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문 이야기
또 하나의 문화, 그 시작
  억압의 시대, 자유로운 시작  When?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소설 제목이자 배경인 <1984년>, 태풍 준(June)과 홍수가 전국을 강타하던 해에  Who?   정진경, 조옥라, 조은, 조한혜정, 조형 등 사회학, 여성학을 연구하던 여성들이  Where?   전두환 군사정권 하의 대한민국 서울, 그러나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는 곳에서  How?   자유롭게, 자매애를 바탕으로 개개인의 삶과 경험, 창작을 나누며  Why?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여성의 언어로 그 시대를 논하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가고자  What?  페미니스트 동인모임이자 담론적 실천모임, ‘또 하나의 문화’를 시작했습니다.     1984~2004년 모임에서 사단법인까지   | 1984년 ‘사회관념의 노예가 되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사회, 양성적 인간, 다원적인 문화 등의 대안문화 만들기’라는 목표를 내걸고 시작한 ‘또 하나의 문화’ 모임은 고정희, 김은실, 박혜란, 장필화 등이 합류하고 대학생들과 대학원생들이 대거 참여하면서 점차 확대됐습니다.  | 1987년 ‘도서출판 또 하나의 문화’를 설립해 여성 관련 도서들을 출판하며 문화예술계와도 적극적인 교류를 시작했습니다.  | 1988년 미술계에서는 ‘또 하나의 문화’ 기획을 통해 김진숙, 박영숙, 윤석남, 정정엽 4인의 여성작가가 참여한 시화전 <우리 봇물을 트자>를 개최했습니다. 이후 작가들과 번역, 삽화, 표지 작업, 여성학 스터디 등을 통해 여성주의적 문화를 중심으로 교류를 이어갔습니다.  | 2004년 모임을 시작한 지 20년 만에 사단법인으로 등록했습니다.   ‘대안 문화’에의 열망, 그 타는 목마름 80년대는 1980년 5월 광주부터 1987년 6월 항쟁까지 민주화운동으로 뜨거웠던 시기입니다. 1987년 2월 18일 21개 여성단체가 여성단체연합을 결성해 본격적인 정치투쟁에 나서는 등 여성운동이 본격화된 시기이기도 하지요. 이렇게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이 끓어오르던 시기에 등장한 <또 하나의 문화>는 그 이름에서부터 ‘다른 문화’ 즉 ‘대안 문화’를 향한 열망에서 시작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1984년도 제1호 ‘평등한 부모 자유로운 아이’로 시작해, 2003년 제17호 ‘누구와 함께 할 것인가’로 마무리된 <또 하나의 문화>의 슬로건은 1호부터 17호까지 동일합니다.   「또 하나의 문화」는 인간적 삶의 양식을 담은 대안적 문화를 만들고 이를 실천해 가는 동인들의 모임입니다. 이 모임은 남녀가 진정한 벗으로 협력하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랄 수 있는 사회를 꿈꾸며 특히 하나의 대안 문화를 사회에 심음으로써 유연한 사회 체계를 향한 변화를 이루어 갈 것입니다. 창간호부터 종간호까지 일관됐던 이 슬로건에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또 하나의 문화>가 추구했던 것은 한층 평등하고 자유로운 사회, 유연한 사회를 향한 ‘대안 문화’라는 것입니다.   동인회보 1호   관련자료 또하나의문화 홈페이지 성평등 아카이브 > 또하나의문화 네이버사전 > 또하나의문화 관련 기사 [책만드는사람들] 30. 또하나의문화, <한겨레>, 2000.10.08. 20주년 맞는 페미니스트 운동그룹 ‘또 하나의 문화’, <경향신문>, 2004.10.28. 출판도시 홍대앞 알아가기 – 015. 또 하나의 문화, <스트리트H> 2013.07.24.  학술커먼즈의 역사와 경험: <또 하나의 문화>의 기획을 중심으로 웹진<인-무브>, 2022.06.29.
  • 내면을 들여다보는 남녀동인 테스트
    여성동인에게 묻습니다. 1995년 7월, <또 하나의 문화>에서는 독립, 역사, 성평등, 민주시민, 문화까지 총 5개 분야에서 ‘나의 의식지수’를 점검해보는 총 53개의 질문과, 질문별 3개의 선택지(그렇다/판단이 안선다/아니다)를 여성동인들에게 내놓았습니다. 현실적으로, ‘독립’은 곧 경제적 독립입니다. 물론 ‘독립을 하겠다’라는 심리적 독립의지가 바탕이 돼야겠지요. 이에 따라 ‘독립성’ 문항은 경제적 자립능력이 있는지, 데이트 비용을 공평하게 부담할 것인지, 재산은 부부 공동명의로 할 것인지 등 ‘경제’에 관한 내용이 많습니다. 또한 혼자 당당하게 여행하고 식당과 극장에 갈 수 있는지, 자신의 일에 남탓을 하지 않고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지, 나이듦이나 남다름에 당당한지 등 심리적 내용까지 총 11개의 문항으로 구성됐습니다. ‘나’만 생각하지 않고 ‘우리’, ‘동시대인’과 ‘지구촌’을 인식하고 있는지에 ‘역사의식’ 문항은 총 9개가 주어졌습니다. ‘성평등’ 문항은 총 12개. 이성과 동성을 대할 때의 태도가 일관되는지, ‘여류시인’ 등 성차별적 언어를 쓰지 않는지 등입니다.  가장 문항이 많은 분야는 ‘민주시민의식’입니다. 약속을 지키는지, 계층간 불평등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시민의 권리가 침해당할 때 행동하는지 등 총 13개의 질문이 주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문자(글)문화의 정착과 이성적 성찰에 대해, 총 8개의 문항이 주어졌습니다. 하루 1시간 이상 책을 읽는지, 메모와 글쓰기를 습관화하고 있는지, 지나친 일반화를 자제하는지 등입니다. 열린 사회, 자율적 여성 : 자신의 태도를 점검해 봅시다 이 질문을 던진 지 2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 세대가 바뀌었다는 이야기지요. 2023년 오늘, 1995년에 던진 질문들이 썩 낡아 보이지 않는다면, <또 하나의 문화>가 지닌 선진성 때문일까요, 흘러온 시간에 비해 변화가 미미했기 때문일까요.   남성동인에게 묻습니다.  2000년 1월, <또 하나의 문화>에서는 남성동인들에게 ‘나의 의식지수’를 점검해보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인간해방, 여성과 남성, 결혼과 가정, 직장 생활까지 총 4개 분야에서 총 35개의 문항이 남성동인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분야별로 대표적인 문항 몇 가지만 추출해봅니다.  [인간 해방 운동-총 5개 문항 중]  ‘여성 해방 운동을 인간성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운동으로, 다른 인권 운동과 동등한 비중을 가지고 동시적으로 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과 남성-총 11개 문항 중]  ‘여성을 멸시하는 것은 비민주적 태도의 일환이라고 생각한다’  ‘남성 중심적 사회에서 자신의 언어와 행동이 때로는 여성에게 피해를 줄 수 있음을 인식하고 언행에 주의한다’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 그린 대중 매체(광고, 드라마, 영화 등)를 거부한다’ [결혼과 가정-총 13개 문항 중]  ‘가사 노동은 가족원 모두의 책임이며, 특히 부부간에는 합리적으로 분담한다’ ‘아내의 사회 활동을 존중한다’ ‘아내에게 시댁에의 일방적 희생을 기대 및 강요하지 않으며, 장인과 장모를 친부모와 똑같이 대한다’, ‘만일 아내나 다른 여성이 강간을 당했을 경우 다른 종류의 폭행을 당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식하고 대처한다’ [직장 생활-총 6개 문항 중] ‘같은 작업 같은 노동에서 남녀간의 임금 격차는 불합리한 것이므로, 이를 시정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여자 상사의 권위와 책음을 남자 상사의 경우와 똑같이 인정한다’ 2023년 오늘, 대한민국 남성들에게 다시 이 질문들을 드리고 싶습니다. 아마도 아버지 세대에게 주어졌을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과연 23년 전과 얼마나 바뀌었을까요?   지배문화 남성문화 : 또 하나의 문화 남성 동인 스케일  
  • 고정희의 삶과 문학
      ‘시인’이라는 두 글자로는 부족한 고정희(본명 고성애, 1948~1991)는 문인입니다. 시(詩)를 주로 썼으니, 시인으로 ‘분류’되지요. 그러나, ‘시인(詩人)’이라는 두 글자로는 그의 문학과 43년 삶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975년 27세 때 『현대시학』 추천으로 등단합니다. <전남일보> 기자와 광주 YWCA 대학생부 간사, 크리스천아카데미 출판부 책임간사와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을 역임했지요. 고정희는 모교인 한국신학대학의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대학생 문화에도 참여했으며, 1980년대부터 시작된 국내 여성운동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1984년 시작된 여성주의 공동체 모임 ‘또 하나의 문화’ 동인으로서의 활동을 토대로, 1988년 창간된 <여성신문>의 초대 편집주간을 지냈지요. 1975년 등단 이후 격동의 1980년대를 거치며, 고정희는 시인이자 여성운동가로서 시와 여성주의를 결속시켰어요. 여성으로서의 시선과 경험을 바탕으로, 여성의 역사성과 사회성을 형상화했습니다. 문학의 장르 중 시(詩)는 가장 ‘예술’에 가까운 형태이지요. 즉 암울한 시대, 복잡한 사회, 비루한 현실에서 저 너머의 아름다운 세계로 도피하려는 유혹에 빠지기 쉬운 이들이 시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고정희의 시는 현실도피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는 민중과 여성에게 가혹하던 1980년대, 민족과 민중 그리고 여성의 해방과 자유에의 갈망을 차갑고도 뜨겁게 담아냈거든요.  고정희는 1980년대 페미니즘 운동의 선구자이자,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한 시인입니다. 기독교 정신을 형상화한 문인이기도 하고요.   [노래] 고정희 시 - 하늘에 쓰네(2001) 링크를 클릭하면 해당 기록물로 이동합니다.   그가 받은 상, 그가 남긴 상 고정희는 43년의 짧은 삶 동안, 27세에 등단한 이후 16년 동안 총 10권의 시집을 내놓았습니다.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부터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여성해방출사표>(1990), <광주의 눈물비>(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까지. 그리고 사후에 출간된 유고시집으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1992)까지 총 11권입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남도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어 민중의 아픔을 위로한 장시집(長詩集) <초혼제>로, 1983년 고정희는 대한민국 문학상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전라남도 광주 북구에 위치한 광주문화예술회관에 가면, <상한 영혼을 위하여> 전문이 새겨진 '고정희 시비(詩碑)'를 만날 수 있습니다. 고정희 사후 ‘또 하나의 문화’ 동인들이 매년 그의 추모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1년부터 매년 고정희기념사업회와 해남여성의소리가 주최하고 '또 하나의 문화' 동인 등이 참여하는 ‘고정희문화제’가 열립니다. 전라남도 해남 땅끝순례문학관에서는 고정희의 생애와 작품세계, 유품 등을 전시하고 있고요. 사단법인 또하나의문화는 2000년 ‘고정희상’을 제정해, 여성예술 분야에서 의미 있는 활동을 한 이들에게 이 상을 수여하고 있습니다.   관련 자료 두산백과 > 고정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고정희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고정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고정희 관련 기사 고정희, 여성들의 배후가 되다, 김정은 문학연구자, <여성신문>, 2021.06.01. 남성 문단이 홀대한 아시아의 페미니스트 시인, 이세아 기자, <여성신문>, 2021.06.01. 고정희 타계 30년...죽은 시인은 힘이 세다, 이세아 기자, <여성신문>, 2021.06.01.
  • 소외된 존재를 보듬는 여성주의 미술가, 윤석남
      문학과 미술이 만나자 봇물이 터졌다 시인과 화가의 만남은 시와 그림의 어울림, ‘시화(詩畫)’라는 향기로운 결실을 남깁니다. 1988년 개최된 여성시화전 <우리 봇물을 트자: 여성해방시와 그림의 만남>은 여성해방운동 및 여성주의 문화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전시입니다. ‘또 하나의 문화’의 시인들과 함께 시화전 <우리 봇물을 트자>를 기획한 화가들 중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라 불리는 이가 있으니, 바로 윤석남 작가입니다.   불혹의 나이에 미술에 매혹되다 윤석남은 1939년 만주에서 태어나 1945년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만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한국 최초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를 촬영한 영화감독이자 극작가, 소설가인 윤백남입니다. 그 아버지가 1954년 병사하자, 어머니 원정숙은 졸지에 가장이 됩니다. 혼자 6남매를 책임져야 했던 서른아홉의 여인, 인고의 세월 속에 강해진 어머니 원정숙은 윤석남의 예술혼을 불태우는 매개체가 됩니다. 주부로 살다가 서른아홉에 가장이 된 윤석남의 어머니, 역시 주부로 살다가 마흔에 화가가 된 윤석남. 그는 서른여섯에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고, 마흔에는 그림에 빠집니다. 불혹의 나이에 미술에 매혹된 그의 자아는, 봇물이 터지듯 작품 속에 분출됩니다.   버려진 나무를 주워다 빛을 입히듯 윤석남의 미술은 여성과 어머니, 나무를 빼놓고 말할 수 없습니다. 족보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채, 존재도 없는 듯 살아갔던 여성들. 그 가운데 그의 어머니도 있었습니다. 윤석남은 버려진 나무를 주워다가 그 위에 먹으로 여성을 그리고 색을 입힙니다. 버려진 나무에 빛을 입히고, 가려진 여성을 비추는 작업. 빛나는 재능을 지녔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빛을 발하지 못했던 허난설헌의 생가를 찾은 윤석남은, 그곳에서 감나무 가지를 주워옵니다. 그 나뭇가지로 허난설헌의 모습을 만든 것이, 그에게는 최초의 나무 작업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시선으로 여성의 삶을 그린 <어머니의 눈>(1993)은 윤석남에게 이중섭미술상(1996)을 안겨줍니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도 않았고, 마흔이 넘어 미술을 시작한 윤석남은 그렇게 이중섭미술상을 받은 최초의 여성작가가 됩니다.   버림받은 개들을 달래는 진혼굿 이중섭미술상 수상전, <빛의 파종>(1997)에서 윤석남은 <999>라는 제목으로 여성 목상 999개를 설치했습니다. 전시공간은 여인들의 한을 치유하는 서사의 장(場)이 됐습니다. “1,000은 완전수지요. 천수를 누리라고 하잖아요. 완전수에서 단지 1이 부족할 뿐인 999는 여성들의 한스러운 상황, 1이라는 격차를 표현한 수입니다.” 2008년 가을에는 1,025마리의 개가 전시장을 채웠습니다. 인간에게 버림받은 1,025마리의 개들이 인간 관람객을 바라봅니다. 시선이 관람객에서 전시물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물에서 관람객을 향하는 기이한 경험. <1,025: 사람과 사람 없이> 전입니다.  “지난 5년 동안, 1,025마리 개를 만드느라 죽을 만큼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 일을 끝낼 때까지는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요.” 이 작업을 하는 동안, 그는 1,025마리 개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진혼굿을 하는 듯했다고 합니다. 또한 “인간에 대한 혐오와 존경을 동시에 느꼈다”라고 하네요. 그들을 버린 이도, 보살피는 이도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소재는 개들이지만, 주제는 ‘돌봄’, ‘돌보는 여성’입니다. 돌봄은 여성의 본능이 아닐까 생각해요. 5년 전 신문에서 1,025마리의 유기견이 사는 <애신의 집>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 많은 개들을, 할머니 한 분이 돌보신다는 이야기에 놀라고 감동했어요. 버려진 동물을 돌보는 이들 중에는 여성이 많습니다. 버려진 동물들과 그들을 돌보는 여성들. 이건 내가 꼭 담아야 할 주제라고 생각했어요.” 이듬해 초봄, 윤석남은 개들에게 환생을 선사합니다. 백팔 번뇌를 떨친 개들이 화사한 날개를 달고 환생을 기다립니다. <108마리의 나무-개들>(2009) 전입니다.   관련자료 동인 아카이브 > 윤석남 네이버지식백과 > 미술가 윤석남 위키피디아 > 윤석남 윤석남 홈페이지 텍스트 모음 윤석남 홈페이지 뉴스 모음 관련기사 윤석남 “보살핌은 여성에게 새겨진 본능”, 윤민용 기자, <경향신문>, 2009.02.02.
  • "가부장제를 타파해야 군사독재 타도 가능"을 외친 조옥라
      “모든 차별은 성차별에서 시작된다“ 조옥라 서강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는 1978년경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중 약 9개월 동안 농촌여성들과 함께 지내면서, 한국사회의 가부장적 구조를 통감했습니다. 그는 이를 계기로 여성문제 연구에 뛰어들게 됩니다. 그리고 1984년, ‘또 하나의 문화’ 모임을 창립합니다. 그처럼 사회학과 여성학을 연구하며, 같은 종류의 답답함을 느끼던 동지들과 함께였습니다. 정진경, 조은, 조한혜정, 조형 등이 그들이지요.   이들이 ‘또 하나의 문화’ 모임을 시작한 80년대는 군사독재시기였습니다. 즉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이 당시 운동계의 주류이고 핵심이었지요. 그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여성운동, 문화운동은 당장의 삶과 거리가 있는 것처럼, 즉 다소 배부른 넋두리처럼 취급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조옥라 교수는 ”성차별이야말로 우리 삶의 모든 고통과 맞닿아 있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즉, 성차별과 성에 대한 편견이 다른 불평등 및 편견과 합쳐져 사회를 더욱 불합리하고 불평등하게 만든다는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양성 불평등을 해소해야 빈부격차 등 다른 불평등도 해소되며, 가부장제를 타파해야 군사독재도 타도할 수 있다는 관점입니다. ‘또 하나의 문화’가 성차별, 가부장제에 특히 주목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지배문화 남성문화 : 인류 사회에서의 폭력의 대두 답답해서 시작한 ‘또 하나의 문화’ ”답답해서 못 살겠다“라는 한탄과, ”뭐라도 하자“,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계속할 수 있는 일을 하자“라는 제안 끝에 시작된 것이 ‘또 하나의 문화’ 모임이고, 무크지의 발행이라고 조옥라 교수는 말합니다. 그 ‘답답함’의 원인들 중 하나, 즉 당시 직면했던 문제들 중 하나는 제자들의 사회진출이었습니다. 여성들이 아무리 수준 높은 교육을 받아도, 일할 곳이 없었던 것입니다. ”유명한 학자들을 모셔다가 강의를 들어봤는데, 다들 현실과 동떨어진 이야기들만 하는 겁니다. 우리는 지식인들을 위한 전문서가 아니라, 일반 대중들을 위한 저술활동을 하고, 삶에서 느끼는 문제들을 공유하며 대안문화, 또 다른 문화를 추구하자고 했어요. 그렇게 해서 만든 게 <또 하나의 문화> 무크지입니다.“ <또 하나의 문화> 창간호의 제호는 ‘평등한 부모 자유로운 아이’입니다. 이 제호에 대해서도 말이 많았다고 합니다. ”사회가 평등하지도 자유롭지도 않은데, 어떻게 그런 부모와 아이가 있을 수 있냐“라는 것이지요. 조옥라 교수는 ”물론 현실, 특히 당시 현실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은 하나의 지향점이었다“라고 합니다.  ‘또 하나의 문화’는 토론의 장인 무크지 발행에 주력하는 한편, 여성예술인 지원이나 어린이 캠프 등 다양한 문화활동과 교육활동을 펼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누르는 교육 자라는 아이들 : 농촌의 어린이 교육   관련자료 동인 아카이브 > 조옥라 관련 기사 [달리는 여성] 여성학 분야 전문가 조옥라 교수, 이주연 기자, <가톨릭신문> [제1970호, 12면] 1995.09.17.  
  • 또문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