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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명승팔경(平壌名勝八景) - 기자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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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대정사진공예소(大正寫眞工藝所)에서 발행한 평양명승팔경 사진그림엽서 8매 중 기자릉의 모습을 수록한 자료이다. 잔디가 덮인 봉분을 중심으로 조성된 기자릉의 능역이 넓게 나타난다. 봉분 전면에는 箕子陵이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고, 그 앞에는 장방형 석상과 장명등이 배치되어 있다. 능역 좌우에는 여러 기의 석수가 대칭적으로 놓여 있으며, 뒤쪽으로는 기와를 얹은 담장과 울창한 소나무가 능역을 둘러싸고 있다. 이러한 도상은 일제강점기 당시 기자릉으로 관리·인식되던 묘역의 공간구성과 석물 배치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기자는 중국 은나라 말기의 인물로 전해지며, 후대에 기자가 조선으로 건너와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기자동래설이 형성되었다. 평양의 기자묘는 이러한 전승에 따라 기자의 무덤으로 비정된 유적으로, 고려시대부터 기자를 기념하는 제향이 이루어지고 조선시대에도 숭배가 지속되면서 평양의 주요 역사유적으로 자리하였다. 그러나 현대 연구에서는 기자동래설 자체를 역사적 사실로 확정하기 어렵다고 보며, 평양의 기자릉 역시 실제 기자의 무덤으로 입증된 유적이 아니라 후대의 역사인식과 전승에 따라 기자의 묘로 인식·조성된 장소로 파악한다. 본 사진그림엽서는 이러한 복잡한 역사적 성격보다 三千年の歴史を語る箕子の陵, 즉 ‘삼천 년의 역사를 말해주는 기자릉’이라는 표현을 전면에 내세운다. 이는 기자릉을 평양의 장구한 역사를 상징하는 고적으로 제시하고, 이를 여행자가 감상할 수 있는 대표적인 ‘평양명승’으로 의미화한 당시 관광출판물의 역사서사를 보여준다. 실제 일제강점기 관광안내에서도 기자릉은 대동문·연광정·모란대·을밀대·부벽루 등과 함께 평양의 대표 관광명소로 소개되었다. 또한 동일한 기자릉 도판 또는 동일 계열 판본은 대정사진공예소가 제작한 6매·15매·16매 등 서로 다른 평양 명승 세트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본 자료는 「평양명승팔경」만을 위해 새롭게 제작된 전용 도판이라기보다, 대정사진공예소가 보유한 평양 명승 사진제판을 여러 종류의 봉투와 세트에 선택·재편성하여 유통한 사례로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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