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으로 돌아 본 노회찬의 발자취
아키비스트의 발견
작성자 아카이브센터 게시일 2022.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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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데이터로만 저장되어 있던 기록이 서로 연결점을 갖게되면 새로운 의미와 지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키비스트의 발견>은 여러 아카이브에서 공개하는 기록과 콘텐츠를 살펴보면서 발견한 연결점을
새로운 맥락과 이야기로 풀어나가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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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생활을 하면서 직장을 옮기거나 직급이 바뀔 때, 우리는 새 명함을 만듭니다. 삶의 변화가 많을수록 다양한 명함들을 갖게 되지요. 그리고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과거의 명함들은 서랍 속에 차곡차곡 쌓여 그동안 걸어온 길을 말해주는 흔적으로 남습니다. 눈 위에 찍힌 발자국처럼 말입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며 명함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직업으로는 정치인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특히 4년마다 선거를 치르는 국회의원의 명함은 일반인의 명함과는 꽤 다른 용도를 지니는 것 같습니다. 아마 명함이 효율적인 선거 홍보물로 사용된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겠지요. 노회찬 아카이브에는 1995년부터 정치인 노회찬이 사용해 온 수십 종의 명함이 박물류 기록물로 담겨 있습니다. 역시 선거용으로 제작된 것이 많지만, 차례대로 살펴보면 꽤 많은 정보와 이야기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95년 이후 정치인 노회찬이 어떤 정당을 거쳐 왔고 어떤 신념으로 어떠한 미래를 설계했는지, 게다가 특유의 시원하고 유머러스한 언어감각까지 엿볼 수 있습니다. 크게 세 시기로 구별해 명함이 말하는 정치인 노회찬의 옆모습을 살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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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봄 그리고 장미 명함(1995~2004)

- 강서을 지구당 창당 준비 위원장 및 당무 위원 명함

1995년에 사용한 통합민주당 창당준비위원장 명함 아카이브에서 보기

1995년에 만든 이 명함은 나이 마흔의 노회찬이 잠시 정치 실험에 도전했던 한때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를 거쳐 진보연합이라는 단체를 이끌면서 진보 정당을 창당하고자 고군분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둔 시점에 그는 보수적 성향의 개혁신당 ‘통합민주당(속칭 꼬마민주당)’과 전략적 연합을 택하고 통합민주당의 당무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이는 총선에 승리한 후 진보정당을 창당하겠다는 현실적 설계였으나 결국 정치철학의 차이로 인해 총선을 앞둔 시점에서 통합민주당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러한 배경을 알고 보면 명함 속 노회찬의 사진 밑에 적어 넣은 “봄이 옵니다”라는 문구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집니다. 어쩌면 통합민주당 이후에 창당할 진보 정당을 암시하는 시그널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2018년 4월, '봄이 옵니다'라는 문구를 새겨 의원들에게 선물한 화분. 정의당 보도자료 보기

세월이 흐른 2018년 4월 2일, 정의당 원내대표 노회찬은 ‘평화와 정의의 의원 모임’ 20명에게 동료 의원들에게 야생화 화분을 선물하면서 화분에 “봄이 옵니다, 노회찬”이라는 팻말을 적어 넣었습니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들면서 명함에 적어 넣었던 ‘봄’이 하필 23년이 지나 삶을 마감하는 해에 다시 등장합니다. 그사이 진보정당 창당이라는 꿈은 이루었으니 2018년 그가 화분에 담은 ‘봄’은 ‘평화와 정의’가 활짝 피어나는 시대를 상징하는 것이겠지요.
 

- 국민승리21 정책기획위원장 명함

해외에서 진보 정치 상징으로 쓰이는 장미꽃을 심벌로 채택한 국민승리21의 로고 아카이브에서 보기

2000년 노동자의 지지를 받아 민주노동당이 정식 출범하기 전까지 진보정당은 3년간 ‘국민승리21’이라는 과도기 정당을 거칩니다. 이 명함은 노회찬이 국민승리21의 정책기획위원장을 맡고 있을 당시의 것인데 당명 앞에 그려진 붉은 장미가 눈에 띱니다. 붉은 장미는 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를 상징하는 꽃으로, 이후 노회찬의 삶에서 붉은 장미는 성 평등의 메시지로 자리하게 됩니다.
 

-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명함

시각장애인을 위해 명함에 점자를 새겨넣은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명함 아카이브에서 보기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민주노동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고 나서 제작된 이 명함은 매우 인상적입니다. 디자인이 완전히 배제된 채 오직 “국회의원 노회찬”이 전부입니다. 백지 같은 상태에서 국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각오의 표명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그 대신 오톨도톨한 점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점자 명함을 처음 도입한 국회의원으로서 약자를 대변하겠다는 진보 정치인의 결기도 느껴집니다. 이를 입증하듯 국회의원 노회찬은 당선 이후 전국을 돌며 95회 강연을 하였고 189차례나 공식 언론 인터뷰를 했습니다. TV 생방송 토론에 참여해 “50년 동안 똑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 먹으면 고기가 시커메집니다. 판을 갈 때가 이제 왔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긴 것도 이 무렵의 일입니다.
 
참고: 통계로 본 '민노당 입심' 노회찬의 2004년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228183

2. '호빵맨' 노회찬의 명함(2008-2011)

- 진보신당 18대 국회의원 선거 기호 6번 명함-호빵맨

자신과 닮은 호빵맨 캐릭터를 넣은 2008년 총선에서 사용한 명함 아카이브에서 보기

2008년 노회찬은 당내 노선 차이로 민주노동당을 탈당하여 진보신당을 창당하고, 곧이어 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했습니다. 이 명함은 당시 선거를 치르기 위해 만든 6종의 명함 중 하나입니다. 선거용이기 때문에 명함의 앞면에는 사진과 출마 기호, 구호가 강조되어 있고 뒷면에는 공약이 담겨 있습니다. 이 명함에서 진보신당의 상징색인 노란색 바탕에 호빵맨 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것이 눈에 띕니다. 노회찬 본인의 글씨체인지는 모르겠지만 “세균맨 물리치는 호빵맨, 노회찬 파이팅!”이라는 손글씨가 씌어 있습니다. 호빵맨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고 심술궂은 악당(세균맨)을 혼내주는 만화 속의 귀여운 슈퍼 영웅 캐릭터로, 노회찬의 이미지와 잘 맞아떨어집니다. “아름다운 하제를 노회찬이 만들겠습니다”라는 구호 아래에는 “하제는 내일, 희망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입니다”라는 설명이 있습니다. 한글 사용에 앞장서 온 노회찬의 면모를 엿볼 수 있습니다. 한편 명함 뒷면에 가득 적어 넣은 아래의 공약들을 모아보면 노회찬의 서민정치 노선이 뚜렷이 드러납니다.
 
명함 뒷면에 적힌 선거 공약들 아이들에게 희망찬 나라 믿을 수 있는 노회찬의 약속 현재 10%수준 공공보육시설 50%까지 확충, 아토피 전문 보육시설 설치 6세 미만 어린이 어느 병원에서나 무료 예방접종, 아동식품 안전평가기구 설치 학교 운영지원비, 학교급식비, 수업료 등 무료화, '밤엔 자자' 학원영업 밤 10시까지로 제한  노회찬이 '생태·교육·문화 1번지' 노원을 만들겠습니다. 걸어서 중랑천까지! 동부간선도로를 지하화하겠습니다! 편하게 고려대, 왕십리까지! 경전철 마들~은행사거리 구간을 연장하겠습니다! 지하철 4호선을 지하로! 쾌적하고 편안한 상계 뉴타운을 만들겠습니다! 노원의 신나는 변화, '검증된 국회의원'에게 맡겨야 합니다.  우리 노회찬을 다시 국회로! 사교육 조장하는 정치세력에 맞서 공교육의 질 향상으로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겠습니다! 환경재앙 불러 올 한반도 대운하 추진을 저지해 이명박 정부의 오만과 독선을 견제하겠습니다! 부자내각의 부자정치에 맞서는 속 시원한 정치, 유쾌하고 편안한 서민정치의 본보기를 만들겠습니다! 노회찬이 '생태·교육·문화 1번지 노원'을 만들겠습니다!!!


- 진보신당 서울시장 후보 명함

2010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사용한 명함. 그 당시 이슈였던 무상급식을 실시하겠다는 공약이 담겨 있다.
아카이브에서 보기

2010년 서울시장 출마용으로 만든 명함도 볼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엄마와 아이가 행복한 친환경 무상급식을!”이라 적힌 명함이 눈에 띱니다. 당시 선거에서 무상급식에 반대한 오세훈 후보에 맞서 내세운 공약으로, 뒷면에는 “꼭 ‘눈칫밥’을 줘야겠습니까? 4대강만 안 해도-삽질예산만 줄여도-따듯한 밥 한 끼 먹일 수 있습니다”라는 글이 담겨 있습니다. 풍자와 비유, 촌철살인의 노회찬표 어법을 느낄 수 있습니다.
 

3. 이름 석 자만 담긴 명함(2012-2016)

- 통합진보당 19대 야권단일후보 기호 4번 노회찬 명함

여론조사에 참여해 유권자의 목소리를 내달라 호소하는 2012년 총선 명함 아카이브에서 보기

2011년 진보신당을 탈당한 노회찬은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과 손잡고 창당한 통합진보당 소속으로 2012년 19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합니다. 노원구병 지역구에 재도전하여 찍은 선거용 명함 가운데 “국회의원 선거! 4월 11일보다 중요한 3월 17·18일!”이라고 대문짝만하게 강조한 것이 있습니다. 그 밑에는 “야권 단일후보를 선택하는 날입니다 꼭! 여론조사 ‘집 전화’를 받아주세요. 지지여론이 앞서도 ‘집 전화’ 안 받으시면 소용없습니다”라며 여론조사 참여를 독려하고 있습니다. 선거에 앞서 야권 단일후보에 뽑혀야 하는 현실을 말해주는 명함입니다.
 

- 진보정의당 국회의원 및 새진보정당추진회의 명함

한 달 차이로 서로 다른 당명을 새긴 2012년 명함 아카이브에서 보기

2012년 국회의원에 당선은 되었지만 당내 갈등으로 인해 노회찬은 다시 무소속 신세가 되어 의정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해 9월과 10월에 만든 두 장의 점자 명함이 당시 상황을 말해줍니다. 얼핏 똑같아 보이지만 9월의 명함에는 당명 대신 ‘새진보정당추진회의’라 되어 있고, 10월의 명함에는 '진보정의당'이라는 당명이 담겨 있습니다.
 

- 정의당 동작을 국회의원 보궐선거 기호 4번 노회찬 명함

2014년 정의당 소속으로 보궐선거에 출마해 사용한 명함 아카이브에서 보기

이 명함은 2013년 노회찬 의원이 삼성에게 떡값 받은 검사 명단을 공개한 후 의원직을 상실했다가 2014년 7.30 재보궐 선거에 출마했을 때 제작된 것입니다. 그 사이 당명이 정의당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뒷면에는 “세월호특별법 제정! 공직자비리수사처 신설!”이라는 공약이 적힌 명함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 정의당 국회의원 명함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 일본어 등 여러 상황을 고려해 만든 다양한 명함 아카이브에서 보기

2016년에 만들어 사용하던 명함들입니다. 이 4가지의 명함은 웃는 모습의 사진만 똑같고 내용은 조금씩 다릅니다. 국회의원 직함이 있는 것, 원내대표라는 직함이 있는 점자 명함, 일본어로 된 것, 소속 정당이나 직함 없이 이름만 넣은 것입니다. 각계각층의 인사를 만나는 국회의원이니 경우에 따라 다른 명함을 가지고 다녔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노회찬’이라는 이름 석 자만 있어 허전하기까지 한 첫번째 명함은 어떤 용도로 사용되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1995년부터 2016년까지 9번 정도 창당과 탈당을 반복했으니 정치인 노회찬이 한 당에 머문 기간은 평균 2.3년입니다. 사이사이 끼어 있는 무소속 기간만 해도 짧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명함 속에 비친 정치인 노회찬은 조금 고단하고 외로워 보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그의 명함은 분명히 진보정치의 ‘봄’을 맞기 위하여 지치지 않고 기반을 다져온 여정을 그만의 유머와 함께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회찬 아카이브 바로가기
https://archives.hcroh.org/hcr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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