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결 따라 살아온 삶
벽화쟁이가 나무에 그린 그림
미추홀학산문화원
게시일 2022.12.23  | 최종수정일 2023.02.25



"나무를 태우면 테라피향이 있어요. 정신을 맑게 해주고 집중력을 키우게 되죠. 이런 판재 하나도 죽은 것 같지만 다 살아있는 거예요. 어떻게 보면은 그것처럼 늘 그냥 한결같고. 하는 데까지 하는 거구나."

 


1. 운명처럼 벽화쟁이의 길로 들어서다.

이름은 이현준이고 나이는 70년생, 쉰셋입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그때 지도한 고3 담임 선생님이 그림을 좀 하니까. “너는 공부는 못하니까.” 공주에 ‘공주대’인가 거기 ‘만화학과’가 하나 생겼다고. 그래서 “거기나 한번 가봐라.” 그랬는데 제가 싫다고 그랬어요. 그때 운동에 한참 빠져 있을 때였거든요. 얘기 거슬러 올라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무슨 일이 있었냐 하면, 제가 자전거를 너무나 좋아한 나머지 우리 어머님하고 거래를 했어요. “반에서 몇 등 안에 들면 자전거를 사달라.” 사준다고 약속을 해 갖고. 근데 거래했던 거보다 성적이 더 좋게 나왔어요. 딱 들고 가서 자신 있게 “자전거 사주세요.”라고 했는데 어머님이 ‘노’를 한 거예요. 이게 마음의 상처가 커 가지고 운동을 시작했어요. 초등학교 4학년 때 공부를 거의 접고, 배구 선수 생활을 했어요. 졸업하고 또 축구에 빠져서 축구부 생활도 하고.


 
준아트 이현준 대표님



운동을 계속 하다 보니까 학업은 안 되고. (선생님이 권하신 대학이) 싫다고 하고 나서 성적이 안 되니까 대학을 못 갔죠. 졸업함과 동시에 ‘뭐 먹고 살지?’ 그 생각을 하다가 그냥 무턱대고 걸었는데 ‘디자인 학원’이라는 게 하나 딱 보이더라고요. 저거나 한번 해볼까 그래서 접수하고.
그때 어떤 상황이었냐면 아버님이 건축업 하셨을 때 원래 단독주택 짓고 빌라 짓고 그러시는 환경에서 ‘아파트’를 하나 지으셨어요, 부평, 백운 쪽에. 그런데 그 아파트를 짓고 분양하고 있는데, 아버님이 제일 믿고 있던 오른팔이라는 분이 분양권 돈을 갖고 날라버렸어요. 그래서 아버님이 쇼크로 뇌출혈이 오셔서 쓰러지셨어요. 가세가 기울었죠. “막내한테는 쉬쉬해라.” 형제들끼리는 그걸 다 알고 있는 상태였고. 나중에 그 얘기를 들었어요, 다 커서. 아까 얘기했던 어머니에 대한 약간의 속상함. 그것 때문에 학업을 거의 신경 안 썼고. ‘내가 뭘 좋아하고, 뭘 해서 먹고 살아야 되지?’라는 고민하다가, 그냥 불현듯 본 게 그 학원, ‘예술 공원’이라는 학원을 접수하고, 학원비를 스스로 벌어서 다녀야 되겠다고 해서 막연히 그냥 버스 하나 타고서는 가다가 내린 곳 앞에 아르바이트 모집 있어가지고 거기 들어가서 면접 보고, 그날 바로 일을 시작하고, 그다음 날부터 학원 다니고 그러다가 군대 갔고.
말년 휴가 때였어요. 친구의 누님이 “나랑 같이 학원 다닐래? 제물포에 ‘공간디자인 학원’이라고.” “좋아요.” 그래서 국가고시 ‘광고도장기능사’라는 자격증 취득하고. 학원 원장님이 또 “동대문에 있는 회사에 한번 가 볼래?” “좋아요.” 그래서 동대문 회사 출판사 프로덕션에 가서 디자이너로 있는 와중에, 제가 군대 가기 전에 아르바이트했었던 형님이 전화가 온 거예요. 그분이 학원 원장님 됐다고. “속셈학원 올라오는 계단 벽이 좀 휑하니까, 애들을 위해서 여기다 그림을 넣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젤이나 캔버스에다가 그림을 그렸던 사람이 처음으로 큰 벽에다 그리고 하는데 그게 굉장히 매력이 있더라고요. ‘야, 이거 재밌는데. 해볼 만하겠는데.’ 싶어 그때부터 회사를 그만두고 벽화를 시작했죠. 그 학원 원장 형님한테 혹시 빈 교실이 있냐고 했더니 “교실이 많다.”고 하나 쓰라고. 거기 학원 한편에다가 사무실을 차려 놓고. 그게 95년도. 그렇게 그렇게 흘러서 벽화를 처음 시작하게 된 거죠.


2. 벽화의 매력에 빠지다.

저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속셈학원에 그렸던 그림을 사진 찍어서 전단지를 만들었어요. 상호를 ‘그린 그림’으로 명함도 만들고 전단지도 만들어서 어디로 갔냐면, 처음 시작이 속셈학원이다 보니까 학원가. 종합학원 있고, 미술, 피아노학원 있고 많잖아요. 어린이집도 있고.그런 대를 막 다니는 와중에 누가 그러더라고요, “어느 극장에서 오셨어요?” 그때 당시만 해도 극장에서 간판 하시는 분들이 다 손으로 그렸던. 그러니까 어느 극장에서 오셨냐고 저보고 하는데, “저는 극장 간판 하는 사람 아니에요.” 그런 설명도 드리면서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
그 당시에 거의 독학이었죠. 소재도 벽이라는 소재가 시멘트만 있는 건 아니잖아요. 샌드위치 판넬이라는 것도, 철제도 있고, 플라스틱 계열도 있고, 벽돌도 있고. 소재가 워낙 다양하고 하물며 벽이라는 건 또 유리일 수도 있어요. 그 당시에 어디 가서 물어볼 데가 없었죠. 제가 극장 계통에 있던 사람도 아니었기 때문에 찾아볼 데도 많지 않고 그나마 그때 인터넷이 조금 될 때였을 거예요. 인터넷 찾다 보니까 ‘벽화’ 쳐보면 옛날에는 ‘고분벽화, 쌍영총’ 그거 나올 때였어요. 2000년대 들어서면서 상업 벽화부터 서양화 전공하거나 동양화 전공한 분들이 벽화에 대해서 인식이 조금씩 생기다 보니까 많이 하셨어요. 저한테는 도움이 됐던 게 뭐냐면은 같이 대화를 나누고, 어깨 너머로 그림을 배울 수 있는 그런 환경이 조성이 된 거였어요. 디자인을 전공했었어도 다양한 사람들과, 회화 전공자들과 같이 그림을 하다 보니까 어깨 너머로 그 사람들의 터치라든가 그림들을 많이 배우게 됐죠.

어떻게 영감을 떠올리세요?
그게 너무 막연하진 않고요. 키워드를 찾아 나가려고 그래요. 이번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던졌을 때,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됨과 동시에 제 머릿속에서는 무수한 도안이 돌아다니죠. 결국은 뭘 그리느냐가 먼저가 아니고 주변을 좀 보게 돼요. 왜냐하면 골목은 좁은데 너무 확장성을 해놓을 수도 없고 확장은 돼 있는데 그렇다고 주변 환경을 무시할 수도 없고. 예를 들어서, 담이 있는데 위에 나무가 이렇게 있어요. 그 나무를 갖고서는 연장(延長)을 해 갖고 ‘이 너머를 한번 자연스럽게 다시 표현도 해볼까’라는 생각도 하기도 하고.


 
벽화작업


주변 환경과 잘어울리게 그림화 시키는 작업도 하고. 그리고 그 주변에 없는 건데 너무 식상하거나 삭막하다 싶으면 없는 거를 차용해서라도 표현해 주기도 하고요. 근데 주민들하고 같이 할 때는 아무래도 그 안에서 키워드, 핵심을 잡아내죠. 이분들이 원하는 게 꽃을 좋아한다, 그러면 꽃에 대해서 표현을 하거나 꽃과 관련된 곤충이 있으니까 벌이라든가 나비, 걔네들을 넣기도 하고.
그동안 해오면서 항상 지루하지는 않았어요. 똑같은 그림을 그릴 때도 있어요. 왜냐하면 그때 그 그림을 보고 “그런 류의 그림을 그려주세요.”라고 그러면 할 때도 있지만 그건 많지는 않고요. 한 벽에서 이 벽으로 옮길 때는 이 벽에 맞는 게 들어오기 때문에 똑같을 수는 없어요. 예를 들어, 이쪽에 해바라기를 넣는데 여기다 똑같이 해바라기를 넣는다 해도 똑같은 구도의 해바라기가 들어오진 않아요. 이 장소에 맞는 다른 해바라기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매번 할 때마다 신선하고 재미있어요.


 
벽화작업 모음



3. 고향 인천에서 지역 활동을 하기로 결심하다.

숭의 목공예마을은 어떤 계기로 오시게 되셨나요? 
벽화로 전국을 돌다가, 40줄이 되니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인천, 나고 자란 곳에서 활동을 하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갖게 됐어요. 그래서 ‘찾아가는 예술활동’이라고 인천문화재단을 통해서 ‘소무의도(소무의도 아카이빙 작업)’를 만났고. 여러 작가들이 가서 기록도 하고, 벽화로 남기기도 하고, 그분들 인터뷰도 하고, 나중에는 그걸 자료화 해서 책으로도 만들었어요. 일종의 뜻깊은 여행길이었죠. 그 활동을 한 2년간 하다가 거의 끝날 때가 돼서, 친구를 한 명 만났는데 그 친구가 마침 우각로 ‘문화마을’이라는, 거기를 제안한 거예요. 위에 보시면 전도관이라고 숭의동 109번지. 지금 개발이라 그 있던 자리들은 다 소실됐고. 전에 제가 올라가서 본 동네의 풍경은 그냥 옛날 풍경인 거예요. 허름하고, 개발이 들어간다고 해서인지 몰라도, 사람들이 많이 떠났고. 빈집이 많이 생겼고. 그러다 보니까 입주하는 다양한 예술작가들이 몰리는 거죠. 영화감독도 있고, 연극 연출자도 있고, 연극배우도 있고, 시인도 있고, 만화가도 있고, 저처럼 벽화 하는 사람도. 그래서 그 친구 제안으로, 공방을 하나 따로 얻어가지고 거기서 그 사람들하고 생활하면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죠. 

고향인 인천에서의 유년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가끔씩, 옛날 유년 시절에 살았던 곳을 그냥 한 번 순방한다고 그러죠. 저한테는 둘레길 같은 느낌으로. 아버님이 건축업을 하셔서 그때 지으신 집들을 다 둘러보고 다닌 적도 있어요. 몇 차례에 걸쳐서. 제가 한 번 둘러보니까 일곱 채 정도 남아 있더라고요.
저 어렸을 때 저희 집 앞에 천(川)이 하나 있었어요. 거기서 술래잡기 같은 거 하거나 담방구라고 해서 이렇게 도둑과 경찰 나눠가지고 범인 잡는 거 있잖아요. 그런 게임을 할 때 그 천이 가운데 흘렀는데 그걸 뛰어넘고 도망가면서 술래잡기 비슷하게 했던 기억이 있어요. 지금은 그게 다 덮여 가지고 천이 안 보이는데, 저 용일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뒤에 천이 흘러가지고 천 양쪽에 보면 골목과 골목 사이들이 많아요. 그래서 조그만 골목 사이에서 미니 축구 같은 식으로 하다가 공이 빠지면 공이 흘러갈 거 아니에요. 그걸 주스러 천으로 내려가던 기억들이.용일초등학교가 언덕이잖아요. 언덕에서 밑으로 그러니까 용일초등학교 후문 쪽으로 해서 쭉 내려가다 보면 거의 경사면 끝쯤에 아마 고 자리가 천 자리였어요. 엄청 길었죠. 천의 원류가 어디라고 한다면은 ‘수봉산 자락일 수도 있다’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 천에서 더 올라가면 그 위쪽은 막아놨었기 때문에 보이진 않았고 그 밑으로 물이 흘렀던 기억이 있거든요. 지금 ‘독쟁이고개’라고 그쪽부터 아마 내려오지 않았나 싶어요. 가운데 천이 있어서 수풀이 양쪽에 있었고. 그리고 옹벽식으로 돌 있잖아요. 그 높이가 제 키가 이렇게 해서 올라올 정도니까 1미터 한 2, 30? 그렇게 높이 옹벽이 쌓여있었고. 사이에 천 폭이 1미터 좀 넘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서로 담력 시험한다고 그걸 뛰어넘어 다니고 그랬던 기억이 있어요.그런데 (아버님이 건축업을 하셨기 때문에) 정들만 하면은 이사를 해야 해서 싫었죠. 제일 황당했던 때가 언제냐 하면 용현동이라는 데서 벗어나 부평으로 이사 갔을 때, 제 기억이 중2 때인가 그럴 거예요. 학교를 끝나고 집에 딱 왔는데 문이 열려는 있었어요. 근데 집에 짐이 없어요. 그래서 그때는 뭐 삐삐도 없고, 휴대폰도 없을 때잖아요. 그러니까 굉장히 막막하더라고요. 그래서 어디 못 가고 집 대문 앞에 앉아 있는데 갑자기 트럭 한 대가 딱 오더니, “야 타.” 그러는 거예요. 그게 우리 형이에요. “왜 우리 집에 짐이 없냐”고 그랬더니 “빨리 타. 우리 이사 갔어.” 그러는 거예요. 트럭 타고 간 데가 백운역인데 “우리 이리로 이사 왔어.” 그러는 거예요. 막내한테는 한마디 말도 안 하고 집이 이사를 갔던 상황이 그때 해프닝이죠(웃음). 지금 다시 생각해도 황당해요. 잊어버렸대요. 저를 잊어버렸대요. (웃음).
 
소무의도 아카이빙
 

4. 우드버닝, 벽화쟁이가 나무에 그린 그림

우각로 문화마을 시절 그때 목공예센터장을 만났고. 센터장도 부천에서 활동을 하다가 그걸 접고 전도관 안에다가 공방을 꾸민거예요. 저는 그림을 그리는 중에, 나무 그림 그리는 거를 좋아했어요. 그런데 마침 목공하는 친구를 만나니까 목공예에 관심을 갖게 됐죠. 그래서 그 친구랑 같이 협동조합도 만들어서 활동하다가, 그 전도관 ‘문화마을’이란 곳이 해체 위기에 와 있었고 그러는 와중에 여기 ‘창작 공방’이라는 공간이 생겼고. 그래서 그 당시에 평생학습관이 주관하고 있으니까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는 게 어떻겠냐.”라고 현 센터장이 제안한 게 ‘우드버닝’이라는 게 있었어서, “내가 모르는데 어떻게 시작하겠냐. 어느 정도 기술이 갖춰진 다음에 해보겠다”라고 해서 연습도 했고, 혼자서 거의 독학으로 공부를 했죠. 

 
창작공방 우드버닝 작품들


우드버닝 습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무엇인가요?
이게 기계잖아요. ‘우드버닝기’라고도 하고 ‘인두기’라고도 해요. 기계를 다루는 방법을 습득 하는 게 우선이니까. 이게 보시면 앞에 ‘팁’이 탈부착이 되는 건데 종류가 다양해요. 펜처럼 넓은 게 있고, 구슬처럼 된 것도 있어요. 팁이 활용 범위가 넓기 때문에, 이거를 완전 마스터는 아니어도 ‘이 정도 갖고 이거를 활용할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적응하는 데는 시간이 걸려요. 계기는 어쨌든 센터장의 제안으로 제가 우드버닝을 접했고. 현재까지 우드버닝 지금 한 7년 돼 가는 것 같아요.

 
인두기 끝 펜처럼 생긴 팁
  
창작공방


우드버닝 제작 과정을 조금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우드버닝에 필요한 목재는 정해져 있나요?
일단 제일 기본 틀은 좀 맑은 나무가 좋아요. 예를 들어서 보여드리면, 버닝은 나무를 태우는 거예요. 그런데 어두운 쪽에 태우면 잘 안 보일 거 아니에요. 때문에 맑은 쪽 나무에다가 버닝을 해요. 그러다 보니까 제일 많이 활용하는 게 자작나무. 자작나무 내피 쪽을 보면은 맑기 때문에 여기다가 버닝을 하는 거예요. 물론 버닝이 꼭 나무만 들어가지는 않아요. 가죽에도 되고, 종이에도 되고. 두꺼운 종이 같은 경우도 태우는 거니까, 태워지는 거는 다 할 수 있어요.
이게 테라피 효과라고, 나무를 태우면은 사람 정서에도 굉장히 좋은 테라피향이 있어요. 정신을 좀 맑게 해주고 집중력을 키우게 되죠. 아무래도 하다 보면 집중할 수밖에 없는 거고. 타 목공 수업들은 망치질하거나 톱질하거나 이런 것들이 있다면 저는 나무를 태우는 거기 때문에 톱질이나 망치질은 없잖아요. 제 수업에는 음악을 틀어드려요. 음악을 들으면서 작업을 하시죠. 좀 감성적인 부분이 많아요, 힐링도 되고. 처음 수강하는 분들이 오셔서 제일 많이 하시는 얘기가 “시간이 너무 빨리 가요.”

우드버닝 과정도 설명해 주세요.
버닝 순서라면은 (직접 시연을 하시며) 예를 들어서 도안을 판재에다가 올려놓고, 전사를 하는 거죠. 전사는 뒷면에다가 먹지를 대고 그림 따라서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여기(판재)에 밑그림 도안이 배겨지겠죠. 그 상태에서, 버닝기를 켜고 나무를 태우는 거예요. 그러다 보면 나무에 그릴 수 있는 거죠. 이런 걸 우드버닝이라 하는데 그냥 이렇게 있으면 작품보다는 판재 같은 느낌이 드니까. 액자에 껴 놓으면은 작품이 완성되는 거죠.
(판재에 인두기로 시연을 하시며) 천천히 대고서는 일종의 선을 하나 그을 수가 있는 거죠. 이게 태우는 거예요. 연필은 예를 들어서 하트 모양을 하나 했다 그러면 지우개로 지워지잖아요. 나무를 태웠기 때문에 지우개로 지워도 버닝한 거는 안 지워지죠. 이렇게 면을 채워나가면 하트가 하나 나오죠.
흐리게 표현할 때는 여기 온도 조절이 돼요. 그리고 속도로 조절을 할 수 있어요. 선을 연하게 쓰고 싶을 때는 좀 빠르게 터치식으로 움직이기도 하고, 어떨 때는 점으로도 표현을 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원을 무수히 긋다 보면은 연하게 얻는 동그라미가 나오기도 하고. 천천히 움직이면 진한 원을 구할 수도 있구요. 여기 보면 1부터 7까지 돼 있는데 이게 온도계예요. 한 번 켰을 때 온도를 조절해서 이것도 계속 머물고 있으면 진해지죠. 그런데 같은 속도를 유지한 상태면 연하게 얻고, 온도를 좀 올려놓고 같은 속도를 해도 진하게 나오기도 하고.
우드버닝기는 온도가 조절되는 게 있고 안 되는 게 있어요. 온·오프만 되는 기능이 있고. 현재 저희가 보유하고 있는 건 다 온도가 조절되는 거라서. 이 펜(팁)을 얼마큼 본인이 용이하게 쓸 수 있느냐에 따라서 작품의 질이 달라지죠.
처음에 수강생분들 오시면 이 판재를 나눠드리고, 지금처럼 이런 선 긋기 연습을 제일 먼저 해요. 그 시간이 실은 제일 중요해요. 이분들이 처음 버닝기를 접하기 때문에 (판재에) 연필 선으로 다 그어 놓은 다음에 이걸 따라서 (팁으로) 선을 긋는 거예요. 그러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기초 단계에서는 (진열된 작품을 보여주시며) 이런 캐릭터 모양이라든가. 이런 ‘건물이 있는 풍경’이라든가 이런 거를 작업을 하고요. 범주는 넓어요, 버닝이라는게. 예를 들어서 테이블이 하나가 있는데 테이블이 다 맑기만 하다 그러면은 테두리를 둘러 가지고 패턴을 만들 수도 있는 거예요. 저한테 배우신 분들은 주변 지인들 사진 받아다가, 인쇄 해 가지고 버닝으로 그려드리는 분도 계세요.

 
우드버닝 작품시연


초보자가 그 정도로 습득을 하기까지는 보통 얼마나 걸릴까요?
그거는 본인 능력 달려 있고요. 그리고 기초 수업을 토대로 해서 심화 과정을 따로 해요. 수업 과정에는 기초하고 심화가 같이 공존을 해요. 심화하신 분 중에 저하고 벌써 4년째 같이 하시는 분도 계시고. 그런 분들은 본인 작품을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죠. 그분은 그냥, 항상 오실 때마다 저한테 무슨 얘기를 하시냐면 “집에서 잘 안 하게 돼요.” 그러더라고요. 근데 여기는 동기 유발이라고 그래서, 수업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된 거잖아요. 여러 사람 같이 있고 하다 보니까 “여기 오면 하게 돼요.”라는 그분의 한마디가 좋은 것같아요.
본인이 와서 작업을 할 수 있는 그 시간대만큼은 행복하다고 하실 때. 본인들의 성장을 저는 옆에서 보는 거고. 그리고 그걸 봤을 때 가능성이라든가 그런 거. 단지 이 안에서 같이 얼굴을 맞대고 수업을 하는 시간대만큼은 편하고, 있는 시간 동안은 행복하고, 유익하고 그랬으면 하는 거. 제 바램은 그게 다죠. 저도 여기서 같이 있다 보면은 그 시간만큼은 재미있으니까요.
이게 총 10강인데, 10강이라고 해도 주 1회, 두 시간씩이니까 20시간인 거잖아요. 어떻게 보면 하루도 안 되는 시간인 거예요. 근데 그 시간 동안 본인이 열심히 해서 기초 떼고, 심화 1년 정도 저랑 같이 최소 60시간 정도를 해도 그리고자 하는 그림이라든가 이런 거는 다 표현할 수 있을 거예요.만족도는 되게 높아요. 센터에서 전체적으로 강좌들 다 설문조사를 해봤는데 우드버닝에 대해서 만족도가 좋더라고요.

  



5.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펜

우드펜 작업을 하시게 된 계기는 어떻게 되세요?
그것도 참, 그러니까 벽화도 제가 그런 얘기했잖아요. 직장을 다니고 있는데 아는 형님이 그림 그려달라고 해서 뜻하지 않게 그림 그렸는데 그게 재밌어서 그 분야로 뛰어들었듯이 실은 버닝도 마찬가지예요. 해보니까 나무 불태우는 게 좋으니까, 다른 분들한테도 추천할 수 있는 거잖아요. 그것처럼 우드펜 같은 경우는 옆에 지인분이 “니가 목공예 (마을에) 있으니까, 이분들 하고 겹치지 않기도 하고. 손재주 있으니까 한번 해보는 게 어떻겠냐.” 제안을 받아서 뜻하지 않게 그냥 “우드펜? 나 잘 모르는 분야인데.” 마침 이 밑에 서울공예 사장님 아는 분이 우드펜을 하셨던 분이 계셨어요. 그분하고 그냥 “전화 통화 한 번 하자.”고 그래서 그날 바로 술을 한잔 했어요. 그리고 그다음 날 제 공방에, (우드펜 제작) 기계를 여기다 갖다 놓고 “우드펜 하는 걸 알려주겠다.” 하셔 가지고 그분 기계를 다 갖다 놓고. 또 그분이 아는 수제펜 만드는 부품들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거를 바로 그날 또 사러 갔어요, 그래서 그다음 날부터 작업을 시작을 했고 자연스럽게 그 스승님한테 전수를 받은 거죠. 전수 받고 한 달 정도 됐나, 하다 보니까 저도 어느 정도 손에 익더라고요. 그래서 지금까지 우드펜을 하게 된 거죠.
제가 그런 게 있긴 있나 봐요. 뭔가를 하려고 할 때, 안 하려고 하면 막 끔찍이 안 하는데 막상 뛰어들면 ‘끝까지 한번 해보자’라는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수제 우드펜


우드펜은 제작에도 목재가 정해져 있나요?
단지 일반적인 나무는 쓰지 않고요. 특수목이라고 그래서 시중에 우리가 쉽게 접하지 않는 나무들을 많이 활용하죠.전 세계적으로 보면 나무 종류는 되게 많아요. 책에서 봤는데 만여 종 된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니까 나무는 색깔이 자연적으로 속이 빨간 나무 있고, 노란 나무도 있고, ‘퍼플하트’라고 해서 보라색 나무도 있어요. 흑단이라고 검은 나무도 있고요. 흑단은 특히나 물에 가라앉아요. 얘네들이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막 타공이 돼 있어요. 숨을 쉬어야 되잖아요, 수축 팽창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런데 그만큼 흑단은 밀도가 높기 때문에 물에 넣으면 가라앉아요. 대부분의 나무들은 뜨거든요. 돌처럼 단단하다는 얘기죠. 그래서 가공하기는 쉽지는 않아요. 다르게 얘기하면 너무 단단해서 가공은 용이하지 않다. 그래서 가구하시는 분들이 실제로 가구 업을 40년, 50년 하신 분들도 쓸 수 있는 나무가 100여 종도 안 된대요. 나무 수종은 만여 종인데 백여 종밖에 사용을 못 하시는 거예요. 우드펜 같은 경우는 더 많이 쓸 수가 있잖아요. 그래서 우드펜이 어떻게 보면 장점이 그거죠, 여러 나무를 접해볼 수 있다.그리고 우드펜은 말 그대로 펜이잖아요. 펜은 우리 인간하고 굉장히 역사가 오래됐잖아요. 글씨를 쓸 때, 옛날에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은 어렸을 때 ‘파일럿트’ 해서 잉크병 놔두고 만년필 촉에다가 대를 따로, 나무로 만들어서 펜촉 이렇게 껴가지고 잉크콕 찍어서 글씨 쓰고 했던 기억은 누구나 다 있을걸요? 그처럼 우드펜으로 만년필도 제작이 가능하고, 볼펜도 제작이 가능하고, 샤프도 제작 가능하고. 특히나 중요한 사인할 때는 대부분 다 수기로 사인을 하잖아요. 펜은 우리 인간하고 굉장히 오랜 역사를 지녔고, 상징적인게 있잖아요. 그런 맥락에서 보면 또 괜찮은 것 같아요.그리고 굉장히 소중한 사람한테 선물용으로도 좋고. 나무에다가 레이저로 각인을 해서 드리면 더 좋아하시죠.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펜인데, 거기에 본인 이름까지 있으면 세상에 진짜로 하나밖에 없는 거잖아요. 그니까 더 의미가 있죠.나무가 주는, 저희한테 주는 감성이라는 게 있잖아요. 그냥 느껴지는, 친환경적이고 자연적인게 있기 때문에.

 
수제 우드펜


우드펜을 제작할 때 어떤 경로로 그런 특수목들을 들여오세요.
목공예마을에 있다 보니까 이분들이 자투리 나무라고 그러잖아요. 쓰고 남은 나무도 있겠지만, 본인이 가구를 제작할 수는 없어요. 그렇다고 갖고 있자니 짐이기도 하고. 제가 우드펜을 한다고 그러니까 그걸 저한테 나눠주세요. “이런 자투리 나무가 있는데 이거 어디다 뭘 만들 수도 없다. 펜은 소량의 나무만 있으면 되니 니가 이 나무를 갖고 한번 해봐라.” 그래서 특수목들을 많이 주세요. 그래서 물론 구매한 것도 있지만, 얻는 것도 꽤 커요.​​​​​​​


6. 명명(命名)은 아내로부터

선생님 ‘준아트’ 공방은 선생님 성함에서.
이름 끝자, ‘이현준’이니까 ‘준아트’ 해가지고.




여담이지만 개명을 하셨다고 그러셨잖아요. 개명하시게 된 이유는 있으세요?
그거, 와이프가 원해서요 (웃음). 어느 날 갑자기 집에 갔는데 이름 세 개를 인터넷에서 개명하시는 유명하다는 분한테서. 이 이름 중에 제일 마음에 드는 게 뭐냐고 하길래, 제가 끝자가 동자였으니까 그래서 준, 이현준, 현준이 나은데 그래 갖고. 와이프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러더니 갑자기 “개명하자.” 그러는 거예요. “그래 그러자.” 그래 갖고.
실은, 저도 안에 그게 있었던 것 같아요. 저희 형제 셋이 ‘현’자까지는 다 돌림자인데 큰 형이 ‘이현근’, 둘째 형이 ‘이현찬’, 제가 ‘이현동’이었는데 마침 옛날에 용현동 살았고 친구들 사이에서 별명이 ‘용현동’이었잖아요. 근데 나이는 먹어 가는데 동자라는 이름이, “현동아, 현동아” 이러는데 무슨 애 취급하는 것 같고. 그때 거의 40대 조금 넘어서 개명한 걸로 알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불혹(不惑)이라는 나이에 너무 아이스러운 이름보다는, 그래도 마침 와이프가 난 별로 생각 안 하고 있는데 “개명이나 해”라고 던진 한마디가, “현준이 괜찮은데.” 뜻하지 않게 개명을 하게 됐죠.​​​​​​​

사모님 리더십이 있으신 거 같아요. (웃음)
저를 많이 케어해요. 제가 미용실에 안 간 지도 오래된 게 와이프가 제 머리를 깎아준 게 꽤 오래 됐죠. 슈나우저 두 마리를 키웠는데, 얘들 키우다 보면 미용을 직접 맡기는 게 아니라, 미용기를 사거든요. 와이프가 저한테 실험을 했어요. 개 머리 깎던 그 기계를 제 머리에다 깎았으니까요, 똑같은 기계갖고. 처음에는 약간의 실수도 좀 하고 그랬는데 (모두 웃음), 이제는 거의 프로 수준이 돼 가지고. 지금은 그 강아지들은 떠나 보냈고. 그래도 한 17년, 15년 둘 다 키웠으니까 사람 나이로 치면 굉장히 고령이죠. 17년이면 거의 90살, 거의 그정도 되니까요. 걔네들 떠나보낸 지가 벌써 한 3년, 4년째 되거든요. 아직도 와이프는 “더 이상 개는 안 키운다. 남은 개라고 너밖에 없다.” (모두 웃음) 제가 개띠고요, 집안에 개가 두 마리였다가, 아니 세 마리였는데 두 마리 가고 “남은 개는 너밖에 없으니 너라도 케어를 잘 받아라.” 이제 이런 거죠, 뭐.

잘 어울리세요. 미용실 가면 사실 이렇게 깎아달라고 요구하기에도 힘든 헤어 스타일 같으신데요.
저는 요구 못해요. 그냥 “앉아.” 그러면은. 저는 나름 헤어 스타일에 대해서는 해보고 싶은 건 다 했었어요. 삭발도 해봤고. 지금 이 머리도 와이프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머리니까. 저도 그냥 가만히 앉아서 머리만 빌려주면 알아서 헤어를 다듬는 거니까, 저도 만족을 해요.​​​​​​​

그러시면서 두 분의 사랑은 싹 트시고. (웃음)
머리로 싹 트나요? (웃음)

벽화 하시면서 사모님도 만나시게 되신 거죠? 
그렇죠. 그게 어떤 계기였냐면, 2000년 초반쯤 되겠네요. ‘거리미술’이라는 이진우 대표님을 알게 됐는데, 그분하고 만나게 된 것도 참 웃겼어요. ‘벽화쟁이’라는 간판을 걸고 제물포에다가 사무실을 차린 거예요. 한참 얻어 놓고 안에서 캔버스 앞에서 그림 그리고 있는데, 문 앞에서 그림자 하나가 이렇게 올 듯 말 듯, 들어올 듯 말 듯 이러는 거예요. ‘뭐지?’ 그러면서 딱 열었어요. 그분이 키가 좀 커요. 앞에서 팔자로 이렇게 들어갈까, 말까 들어갈까, 말까 이러고 있더라고요. (웃음)“어떻게 오셨어요?”이랬더니 쑥 들어오는 거예요.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 형도 바로 옆 건물 3층에서 벽화를 하시는데 어느 날 보니까 ‘벽화쟁이’라는 허연 간판을 내거니까 관심이 간 거래요, 그래서 왔대요. 근데 또 마침 이 형님이 그때 인터넷에서 ‘벽화 동호회’ 이런 거를 막 개설을 해가지고 활동하고 그랬던 거죠. 저보고 가입하래요. 그래서 가입했죠. 말 그대로 코가 뀄던 거죠. 
그 형님이 어떤 작업을 했었냐면은 자원봉사를 하러 다니셨어요. 저는 상업 벽화를 그동안 해왔던 사람인데 자원봉사라는 게 말 그대로 자기의 자본과 자기 기술을 동원해서 봉사하는 거잖아요. 어, 이거 생각보다 재밌더라고요. 상업 벽화는 계산적이잖아요. 돈에 맞춰 줘야 하고 어떤 그림도 그거에 맞춰서 그려줘야 되는 그런 시스템적인 거라면, 자원봉사는 아마추어의 세계지만 그래도 순수하게 사람들이 봉사하러 나오고 하는 그 마인드가 제 입장에서는 봤을 때 너무나 신선했던 거예요. 저는 한번 꽂히면 거의 올인하는 스타일이라서 생업을 팽개치고 자원봉사를 쫓아다녔어요. 하다 하다 나중에는 그 형님 일, ‘벽화 제작 교실’이라는 수업 책임 강사도 하고 자원봉사 벽화를 하러 전국을 돌면서 했으니까요. ‘거리미술’이라는 그게 전국구예요. 전라도에 ‘이번에 공사가 있으니까 인원을 모집합니다.’ 그러면 차도 제 차로 가서 그림 그리고 올라오고. 근데 자원봉사를 하다 보면 뒷풀이가 꽃이니까, 뒷풀이가 재밌잖아요. 그림판 있는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꽃 피우다 보면 재밌잖아요. 그러는 와중에 동암 쪽 어린이집에 벽화 그릴 일이 있었는데 와이프가 그때 처음 벽화 봉사하러 나왔던 거죠. 그래서 와이프가 마음에 들어서 제가 다음 날 모닝콜 해달라고 하니까 모닝콜 해주더라고요. 자연스럽게 만남이 이어져가지고 같이 살고 있어요.‘그림을 전공했는데 자원봉사를 한다는 마음만 있다면 좋다. 자원봉사 많이 한 걸 보면은 같이 살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있어서 그때 모닝콜 해달라고 했던 거고.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거죠.​​​​​​​

그럼 지금도 벽화 작업하시는 데 많이 참여하세요, 사모님도? 
그럼요. 많이 싸우죠. 같은 계통에 있으면 그림 스타일이나 풍이라든가. 와이프 같은 경우는 정석 코스를 밟아서 해왔던 완전 전공자고, 저는 사이드 적인 접근을 해서 온 사람이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의견 충돌이 좀 있었죠. 없을 수가 없죠. 한 지붕에 사는 사람이니까. 든든해요 근데. 한편으로는 든든하기도 하고 또 위로도 되고.


7. 젊은 세대가 숭의 목공예마을 장인들에게, 그리고 나무를 바라보며

이분들 한편으로는 존경스럽죠. 어떻게 보면 목공이 가공이 쉽다고 하기도 하지만 되게 어려운 작업이거든요. 그리고 ‘날물’이라고 그래서 톱니를 많이 쓰잖아요. 굉장히 위험한 직업이에요. 예전에 저희 협동조합 뒤풀이할 때 서로 꼭 자랑스럽게 “내 상처는 이거야.”라고 보여주시는데 이게 시간이 지나서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다들 그 당시에 큰 상처이기도 하고 얼마나 아프셨겠어요. 엄지의 절반이 없으시기도 하고, 배 어느 부분에 톱니자국이, 나무가 이렇게 훑고 지나간 자리. 이런 것들을 다 훈장처럼 갖고 계신데. 실명(失明)될 수도 있어요. 나무를 켜다가 나무가 역으로 팡 튀어 올라올 때는 총알처럼 빨리 날라오거든요. 눈을 찌르면은 그냥 실명되는 거죠. 그리고 거꾸로 밀다가 튈 때는 명치를 맞으면 순간적으로 사람이 숨을 못 쉬잖아요. 그래서 주변에 아무도 없으면 숨 못 쉬어서 돌아가실 수도 있는 거고. 굉장히 위험한 직업이에요. 그래도 이 몇십 년을 굳건하게 그렇게 해 오시는 거 보면 존경스럽죠.​​​​​​​

목공 일에 대한 본인만의 철학이나 이런 것들이 좀 있으시다면.
딱히 목공예에 대한 철학이라는 거는 없고요. 그냥 나무가 있으면 편해요. 산에만 나무가 있는 게 아니라 주변에 나무가 많잖아요. 그리고 실생활에 우리가 어딜 가도 나무가 다 존재하잖아요. 철학 개념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거고 그냥 편한 거. 판재 하나도 죽은 것 같지만 다 살아있는 거예요. 얘네들이 수축 팽창을 해요. 비가 오는 날 습도가 높으면 얘네가 머금어요. 그랬다가 다시 쨍쨍하면은 또 팽창하고 이런 거예요. 죽어서도 편안함. 어떻게 보면은 그것처럼 늘 그냥 한결같고. 하는 데까지 하는 거구나.​​​​​​​

 
시민기록일지
• 면담자 : 허은영 (면담지원: 정지선, 표기자)
• 면담일시 : 2022.9.7. 13시30분 / 2022.9.14. 14시
• 면담장소 : 창작공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