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결 따라 살아온 삶
로구로 외길 인생
미추홀학산문화원
게시일 2022.12.23  | 최종수정일 2023.02.25



중학교 끝날 무렵에 뭣도 모르고 큰아버님을 따라갔는데 굵은 톱밥이 끊어지지 않고 연결돼서 나와서 아주 신기한 거야. "야 저거 진짜 신기하고 괜찮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그랬어.

 


1. 목공은 나의 천직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하던 날 태어났어요. 근데 출생신고는 9월 16일로 되어 있어요. 전쟁 통에 아버지가 늦게 올린 거야. 어머니 고향인 영종도 운서리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는 서울 신당동 떡볶이 동네가 고향이야. 그 당시 아버님이 의용군으로 끌려가셨어요. 근데 거기서 탈출을 하신 거야. 여기 인천에서 송산까지 끌려가다가 탈출했어요. 그래가지고 걸어서 뭐 20일 만에 영종도를 찾아오셨대. 그때가 나 태어나기 한 일주일 전이라나 열흘 전에 여기를 오신 거야. 영종도가 마누라 고향이니까 거기를 찾아간 거야. 그리고 그해에 이제 내가 태어났지.

인천에는 일곱 살 때 왔어요. 집안이 다 인천 화수동으로 왔어. 송현국민학교를 5학년까지 다녔는데,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1학년 때 송림동으로 이사를 했어요. 아버님 친구분이 집을 하나 짓자고 그래서 그 친구분하고 집을 지어가지고 송림동에서 살게 됐어요. 송림동에서 송현동까지 학교를 걸어서 다녔어. 옛날에는 뭐 웬만한 사람들이 걸어 다녔죠. 그러다 5학년 2학기 때 정부에서 아이들 가까운 데로 다니게 하라고 해서 서림국민학교로 전학을 했어요. 어린애가 멀리 학교를 다니려고 해봐요. 옛날에는 송현초등학교 가는 길에 강물이 흘렀어요. 옛날 현대극장 송림시장 앞에 둑이 있었어. 그럼 비 오는 날 같으면 학교 가려고 건너다가 신발도 잊어 먹고 그랬지.

목공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어요?
내가 위로 형님이 있고, 여동생이 둘에다가 남동생까지 형제가 자그마치 여섯이야. 옛날에는 형제가 그렇게 많았어. 근데 형님이 20살에 돌아가시고 이제 내가 장남이 된 거야. 서울 왕십리에서 사돈 아저씨가 서울에서 공예사를 했어요. 그때 당시에는 공예를 해서 돈을 엄청 많이 벌었어. 중학교 끝날 무렵에 큰아버님이 “야, 너하고 사돈 아저씨 되는 분이 있는데, 거기 한번 구경 가보자” 그래서 난 뭣도 모르고 따라갔네. 근데 나무를 깎는데 아주 신기한 거야. 왜 신기하냐. 옛날엔 젖은 나무를 갖다가 딱 깎으면 줄기가 있어요. 나무가 젖어서 굵은 톱밥이 끊어지지 않고 연결돼서 나와서 아주 신기한 거야. 그래서 “야 저거 진짜 신기하고 괜찮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그랬어. 큰아버님이 “철성아 너 이것 좀 배워라. 고등학교는 가까운 데서 야간으로 다니고 기술을 배워라.” 아버지하고 얘기가 됐었나 봐. 내가 생각해도 기술을 배우는 게 좋을 거 같애. 지금도 그렇지만 우리 시대는 기술이 있어야 했어. 그때 갔을 때가 여름 방학이었나 그래. 그래가지고 그다음 해에 왕십리로 간 거야.
옛날에 왕십리가 상왕십리, 하왕십리가 있었어요. 나는 하왕십리라는 데서 기술을 배우게 된 거야. 그리고 그 해에 한영고등학교 야간을 들어간 거야. 거기 바로 옆에 사근동이라는 동네에 한영고등학교가 있어요. 옛날에 주 야간이 거기 있었는데, 옛날에는 학교마다 야간이 많았어요. 그리고 그때 당시에는 전부 다 어려워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야간으로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근데 거기 딱 갔는데 돈을 잘 버니까 이 사람이 먹는 것도 맛있는 거를 사주는 거야. 그 동네 앞에 중국집이 있었어요. 점심에는 중국 요리 같은 거 많이 먹고, 저녁에는 그 사돈 아저씨가 약주를 좋아해서 곱창 이런 걸 많이 먹었어. 또 그 사람이 서부 영화 이런 걸 좋아해. 옛날에 동대문 같은 데 가면 동대문극장, 명보극장 이런 데서 외국 서부 영화를 많이 했어. 프랭크 시나트라 출연한 영화 보러 갔다가 나와서 곱창을 사 주는 거야. 그러면 우리도 나이는 어렸지만, 그때는 술 한 잔씩 먹고는 했으니까, 그러면서 그 사돈 밑에서 기술을 배운 거지.
거기는 띠톱하고 실톱, 로구로 이 세 가지를 가르쳤어. 목공장인들은 웬만하면 이 세 가지로 다 했어. 지금은 중국산 바람에 여기저기 다 죽었지만, 옛날에는 발전하던 시대라 집집마다 일이 많았어. 띠톱은 스카시, 오비로꾸라고 그래. 남미나 유럽 이런 데서는 목선반이라고 하지만, 옛날에는 로구로라고 했어. 로구로는 일본 말이야. 그때 당시 일본 사람들이 와서 목공을 가르친 거야. 그러니까 우리 사돈 아저씨라는 사람도 일본 사람한테서 배운 거지. 내가 바로 그다음 시대야.
한국은 그래. 원래는 일본에서 다 건너 온 거야. 목공예 자격증 따러 가보니까 강사들이 일본에서 연수를 해가지고 온 거야. 목재진흥원에서 우리나라도 이제 일본처럼 활성화시키려고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활성화는 잘 안됐어. 우리야 이제 자격증 따라간 거지. 자격증이 있어야 사람을 가르치는 거거든. 우리가 가서 보니까 기술은 우리만도 못해. 배운 거 있으니까는 이론적으로는 많이 아는데 기술적으로는 우리만도 못하고 오히려 우리가 가르치고 왔으니까. 중학교 졸업하고부터 배웠으면 벌써 몇 년이야. 외래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더라고. 지금 자격증 시대에요. 자격증도 없는 선생이 뭘 누굴 가르치냐고. 이제 이런 식으로 되니까, 우리도 그때 당시에 얼마야 한 4~50만 원 줬지.


 
로구로 작업하는 모습


사장님 처음 배우실 때 로구로만 배우셨나 봐요.
그렇죠. 처음에 로구로로 시작한 거예요. 로구로를 배워서 지금까지 하는 거예요. 목공 일도 딴 거 많잖아요. 뭐 자르고 오리고 짜고 이런 거 하는데 나는 딴 거 안 하고 로구로 하나만 해. 목공이라면 나무도 자르고 가구도 짜고 별거 다 하는데, 나는 한길만 간 거야. 이렇게 한길만 한 사람이 드물지.

자격증은 몇 년도에 취득을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몇 년도야. 6년 됐으니까 2016년인가 그래요. 자격증 취득하고 강의도 시작한 거예요.
처음서부터 가르칠라고 그랬지. 기초부터 해서 목공예를 다 하려고 그러니까 이게 또 위험한 거야. 기계도 그렇고 또 우리 프로들도 손 많이 다쳐요. 프로들도 다 위험하거든. 그러니까 막상 또 가르치려니까 이게 위험해서 문제가 많더라니까 첨에. 쉽게 얘기해서 여기 오는 사람들은 기술을 배우려고 오는 건데 위험하니깐 우리는 조립해놓은 거 뭐 피스 가지고 타카나 하나 쏘고 하니 배울 게 있냐고. 근데 목공 일이 보기하고 틀려. 또 쓸 줄 모르면 아차 하는 순간에 다쳐서 위험해요.



2. 대우공예사의 시작

옛날에 내가 인천교에 있는 삼익가구라는 곳에 있었어요. 또 서진 피아노라고 그 옛날에 피아노 회사도 다니고 그랬어. 서진 피아노는 여주에 있는 건데 거기가 이제 대우로 넘어갔지. 그래서 옛날에 대우가 피아노를 만들어서 외국으로 수출했어요. 근데 옛날에는 외래 서진 피아노를 알아줬다고 외국에서. 그래서 서진 피아노 마크를 붙여가지고 대우에서 판매한 거야. 그때 당시에 서진 피아노에 후배가 있어가지고 “형님 여기 와서 반장도 할 겸, 뭐 돈도 많이 받게 해 드릴 테니까 오세요.” 하더라고. 자기는 그만두고 자기 사업하려고 그런데. 한 일 년만 있다 나온다는 게 어영부영하다가 5~6년 있었지. 거기에서 있다가 79년도에 나왔어.
대우공예사가 된 이유가 거기서 하청을 주잖아 전부. 그래서 내가 거기서 하청을 맡아서 했었어요. 걔네들이 갖다주기도 하고, 내가 가서 가져오고 그래서 여기 이름이 대우공예사가 된 거예요. 밖에 세워놓은 거에 대우 마크도 있잖아.

삼익 가구랑 피아노 공장에서 일하실 때도 로구로를 하신 거예요?
그렇죠. 옛날에는 이거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으니까 이제 우리는 특수직에 들어가서 그것만 한 달 치 저기 오다를 딱 줘. 그럼 그거 한 보름치밖에 안 돼. 그것만 하는 거야. 근데 우리는 특수직이라 보급을 많이 받았지. 그러고 또 새로운 거니까. 이렇게 깎는 거 보면 쉬워 보여도 안 그래요. 그래서 막상 배우려고 그러면 쉽지 않아. 근데 특히 여자들은 더 잘해. 손이 섬세해가지고 여자들이 잘 깎아요.

삼익 가구에는 언제 있으셨던 거예요?
내가 세화라고 벽시계 만드는 곳에 있었어요. 나무를 짧고 조그맣게 깎아가지고 반을 쪼개서 붙이고 막 그런 게 많았어. 후배들 양성하고 가르치고 그런 것도 몇 년 했어 내가 또. 그러니까 내가 직장생활을 세 군데서 한 거야. 세화라고 하인천에 있는 곳인데 거기서 하고 그다음에 삼익가구로 간 거지. 삼익가구 초창기 때 기술자가 없으니까 그래서 거기에 후배 되는 사람이 먼저 들어갔어. 그 후배가 “형님 일이 많아가지고 저 혼자서 안 돼요. 봉급 많이 받게 해드릴 테니까 오세요.” 그래서 내가 돈 많이 받고 특수직으로 들어간 거야. 거기서 있다가 공예사를 차린 거야. 원진공예사. 여기 신정공예사 있잖아요. 그 바로 옆에서 했었어요.

대우공예사는 몇 년도에 시작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79년도, 이걸 배웠으니 해야지. 그리고 그전에도 내가 여기 위에서 원진공예사를 했다고 했잖아요. 위에서 좀 하다가 잘 안됐어. 처음에 배다리 쪽에서 있다가 거기가 철거되면서 이쪽으로 넘어온다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혼자서 미리 와서 있었는데 손님이 안 몰리는 거야. 그러니까 일이 있어야지. 거래처도 뭐 크게 없었고 그러다 보니까 ‘아, 이거 안 돼 갔다. 거기서 이쪽으로 넘어올 때까지 몇 년 다른 데서 있다가 와야 되갔다.’ 했는데, 3년 후에 일로 넘어오더라고. 근데 내가 빠져나올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서진 피아노에서 이제 한 4~5년 있다가 과장한테 얘기를 했지. “내 사업을 한번 해보려고 그러니까 하청을 좀 주십시오.” 그랬더니 그렇게 하자고 합의를 봐 가지고 내가 일로 넘어와서 이제 하기 시작한 거야. 직장 생활은 한 십 년 넘게 하고, 대우공예사만 한 게 40년 이상이야. 세화 벽시계에 있다가 삼익가구 갔다가 원진공예사 했다가 다시 서진피아노 갔다가 대우공예사를 열었지.

그럼 목공 일을 시작해서 지금까지 하신 게 총 몇 년 정도 되셨어요?
목공예를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올라가면서 시작했지. 저녁에 야간 다니면서 배웠는데, 거기서 한 7~8년 배워가지고 내가 여기 인천에 아는 사람이 있었어요. 선배 아버지하고 이제 형님하고 하는 사람인데, 공예사를 했었어요. 근데 그 사람이 인천에 사람이 없으니까 옛날에 방직 공장에 그 실패 같은 거 있어요. 그런 게 일이 많이 나왔어. 지금도 지하상가에 가면 그게 있어. 옛날 방직공장에서 쓰던 거랑 틀려. 근데 지금도 만들어가요. 엊그저께도 자기네들이 나무 가져와서 잘라가지고 만들어 가요.

목선반을 하면 할수록 더 어렵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사장님 나름의 노하우가 있으신지 아니면 또 목선반 중에서도 이건 내가 좀 그래도 잘한다 하는 기술이 있으세요.
긴 봉이 있잖아요. 이런 거는 아무나 못 깎아요. 다른 공예사에서 의뢰받은 건데 못 깎으니까 나보고 해달라고 가져왔어. 내가 사용하는 기계가 다이가 길잖아. 이렇게 길게 하는 사람들이 없어요. 딴 사람들은 못 해요. 그리고 이렇게 길게 하는 사람이 없어. 이게 3600이니까, 2m 70~80까지 깎아요. 인천에는 이런 거 하는 데가 없어. 그리고 0.1mm까지 따지는 정밀한 거는 딴 사람들은 못 해. 도면을 볼 줄 알아야 되거든. 나는 삼익가구, 대우 피아노 이런 데서 도면을 보고 작업을 했기 때문에 그런 정밀 작업을 할 수 있지. 또 을지로 왕십리 이쪽에는 고급 일들이 많아요. 그런 데서 일을 배웠거든. 그러니까 내 실력은 못 따라오지. 악기에 보면 다리인데 동그랗게 깎는 것도 있고, 뚜껑 올리는 것도 있어. 그런 거 다 내가 한 거야 옛날에.

이 기계도 사장님이 직접 제작하신 거예요?
철공소에다 의뢰 해가지고 제작한 거예요. 옛날에 시작할 때 사용한 기계는 위에서 기름을 줘야 돌아가서 나무를 깎을 때 기름이 막 튀는 거야. ‘야 이거는 아니다, 베어링으로 해서 기계를 제작해야 되겠다.’ 베어링은 안에 들어가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기름이 튈 일이 없어요. 베어링을 찍어가지고 와서 만들어달라고 한 거예요. 한 35년? 40년 정도 됐지. 근데 몇 대 만들고 중단됐어. 이거 그때 당시에 120만 원 줬어요. 근데 다섯 대인가 만들고 중단됐어. 그 사람이 남는 게 없다고. 근데 이게 기름이 안 튀고 좋아.

아래 받치고 있는 나무도 그러면 한 번도 안 바꾼 거예요?
그렇죠. 이렇게 같이 사는 거지. 이걸 바꾸기 또 그렇잖아요. 밑에는 많이 썩었어요. 세월이 흘러가지고 막 오래됐잖아요. 딴 사람들은 다이를 그냥 없애고 조그맣게 모터 달아가지고 조그맣게들 해요. 그러니까 나는 길고 큰 걸 깎을 수 있는 거야. 딴 데서 못 깎는 거니까 비싸게 받을 수가 있어. 대우공예사 가면은 2m 30, 40~50도 깎아. 그런 게 이제 뭐 자주 오지는 않지만 가끔씩 들어와요. 그런 일이.


 
로구로 기계



3. 인천의 야구 - 야구방망이 이야기 

야구방맹이 같은 거 여기서 옛날에는 내가 막 깎고 그랬는데, 좋은 나무 나오면 여기 프로야구 선수들도 많이 깎아주고 그랬거든. 목이 굵으니까. 자기 손하고 무게하고 다 맞아야 되거든. 옛날에는 야구방망이를 다 수입해왔어. 자기네들이 여기 와서 자기 손에 맞게끔 깎아야 돼. 외국 사이즈가 한국 사람이 안 맞잖아. 걔네들 손이 크잖아요. 한국 사람들도 운동하는 선수는 손도 크고 등치도 크고 다 큰데도 외국만 못 해. 우리 한국 사람하고 틀려. 모든 게 다 커. 그러니까 뱅맹이도 굵어요. 그럼 자기 손에 맞게끔 해야 이게 돌리기도 좋고 무게도 좋아. 옛날에 김성갑이라고 아나 몰라. 가수 누구 유인가 그 사람 아버지도 와서 방망이를 잘라갔어. 여기 안 온 사람이 없어. 야구 선수 다 왔어서 우리 집에 가서 보면 사인볼이 몇 개인지도 몰라.

야구 배트를 만들기 시작하신 것도 그쯤이신 거예요?
그렇지. 프로야구가 생긴 지 40년 됐지만, 지금 내가 야구광이야 광. 김광현이를 내가 제일 좋아하고, 그다음에 최정 그래. 올해 SSG가 진짜 잘하지. 내가 코로나 있기 전에 우리 아들보고 “야 올해 아니면은 인천이 이제 우승하기 힘들 것 같다. 표 끊어라” 하고 서울까지 갔어. 그때 한동민이가 홈런을 때려가지고 우승을 한 거 아니야. 서울까지 간 날, 마지막 날 그것도 9회 말에 그때 이겼잖아. 두산을 잡은 거 아니야. 내가 “야 이제 내 생에 이런 거 못 볼 거다” 그랬는데 올해 또 우승이야. 볼 것도 없어.

그러면 야구방망이 만들어줬던 선수 중에 기억에 남는 선수가 있으세요?
많죠. 뭐, 먼저 감독했던 SK와이번스 2군 전 감독 김경기는 저 아버지가 삼미 슈퍼스타즈 그때 감독이었지 그 사람. 또 김성갑이 정민태 또 지금 여기 SSG에 있는 정경배, 이진영 하여간 인천에 웬만한 스타들은 우리 집에 다 왔어. 투수들은 또 박종환이 이런 사람들은 투수지만 이제 구경 같이 오는 거야. 같이 와서 어떻게 깎나 그거 구경하러 오더라고. 박재홍이 같은 사람은 손목이 우리보다 두 배 세 배 돼. 이렇게 굵고. 야구는 잘했지. 근데 되게 까다로운 사람이야.
김경기 같은 사람은 일본서만 방망이를 가져오잖아. 일본 거 꽤 비싸요. 여기서 한 이십만 원이면 걔는 뭐 백만 원에서 백오십만 원 그렇대. 근데 기계에 물려서 이렇게 깎으면 부드럽게 깎여. “캬!” 샌딩을 싹 하면 샌딩이 크게 나오니까 비싼 나무가 이래서 좋은 이유가 있구나. 그래서 나도 비싼 나무 쓰는 거야. 그리고 또 방망이가 탄력이 있어요. 저쪽에서 공이 터지잖아요. 딱 때리면은 탄력이 있어가지고 멀리 나가. 그래서 물푸레나무를 쓰는데 물푸레나무가 있어야지. 한국이 그래서 지금 뭘 쓰냐 단풍나무 캐나다산. 이 나무를 쓰는 거야. 이게 흔하니까, 수입하는데 싸고. 캐나다는 이 나무가 잘 자라나 봐. 그쪽에서 많이 수입해 와요. 그리고 야구 선수들이 지금 쓰는 게 이 이 나무야. 소프트메이플, 하드메이플. 그래가지고 하드메이플은 단단한 거고 소프트메이플은 약간 좀 연한 거 연질이죠. 연질은 뭘 쓰냐, 나무 중에서도 가운데 심이 있어요. 그거는 연해 그러면서도 당당하대. 그것만 빼서 또 쓸라고 그러면 가격이 비싼 거야. 그래서 그걸로 만들려면 진짜 돈 좀 많이 받는 선수들이 그런 거 쓰지.
그리고 대전하고 용인 가면은 사람 키, 몸무게, 손목 다 찍어가지고 그 사람들의 방맹이를 만들어줘. 지금은 이름도 다 써주고 전부 다 기계화 돼가지고 분석해서 도장, 채색까지 싹 해서 나와 지금은. 그런 공정이 없을 때는 우리가 다 해줬는데, 지금 그렇게 해주니까 거기서 해 오지 여기서 뭐 해. 우리는 왜 못 하냐. 나무가 없어. 나무가 그러고 또 한두 개씩 만들어 달라 그러면 돈도 안 돼. 그래서 아유 난 못해 거기 가서 해. 그래서 지금은 안 와요.
지금 누가 오냐 고등학생 애들 인천고, 동산고, 제물포고 유명하잖아요. 고등학생 애들이 와서 깎아가. 개인 그리고 친구들, 야구 선수들 몇 명 있어도 올 때도 있고 그리고 처음 시즌 때 학교에서 주는 게 있어. 오십 자루인가 몇 자루를 줘. 그거 다 쓰면은 자기가 다 사서 써야 돼. 프로선수들도 일 년 동안 쓰라고 한 백 자루인가 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다 사서 써야 돼. 그렇게 돼 있어.

학생들이 쓰는 야구 배트가 선수들이 쓰는 거랑 키가 다른 거예요?
어 키가 달라요. 국민학교나 이런 애들은 기장이 한 650mm대고, 중학교는 한 750mm, 또 고등학교 프로들은 850mm 그래요. 체격하고 키하고에 맞춰서 길이가 한 10cm씩 차이 나요. 고등학교 애들은 프로 선수하고 똑같이 써. 근데 그 옛날에는 그 저 알루미늄으로 된 거 많이 썼잖아요. 그게 탄력도 좋고 부러지지도 않고 싸니까 그것도 썼는데, 이 프로에서는 써먹을 수 없잖아. 그거 못 써먹게 하잖아. 예전에는 중학교 때까지는 알루미늄 배트를 많이 썼어. 지금도 중학교 때 알루미늄 배트 쓰나 모르겠네. 아마 지금은 나무 쓸 거야.

혹시 작업해 준 고등학생 중에 프로로 가는 선수도 있었나요?
최지만이 우리 집에 와서 그 전에 그 친구 하고 또 누가 있나 몇 사람이 있어. 동산고등학교 출신들이 다 프로에 많이 가 있잖아요. 동산고 출신 애들이 다 우리 집에서 거쳐 간 애들이야 고등학교 때. 프로 되고서 안 왔어. 유명해지고 바빠서 못 오는 거지 안 오는 게 아니라. 후배 애들한텐 얘기 듣지.
요즘은 야구방맹이 작업은 어쩌다가 들어와요. 여기서는 자기 마음에 딱 맞는 나무가 없어. 내가 깎아줄려고 해도 나무가 없어서 직접 나무를 가져오라고 하지. 그러니까 내가 깎아주고 싶어도 못 깎아준다는 거야.


 
공방 내 야구 선수들 사진


4. 목공 의뢰의 변천사

야구방망이도 깎고 지압봉 또 각종 다리도 많이 해요. 한 열 가지 돼요. 가구 다리 쉽게 화장대 같은 다리에요. 바둑판 다리 뭐 다리 종류는 다 하는 거야. 여기서 한 20가지 돼요. 그러고 이제 야구 글러브 끼는 거 있잖아요. 그러니까 나무로 하는 거는 여기서 다 한다고 봐야지 뭐. 굴 따는 거. 여기다 이렇게 꼬챙이 끼어가지고 쪼는 거예요. 이런 것도 많이 해요. 그리고 또 발 지압 협회에서 만들어가는 것도 있고 많아요. 지압봉에는 단단한 박달나무를 사용해요. 나무가 단단하니까 지압하면은 힘이 안 들어간대요. 그래서 단단한 나무를 쓰는 거야 사람들이. 그리고 박달나무는 대부분 국산이에요. 수입제가 없어요. 그거를 원하는 거야 사람들이. 그래서 한 군데에서 그전에는 많이 깎아갔는데, 시대의 흐름에 저기 해서 그런지 많이 좀 죽었어.
스위스에서 요들송을 할 때 쓰는 악기도 주문이 들어와요. 스위스에서 7~8만 원 씩하는 거를 여기서 제작하면 개당 1만 5천 원씩밖에 안 받잖아요. 나는 제작만 해주고 가져가서 칠해서 파는 거야. 공예사에서는 나무로 하는 거는 다 만드는 거지 뭐.

만드는 거에 따라서 나무 사용하는 게 좀 다르신가 봐요.
그렇죠. 나무가 다 틀리지. 소나무 종류도 뉴질랜드건 뉴송, 미국건 미송, 소련권 소송, 국산은 소나무 몰라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몰라도 그 나라 이름을 따서 불러요. 옛날에는 뭐 피나무, 향나무 국산들이 많았는데. 이제 잘 안 나와요. 산속 깊은 데 가서 베다가 또 건조 시켜야지. 나무가 문제가 제일 까다로운 게 뭐냐면 건조야. 건조 안 하면 다 터져버려. 그래서 건조하는 과정이 있지. 우리나라는 딴 나라에 비해서 나무가 잘 자라지도 않아. 보급도 잘 안되고 그러니까는 외국에서 다 사들이는 거예요. 할 수 없이. 근데 외국도 지금은 산림녹화 바람에 안 팔려고 그래.

나무가 예전이랑 요즘이 다르다 뭐 이런 이야기 하셨는데, 나무 수급을 어떻게 하세요?
친구가 대동 목재라고 제재소를 해요. 그 친구도 한 오십 년 됐지. 친구들이 전부 나무 개통 친구들이 많아. 나무 만지는 친구끼리 친목회도 하고 그래요. 그래야 나무도 싸게 수급하고 나무에 대해서 알고 또 돈 없으면 “야 외상으로 하자. 나중에 줄게.” 나는 한 달에 한 번씩 해. 그 친구는 한 달에 100만 원어치 하잖아요. 그럼 100만 원 말일에 끊어주는 거야.

예전에는 제재소가 가좌동 쪽에 많지 않았나요.
그렇죠. 가좌동이 제재 단지라 거기 제재 단지였어. 그리고 인천 여기서 송림동 로타리 쪽에도 많았어요.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 항상 그 집에 나무 냄새가 똥 냄새 비슷하게 나잖아. 물에다 담가가지고 있다가 배에다 싣고 오거든. 지금 만석동 동일방직 뒤쪽에 가보면 말도 못 해. 지금도 그래. 그 동네 옛날에 나무 껍데기를 까가지고 불을 땠거든 사람들이. 땔감이 없으니까 그 껍데기 베끼다가 굴러가지고 빨려 들어가서 죽기도 많이 죽었었지. 그 전에 진짜로 많이 죽었어. 대성목재가 거기 있었거든.
그전에는 우리가 잡목이라고 그래가지고 가서 보고서 사야 돼요. 국산은 단풍나무가 많어. 지금도 있는데 가격도 비싸고 또 국산은 나무가 별로 없어. 그래서 수입산밖에는 쓸 나무가 없어. 요즘은 국산은 다 비싼 거야 뭐든지. 그래서 국산 나무로 만들어주면 비싼 거야 가격이. 그러니까 할 수 없이 수입제를 쓰는 거야. 그리고 별 차이도 안 나고, 가져가는 사람도 비싼 거 해달라고 그러냐고. 그나마 수급되는 게 소나무인데 그런 것조차도 많지가 않아. 건조도 안 되고 그래서 나무를 쓰지를 못해. 건조 안 된 나무를 깎아서 만들어 놓잖아? 다 터져서 막 여기저기 갈라져서 상품도 안 돼. 근데 수입제는 안 그렇거든. 건조가 다 돼 있는 걸 팔거든. 통나무가 오면 재에서 켜가지고 한 열흘, 조금 두꺼운 거는 15일, 더 두꺼운 건 한 달 그렇게 해서 건조해야 돼요. 건조장에 전기로 다 하는 데가 있어. 또 스팀으로 하는 데가 있고. 전기로 다 해도 한 달 걸려. 이런 판재는 한 이십일. 그러니까 10cm 틀리고, 20cm 틀리고 다 틀려요. 가격이. 나무가 없어요. 지금. 그게 문제야. 그러니까 우리가 일을 못 해 나무 구입이 힘들어서. 기술을 가진 그런 목공인들이 부족한 것보다 지금 나무 수급이 더 시급한 거예요. 나무가 없으니 가격은 계속 올라가지.


 
목재



5. 내 삶의 원동력 가족

우리 형제가 6남매에요. 대부분 공무원 그리고 서울대학교 나온 친구들이 우리 집에 네 명이나 돼. 남동생은 서울대학교 나와서 통일원에서 국장까지 하다가 나오고, 여동생은 연세대학원 간호과장이고 동생들은 다 잘 됐어. 나만 이제 많이 못 배워가지고 이걸 하게 된 거고. 또 남동생 하나는 미국 기아자동차에서 공장장이고 다 그래. 다 잘 됐어.
그냥 그 동생들 가르칠래니까 그런 것도 많았어. 학교에서 졸업을 할래도 돈이 있어야지. 그러면은 사장한테 얘기해서 가불을 해서 또 갖다주기도 하고 옛날에 직장생활 할 때는 빌려서라도 갖다주고 입학금 등록금 졸업장 낼 돈이 없으니까 그러고 살았어. 동생들을 키웠다기보다 그렇게 많이 보탬이 됐지. 내가 큰형인데 그래도 돈을 조금씩 버니까. 그래서 지금도 동생들이 형을 무시하지 않고 옛날에 자기네 다 등록금 내주고 다 이렇게 됐으니까 잘해. 잘 됐으니까 그래도 보람이 있잖아. 제일 큰 형님은 옛날에 계셨는데 스물세 살에 폐결핵으로 돌아가시고 남동생 하나는 당뇨로 죽고, 것도 스물하난가 그래. 이상하게 둘이나 그렇게 죽었어. 옛날에는 다들 집집마다 많이 낳았어. 고생들 많았지 뭐.
인천에 뭐 꿀꿀이 골목이라는 거 들었나 몰라. 여기 창영동이야. 그게 창영국민 앞에 앞인데 옛날에는 없는 사람들이 꿀꿀이죽이라고 그래가지고 미군 부대에서 먹던 그 음식들 그거를 받아서 끓여 먹었어. 우리도 옛날에는 그거를 사다가 먹었어요. 형제들이 많고 그러잖아. 어머니가 다라이(대야) 큰 걸 머리에다 이고 사다가 먹였어. 어떤 건 물고 어떤 건 되고 막 그래. 이제 묽어서 먹기가 뭐하잖아. 그럼 강냉이 가루를 거기다 노란 거 그걸 넣고서 이제 끓이는 거예요. 미군 부대에서 먹는 소시지를 한국 사람은 못 만들어. 맛이 기가 막혀. 지금도 못 잊어.
옛날에 이렇게 어렵게 살았어. 다들 명절 때나 고깃국에다가 쌀밥 먹었지. 지금도 내가 밥을 빨리 먹는 편이거든. 왜냐 이렇게 반찬을 갖다 놓잖아. 형제가 많으니까 서로 하나라도 더 먹으려고 그래서 금방 없어져.
결혼해서 뭐 돈이 있어야지. 그때 당시에 인심을 안 잃었나 봐. 동네에서 다 왔어요. 사람들이 축의금을 진짜 많이 냈어. 근데 신혼여행을 가려고 그랬는데 돈이 있어야지. 집도 또 전세라도 하나 얻어야지. 나도 동생들 가르치고 그래서 돈 모아 놓은 게 별로 없었어. 그때 내 나이가 30이야. 우리 마누라가 이제 일곱이고 세 살 차이 나. 신혼여행을 온양 온천으로 가야 되는데, 돈이 없으니까 그냥 서울 한 바퀴 돌고 오자 그랬더니 마누님이 안 간대. 안 간다니까 어떡해. 그때 막내 처남이 전화가 왔어. 처남이 “우리 누나 고속버스 앞에 있을 테니까 걸로 오세요” 그러더라고. 가니까 거기 있더라고. 아무 소리 안 하고 고속버스 타고 서울로 간 거야. 한국민속촌 있잖아. 그때 개장한 지 얼마 안 된대요. 거기를 가자고 그러더라고. 우리 한복 입었었거든. 우리 집사람이 이뻤나 봐 그래도. 일본 애들이 몇 명이 왔었는데 막 사진을 찍고 그 난리가 났더라고. 그래서 거기서 뭐 하루 어영부영 뭐 보내고 또 자연농원도 그때 막 한참 생길 때야. 자연농원도 가고 그게 79년도야. 내가 결혼한 게. 차라리 그게 난지도 몰랐지.

어떻게 결혼하게 되셨어요?
중매반 연애반이지 뭐 그 시대에. 그때 당시에는 중매가 많았잖아. 누가 소개해서 다방에서 만나서 자유공원을 걸어서 홍예문 근처 쪽으로 이렇게 넘어서 그게 코스야. 그렇지 않으면 저기 연안부두 쪽으로 쭉 가고. 결혼해서 같이 사니까 처음에는 낯설은 거야. 어떻게 보면 남녀 관계가 그래. 처음서부터 서로 잘 알지도 못하고 오다 보니까. 애가 딱 들어섰는데 어떻게.
그때 당시에 또 뭐가 문제였냐면, 옛날에 저 마디카레 나무가 있었어. 근데 그 나무가 깎으면은 냄새가 나요. 똥 냄새가 비슷하게. 그때는 나무를 주로 많이 썼거든, 옛날에는. 근데 냄새가 나니까 내 몸에서 똥 냄새가 나는 거야. 손이 배가지고 그래서 처음에 살라니까 못 살겠더래. 변 냄새가 나니까 몸에서 나는 거 같이 생각 들었나봐. 나중에 그 얘기를 하더라고. 이혼하려고 그랬대. 그 냄새 못 살아. 우리는 그 냄새를 모르는데 딴 사람은 그 냄새를 맡는 거야. 우리는 맨날 그 나무를 깎으니까 냄새가 손에 이렇게 배는 거야. 그 나무가 그래.


6. 못 다한 목공 이야기

냄새 많이 나던 나무들은 언제까지 많이 쓰셨었어요.
시계 회사 다닐 때는 계속 썼지. 그런데 삼익에 딱 오니까 좋은 나무는 다 있는 거예요. 큰 회사니까 무늬도 기가 막힌 나무들을 썼어. 대기업 회장 그런 집에다 장롱 같은 거 제대로 된 나무로 만들어 납품시키더라고. 옛날에 삼익가구가 그렇게 컸거든. 삼익가구가 유명했어. 고급가구를 다 만들었어요. 좋은 나무는 다 갖다 거기서 만드는 거야. 장식장이니 쇼파니 용무늬에다가 뭐 꽃무늬에다가 해가지고 별 나무가 다 있어. 그리고 서진 악기도 그렇고. 악기 만드는 것도 대기업이라 좋은 나무는 다 거기서 쓰는 거야.

회사에서 만드는 과정이랑 이렇게 단독으로 작업하시는 과정이 다른가요?
어 틀리지. 큰 회사 같은 데는 기계로 반 사람이 하는 거 반 반자동이야. 기계에 나무를 걸면 위에서 딱 이렇게 찍어서 내려와. 그럼 한 칠십 프로가 모양이 돼서 나와요. 그런데 이게 윤곽이 뚜렷하지가 않아. 그러면 이거를 사람 손으로다가 다시 물려가지고 선명하게 만드는 거야 큰 회사에는. 반자동으로 하니까 많이 나와요. 처음서부터 사람 손으로 깎으려면 오래 걸려요.
그리고 그때 당시에는 나무도 싸고 많고 그러니까. 그때는 호황기지 호황기. IMF 전에까지만 해도 호황 누린 데가 많아. 그 이후로는 나무 수입도 잘 안되지. 또 중국산이 계속 쏟아져 나오지 그러면서 어려워졌지.

그 큰 계기가 IMF인가요?
크지. 근데 그 전부터 서서히 한국이 중국이나 일본한테 밀렸어. 거기가 워낙 큰 시장이니까. 물건도 좋고. 예전에는 중국산이 안 좋았는데, 80년대 이후로는 한국하고 맘먹게 물건이 깨끗이 나오더라고. 그전에는 막 엉망이었는데 기술이 발전이 된 거야. 가격이 이제 우리하고 거의 맞먹어요. 인건비도 비싸지고 나뭇값도 비싸고 그러니까 그런지. 개수 많은 것들은 아직도 중국에서 해 오지만, 웬만큼 만드는 거는 이제 한국에서 해. 백석이나 검단, 김포 쪽에 가면 자동화 시켜가지고 하는 사람들이 많아. 그래야 숫자가 나오고 돈이 되니까. 하나하나 다 깎으려고 하면 힘들어요. 단가가 안 맞아.


 
학교에서 만들었다는 계단 기둥 작업물



그럼 처음 대우공예사 하셨을 때랑 지금이랑 좀 많이 바뀌었을 것 같아요. 숭의 목공예마을 분위기도 그렇고요.
분위기가 처음이랑 다르지. 근데 나는 이 안에서 하는 일을 말고 외부에서 하는 일을 많이 했어. 뭐 했냐면은 학교에 들어가는 건데 큰 학교에 가보면 층계에 올라가는 기둥을 만들었어요. 학교 전국에 많잖아요. 그때 당시에는 학교 지을 때 층계 입구마다 양쪽에 기둥을 세웠어요. 예전에 손잡이 부분이 약해서 사고가 있었나 봐. 그래서 누가 크고 튼튼하게 만들기 시작하면서 전국 학교에서 유행이었지. 인천은 내가 뭐 만수초등학교, 서림국민학교 웬만한데 곳은 내가 많이 했어. 이런 게 돈이 되거든. 여기서 맨날 깎고 있어 봐야 돈 안 돼. 그리고 대학병원에 들어가는 손잡이 공사를 했지.


 
록타이드 401본드
  
오공 205본드


접착제는 어떤 걸 사용하세요?
401본드가 접착력이 굉장히 좋아요. 이게 접착을 하면 한 1~2분 내로 빨리 굳어요. 접착력이 굉장히 빨라. 냄새는 본드 냄새 조금 나요. 알코올 냄새 비슷하게. 본드를 사용 안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붙이는 거는 다 발라야 돼.
오공205본드도 많이 써요. 그것도 본드 종류인데, 지금도 써요. 본드마다 한 5시간, 6시간 돼야 붙는 게 있고, 하룻저녁 지나야 붙는 거 있고. 근데 지금은 이제 빨리빨리 굳는 거 써요. 가격이 조금 차이가 나는데 비싸도 속도가 빠른 것들은 써요. 그리고 접착력이 빨리 붙으면서 떨어지지 않는 거. 쓴지는 한 4~5년 됐다.
오공본드는 가격이 덜 들어가는데 접착력이 좋아서 가성비가 좋아요. 시간상으로 한 5시간, 6시간 걸린다고 봐야지. 그래야 떨어지지 않지 해 놓고서. 401본드가 아주 이게 이거는 순간은 재깍재깍 붙잖아요. 숫자가 틀려요. 본드 종류도 뭐 지금은 다양하게 많이 나오니까. 지금은 시대는 좋은 시대야 우리 되게 잘 나와요.

아드님 두 분이 있다고 하셨잖아요. 아버지 뒤를 잇고 싶다는 아들은 없나요?
글쎄 작은아들은 이거를 배우고 싶어 하는데 내가 가르치고 싶지 않아 가지고 반대했어요. 옛날에는 괜찮았는데, 지금 하향사업이에요. 젊은 애들이 인터넷으로 지금의 현실에 맞게끔 하면은 조금 날래나 모르는데, 중국산에 밀려 뭐에 밀려 전망이 밝지가 않은 거 같애. 사람들이 지저분한 일들을 배우려고 하질 않잖아요. 처음에는 재미있어서 기술 배우러 와서는 해보다가 전망이 별로 밝지 않으니까 그만두더라고요. 내가 여기서 한 30년 있으면서 몇 사람 들어와서 배우려고 왔었는데. 다 하다가 그만뒀어요.

아무래도 오래 목공 일을 하셨잖아요. 그럼 직업병이 있으실 것 같아요.
글쎄 직업병이라고 그러면은 나무 먼지가 많이 나니까 좀 좋지는 않지. 그래도 쇠나 이런 먼지보다는 나무 먼지는 좋다고는 그러더라고. 관절은 이제 나이 먹으니까 혈액순환이 안 되는지 가끔 저리고 그런 건 있어요. 이제 나이 먹으면 어쩔 수 없어. 별수가 없어요. 다 그러는 거지 뭐.


7. 앞으로의 계획과 바람

우리도 진작 옛날서부터 인터넷이나 이런 걸 배워가지고 했어야 되는데 신경을 안 썼지. 그냥 흘러가는 대로 한 거야. 그러다 보니까 돈벌이가 안 되는 거지. 목공예마을 이름처럼 목공 일을 하는 사람들이 계속 들어와서 활성화 돼가지고 배우려는 젊은 사람들이 많이 오면 좋겠어요. 그렇게 배우다 보면 기술적으로 그렇게 크게 어려운 건 없어요.

앞으로 얼마 동안 더 하실 생각이세요.
글쎄 내가 계획은 정말 80세까지는 할까. 그래봐야 이제 뭐 한 5~6년밖에 안 남았는데 우리 아들은 그만두래. 우리 집사람도 그만두라고 그러는데 이게 그러기가 쉽지 않아요. 하루아침에 쉽지 않아요. 지금 나이 먹었다고 그만두고 노는 사람들 보면 뭐 재미가 있나. 만나봐야 남자들 술이나 먹는 거지 뭐. 어디 기껏 해봐야 산에 나가고.
목공이 좋아서라기보다 내 천직이다 생각하고 한 거지 뭐. 지금 와서 뭘 할 거야. 배운 게 소 도둑질이라고 하는 거지. 오래전에 친구가 전화국에 들어오래. 목공방 할 적인데, 전화국에 들어가서 한 열흘 만에 나왔나. 다시 목공 일로 돌아오게 되더라고. 그래서 이거를 천직으로 생각하게 된 거야. 계속 그냥 이것만 하고 또 내 기술이 있으니까 얼른 그만 못 그만두는 거야.



이렇게 열심히 한 길만 걸어오신 사장님을 장인이라고 불러드리고 싶어요. 건강이 허락하시는 날까지 열심히 부탁드리겠습니다.


 
시민기록일지
• 면담자 : 조연희 (면담지원: 양지원, 정은주)
• 면담일시 : 2022.8.30. 11시 / 2022.9.23. 14시
• 면담장소 : 대우공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