 지금도 가끔가다 제가 바다낚시 같은 것을 좋아해서 배 타고 나가서 낚시하고 그러는데. 하다보면 이 좋은 환경을... 낚시하다 보면 송도 보이거든요. , 저 좋은 환경을 다 매립해서 짓고 있고.
 
예전 같았으면 바로 이렇게 들어가서 할 수 있었던 게 많았었는데...
그렇죠. 다 매립하고 짓고 저거. 우리 애들은 앞으로 이렇게 바다에 나와서 낚시를 하거나 이럴 수 있는 환경이나 여건이 될까? 더 개발을 하고 오염이 될 텐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나 때까지만 이게 허용되는 일일까, 그런 생각. 여기 그 승기천도 이제 이 인터뷰하기 전에는 이거에 대해서는 그냥 동네에 있던 하천 하나 덮어놓은 거고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이렇게 하다보면 이 공간을 그냥 쭉 살려 놓아가지고 거기 산책도 할 수 있고 그러면 좋잖아요. 그러고 좀 청계천도 다시 뜯었는데 여기도 한번 뜯어가지고 그렇게 하면 좋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고. 이게 덮기는 쉬워도 뜯어내기가 어려우니까.
 
그렇죠. 저는 상상이 안돼요. 미추홀구에 물길이 있었다는 게. 저는 인천 토박이도 아니지만 그래도 중학교 때, 고등학교 때 신명여고를 다녔거든요.
우리 약산 빨갱이라고 그랬는데.
 
빨갱이요? 왜요?
신명여고가 빨간 교복이었어. 그래서 약산 빨갱이라고 했어.
 
아무튼 인천에 대해서는 물길이라고는 상상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저도 이 일을 하면서 인천에 물길이 있었어요?” 이러면서 여기저기 물어보고 있네요.
개항에도 있잖아요. 개항하고 우리 미추홀구하고.
 
개항구 쪽(수문통 도심 생태하천 복원사업)이 더 클 것 같네요.
. 개항이 좀 그렇고. 연수구 쪽은 지금 모르겠네? 하도 메꿔 놓아가지고. 그쪽은 또 잘 안 넘어갔으니까. 여기 문학산이 또 경계에요. 우리 어렸을 때는 여기서 생활하지만 문학산이라고 그러잖아요. 우리 어렸을 때는 이거 배꼽산이라고 그랬거든.
 
왜 배꼽산이에요?
그 위에가, 맨 꼭대기 정상이 배꼽같이 이렇게 되어있는 거예요. 어르신들도 다 배꼽산이라고 그랬어. 옛날에 문학산 정상에 레이더기지가 있었잖아요? 그러니까 문학산을 경계로 이쪽으로는 거의 넘어가서는 친가집이 이쪽에 있었으니까 갔었고 웬만하면 거의 넘어갈 일이 없었죠. 거의 이쪽(주안동) 안에서만 생활 했던 거죠.
 
얘기를 들어보면 그런 것 같아요. 우리가 사는 동안에 이 공간을 조금 빌렸다가 가는 것 같고 결국 물려줘야 될 자원이나 자산인데 지금도 계속 아파트가 올라가고 있고 개발이 되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내 자손들한테 물려주고 싶은 미추홀구는 어떤 모습이면 좋을 것 같으세요? 토박이로서.
글쎄요, 애들이 지금은 저도 딸이 둘이 있는데 밖에를 나가지 않아요. 애들이 나가서 놀데가 없는 거야. 나가면 도로에 차들이 깔려있고, 나가봐야 밀폐된 공간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우리 어렸을 때는 그래도 막 나가서 뛰어다니고, 흙 만지고 그러고 생활을 했는데. 가끔가다 친구들 만나 술 한 잔 먹고 얘기하다 보면은 요즘 애들은 불쌍하다. 나가서 놀지도 못하고. 우리는 초등학교 때도 맨날 여름 지나면 쌔까맸어요. 전부 다. 밖에서 노느라 정신이 없으니까. 요즘 애들은 방에만 있고. 그냥 그게 흐름이 그런 거고, 환경이 그러니까 어쩔 수는 없는데 만약 이런 게 있었으면 어떻게 하고 놀았을지 조금 상상이 가더라고요. 실내에서 워낙 이런 게 잘 되어있으니까. 그런 부분이 좀 애들이 접했으면. 그래서 제가 애들을 기저귀 차고 있을 때부터 캠핑 데리고 다니고. 밖으로 막 돌아다니고, 길바닥에서 재우고 그랬었어요 일부러. 요즘 애들은 참 놀데가 없어요.
 
그러니까요. 가깝게 있는 곳은 개발이다 이런 것 때문에 바뀌고, 되레 멀리까지 돈 들이고 시간 내서 가야지만 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는 느낌이 드네요. 처음 말씀하신 것이 친수공간으로서 승기천에 대해서 기억하시고 계셨는데 진짜 조금 멀어진 느낌이 확실히 드네요. 자연, 우리가 잃어버린 게 무엇인가 그런 느낌이 드네요.
그 때 당시에는 모르고 지났지만, 좀 어느 정도 성인이 되고 나서 또 내가 공무원이 아니었으면 더 관심도 없었을 거예요. 없었는데 이제 이런 걸 접하고 뭐 미추홀구에 역사 이런 걸 보면 야, 저런 거는 좀 살려 놨었으면 좋았을 건데. 그런데 이제 개발이 우선이었던 시절이니까 어쩔 수 없었겠다. 여기까지만 하고 넘어가는 거죠. 왜냐면 이게 없고 있고를 떠나서 나한테 이게 있었다고 그래서 그렇게 큰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면 없어지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사람이 적응을 해서 사는 동물이니까. 그런 것 같더라고요. 그런데 기왕이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는데 뜯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죠.
 
지금 선생님 사시는, 사셨던 그 동네는 지금 막 다 헐리고 있나요?
거기 우리 아버지 살던데. 이주했어요, 주안 1구역. 지금 막 천막 쳐지고 거기 먼지가 어마어마해요. 참 희한한게, 저희는 승기천이 이렇게 쭉 있었잖아요. 그런데 여기를 안 넘어 갔어. 여기서만 왔다 갔다 했다는. 지금 남부초등학교 있는 그쪽 앞에. 이게 천이 또 딱히 길 정중앙은 아니고 어디쪽으로 휘어져서 구불구불했었어요. 조금. 지금처럼 쭉 되어 있는 게 아니라 구불구불 되어 있었어요되려 여기는 골목길이거든요. 골목길을 이렇게 걸으니까 이렇게 지형을 딱 봐도 지금 아무리 건물이 있다 하더라도 저기 지대가 높으니까 당연히 이쪽이 물길이었겠다 이런 식으로 가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이쪽(신기사거리)부터는 쭉 직진이에요.
 
확실히 큰길이 난 거겠죠? 이렇게 물길이 있었고 주변에 중심으로 논과 밭이 있다가 건물이 하나씩 생기다보니까 대로가 이렇게 나온 거겠죠?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거기, 사진이 없나?
 
사진을 구하고 있는데 구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구청이나 이런데 없을까요? 있을 법도 한데.
 
여기 계속 사시면서 이렇게 만나시는 분도 있으세요?
친구들밖에 없죠. 친구들. 초등학교 친구들.
 
그러면 그때 당시 까맣게 그을러서 물놀이하고 흙 놀이하고 그랬던 친구시겠네요?
그렇죠.
 
거의 미추홀구와 함께 나이 들어가셨네요?
하기야 뭐 이 주안바닥을 거의 떠나질 않았으니까. 서구 당화동에 한 3년 살고.
 
확실히 미추홀구에 물길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이 물길을 그리워하더라고요 다들. 물길이 아직 있었다면 여기는 생태적인, 자연적인 곳이 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이게, 그때 당시에는 모른다니까. 그때 당시에는 복개를 하면 왜 하는지 관심도 없고. 나이도 그렇고 중 고등학교 다닐 때는 더 그렇고. 그런데 이게 개발을 하게 된 게 80년대 초반부터 해서 막 하면서 제가 군대 갔다 오니까 90년도에 제대했는데 그때 연수동이 막 개발을 하고 있더라고. 연수동 그쪽. 할아버지 살던 동네 전부 다 보상하고 이사하고 난리가 났더라고. 80년대 초반부터 해가 지고 동네가 다 없어진 거예요. 이게 싹 없어진 거야. 그나마 형체를 조금 유지하는 게 신기시장. 그런데 거기도 이제 많이 없어진 거지. 빌라들 짓고 뭐하고 하면서. 그런데 거기 신기시장하고 승기천하고 안 멀잖아요. 거리가 있으니까 한 블록 차이잖아. 그런 부분까지 밖엔 이젠 뭐 기억이 나는 부분이 없죠. 시장을 가려면 논길을 헤집고 가야 하니까. 신기촌 가려면.
 
앞으로의 미추홀구는 어떻게 되면 좋을 것 같으세요? 공무원이 아니라 주민의 입장에서?
주민의 입장에서? 딴 데 이사 가야죠.(농담) 지금은 어떻게 변화된 모습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아요.
 
변화가 아니라 보존의 방식으로? 아니면 상생?
지금 뭐 승기천 이거 복개한 것을 뜯는다고 그러는 이야기를 정치인들이 이야기한 것 같더라고.
 
승기천의 복개 상관없이 미추홀구에 대해서 얘기해주세요
미추홀구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어차피 개발이 시작됐으니까. 여기는 너무 불명예스러운 기록들이 많아요. 이혼율, 자살율, 엄청 높아 일등이야, 넘버원. 너무 구도심이다 보니까 개발도 개발이고 있는 그대로 이렇게 살 것도 좋긴 좋은데 너무 개발이 앞서가니까. 별로 그렇게 좋지 않더라고. 그나마 저는 학익동 거기 사니까 산이랑 또 가까우니까. 뭐 어차피 아침에 눈뜨면 사무실 나와서 있고, 주말에는 뭐 밖에 나간다 그래도 가끔 산에도 가기도 하고 그러거든요. 그러니까 괜찮은데,
무 개발 위주로 하는 거는 별로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 하나니까. 삶의 문제가 부동산의 문제로 이렇게 역전되니까. 사는 공간이라면 필요한 그런 게 느껴지고 필요성이나 이런 것들이 삶의 거주공간으로서의 어떤 것들을 상상하게 되는데, 삶의 공간이 아니라 부동산으로.
 
그런 여유가 없는 거죠. 마음의 여유도 없고, 경제적인 여유도 없다보니까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우리 미추홀구 자체가, 구도심이잖아요. 주민들은 개발의 열풍에 휩싸여서 하다가, 해지하고 지금은 또 점점 구도심으로 가고. 저는 그래요, 개발도 좋고 다 좋은데. 일단 중요한 건 우리가 좀 역사적으로나 기념될만한 부분은 이렇게 좀 놓아두고. 개발은 당사자들 입장에서는 개발이익을 바라기 때문에 그러지만, 3자 입장에서 봤을 때는 저와 같은 생각이 있는 사람도 몇 있을 거라고요. 그런데 현실하고는 부합되지 않죠. 미추홀구가 너무 개발보다는, 좀 역사적으로 가지고 있을 만한 거는 가지고 있고. 개발도 중요하고. 두 개 다 공존할 수 있는 그런 마을, 도시가 됐으면 좋겠다는 이야기.
 
고생 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