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결 따라 살아온 삶
상감으로 나무에 혼을 불어넣는 장인
미추홀학산문화원
게시일 2022.12.23  | 최종수정일 2023.02.25



"철학이라기보다는 그냥 나무를 사랑하죠. 나무에 애착이 굉장히 많죠. 나무 냄새만 맡고도 다 알아요. 나무 냄새가 다 틀려요. 톱이 싹 지나가면 냄새가 나거든요, 톱밥 때문에. 그러면 '아, 이건 무슨 나무다' 대충 알죠."

 


1. 송림동 토박이, 목공예의 길에 들어서다. 

이름은 김인규고요. 우리 나이로 68세, 55년생. 고향은 인천 송림동. 거기서 내가 태어나 갖고 45살에 이사했나 봐요. 송림동에 45년 살았어. 송림동에 가면은 그 옛날에 교회가 불이 두 번 났었나? 불난 교회라고, 송림 침례교회였는데 그 교회에서 바로 한 20m 정도 올라가면은 우리 집이 있었어요. 산동네지 뭐. 
초등학교는 송림초등학교 나왔고요. 중학교는 답동에 가면 ‘시은 고등공민학교’라고 있어요. 신흥 초등학교 바로 위에 있었어요. 지금 가면은 답동 맨션인가? 아파트가 들어서 있어요. 정식 인가 나지 않은 중학교. 집이 가난한 사람은 다 그 동네, 거기(시은 고등공민학교)로 왔지. 중학교 과정은 다른 학교하고 똑같은 교과서 갖고 똑같이 공부했어요. 인천 침례교회라고 교회학교야. 남녀 공학이었어요. 거기 오는 분들은 교사자격증은 다 있었어. 영어하고 수학은 실력들이 좋은 사람들이 가르쳤어. 그래도 큰 추억은 없는데 운동은 좀 잘했던 것 같아요. 농구도 하고 배구도 하고. 공부도 곧잘 했고, 그랬어. 송림동에서 답동까지 걸어 다니고. 거기서 3년 과정 마쳤고요, 그다음부터는 그냥 뭐 하다가 열아홉 살 땐가부터 바로 목공 일을 시작하게 된 거예요.

 
미추홀공예사 대표님

 
내가 학교를 가면 식구들이 굶어야 되니까, 내가 일을 해야지. 왜 그러냐면 내가 스무 살 때 우리 아버지 환갑이었어요. 그러니까 자식이 굉장히 늦은 거예요. 아버지 40세에 나를 낳은 거죠. 우리 어머니는 (결혼 후) 7년 만에 봤대요. 내가 귀한 아들이었어요. 그리고 되게 또 귀했던 게 뭐냐면, 그때는 외아들을 되게 쳐줬잖아요. 근데 우리 막내가 10년 만에 나온 거야. 그러니까 10년 동안은 거의 뭐 내가 귀한 자식이죠. 그래도 뭐 아버지가 벌이가 시원찮아요. 여기 이거 ‘참외전로’라고 그러잖아요. 참외전로를 왜 참외전로라면 동인천 가다 보면 지금 주차장으로 바뀌었는데, 거기 가다 보면 왼쪽이거든요. 거기가 아직 ‘참외전 거리’야, 그러니까 과일 시장이지. 과일 경매 부르는 데, 쉽게 얘기해서 농수산물 시장인데 거기는 과일만. ‘참외’가 주 종목이라 참외전 거리. 저희 아버님은 거기서 리어카 일을 하셨지.
그때는 친척이, 지금은 미국 가 있는데, 시계 케이스 공장을 했었어요. 그때는 괘종시계 케이스를 나무로 했었거든요. 바쁘니까 일 좀 도와달라고 갔다가 그때부터 목공 일을 했죠. 그게 19세 때. 그러다 보니까 계속하게 된거여.

독립은 몇 세 때 하시게 됐나요?
84년도니까 서른한 살 땐가. 그분(친척)은 한 2년 하다가 망해 갖고 미국 이민 가시고. 나는 주로 서울에서 조각을 하긴 했는데, 주전공은 목조각이거든요. 인천에 누가 개업을 하는데, 도와 달라고 해서 왔다가 84년도에 처음 ‘상감’이라는 걸 개발해 갖고 그때부터 ‘상감’했어요.
‘숭의 맨션’에서 처음 시작할 때, 그 전 해가 우리 어머니 환갑이었어요. 환갑 때 부주(扶助) 들어온 돈 50만 원을 내가 얘기하니깐 장롱서랍에서 꺼내주더라고. 84년도에 50만 원 보증금 걸고 했어. 그때는 확신이라기보다는 ‘한번 해보고 싶다’라는 어떤 일념 그런 거지, 확신 같은 건 없어요.​​​​​​​


2. 이태리 상감과의 조우, 독자적으로 상감기법을 연구 개발하다.

그때 우리나라에도 상감이 있긴 있었어요. 우리나라 상감은 홍대 교수, 이름이 뭐더라, 곽 모인데 그 양반이 처음으로 가구에 상감을 응용해 갖고 ‘사임당가구’라는 게 처음 나왔어요. 나는 신천리 어디 가구 공장을 갔었는데 이태리에서 상감이 왔는데, 0.6mm(0.6mm 두께의 염색 무늬목으로 장식한 가구). 그걸 봤는데 너무 기가 막히드라고 (감탄하는 표정을 지으시며). 상감 개발할 때 송림동 집에서 조그만 기계 하나 놓고서 일 년 걸렸어요. 다 수작업이죠.

상감기법으로 문양을 넣는 과정을 설명해 주세요.
무늬목을, 나무를 0.6mm로 켜는 거지. 그리고 그걸 오려서 박는 거야 다시 (가구나 목재에). 붙이는 게 아니라 나무를 오려서 그 안에 또 끼워요. 
상감 처음 시작할 때 잘 된다는 어떤 보장도 없었고 되게 어려웠던 게 염색이에요. 나무에 염색을 해야 되는데, 나무를 염료에 담갔다 꺼내면 될 줄 알았어요. 절대로 안 되는 거야. 아무리 얇아도 안 돼요, 염료가 안 스며들어요. 이렇게 사포질 조금만 하면 싹 벗겨져 버려. 그래서 또 공부를 했죠. 시청 옆에 가면 도서관 있죠? 한 일주일 정도 공부를 했나 봐요, 그쪽 책을 찾아서. 그랬더니 나무에 염색하는 방법이 나무를 보면 세포막이 있고 세포중이 있고 세포핵이 있어요. 근데 세포핵 속에 공기와 이물질과 물 세 가지가 들어가 있는데, 우리가 흔히 나무에서 “진 나온다.” 그러잖아요. 그 진이 세포핵 속에서 나오는 거야. 근데 나무에 염색을 할라고 그러면 공기와 이물질 이런 걸 다 빼내야 돼, 강제적으로. 빼낸 거기다가 물감을 집어넣는 거야. 그래서 기계도 만들었죠, 염색 기계를.
물을 끓여서 스팀을 집어넣어 갖고, 스팀압으로 진을 빼내서 그 안에다 염료를 집어넣는 기계를 만든 거죠. (염색 기계 그림을 그려주시며) 물 끓이는 보일러가 이렇게 있고요. 불 때서 수증기 끓이고. 또 여기 핸들이에요. 핸들을 8개를 잠그게 돼 있어. 그리고 안에 바킹이 있고. 여기서 이렇게 들어와서 벨브 있고, 다리 4개 있고, 이걸 열어 갖고 나무를 집어넣어. 여기 압력이 한 50kg 정도 돼. 우리 압력밥솥 압력이 15kg예요. 얘는 한 50kg 되니까 엄청 세. 잘못해서 터지면 큰일 나는 거야.
(무늬목을) 염료에 하루를 담가. 그래서 여기다 집어넣으면은 불순물이 빠지면서 염료가 그 안으로 들어가요. 이걸 내가 보일러 만드는 데 가서, 설명을 해 갖고 만들은 거예요. 압력은 압력 게이지가 따로 있어. 가령 여기 이렇게 압력 게이지가 있잖아요. 봐서 거기까지 올라가면 밸브를 잠그는 거지. 더 이상 못 들어가게 더 이상 들어가면 위험하니까. 여기는 또 이렇게 밸브가 하나 있어 갖고. 이제 빼내야 될 때, 물건(염색이 완성된 무늬목)을 빼낼 때 그냥 빼면 큰일 나잖아요. 이게 팽창이 돼 있어 갖고 풀리지도 않아. 그리고 여기 이쪽에서 호수로 연결이 돼서 열면은, 이제 스팀이 빠져나가면 그때 가서 열어서 빼는 그런 역할이에요.

 
염색기계 그림


염료는 보통 어떤 종류를 쓰셨나요?
염색도 굉장히 복잡해요. 설명하려고 그러면 하루 갖고 안 돼요.

그래도 해주세요. (웃음)  
하루 갖고 안 돼. 
 
그래도 조금만. (웃음)
염료가, 그때 동대문에서 더 가 갖고, 어디 특수한 염료를 파는 데를 알아 갖고. 그때 그 염료 집을 아는데(알아내는데) 내가 공중전화로 그 사람 전화번호를 찾는데 그때 (공중 전화비가) 20원일 때거든. 다방에서 공중 전화비 5천 원 넘게 쓴 것 같아. 그래서 한 군데 가서. 염료가 있는데 그 염료를 그냥 푹, 푹 하기만 한다고 해서 염색이 안 돼요. 염색이 돼도 햇빛 보면 금방 날아가 버려. 우리가 바래진다고 그러죠. 그니까 천(옷감)도 염색만 하는 게 아니라 화학 처리를 해야 돼요. 안 그러면 햇빛 보면 다 바래져 하얗게. 염료가 붙어서 빠져나가지 않게 하는 화학제품이 있고. 또, 잘 스며들어 가게 하는 그런 역할을 하는 뭐가 있어, 그 이름을 모르겠는데. 그렇게 되게 복잡해요. 이태리 책을 번역해 갖고, 염료 책 찾는데도 시청 옆에 도서관 거기 가서 한 일주일 쫓아다녔나 봐. 어떻게 구해 갖고 그걸 대여를 해서 복사하는 집 가서, 그때 당시에 복사하는 데가 많지 않았어요. 신포동 어딘가 찾아 가서 복사를 해다가, 이태리어니까 번역을 해야 될 거 아니에요. 번역하는 사람 찾아서 번역해달라고 그러고 번역비 주고. 시작할 때 돈도 투자 많이 했어요. 일단 나는 이거를 시작했으니까 끝장을 봐야 할 거 아니에요.무늬목 0.6mm, 이거 못 구해 갖고. 서울에 한양대학교 뒤에 가면은 밥상에 붙이는 무늬목을 하는 데가 있었어. 두껍게 하는 데는 거기밖에 없었어요. 인천에도 무늬목공장 많았는데 다 얇아, 비쳐요. 0.18(미리) 그러니까. 들면 (뒤가) 비쳐요. 그런 거 갖고 작업이 안 되니까. 그것도 수소문 엄청나게 했어. 그래갖고, 거기 한양대학교 뒤에 가니까는 밥상에 (붙이는) 엄나무를 벳기고 있더라고. 엄나무라고 까시 돋친 나무 있죠. 백숙할 때 집어넣는 거. 그게 큰 게 있어. 그걸로 무늬목을 벳기고 있더라고요, 0.6mm를. 그걸 처음에는 어떻게 할 수 없으니까는 처음에 파(破)가 많이 나오더라고 그게, 요만큼씩 하게. 길게 쭉 나와야 되는데, 파 나오면 막 버리더라고요. “갖고 가도 되냐”고 그러니까 “갖고 가라”고 그러더라고. 그걸 말아 갖고 전철 타고 오는데 그게 또 냄새가 나. 포르말린 처리하고 그래갖고. 하얀색은 포름알데이드 처리를 안 하면 곰팡이가 금방 나. 전철 타고 아무리 잘 싸 갖고 와도 냄새 나고 그러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그러고. 그게 좌우지간 그때는 차도 없고 그러니까. 이렇게 말아서 어깨에다 떠메고 오고 그랬어요. 계속 염색 실험을 한 거지. 사업할 때는 지금 죽었는데 ‘부일 무늬목’이라고 그 사람한테 부탁을 해서 0.6mm를 해오게 했죠. 0.6mm 벳기는 기계가 지금 홈플러스, 그 뒤에 교통방송이 있는데 거기에 무늬목공장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 그게 제일 좋은 기계라 해 갖고 그 집에서만 꼭 해왔지. ‘준성 무늬목’, 지금은 없어졌죠. 필름 생기면서 다 없어졌어요, 필름 생기면서. 지금 무늬목 하는 공장이 우리나라에 한, 두 군데 있을까. 김포에, 거긴 무늬목을 벳기진 않는데 무늬목 취급을 하는데 김포 대곶에 한 군데 있어요. ‘김포 무늬목’이라고 그 정도예요. 지금 두꺼운 거 쓰는 사람은 거의 없죠.

 
상감기법으로 제작한 작품



3. 상감기법을 가구에 접목하다.

우리가 나무 색깔로 안 되는 게 있어요. 내가 이런 칼라를 원하는데, 흑단 같은 거 까만색은 나무가 (색이) 나오는데 가령 월넛 하고 흑단하고 중간색을 원하는 거야, 그쪽에서. 그 염료 기계 갖고 그거(염색)를 해서 물건을 만들어서 보루네오에 납품하니까 이거잖아요(엄지손가락을 치켜들며). 나밖에 못 하잖아. 
보루네오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컸잖아요. 손잡이나 이런 쪽에 알판이라고, 장롱 가운데 (상감으로) 문양 넣는 그런 거. 그런 걸 했는데 내가 독과점을 친 거지. 나는 그때 보루네오만 한 게 아니고 우아미, 그로리아가구. 그로리아가구가 위당학 씨라고 보루네오 조카예요. 그쪽이 보루네오, 동서, 바로크, 삼형제예요. 바로크도 내가 납품 많이 해줬거든요. 그러니까 엄청 바빴죠. 그때 그렇게 해서 많이 벌었어요. 84년도 4월에 개업을 해 갖고 돈을 굉장히 잘 벌었어요. 그때 돈으로 2년 만에 2억을 벌었으니까, 월급 다 주고.
나는 상감을 이태리 방식 그대로 했고, 삼익가구는 내가 그랬잖아요, 물감이 염색이 안 된다고. 삼익 가구는 그냥 무늬목을 문양대로 오려 갖고 물감에 담갔다 꺼내. 그래 갖고 붙이는 거예요. 그러면서 또 사포질을 못 해 (염색이) 까지니까. 그리고 그 위에 살짝 도료 칠만하는 거지. (삼익 가구는) 얇은 무늬목에다가 뒤에 종이 배설(排設)해서 쓰고 나는 0.6mm 쓰고 차이가 있죠. 


 
상감기법 가구


공장이 잘 되실 때 보통 하루 생산량이 얼마쯤 되셨어요?
액수로 한 달에 보루네오 납품가가 한 3500에서 4000만원. 그때 보루네오 납품 업체가 330개인데 내가 서열 11위에 앉았어요. 협력 업체 사장단 회의가 있으면 그때 나 젊었을 때니까 머리 허연 사람들이 한 번씩 쳐다보고 가. (웃음) “얘 뭐야. 도대체 왜 여기 앉아 있어.” 그러는 거지.
많이 벌었어. 그거를 할 수 있는 업체가 없었으니까. 대한민국에 나 말고는 없었어요. ‘동양 특수목재’는 자기네 브랜드를 달고 나가니까 납품을 안 하고 나만 납품을 했죠, 그랬어요. 86년도, 7년도 이럴 때는 월급을 다 주고도 그때 돈으로 한 달에 3000만 원씩 떨어졌어요. 현금으로 양쪽 주머니 넣고 술 먹으러 다니고 그랬어요. 그때는 젊을 때니까. 그게 돈이라는 게 무서운 게 뭐냐 하면 3000만 원에서 한 40만 원, 50만 원 어치 술 먹어도 표시가 안 나, 사실 그때는 재미는 있었어요, 돈도 잘 벌리고. 근데 상감이라는 그게 아무래도 유행을 많이 타니까 92년도에 정리를 했어요.
지금 붙박이장은 사실 장이 아니에요. 파티칼 보드라고 해갖고, 톱밥을 굵게 이겨서 뽀사 갖고 눌러서 그 위에 양면 비닐 계통을 붙인 거잖아요. 거의 궤짝 수준이지 뭐. 지금 가구는 박스예요, 박스. 그냥, 박스 짜는 거야.

 
미추홀공예사 대표님 젊은 시절


사업체 운영하실 때 직원분들이 주로 하셨던 일은 어떤 분야인가요?
남자들은 대부분 목수지 뭐. 목수하고 도장. 여자분은 주로 사포질하고 상감부가 있으니까 상감하는 여자분도 따로 있었고. 도장반에서 칠하면은 사포질을 해야 되니까. 도장반에 그분들이 한 다섯 분 정도 계셨나. 샘플 제안을 받으면 내가 샘플 먼저 만들고. 그쪽에서 이제 오케이 하면은 작업 들어가고.초보들을 데려다가 숙련을 시켰죠. 처음에는 그냥 단순 작업만 시키고 그러다가 나중에 한 서너 달 되면은 숙련공이 되는 거죠. 숙련공이 해서 주면은 짜 맞추고 그러는 건 단순 작업이거든. 짜 맞출 때도 그 숙련공이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서 그 상감 짜 맞출 때, 좀 잘 맞는 것도 있고 잘 안 맞는 것도 있고. 잘 안 맞는 건 다시 가서 조각칼로 좀 끊어준다든가 이렇게 해서. 다 수작업이에요.
지금 뭐 레이저 나오니까는. 근데 레이저 나와도 원형이나 팔각이나 이런 데다는 불가능하잖아요. 레이저는 평면만 가능하지. 이런 데다가도 (직접 팔각모양 통을 들어 보이시며) 상감을 하거든요. 그리고 상감이 레이저가 안 되는 부분이 뭐가 있냐 하면 (자작나무 판재를 두드리며) 밝은 계통 나무는 안 돼요. 왜냐하면 레이저로 오리면 거의 다 이제 끄슬러 있어, 꺼멓게. 그런 거는 이렇게 기계로 오려야 하고, 스카시로.

 
상감기법으로 제작한 가구
  
상감기법 작품



4. 상감기법에 사용되는 도료와 목재의 종류

상감기법 하실 때 도료와 목재는 주로 어떤 걸 쓰셨어요?
도료는 우리나라에 도료가 그렇게 많지 않아요. 우리나라에 나오는 도료가 락카 하고 우레탄하고 그다음에 페인트류, 바니시 종류. 그리고 저 오일스테인 그다음에 이제 좀 고급으로 가면은 카슈. 카슈 위로 올라가면 옻칠. 제일 좋죠, 우리나라 옻칠이. 우리나라 옻은 한 관에 한 400에서 500만 원 가요. 한 관이면 3.75 키로예요. 중국산이 한 80만 원, 90만 원. 거의 지금 옻칠하는 사람들은 중국산 옻 써요. 우리나라 건 너무 비싸 갖고 안 되고.

 
도료


목재는 나무 염색할 때 제일 중요한 게 수종이니까. 나무에 기름이 많으면 염색이 안 돼요. 그래서 제일 염색이 잘 되는 나무는 단풍나무, ‘메이플’이라고 그러는데요. 우리나라 단풍은 해봐야 요만하잖아요. 단풍나무는 캐나다 쪽도 있고, 미국에서도 많이 들어와요. 그런데 그게 원목을 써야 돼요. 지금 들어오는 건 제품으로 해서 건조돼서 들어오잖아요. 그걸 염색 통에 넣고 한 며칠 걸려요. 진을 빼내고 염료를 채워 넣고 그런 작업을 하는 거죠. 인도네시아 쪽은 ‘나왕’이나 잡목 그리고 철도 레일 깔 때 옛날에 침목 썼잖아, 지금은 시멘트를 쓰지만. 그게 ‘아비동’이라고 해서 그런 건 다 ‘남향재’라고 해.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이쪽에서 나온 나무는 ‘남향재’라 그러고, ‘미송’은 미국에서 나오는 소나무를 ‘미송’이라 그래요. 그러고 지금 우리나라에 제일 많이 들어오는 나무가 뉴질랜드에서 소나무가 들어오는데 그건 ‘뉴송’. 그다음에 러시아산은 ‘소송’. 그렇게 알면 돼요.

남은 나무 원료를 어떻게 처리하세요?
떼죠. 난로 있잖아요. 겨울에 떼요. 이거 버리려고 그래도 돈이잖아요. 안 그러면 ‘이건산업’ 같은 데 갖다 줘야 돼요. 그거 갖고 PB나 MDF나 그걸 만드는 거죠.


 5. IMF, 위기에 처하다.

그때 당시 공장은 어디에서 운영하셨어요?
제일 처음 시작했던 건 여기 가면은 한화아파트 바로 옆 코너에 ‘숭의 맨션’이라고 있어요. 거기 지하에서 시작했죠. 84년도 4월달에 해 갖고 거기서 한 1년 있다가 ‘이든팀버’라고 합판 가게가 있어요. 거기서 한 사 년 했나 그 자리에서. 거기서 1층, 2층을 다 썼거든, 그러다가 거기가 좁아 갖고 ‘동서가구’ 있는데 옆으로 이사를 가 갖구 거기 있을 때가 출근부 도장 찍은 사람만 쉰 네명이었어요. 거기서 140평짜리 아파트 얻어 갖고 쓰다가 집주인이, 건물 주인이 쓰고 싶은 대로 쓰라 그러더니 갑자기 계약기간 끝나니까 나가라는 거야. 그때만 해도 여기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때는 막 사람이 쉰네 명이 일하니까, 시설도 엄청날 거 아니에요. 그걸 한 번 옮길라고 그래봐요. 진짜 몇천만 원 깨지거든. 그래도 신흥동 ‘삼화 정미소’ 했던 창고 쪽으로 이사를 갔죠. 거기서 하다가 잘못돼 갖고 정리를 하고, 92년도인가 폐업 사실 증명원을 뗀 게 어디 있거든. 하여튼 9년을 했어요. 한 2년 쉬다가 다시 숭의동 남구청 맞은 편 아래, 지금은 헐렸는데 그 아래 2층 건물 반지하에서 13명, 15명 정도 두고 했었어요. 그 회사도 IMF 때 부도를 크게 맞았어요. 98년도 12월 말일 날 부도가 난 거죠. 통보를 받은 거는 99년도 1월 2일 통보를 받았죠. 그때는 ‘이노센트가구’하고 ‘에몬스가구’하고 거기에 납품하고 아주 잘 됐었어요. 통장에는 항상 몇천만 원 있었어. 그래도 통장에 그만한 돈이 있으니까 사람들 월급하고, 퇴직금 같은 거 해결해 주고 그랬죠. 부도 맞은 금액이 그때 돈으로 2억 5천이에요. 지금으로 따지면 굉장히 큰돈이죠. (지금이) 2022년도니까, 23년 됐으니까 굉장히 큰돈이에요. 당시 강남 집값이 25평 같으면 7, 8000만 원 갔을 때니까. 그 사람들(직원 13명) 일단 퇴직금이고 뭐고 다 해줘야 할 거 아니야. 집 담보대출 받고 은행에 대출 원리금 있던 거를 한 3년 전에 다 갚았나 봐. 내가 한 육십넷인가, 다섯까지 빚을 갚았어요. 그게 제일 힘들었던 것 같아요. 은행 빚이라. 그나마 집 한 채 있는 거 넘어갈까 봐, 진짜 노심초사하고 그랬어. 이제 다 갚았어, 빚은 없어.
거기서 딱 부도를 맞고 직원 서너 명 데리고 신흥동으로 이사를 갔어요. 거기 가서 일하다가 조그만 범종이죠 기념종, 그거 만드는 사람하고 인연이 돼 갖고 같이 가좌동으로 갔다가 거기서 떨어져 나와서 이리로 온 거지. 이 자리에 온 게 한 12, 13년 됐나 봐요.


6. 수상 경력과 기억에 남는 작품들

수상 경력은 전국 공예대전에서 전국대회 장려상 받고, 특선 받고, 인천에서는 동상, 금상까지 받았나 봐요. 꽤 되죠.

 
작품전시

          
청와대에서도 시연도 좀 하고. 매일 토요일, 일요일만 빼고 ‘동양자수’하는 사람은 가서 자수하고 나는 목공예 쪽이라 거기서 ‘장승 ’깎았어요, 청와대 사랑채에서.

  
        

지금까지 제일 기억에 남는 작품과 영감을 떠올리는 방법을 말씀해 주세요.
작품 중에서 찻상이 하나 있는데, 제목을 내가 ‘훈민정음’이라고 지었는데, 그게 좋았던 거 같아요. 그러니까 우리나라 한글을 도안화 해서 찻상에 상감기법으로 새겨 넣은 거죠. 금상 받았나 봐요, 인천에서. 공예대전에서 금상 받았구나.
  
상감기법 작품 - 훈민정음


(영감은) 하다 보면 그냥 떠올라요, 갑자기. 그러면 메모해 놓고. ‘훈민정음’이라는 거 저거는, 청와대 사랑채에서 한 6개월 시연을 했었나? 그래 갖고 감사장 받은 거거든요. 근데 거기 (청와대 사랑채) 창문에 훈민정음이 있는데 그걸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가, ‘저거 찻상 한번 만들어 봐야지’. 그런 식으로.​​​​​​​

특허 내신 것도 말씀해 주세요. 
특허는 못 박는 기계 있잖아요, 타카라고 그러죠. 그게 쓰다 보면 알맹이가 떨어진 걸 몰라. 그래서 표시 나게 불이 들어오거나 아니면 소리가 나거나, 타카 핀이 떨어졌다는 걸 알 수 있게끔 해서 특허가 나왔죠.필요하면은 막 머리를 써서 만드는 거지. 그거 말고도 많죠. 내가 원해서 만드는 기계는 많아요. 가령 0.6mm(두께)를 뭐 3mm나 5mm(넓이)로 정확하게 잘라야 되는데, 저 톱기계로는 도저히 자를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거를 정확하게 딱딱. 이게 3mm를 원하는데 2.9mm 나 3.1mm나 이렇게까지 그 정도는 되는데, 벗어나면 물건이 안 돼요, 그 기계를 내가 만들어 썼죠. 그걸 내가 필요할 때마다 그냥 만들어 쓰는 거죠. 쇠도 어느 정도 알아요. 여기 이런 데 볼트 구멍도 낼 줄 알고, 볼트도 박을 수 있고.


7. 상호에 담긴 의미

‘미추홀 공예사’를 상호로 정하신 이유가 특별히 있으세요?
난 인천 사람이니까. 그때는 ‘미추홀구’로 바뀌기 전인 ‘남구’였죠. 문학 쪽에 미추홀이라는 데가 인천의 옛 이름이니까. 남구청보다 훨씬 먼저 썼죠. 남구청이 이제 몇 년 됐습니까. 얼마 안 됐죠, 미추홀구로 바뀐 지. 난 오래됐죠. 이게 십 한 오륙 년 됐으니까.
처음에는 ‘예화 공예’였어요. ‘예화 공예’ 하다가 그다음에 ‘나래 공방’. ‘나래 공방’하다가 그때 사업자 등록증 새로 내면서 ‘미추홀 공예사’로 저기 신흥동에 있을 때 바꿨나 보다.


 


8. 작품활동과 목공예에 대한 철학

나무나 목공예에 대한 본인만의 철학이 있으실 것 같으세요.
그냥 나무를 사랑하죠. 나무에 애착이 굉장히 많죠. 저 뒤에 가면 나무가 많은 이유가, 나무를 좋아하다 보니까 귀한 나무들은 다 주워서 모아놓는 거야. 요거를 나중에 언젠가 써먹어야지 하고. (문 앞, 인도 쪽을 가리키며) 저것도 그래서 15만 원에 주서다 놓은 거예요. 저게 느티나무거든.

 
목재들
  
느티나무


우린 느티나무 보고 괴목이라고 그래요. 괴목이 무늬가 참 예뻐요, 색깔은 노오랗고. 
나무하는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나무가 먹감이라고 있어요. 감나무인데, 안에 까만 문양이 나오는 나무가 있어요. 그게 먹감이라고 그러는데, 그런 거는 아주 만나기가 힘들어요. 괴목은 그래도 이제 가로수도 많이 심고 그래 갖고, 좀 낫죠. 지나다니다가 봐 갖고 “파는 거냐?” 물어봐서 판다고 그러면 사다 놓는 거죠.

나무마다 향도 다 달라요?
다 틀려, 다 틀려요. 나무 냄새만 맡고 다 알아요. 나무 냄새만 맡고도. 일반인들이야 소나무는 다 알겠지만, 괴목하고 참죽하고 나무 냄새가 다 틀려요. 이게 톱이 싹 지나가면 냄새가 나거든요, 톱밥 때문에. 그러면 ‘아, 이건 무슨 나무다’ 대충 알죠.


9. 정부 지원의 필요성과 나무의 가치

일본은 20년 이상 하면 무조건 명장을 지정해 준대요. 우리나라는 너무 까다로워. 일본은 공예 하는 사람을 정부에서 무지하게 많이 도와줘. 그래서 젊은 사람들도 배우는 사람들이 많대요. 지금이라도 좀 지원을 많이 해주면 제대로 이걸 업으로 삼을 사람도 있지 않을까. 우리 친구가 십정동에서 목공예 학원을 하는데 배우는 사람들 많아요. 자격증도 따고 그러더라고. 근데 그 사람들은 다른 직업 다 갖고 있는 사람들이 취미로 배우는 경우죠.
어떤 사람은 내가 이거 뭐 하나 만든다고 그러면 이렇게 얘기하잖아. “그까짓 거 나무가 몇 푼이나 간다고.” 이런다니까. 열 받잖아요, 그거. 얼마나 승질 나 “이까짓 거 몇 푼, 나무”라니.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잘 나오지도 않고 이런 목재용은 우리나라에서는 안 나와요. 잘라 나오는 게 없어. 자르기 시작하면 한 2~3년이면 다 민둥산 될걸. 우리나라는 나무가 얼마 없어 갖고. 우리 쓰는 나무는 백 프로 수입이라고 보셔도 돼요. 가끔 저렇게 나처럼 나무가 좋아서 그냥, 누가 벌목해 논거 돈 주고 갖고 오거나 그런 경우 말고는 우리나라 나무는 제재해서 파는 데는 없어요. 국산 목을 제재해서 파는 데는 없어요. 광주 가면 있는데, 거기는 간벌하는 나무들 있죠. 그렇게 산불 같은 거 나지 말라고 빽빽한 데는 나무를 중간중간 베 줘요. 산림청에서 주도해 갖고 벌목하는 사람들한테 시켜서 간벌할 나무들은 다 표시를 해놔. 그러면 그것만 자르는 거야. 그냥 나무 함부로 잘랐다가는 우리나라는 영창 가요.


10. 숭의 목공예마을에 대한 견해

앞으로는 어떠실 것 같으세요, 목공예 마을이.  
이게 3D 업종이다 보니까 배울 사람이 없어요. 일단 이 기계가 굉장히 위험해요. 톱, 둥근톱 저거. 딴딴한 나무를 뚝뚝 자르니까 사람 살이 닿아 봐요. 그냥 뚝뚝 잘리지. 여기봐요. 왼손이 네 개가 다 성치 않아. 이건 안 구부러지고 요만큼씩 잘라져서 다 조금씩 짧아. 우리 일하는 사람 다 그래요, 안 다친 사람은 거의 없어요. 한 번씩은 다 다쳐.
목공 일이 되게 위험해서 배우는 사람도 없지만 이걸 가르치기도 힘들어요, 1, 2년을 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 우리 이 정도 조각하려고 그러면 최하 10년은 조각을 해야 어느 정도 조각이 나오지 그냥 1, 2년 해 갖고 안 나와요. 누가 “배우겠다”고 그런 사람 있으면 좀 가르치긴 하겠는데, 배울 사람 없어. 먼지도 많이 나잖아.



내가 구청한테도 항상 하는 얘기인데 구청에서 이 동네 좋게 만들잖아요. 그러면 우리 같은 사람은 별거 없는 거예요. 건물 주인들만 좋아지는 거지. 여기 (점포 앞) 주차장 판 것도 우리가 해달라고 해서 한 거예요. 공예인들이 “손님들이 왔다가 주차할 공간이 없어서 그냥 가는 분들도 많다.”고 건의해서. 근데 엉뚱한 사람들이 대놓고 있잖아. 저렇게. 내차 여기 못 대고 저 위에 있어.




11. 은퇴 후 계획

만약에 여기가 헐리면은 강화로 들어갈려고요. 가게 되면 70이 넘은 거니까, 여태까지는 먹고 살아야 되니까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못 했잖아. 그러니까 거 가서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물건들을 한번 해보려고. 그냥 지금 갖고 있는 꿈이 작게 ‘공예 공원’ 하나 만드는 게 꿈이에요. 그래서 마당에다 물레방아도 하나 돌리고. 그리고 뭐, 수로 하나 만들어 갖고 붕어도 좀 키우고. 마당에다가 벤치도 좀 놓고, 장승도 세워 놓고. 이렇게 해서 사람들이 와서 쉴 수 있는 공간도 되고. 전시장, 전시관을 하나 만들어 갖고 작품도 전시하려고. 작업장 따로, 전시관 따로. 이렇게 하나 갖는 게 꿈인데. 잘 안돼 (웃음).
그러려면 최하 2~3억은 있어야 되겠드라고 (웃음). 뭐, 어쨌든 간에 나는 나고, 나 혼자 알아서 꾸미고 살아야지 뭐,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지는 모르겠지만.​​​​​​​

 
시민기록일지
• 면담자 : 허은영 (면담지원: 표기자)
• 면담일시 : 2022.8.26. 17시 / 2022.9.3. 11시
• 면담장소 : 미추홀공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