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결 따라 살아온 삶
조각부터 인테리어까지, 일명 맥가이버
미추홀학산문화원
게시일 2022.12.22  | 최종수정일 2023.02.25



"이거 다 해보고 한 번쯤은 다 경험해서 몇십 년 하다 보면 자동으로 기술이라는 게 몸에 배고 익히고, 그러다 보니까는 일명 ‘맥가이버’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1. 출생에서 결혼까지

사장님께서 기억나는 어린 시절 이야기가 있을까요?
전 1958년에 인천 북성동 1가 1번지, 차이나타운 바로 앞에 지금 현 파출소가 있는 곳에서 태어났어요. 거기가 우리 집이었어요. 어린 시절에 제가 살았던 북성동이 그때는 배가 수십 척이 들어오는 큰 항구였잖아요. 그 당시에 배들이 들어오면은 조기, 갈치, 뭐 고등어. 그러고 새우도 나오고, 가을에 가서는 꼴뚜기. 뭐야 김장철에 많이 쓰는 거 밴댕이 같은 거 이런 것도 많이 나오고 그랬죠. 그리고 물텀벙이 뭐 이런 것도 나왔는데, 그 당시에는 아귀라는 말을 안 썼어요. 아귀는 전통 우리나라 말이 아니야. 일본서 넘어온 말인데 우리나라 말로는 물텀벙이야. 물텀벙이는 값어치가 없고 그러니까 막 버리고 그랬어. 그거를 구루마에다가 해서 큰 솥단지에다가 얼큰하게 끓여서 하역하시는 노동자분들에게 막걸리 한 사발에다가 그거 한 사발을 그냥 서비스로 이렇게 떠주고 그랬어요. 노동자 음식의 문화였죠. 우리가 어렸을 때 지나가면 새우하고 같이 옆에 놓고 팔고 그래요. 그러면 우리 어렸을 때는 장난기가 있으니까 가면서 새우도 집어먹고 그랬어. 그때 저것(물텀벙이탕)도 한 그릇씩 떠주고 그랬는데 그게 매우니까 우리 어렸을 때 맛이 안 나잖아요(맛을 모른다는 의미). 그래도 배고픈 시절이니까 주면은 좋다고 먹고 그랬으니까. 그런 추억들이 있어. 그런데 지금은 물텀벙이가 고급문화가 됐잖아요?

형제, 자매가 있으셨어요?
4남 1녀. 내가 넷째로 태어났죠. 형님 두 분 누님 한 분. 밑에 남동생 하나 있고. 밑에 동생은 대학생이었는데, 예전에 인천에서 데모가 한창일 때 아깝게 희생당했지. 하늘에서 부르니까 부르는 대로 빨리 갔지. 84년도에 주안에서 김대중 씨가 출마 선거하고 나오고, 전두환이가 할 때였는데, 인천 (구)시민회관 거기서 학생들을 대표로 해갖고 충청도 쪽 연수원에 교육받으러 갔다가, 여학생 네 명이 떠내려갔어. 우리 막내 애가 수영도 잘하고 그래서 건지러 들어갔다가 세 명은 구하고 나머지 한 명을 건지다가 거기서 못 나오고 그렇게 됐지. 인천 묘지에서 장례식을 했는데 김대중 씨가 화환 보내고, 운동권에 같이 있던 애들이 한 200m 양쪽으로 줄 서서 태극기 흔들면서 그렇게 해줬어. 원래 동생은 혼자서 중학교까지 검정고시를 패스하고, 영등포로 학원 다니면서 열심히 해서 대학을 들어가더라고. 근데 어쩔 수 없어. 부르면 가야지. 어떻게. 세월이 벌써 20년이 넘어가서.

형제, 자매와 관계는 어떠셨어요?
그 당시에는 우리가 좀 두텁고 그랬어요. 옛날에는 인천항이 하인천역이라 그래갖고 부둣가가 형성되어 있었어요. 거기서 우리가 배를 두 척을 부리고 있었다고 그러셨어요. 큰형님이 해룡호라는 조그마한 꽃게 잡는 배 사업을 하고 있을 때라 내가 틈틈이 형님 일을 많이 도와줬지. 내가 그런 일을 잘하고, 형들을 잘 따르니까 나한테 그런 거를 많이 해달라고 해서 형님들 하시는 일을 많이 돕고 살고 우애가 좋았지. 예전에 하인천이 폐쇄되면서 동지나 쪽으로 가는 큰 배들은 연안부두로 이주하고, 우리는 배가 중선이라 좀 작으니까 소래로 갔죠. 사업이라는 게 그렇잖아. 아버지가 고령이 되시고 그러면은 형님이 하시니까 다 같이 하게 되잖아요. 그래서 소래 가서 좀 하다가 배를 다 정리하면서 도림동에 정착했죠. 저도 이 나무 일이 좋다 보니까 나무 일을 하는 거지. 그렇지 않았으면 계속 배 타는 일을 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해야지!


 
작업하시는 모습


배 타면서 있었던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말씀해주세요.
아. 배는 요만한데 거기서 뭐 화장실이 있어요? 뭐가 있어요? 낚싯배에는 쪼그맣게 화장실도 만들고 그렇지만, 고기 잡는 배는 그런 게 없어. 그냥 뒤에 가서 바다에다 덜러덩 누고 오면 그만이야(당시 배에서 생리현상을 해결하셨던 점이 재밌었다는 표정으로 웃으시면서). 그렇게 배가 좁으니까 배에서 담배를 같이 펴도 말을 못 하는 거야(하하하). 형님하고 나하고 나이 차이가 한 13, 14년 차이 나거든요. 육지에 나와서는 그렇게 하면 매 맞고 혼내고 뭐 그러잖아요. 그런데 좁은 배에서는 말을 못 하니까 같이 담배를 폈던 게 에피소드지. 뭐 일하다가 기분 나쁘면 “너 담배 물고 할래? 뭐 할래?” 그러고 혼나기도 했지만.

그 당시에 하인천 부둣가가 어떤 모습이었고, 차이나타운은 어땠어요?
그 당시에는 차이나타운이 없었고 ‘중국촌’이었지. 중국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와 갖고 살던 동네 ‘중국촌’이었지. 차이나타운이라는 건 나중에 형성된 거지. 그 당시에는 그런 게 없었어요. 지방에서 올라온 노동자나 지게 지고 구루마 끌고 생선 날라준 그런 사람들 숙식 제공하기 위해 여인숙이랄까 뭐 그런 식으로 형성이 되었던 거죠. 근처에 있던 올림푸스 호텔은 외국인들 들어오면 글로 저기(숙식했다는 의미)하고 했는데, 어렸을 때니까 호텔이 있는 것만 기억하지 자세한 건 잘 모르죠.

어린 시절에 먹었던 음식 중에서 기억나는 음식이 있을까요?
어린 시절에 보면 동사무소에 보리를 타러 갔어요. 이렇게 납작하게 눌린 보리가 있어요. 기계로 눌려갖고. 그 당시에 꿀꿀이 죽이라는 것이 있었어요. 지금 부대찌개가 꿀꿀이 죽인데, 원래는 그게 미군 부대 식당에서 먹고 남은 거를 사다가 지저분한 거 다 골라내고 다시 끓여서 파는 게 부대찌개예요. 창영동이 원래 꿀꿀이 골목이었어요. 지금은 서점도 있고, 책방도 있는데. 예전에는 거기에서 꿀꿀이 달아놓고 다들 그렇게 팔고 그랬어요. 우리 어렸을 때는 다 그거 먹고 살았다니까요. 옛날에 백마장 부평 삼거리. 거기서 가져다가 여기서 제조했다고 봐야지. 못 먹을 거 지저분한 거 빼고 다시 끓여서 새우젓 깡통으로 한 사발 넣어서 만든 거지. 그때 새우젓 한 통이 500원 정도 했을 거예요. 한 사발에 3원 주고 사 와서 국수를 삶아서 먹든, 밥을 말아서 먹든 그랬어요.

학창 시절엔 어떻게 지내셨어요? 
북성동에서 태어나 여섯 살 때 도화 2동으로 와서 인천 서림초등학교, 동인천 중학교에 다녔지. 그다음에 고등학교는 못 갔지. 내가 그때는 약간 건달기가 있어갖고 학교를 안 갔지. 그 당시에는 중학교만 나와도 많이 다닌 거 됐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부터 태권도를 계속했는데, 중학교 다닐 때 김일용 사범이라고 운동을 가르치던 우리 학교 태권도 선생님이 있었어. 그때는 운동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우리들 깡다구를 가르치는 거야. 깡다구를 배우다 보니 우리 중학교 동창들이나 운동하던 친구들은 다 군에 가서도 특기생을 하고, 전국 체전 같은 데 나가도 다 상 받고 다 그랬어. 그래서 운동하면서 깡다구를 갈아서 지금도 운동 신경들이 다 살아있어. 지금도 다 쟁쟁해요. 깡다구가 뭐냐면 “강한 힘!” 누구한테 지지 않고 혼자 설 수 있는 힘을 가르쳤다는 거지. 뭐 완력이나 이런 걸 가르친 게 아니라 정신력으로도 혼자 어디 가서 일어날 수 있는 그런 힘을 가르쳤다는 거지.​​​​​​​

그럼 그 이후에 도화 2동에서 계속 거주 하신거에요?
아니지. 도화 2동 여기 체육관이 있었는데, 백인엽 장군이 선인 재단 안에 세운 거. 그게 원래는 전부 국고 땅이었잖아요. 그런데 강제 수용하듯이 해서 안 나가면 불도저로 집 주변을 뺑 둘러서 구댕이를 파내버렸으니까 출입을 못 하게 했었죠. 비 오고 그냥 푹푹 빠지고. 그렇게 살지는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쫓겨나듯이 해서 나가고 그랬죠. 거기서 뭐 보상을 줘 뭘 줘. 옛날에 그냥 강제로 이렇게 쫓겨나도 말을 못 했어요. 그냥 배고픈 시절이니까. 그때는 박정희 시절일 때니까 보리나 밀가루도 타서 먹고 그랬잖아요. 그렇게 쫓겨나서 만수동(도림동) 그쪽으로 이사 갔어요.​​​​​​​

그럼 결혼은 언제쯤 하셨어요?
지금 딸내미가 36살이니까 한 40년 가까이 됐죠. 우리 마누라는 전라도 광주 사람인데 내가 서울에 있을 때 만났죠. 서울에 살 때 출근하다 보면 맨날 그 시간대에 길에서 꼭 나하고 부딪히더라고. 볼 때마다 ‘아. 참. 이쁘고 괜찮은데!’ 이렇게 생각했죠. 그래서 쫓아다녔지. 우리 와이프는 미용실에 일 다녔는데 그 당시에 남자들은 미용실을 들락날락 안 했었잖아. 근데 나는 들어갔지. 그렇게 해서 다방에서 만나고 그랬어요. 당시엔 다방에서 커피도 팔고 음식도 팔고 그랬어. 그러다 보니 만나는 데가 거의 다 다방이고 그랬잖아요. 술집들을 잘 안 가니까. 내가 마누라 자랑하면 안 되겠지만, 키도 크고 예뻤어. 우리 마누라. 영화배우 촬영도 몇 번 나가고 그랬어. 김진아 배우가 찍은 영화도 우리 마누라가 대역하고 그랬어요. 그렇게 연애는 한 5년 정도 하다가 인천 간석동에 있는 목화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여기 제물포 수봉공원 올라가는데, 거기 옛날에 주택 많았었잖아요? 거기에서 신혼 생활을 시작했어요. 거기서 딸 하나, 아들 하나 낳고 살았죠.


2. 숭의동 마을 주변 옛 이야기 

어린 시절 제물포 주변 풍경이 어땠는지 기억나시나요?
제물포 기차역이 있었고, 그 옛날에 기차역 바로 위에 수인선 화물 철로가 다녔어요. 수인역까지요. 지금은 철로가 폐쇄돼서 다 집들이 있고 하지만, 거기가 옛날에는 철로여서 산책로도 돼 있고. 그리고 거기 옛날에 데이트 코스나 이런 식으로 많이 낭만적으로 다니고 그랬어요. 저기 밑으로는 옛날에 미나리 깡이라고 들어보셨어요? 미나리는 물에서 기르는 야채라고 봐야지. 미나리 저수지가 겨울에는 꽁꽁 얼면 거기서 썰매도 만들어서 놀았죠. 6살에 북성동에서 이사 와서 제물포 이쪽으로 다니다 보니까 이렇게 장롱 짜고 하는 공장들이 많았어요. 인천 항구로 목재가 많이 들어오고 그러니까 나무로 인해 종사하는 일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지나다 보면은 이쁘게 뭐 만들고 그러더라고요. 내가 어렸을 때부터 만드는 걸 좋아하다 보니까 가서 시간 가는지 모르고 구경하고 그랬는데, 그러다 보니까 이 일을 지금까지 하고 있네요.

기차나 철로에 대한 기억들이 있으실까요?
여기 숭의동에 경인선, 수인선 있었지. 그때는 전철이 다니는 시절이 아니잖아? 기차잖아. 칙칙폭폭 기차 다니는 시절 아니야? 그러니까 그때는 이 철로를 징검다리 식으로 사람들이 기다렸다가 건너가던 시절이예요. 근데 옛날에는 기차가 지나갈 때 안전장치가 없었어요. 그냥 반짝반짝 불만 틀어놓은 거야. 그래서 그 당시에 사고도 많이 나고 그랬어요. 쉽게 말해서 농사를 지으려고 소를 몰고 가다가 소가 안 가면 어떻게 하냐고. 소 끌고 가다 기차에 소가 깔려 죽으면 그 소고기 먹으려고 주우러 다니고. 옛날에는 다 그랬어. 그리고 리어카에다 짐을 많이 싣고 가다가 철길이니까 바퀴가 하나 빠져. 기차는 오는데 못 지나가 봐. 그 사람 욕심이 왜 그거 버리고는 자기 목숨을 살려야 되는데, 그냥 어떻게 저래도 이겨내다가 사고 나잖아. 이게 옛날에는 그런 사고도 많았어. 40년 전 이야기네.


3. 목조각에 입문한 계기

목공 일을 하게 된 계기가 있으셨을까요?
제가 목공 일을 배우기 시작한 게 74년도예요. 제물포에 있던 딱따구리 공예사였는데 공방처럼 하는 공예사는 그게 하나밖에 없었어요. 우리나라 인천 최초의 목공예사죠. 지금 제물포역사 뒤로 먹자골목 쭉 타고 들어가다 보면 중간쯤에 옛날에 유명한 차이나타운 중국집이 하나 있었어. 그 골목으로 이렇게 딱 들어가면 가정집이야. 골목 안에 터가 한 250평 정도 되는데, 딱따구리 공예사가 그 안에 있었어. 어렸을 때 그 앞을 지나다니면서 거기 기술자들이 삼국지 전쟁하는 장면을 조각을 하더라고. 그거를 보고서 ‘이거 내가 좀 해보고 싶다!’ 그랬죠. 내가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거든. 학교 다닐 때부터 내 그림 그림은 무조건 칠판에 딱 붙여갔어.​​​​​​​

딱따구리 공예사에서는 무슨 일을 하셨나요?
공예사 사장님이 공군 대령 출신이야. 공군 대령이니까 비행기로 미국도 다니고 그랬는데, 용산 PX 미군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근무하고 자기네 나라로 갈 때 나비장 같은 거 옛날 우리나라 전통 골동품을 선물로 사 갔었어. 우리 딱따구리 공예사가 그런 걸 납품을 했지.

그 당시 급여는 어떻게 사용하셨어요?
그 당시 제가 처음에 들어가갖고 1,500원 받다가, 그다음에 2,800원 받다가 한 3년 정도 되니까 4천 원. 그 당시 쌀로 계산하면 3,600원이었나 그랬을 것 같아요. 월급 타면 다 부모님한테 갖다 드리고 그렇죠. 그리고 제가 필요할 때 쓰고. 지금도 50년 가까이 된 그 조각칼을 갖고 있지만, 그 조각칼을 공장에서 주고 그러지는 않았어요. 개인이 사야 돼. 서울까지 기차 타고 가서. 그 당시에는 전철이 없었으니까. 종로 5가까지 가서 이 조각칼을 사가지고 와서 닦아서 만들고 닦고 갈고 해서 그렇게 만들어 가지고 쓰던 칼을 지금도 갖고 있는 거예요.
(조각칼이 들어 있는 서랍장을 여시면서)이게 한 40년 50년 된 거예요. 요것만 아니라 저기에 있는 것도 한 350자루 되거든? 왜 이렇게 많으냐면 부처님 눈 하나를 파도 깎는 게 다 틀리기 때문에 용도가 달라서 그래요. 눈 속 파는 건 각이 이렇게 삼각으로 되어 있죠? 눈을 팔 때는 또 이렇게 아로(둥글게)가 살짝 져 있죠. 이렇게 다 틀린 거예요. (뒤로)


 
사장님과 오랜시간 함께 해온 조각칼


딱따구리 공예사에서 계속 목공 일을 하신거예요?
아니요. 86년도에 옮겼어요. 여기 인천에서 했던 선배가 서울 광장동 회사 공장장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 선배 때문에 내가 거기 가서 조각하는 일을 계속했죠.​​​​​​​


4. 작품활동을 하러 간 속리산 법주사(주암사)

서울에서 일을 하다가 인천으로 다시 내려오신 건가요?
아니요. 제가 서울에서 일을 하다가 89년도쯤에 작품 생활을 하러 충청도 속리산 법주사에 들어갔죠. 그 당시에 절에 들어가서 쉬면서 어떻게 하다 보니까 불교 조각을 하게 됐죠. 절에서는 주로 은행나무로 불상이랑 용주를 조각했어요. 불상 뒷면에 그려진 그림을 탱아라고 해요. 탱아는 주로 불교 학생들이 많이 그렸어요. 나는 조각만 하고.

절에서는 어떻게 생활하셨어요?
그 당시는 우리가 다 해 먹고 살았어. 밥도 해 먹고 나물도 뜯어다 먹고. 이 절에서는 주는 거는 오로지 된장, 나물. 그 외에는 뭐 주는 게 없으니까 부족하면 우리가 알아서 저녁도 해 먹고 그랬어요. 겨울에는 칡뿌리 캐러 다녔죠. 쌀로 술도 내려서 몰래 먹고. 절에 있으면서 생활했으니까 무조건 아침 7시 땡 하면은 한 시간은 무조건 공양을 올려야 했어요. 절에서 스님들이 하는 거 그걸 따라가다 보면은 그 행동에 되게 돼 있어요. 그때 제가 작품 생활하면서 정직하게 살아온 걸 예쁘게 보셨는지 법주사 스님이 지금 성원인테리어 상호를 지어주셨어요. 내 모습이나 이런 걸 보고 후에 하면은 뭔가를 이룰 거다. 그래갖고 ‘원할 원, 이룰 성’ 자를 써서 그걸 꼭 주고 싶다고 그걸 가지고 꼭 깊이 가슴에 새기면은 좋은 일이 있을 거니까 그걸 간직하라고 하셔서 그 증거를 버리지 않고 내가 지금까지 갖고 있어요.


5. 인테리어 사업과의 접목

94년에 다시 서울로 오셨다고 했는데, 서울에서는 조각 일을 계속 하신 거에요?
내가 전문이 조각사 아니에요? 조각하는 길을 찾아가야 되잖아. 일본에 수출하는 작품 쪽으로 조각하다가, 98년도인가 99년도인가 그때서부터 인테리어 쪽에 뛰어들기 시작한 거죠. 그때는 인테리어라는 게 거의 처음이라 별로 없을 때죠. 거의 집수리 뭐 이런 개념이었죠. 인천 시내고 서울 시내고 대한민국 어디든 다 다녔죠. 인테리어는 종목이 워낙 넓으니까, 천장도 세면으로 깨끗하게 쳐야 되고, 몰딩도 돌려야 되고, 가구도 짜서 갖다 맞춰줘야 되고, 문짝도 달아야 되고. 저는 주로 조각도 하지만 집안 실내 안에 목조계단이나 집을 이쁘게 꾸미는 실내 인테리어 그런 쪽으로 다 할 수 있었죠. 옛날에는 거의 손기술로 직접 작업을 하고 만들어 냈잖아요. 지금은 자재가 규격화돼 있어서 기계가 한다고 보면 돼요. 속도전이죠. 그런데 기계가 못하는 부분이 있어요. 기계가 따라잡지 못하는 거는 손기술이 필요하고 쌓은 경험을 토대로 해서 작품을 만들어내는 거죠.

인테리어 작업은 어떤 걸 주로 하셨어요?
저는 주 종목이 목공 설비였어요. 그리고 타일, 페인트 같은 것도 좀 시키고 그랬어요. 인테리어 하러 외부 현장 나가면 작업 지시도 내리고 디자인도 내가 떠서 만들고 디자인도 점주하고 얘기하고 그렇게 했어요. 우리는 컴퓨터를 잘 못하니까 그림으로 그려서 보여주면서 작업했죠. 목공이 제 주 전문이었지만 목공 일을 오래 하면서 부수적으로 하다 보니까 타일도 직접 붙여야 되고, 전기선도 가서 이어야 되고, 형광등도 달아야 되고 하다 보면은 그거 형광등 하나 한다고 다른 사람 부르면은 그렇게 못하잖아. 이거 다 해보고 한 번쯤은 다 경험해서 몇십 년 하다 보면 자동으로 기술이라는 게 몸에 배고 익히고, 그러다 보니까는 일명 ‘맥가이버’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기억에 남는 인테리어 현장이 있으실까요?
처음에는 인테리어하면서 인천에 예식장 공사만 한 10년 넘게 했어요. 인천에 예식장은 내가 공사를 많이 했죠. 예식장 인테리어 분야에서는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죠. 부평 부흥로타리 8층짜리 동부 웨딩홀도 했는데, 거기 회장님이 십장생 가마를 주문한 거예요. 예식장에서 신부들을 태우고 가는 십장생 가마를 회장님이 원하는 그대로 해서 조각을 해서 해주니까 회장님이 마음에 들었는지 자기네 예식장 공사도 맡긴 거지. 인천의 목수들 한 4~50명 정도랑 한 3개월을 같이 공사했어요. 그때 그 회장님이 먼지 나고 그래도 자리를 뜨지 않고 공사하는 걸 다 지켜보고 있는 거야. 대단한 사람이야. 저 사람 일 못 한다 그러면 “이 반장! 저 사람은 못 하니까 내일 나오지 말라고 해” 그러면서 돈 그 자리에서 딱 주고 “내일은 사람 바꿔” 이 정도. 돈에 대해서 철저한데 일 시키고 일 욕심이 그렇게 많았어. 
그리고 동인천에서 답동 신포동 넘어가는 데 신신예식장이랑, 동인천역사 5층 안에 있는 예식장도 했어요. 하다 보니 소개로 연결해서 간석동 목화예식장도 하고. 특히 서울 종로에 있는 리버사이드 호텔 15층 연회장 그 홀 꾸밀 때 거기는 이태리식 기둥을 다 조각으로 했어요. 한 두 달 정도 걸려 일일이 다 클래식 조각으로 했었는데, 그게 좀 감명이 깊지. 영국이나 프랑스 같은 데 건물 보면은 다 조각품으로 돼 있잖아요? 그런 조각하는 인테리어를 굉장히 내가 많이 했지. 예식장도 그런 인테리어 느낌을 많이 풍기잖아요. 예식장 공사 하면 사람도 많이 필요하고 같은 일하는 분들도 많이 알게 되고 그래서 협조도 많이 받고 그런 게 좋았었는데 지금들은 그런 게 좀 없고 그러다 보니까.​​​​​​​

예식장 인테리어 외에 다른 곳의 일도 하셨나요?
도원역 앞에 보각사 절, 그런 데 가서 지어주고 한 게 있고. 조만간 보수 좀 해주러 또 가고 그래야 돼요. 바쁘다 보니까 다른 거부터 하고 그러다 보니까 못하고 그랬는데, 빨리해달라고 난리를 치는데, 자꾸 기둥이 썩어 들어가 갖고 마루가 자꾸 주저앉는다고 해달라는데 빨리 가서 해야죠. 바빠서 못 하고 있어요. 그리고 가끔 인테리어 업자들이 자기네가 하다가 막히고, 하기 힘들거나 못하는 거는 의뢰가 들어오면 우리가 좀 해주고 그러긴 했어요.

조각이 주전공이신데, 상호명에 목공예도 아니고 인테리어라는 용어를 쓰신 이유가 있을까요?
시대가 가면서 인테리어는 모든 걸 접목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니까 어느 한 가지 품목만 하는 게 아니고 어떤 거라도 다 할 수 있는 거죠. 나무면 나무, 철이면 철 뭐 다 하는 거죠. 저는 이거저거 다 경험을 이렇게 이제 하다 보니까 다 하게 되는 거죠.


 
사장님께서 제작해 놓은 창살



6. 나무 이야기

그럼 목공예를 하실 때 주로 사용하는 나무의 종류가 무엇일까요? 
옛날에는 우리나라 소나무도 많이 쓰고 그랬는데 지금은 거의 100%가 수입이잖아요. 그리고 그 당시에는 수입도 특수목이라 해갖고 재질이 이제 나왕, 구르미(호두나무), 오크(참나무)가 있는데, 나무 강질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있어요. 추운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는 나무가 좀 단단하고 강도가 세고, 더운 지방에서 자라는 나무는 연하고 무르고 부드럽고.

자재는 어떻게 구입하셨어요?
자재 구입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비슷해요. 지금 목재 단지 북항에 배가 들어오는데, 그쪽에 수입 목재 수입상들이 거기에 집합돼 있어요. 그 사람들이 그렇게 해서 자재를 쌓아 놓고서 판매하니까 거기서 사서 쓰는 거죠. 그전에는 목재 제재소라고 그러죠? 거기서 우리가 눈으로 보고 우리가 갖고 있는 경험으로 나무 재질도 만져보고 다 체크 해 보고 이제 선택하는 거죠. 예를 들어서 이게 30cm, 50cm 이렇게 mm수대로 맡겨서 재단 주문해서 받아왔는데, 지금은 규격화가 돼 있잖아요. 자재가 규격화됐으니까 규격화된 대로 그냥 제품을 사서 거기에 맞춰서 사용하는 거죠.

자재 구매 방식이 규격화 되었다고 하셨는데, 왜 그렇게 된 건지 아실까요?
예전에는 원목을 석남동 목재 단지 그런 쪽에서 구입했는데, 지금은 목재 자체가 우리나라에 원목으로 들어오질 않잖아요. 수입 자체를 막아 갖고. 왜냐하면 그 원목 자체를 줄로 묶고 배가 끌고 오다 보니까 나무 성분에 세균이나 미세한 벌레나 이런 종자가 들어오면 세균을 옮겨 갖고 이상한 병도 생기고 그러니까 정부 자체에서 원자재 수입을 금지시켰어요. 그래갖고 지금은 제재소 하던 사람들이 인도네시아나 보르네오섬이나 그런 데로 공장을 다 유입해서, 거기서 나무를 베서 제품을 만들어서 딱 규격화해서 약품 처리까지 해서 컨테이너 박스에다가 넣어갖고 인천으로 와요. 그 컨테이너로 자재가 오면 그 자재를 꺼내서 쓰니깐 문제가 없지.​​​​​​​

사장님께서는 주로 어떤 나무로 사용하시나요?
특수목 쪽으로 하면 주로 많이 쓰는 게 미송 그리고 특수목 나왕. 나왕 같은 거는 대부분 보르네오섬에서 나오는데, 일 년 사이에 푹푹 자라는 거 있죠. 마디카는 솜처럼 가볍고 칼질하기 좋고, 부드러운 피나무, 소련 아니면 브라질 이런 데서 오는 다글라스나 소송, 자작나무는 단단해요. 저는 작품에 따라 사용하는 나무가 달라요. 강도가 센 거는 센 대로 그 활용도가 있는 거고, 부드럽고 연한 거는 또 이렇게 그 나름대로 또 사용하는 데가 있고 그래요.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제품 소재 선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공하는 것도 딱 특색이 거기에 맞춰서 하게 돼 있어요. 연한 거는 기계를 안 하고 손으로 조각하고 만들고 깎고 도장 하고 이럴 때 쓰고, 강도가 센 나무는 기계 작업하면서 각을 살리는 작품을 할 때 쓰는데 쉽게 말해서 강도가 센 거는 만드는 과정에서 용도가 틀려지는 거지. 사람이 앉아서 부러지지 않는 벤치 의자라든가 의자를 흔들든가 아니면 침대라든가. 주로 깨끗한 거 좋아하는 분들은 소나무를 권하고 아기자기하고 예쁜 거 원하는 사람들은 저런 특수 목 쪽으로 장미 나무를 사용하고 그러죠.

재료 쓰실 적에도 손님이랑 뭘 쓰면 좋을지 이야기 나누고 주문받는 방식으로 하시나봐요?
그러니까 상담할 때 우리가 여기다가 적어갖고 원하는 거로 하면 장수 계산하고 그러죠. 자잿값 들어간 만큼 인건비도 똑같이 1 대 1로 그렇게 계산을 해요. 20년 전부터 그렇게 해왔으니까. 거의 지금도 한 150%까지 인건비를 잡는데 지금 계산해 보면 자잿값에 1 대 1로 하면은 간신히 인건비 정도 나오죠.

 
주문 물품 스케치한 노트(1)
  
주문 물품 스케치한 노트(2)

 

7. 주로 사용하는 도구와 기계

그럼 업장에서 사용하시는 기계들이 어떤 것이 있는지요?
절단 커팅기, 마루노꼬, 재단기가 있고, 일반 소모품으로 대패, 대끌, 미싱기라고 곡선으로 오리는 기계가 있어요. 커팅기는 직선을 자르는 거고 구멍 파는 기계도 있고 다 있어요. 종류는 한 대여섯 가지 이상 기본으로 가져야지 할 수가 있는 거죠. 목공 기계는 전기가 들어가서 움직일 수 있는 그런 기계지. 요즘 기계는 휴대용으로 쓸 수 있게끔 만들어져서 참 좋은 게 많아요. 배터리로 해서도 쓸 수 있고 전기로도 쓸 수 있고. 전동 공구 기계가 편리하게. 요즘은 거의 기계들이 많이 일을 다 맞춰주니까 특별한 기술이 없고 초보자라고 해도 이 눈썰미나 보는 각도 시각만 좀 잘 알아도 웬만하면 이제 할 수 있게끔 그렇게 되었지.
특히 목수 인테리어 쪽에는 대패, 끌, 망치, 톱 이게 기본 한 틀이에요. 톱은 썰고 대패는 깎고 망치는 때려서 박고 끌은 찍어서 따내고 파내고. 4대 원칙이랄까. 기계로 못 자르는 구석구석 커팅하는 거는 다 톱으로 쳐야 되니까 필수죠.


 
사장님이 사용하시는 기계(세깡, 원형 톱 등)


그럼 목공 기계들은 언제 어디에서 얼마에 구매하셨나요?
그 당시에는 목공 하는 데가 많이 성행했으니까 이런 기계가 많이 나왔어요. 서울 왕십리, 서울역 뒤 그쪽에 이런 공작소가 많았어요. 거기 가서 테스트해보고, 우리가 쓸 수 있는 기계인지 아닌지 만져도 보고 다 실험해보고 나서 용달 같은 거 해갖고 우리가 싣고 오고 그랬지.
예를 들어서 기계가 500 가든가 300 가든가 그러면 그런 기계 하나 마련하려면 돈을 좀 아껴서 큰마음 먹고 사는 거죠. 내가 뭐 안 사고도 그냥 할 수 있는데, 작업이 속도전으로 가다 보니까 기계를 쓸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니까 돈을 들여서라도 사용하게 되는 거죠. 절단기 같은 경우는 보통 300에서 400 가는 거고요. 그리고 원형으로 돌리는 미싱 기계 같은 게 지금은 나오지 않는데 이런 기계 같은 경우는 100만 원 선 가는 거죠. 각도면 치기 같은 경우는 그게 한 400 정도 갈걸요.​​​​​​​

이 기계(각도 절단기)는 어떻게 사용하는 거예요?
이거는 보시면은 이 기계가 반자동이라 그럴까. 이거는 날을 올려요. 이렇게 이거는 깊게 파고 싶다. 얇게 파고 싶다. 그러면 이렇게 해서 조정을 하는 거예요. 이렇게 조정하면 똑바로 잘라지잖아요? 이렇게 넣고 하는 거고 ‘이거를 이렇게 각을 펴 갖고 이렇게 딱 겹치게 해서 붙인다.’ 그러면 날을 옆으로 눕혀서 절단하는 거예요. 30도로 치려면 30도로 조정해 갖고 사용하는 거예요.

 
각도절단기


다른 기계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세요.
이 기계는 자동 대패, 그리고 이건 원형 톱이라고 그러는데, 그걸 세깡이라고 그러더라고. 자르고 깎고 하는 거죠. 우리나라 말로 하면 원형 톱 절단기라고 하면 될 것 같아요. 원형 톱 절단기는 나무에 따라 톱날을 바꿔서 사용해요. 연할수록 나무가 무르니까 깨끗하게 나오게 하려면 톱을 바꾸는 거죠. 톱날이 아주 미세하게 잘 들어. 톱날이 강도가 세면 이 톱날이 64날이 이렇게 있어요. 그래도 깨끗하게 나와요. 근데 이게 나무가 연한 나무는 120날로 이렇게 돼 있어요. 회전수는 같은데 날이 여러 날이면 깎을 때 곱게 나가겠죠. 이게 입자가 작으면 간격이 머니까 자르면 거칠 것죠. 그렇게 나무에 따라 사용에 따라 톱을 이렇게 기계에다가 바꿔서 끼는 거지. 그리고 그걸 조절하면서 쓰는 거죠. 모르는 사람들은 그냥 무조건 쓰면 되는가 하는데, 나무 조절할 때 분석을 해 갖고 정밀하고 미세하게 써야지만이 되는 거예요.


 
가계 벽면에 걸려 있던 원형 톱


조각을 할 때 사용하는 도구는요?
조각하는 거는 보통 제가 칼을 한 30년 넘게 갖고 있으니까 그 칼을 지금까지 쓰고 있는데, 서각을 하든 조각을 하든 인물을 파든 다 이게 종류가 이렇게 다 달라갖고. 근데 칼을 쓰다가 갈면 닳잖아요. 이게 조각을 하다 보면 부러지기도 하고 그럼 떼워서 쓸 수 없고. 왜냐하면 칼은 강도가 있어야 되기 때문에 불하고 닿으면 안 되거든 나무를 깎지 못하니까, 그러니까 부러지면 버리고 다시 또 우리가 만들어서도 쓰고 다시 사서 또 갈고 닦고 해서 다시 또 쓰고 그러는 거야. 조각칼 갈 때는 야스리라고 하는 줄을 사용해서 갈았어. 그런 거는 철공서 가서 구입할 수도 있고 이런 고물상 가서도 구입할 수도 있고. 그러다 보니까 처음에 50년 된 조각칼이 한 10자루 있고, 30년 된 것도 15자루, 근래에 만든 것도 한두 가지도 있고. 이렇게 사용하는 조각하는 칼은 어디 가서 덜컥 돈 주고 얼마짜리 그냥 물건 사듯이 사는 게 아니야. 그렇게 될 수가 없어. 왜냐하면 때가 묻은 거고 우리가 손수 만들어서 쓰는 거기 때문에 애지중지 좀 뭐랄까 갖고 가는 거지.


 
서랍 한켠에 넣어두신 조각 칼
  
사장님 손과 자주 사용하시는 도구들



지금 사장님이 만드시는 물건 중에서 어떤 거가 손으로 만든 작품일까요?
주로 이제 조각이나 저 간판 같은 거 현판 저기 지금 걸어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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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님이 손으로 직접 제작한 작품들


손으로 일하시는 분이시니 손이 보배일 것 같은데, 사장님께서는 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실까요?
이 손은 부모가 내려주지만, 하늘이 내려준 손이죠. 하늘이 내려준 손 이거는 아무나 이런 손을 갖지 못하죠. 이 손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하는 손이죠. 일생을 해도 못 따라오죠. 왜냐하면 과학자들이 연구하는 머리를 우리가 못 따라가듯이 이 손은 이 천하의 어느 지구상에 있어도 내 손은 못 따라오죠.​​​​​​​


8. 숭의 목공예마을에서

여기 숭의동에 업장을 언제 차리셨어요?
여기 들어온 게 97년도 이때 온 거죠. 그전에는 목공 분야는 동구 배다리 쪽 상권밖에 없었어요. 그랬는데 거기가 재개발로 구역 정리하고, 전철이 생기면서 다 철거하고 밀려나면서 목공예마을 이쪽으로 왔잖아요. 근데 그때만 해도 목공예마을 자체가 없었어요. 여기 와서도 한 이십 년 거의 지나서 목공예마을이라는 게 생긴 거야.
목공예마을 생기기 전, 초창기 때부터 이 동네에 있던 사람들은 다 죽고, 그만두고 때려치고 지금 한 세 사람 정도 네 사람 정도만 원래 본 터야. 수도공예사, 안토니공예사, 전원공예사 이런 사람들이 옛날에 같이 했던 사람들이고, 지금은 다 다른 일 하고 있죠. 제가 이 일한 것만 해도 52년째인데, 인천 배다리 그때부터 같이 했던 초창기 우리 선배들은 다 죽고 없잖아요.​​​​​​​

사장님은 어떨 때 이 목공 일을 하길 잘했다고 생각이 드세요?
저는 그냥 이 일을 하면서 한 번도 싫거나 그러지 않았어요. 그리고 내가 직접 만들어내는 걸 보면 만족감을 느끼고, 그냥 소비자나 상대방도 꼼꼼하게 진짜 잘해주신다고 고맙다고 그 소리를 들으면 기운도 나고. 또 그러면서도 사람과 좋은 인연도 많이 쌓고. 그런 게 좋았어요.

여기 숭의 목공예마을이 지속 가능하게 유지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즘 주변에 자꾸 건물이 들어서요. 건물이 들어오면 상권이 죽잖아요. 우리가 이야기한다고 해서 될까 싶어요. 미추홀구에서 알아서 잘하겠지. 그래도 여기가 기왕 목공예마을로 형성이 되었으니까 목공예 시설이나 이런 거를 활성화 좀 해갖고 앞 간판도 양쪽으로 좌우 사이즈도 크게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어디 가면 관광 도시라고 해서 특구 지역이라고 이렇게 걸고 그러잖아요. 그런데 목공예마을은 그게 없어. 서울 방향에서 오면 딱 1km 전방서부터 하나 해놔야 그런 것도 알고 찾아오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여기 다 와서도 못 찾아 물어보는 사람이 태반이야. 그런 거 좀 해놨으면 좋겠다. 이거죠.​​​​​​​


9. 앞으로의 계획 

앞으로 얼마나 목공일을 하실 계획이신지요?
한 5~6년 하고 이제 좀 쉬어야죠. 한 5년 정도만 더 하면 이젠 쉬어도 100세까지는 굶지 않고 살잖아. 우리 애들 다 장성했겠다. 애들은 또 나름대로 다 잘 살고 그러니까 좀 조용한 데서 공기 좋은 데로 가 갖고 편하게 스트레스 안 받고 남은 여생 저기 하면서 사는 게 좋지 않을까요?

5년 후 마무리를 하시게 되면은 그 이후에는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시나요?
그 이후는 천안 그쪽에 땅을 좀 사놓은 데다가 집 지어가면서 편히 살려고요. 지금도 농사짓고 있는데, 한쪽에는 저수지 물이 흐르고 한쪽에는 야산으로 돼 있는 소나무밭이에요. 거기에 우리가 300평 해놨는데, 집은 뭐 40평 정도 해갖고 국산 육송(소나무)으로 목조 주택을 지으려고 준비 중이에요. 한 10년이면 다 지을 것 같아요. 제가 기술이 있으니까 손수 지으려고 해요. 원자재도 딱 공급받을 것만 받고, 재활용할 수 있는 것들도 쓰고 그러려고요.​​​​​​​

사장님의 멋진 소나무 집이 기대가 됩니다. 여러 차례 긴 시간 인터뷰에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민기록일지
• 면담자 : 김순옥, 정지선 (면담지원: 허은영, 최지은)
• 원고정리 : 정지선
• 면담일시 : 2022.9.2. 13시 / 2022.9.17. 13시 / 2022.10.24. / 2022.12.15. 10시
• 면담장소 : 성원인테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