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결 따라 살아온 삶
맞춤 제작의 달인(達人)
미추홀학산문화원
게시일 2022.12.22  | 최종수정일 2023.02.25



"의뢰인의 사진만 보고도 뚝딱 도면을 파악해 맞춤 제작을 하는 목공 장인. 20년째 끈끈한 인연을 이어가는 단골손님의 비결은 튼튼한 물건, 꼭 필요한 물건을 만들겠다는 뚝심 있는 철학 때문이었다."

 


1. 인생 2회차, 목공을 시작하다

고향은 강원도 영월이야. 거기서 옛날에 국민학교라고 그랬으니까, 국민학교 졸업하고 부천으로 올라왔죠. 뭐 직장생활하고 이렇게 돌아다니다 보니까 이제 군대 생활도 하고, 제대하고 그다음에 내가 연구소에서 좀 오랫동안 근무를 했어요. 한국선박연구소라고 거기에서 근무하다가, 그게 정부 통합이 되면서 한국 기계 연구소로 됐어요. 그래서 한국 기계 연구소로 되면서 대전의 연구단지 있잖아요. 거기서 근무하다가 기계 연구소 본부가 이제 창원에 있어요. 창원에서 근무하면서 창원기능대학을 졸업하고 이제 전공을 살리기 위해서 인천으로 왔지요. 인천으로 올 때는 생산기술연구원이라고 지금도 있어요. 생산기술연구원 이제 인천 내 부서가 있어서 인천으로 왔죠. 그리고 퇴직할 때는 서울 본사에서 퇴직했어요. 

퇴직하고 목공을 선택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분야가 비슷하니까요. 퇴직을 하고 1999년 노아목재를 시작했어요. 20년이 넘었죠. 1999년 11월 9일 사업자등록을 냈어요. 그게 이제 제가 군대 생활을 목공 주특기로 들어가서 그 당시에 방위들이 많아서 방위들을 한 30명 정도 이렇게 같이 제가 맡고 있었죠. 군대는 사천 3훈련비행단이라고 공군 기술공으로 목공 파트 책임으로 목공소를 맡고 있었어요.
사실 원래 목공은 안 했었어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20대 때 목형이라고 그 주물을 할 때 만드는 모형이 있어요. 그거 만드는 기술을 배웠어요. 그래서 선박 연구소에 가서 그것도 하면서 모형선도 만들면서 그 당시에 적성 검사를 했는데 나한테 이제 목재가 적성에 맞는다고 나왔어요. 학교가 직업 훈련 계통이다 보니까 적성 검사를 철저하게 했죠. 군대 가서 목공을 하고 전역한 후에는 연구소에 갔다가 이제 창원 기계연구소로 내려갔죠. 킴이라는 기계 연구소라고 하이클라스가 있어요. 로봇도 만들고 그런 곳이에요. 거기에서 이제 창원기능대학이라고 그때는 기능대학이 하나밖에 없었어요. 거기서 이제 2년간 공부하고 기능장을 땄죠. 그때는 창원기능대학을 졸업해야 기능장 시험을 볼 수 있었어요. 그래서 땄어요.

목공을 처음 배우실 때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나무를 좋아하고 적성에 맞으니까 어려움은 없었어요. 저도 이제 맨 처음에 목형을 했으니까 사실 목공하고는 조금 다르기는 해요. 그런데 이제 군대에서도 목공 반을 맡아서 집도 지어야 하고 운영하다 보니까 목공에 대한 전체적인 걸 알게 됐어요. 목공 파트에 배정되는 방위들도 아주 퀄리티가 있는 사람들이 배정됐거든요. 목공 파트는 특기생들만 오는 곳이라 조각을 한 20년 했던 사람, 가구를 20년 했다는 사람들만 왔어요. 군대에 있을 때 바둑판도 많이 만들어서 전역하는 분들한테 선물도 했어요.
보통 목공 하시는 분들은 도면 쪽이 좀 약한데, 목형 하는 분들이 도면에 밝아요. 퇴직하고 처음 여기에서 창업했을 때는 사실 조금 어눌했어요. 일을 시켜보기는 했어도 내가 직접 하지는 않았던 일들이라. 그래도 한 1년 정도 지났더니 좀 어려운 일들은 다 나한테로 보내는 거야. 왜 그런가 했더니 분야들이 틀리면 안 해. 도면이 필요한 맞춤 제작이 들어오면 노아목재에 가라고 하는 거야. 나한테 오면 이제 마지막으로 온 거야. 그러다 보니 손님 입장에서는 역지사지가 되는 거야. 원하는 물건을 내가 맞춰서 해주니깐 다들 좋아하지.


 
사장님이 만든 목공 제품


정형화된 기존에 나온 디자인보다 맞춤을 많이 만드셨나 봐요.
거의 뭐 90% 이상이 맞춤이죠. 정형화된 이거 파티션. 맨 처음에는 파티션을 많이 만들었는데 인건비가 비싸다 보니깐 고객들은 비싸다 그러는 거야. 그러면서 싼 거 없냐고 그래. 그 당시에 중국에서 막 들어왔어요. 중국에서 들어온 걸 보니깐 내가 만든 것에 한 3분의 1 가격도 안 돼. 고객들한테 가격을 맞춰줘야겠다 싶어서 제작하는 분들을 불렀죠. 그러다 나중에는 내가 인천 파티션 업체 총판으로 됐어요. 덕분에 파티션이 필요한 분들한테 싸게 공급할 수 있게 되었죠. 내가 맞춤으로 만들면 30만 원, 25만 원 하는데, 기성품으로 받으면 10만 원, 15만 원 하니 싸잖아. 근데 관공서에서는 가격보다는 퀄리티를 따지잖아. 그래서 관공서에서 의뢰가 들어와서 여러 개 제작했어. 그리고 나는 내가 못 하는 부분은 전문가나 장인들하고 협업해요. 옻칠 명인들이 있어요. 그런 명장분들을 불러가지고 내가 만든 것에 옻칠을 좀 해달라고 하지. 협업을 할 줄 아니까 전원주택 같은 것도 지어주고 했어요.

목공을 하면서 힘든 적은 없으세요?
일은 안 힘들어요. 근데 인간관계가 조금 힘들어요. 가끔 이렇게 쉽게 얘기해서 힘들게 하는 고객이 있어요. 물론 업자 중에서도 그런 사람이 있지만 고객 중에 해달라는 건 다 해줬는데 뭐 색깔이 마음에 안 든다 그러면서 환불해달라는 분들이 있어요. 그러면 같이 왔던 아들이 “사장님 미안해요”라고 해요. 나는 주문 받은 물건을 내가 쓴다고 생각하고 만들어요. 그렇기 때문에 물건이 튼튼하고 견고해요. 목형을 하나 만들면 그걸로 최소한 물건 오백 개, 천개, 만개는 찍어야 해요. 그런 제품을 만들어야 해서 좀 튼튼한 걸 만드는 습관이 제가 있는 거예요. 한번은 어떤 고객이 와서 이렇게 조그만 탁자를 하나 만들어 달라고 그래서 만들어 드렸더니 “사장님 뭐가 이렇게 무거워요. 나는 1년에 한두 번씩 옮겨야 하는데 옮길 수가 없잖아요.” 그러면서 그다음 말이 “근데 엄청 튼튼해요” 그러는 거야. 그 말을 듣고 깨달은 게 있지. 목공은 튼튼한 것보다는 가벼우면서도 튼튼한 게 좋은 거로구나. 그래서 지금은 많이 융화시켜놨지.


2. 기억에 남는 작품과 20년 단골 이야기

여러 가지 있기는 한데 뭐 특별히 국내에서 못하는 것들 이런 것들이 이제 기억에 남아요. 쉽게 얘기해서 불란서 같은 데 가면 살롱이라고 그래서 커피 마시고 거기는 술 문화니까. 이렇게 와인 진열장이 있는데 그거를 이제 사진을 찍어서 온 거야. 서울서부터 오는 거야. 불란서 살롱에서 그런 모양을 봐가지고 자기들도 하고 싶은데 그쪽에서 사 올 수도 없고 그러니깐 만들고 싶어서 서울에서 다 돌아다녀야 안 돼. 인천은 숭의 목공예거리가 있잖아요. 인천에서 돌아다니다가 이제 맨 마지막에 우리 집까지 왔어. 이쪽에서 왔으면 첫 번째 집인데, 저 끝에서 왔으니깐 우리가 마지막이야. 나한테 와서 “할 수 있느냐?” 그래. 나는 이제 도면을 보니까 사진을 보고 “가능합니다” 그랬더니 금액에 상관없이 만들어 달래. 데모해 본다고 그러죠. 처음 만드는 물건을 대강 만들어서 잘못된 것이 없는지 한번 해봐요. 딱딱 맞춰보니깐 각만 정확하게 들어가면 되겠더라고. 그래서 작업을 해서 하나를 만들었어요. 그랬더니 좋다고 그러고 가지고 갔어. 그 당시에 하나에 200만 원 받았으니까 그때 당시에 많이 받았죠. 그다음에 와서 또 2개를 해 달래. 그 대신 150만 원에 해 달래. 첫 번째는 시행착오가 있었지만, 두 번째는 착착해 나가면 되니까 쉽죠. 그래서 두 번째는 2개 만들어서 300만 원을 받았지. 그게 이제 제일 기억에 많이 남았어요. 그런 거는 처음 해본 거고 그다음에 이렇게 또 주문받아서 만드니깐 참 보람이 있더라고요.

그 이후로 또 오신 적은 없으세요?
그분은 이제 안 왔죠. 왜 그러냐면 워낙 퀄리티가 비싸니까. 근데 그걸 했던 사람은 이제 그걸 들고 다른 데 가면은 만들 수 있는 거야. 사진만 보고는 못 해. 근데 물건을 보고는 모방을 할 수 있는 거야. 그걸 만든 지 꽤 오래됐죠. 벌써 한 10년 훨씬 넘었으니까. 지금은 와인이 일반적이지만 그 당시에 이제 와인 붐이 막 일었어.

손님 중에는 기억에 남는 분이 있을까요?
경기도 양주에 있는 회사인데 대현금속이라고 단골손님이 있어요. 신호등 철주 같은 걸 주로 만드는 회사야. 그런데 거기에서 버스 승강장 의자에 나무가 들어가잖아요. 그다음에 지하철 같은 데 가면은 핸드레일이 들어가잖아요. 그때가 2002년도인데 내가 개업하고 3년 정도 지났을 때예요. 이두현 대리라고 그분이 요 앞에 살았어요. 출퇴근하면서 나한테 의뢰했어요. 해줄 수 있냐고 그래서 그때 해드렸지. 그분이 거기서 한 3년 근무했는데, 3년 근무하면서 쭉 관계를 유지했어요. 그분이 성실하니까 좋은 곳으로 스카우트 돼 갔는데도 끊어지지 않고 위에 부장님께서 계속 연결해서 엊그저께도 납품했는데 거의 20년 단골이에요. 맨 처음에는 제가 돈을 받고 납품했어요. 아직 신뢰가 안 되니까, 근데 한 삼 년 이렇게 거래를 해 보니까 아주 결제가 정확해. 그때 당시 부장님이 지금은 이사님이 되셨는데, 그 부장님으로 담당자가 넘어가면서부터는 내가 후불로 받았죠. 먼저 납품하고 그다음에 세금 계산서 올리면 후불로 받는데 바로 들어와요. 일주일을 넘기지 않아.

최근에 제작하신 작품이 있으실까요? 
최근에 제작한 것도 외국에서 보고 온 건데, 요새 카페들이 많이 생기잖아요. 카페 문하고 대문하고 뭐 이런 콘셉트를 가지고 와서 우리나라에는 없는 거야. 입소문이 났나 봐. 연줄연줄 해서 노아목재 가봐 이래서 오시는 손님들이 많아요. 여기가 이제 노아목재니깐 저 집은 믿는 집이다 그래서 교회 다니시는 분이나 성당 다니시는 분이나 스님들이나 또 보살 이렇게 점치는 보살들 있잖아요. 그런 분들도 와요. 그런 분들은 왜 오나 그랬더니 쭉 물어요. 그분들은 여기서부터 저 끝까지 다 묻고 가. 그럼 이제 가격이 나오잖아요. 견적이 나오면 내가 얼마를 얘기했어. 그러면 그분이 이제 쭉 보고 다음에 다시 나한테 와. 사장님이 제일 비싸대. 그러면 싼데 편하신 데 가서 하시죠. 그러면 여기가 믿음이 간대. “보살님은 영 발이 있네요” 그래서 내가 납품해줬더니 아주 흡족해서 끝나자마자 바로 결제해 준 거지. 우리는 계약할 때 50%, 잔금 50% 기본적으로 그렇게 받아요.

현재 주문 들어오는 제품과 과거의 주문이 다른가요?
우리 딸이 그래요. “아빠는 아직도 처음 만드는 게 있어?” 그러니깐 늘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왜냐면 우리는 다품종 소량이니까. 품종이 여러 가지잖아요. 우리는 기계로 쫙쫙쫙 빠져나가는 게 아니니까. 하다못해 상자 하나를 만들어도 그 상자가 큰 거 작은 거 이렇게 똑같은 거 잘 안 들게 되잖아요. 그래서 아직도 처음 만드는 게 있어. 그래서 절대적으로 치매가 안 걸린다고 확신해요. 왜 그러냐면 계속 머리를 써야 하니까 우리 계통에는 치매에 걸린 사람이 없어요. 내가 이렇게 쭉 봐도 치매가 없어요.


3. 제품을 만드는 뚝심과 고집 

노아목재 이름 뜻이 궁금해요.
그건 노아라는 그분이 인류에 처음으로 목제 제품을 만든 거야. 그 배가 어떤 배였냐면 온 인류가 구원받은 배야. 거기에 들어가는 건 다 살았어. 그 40일 동안 그렇게 비가 내리고 온 세계가 물에 잠겼었는데 그 속에 들어갔던 모든 사람 또 짐승이 모두 다 살았어. 하나도 안 다치고 배도 안 망가졌어. 그렇게 튼튼한 물건을 내가 만들겠다는 그런 개념으로 노아목재라고 지었지. 튼튼한 물건 꼭 필요한 물건, 우리 집은 개업할 때부터 원목 콘셉트로 오픈했죠. 우리 집에는 PB 같은 게 없잖아요. 손님들이 와서 해 달라고 하면 내가 끊어주기는 하는데 그걸로 직접 만들지는 않아요.


 
공방 내에는 목재만을 고집하는 사장님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원목만 쓴다고 하셨는데, 나무를 선별할 때 좀 까다롭게 보실 것 같아요.
저는 이제 목재는 정품을 받아요. 돈은 그쪽에서 원하는 대로 주는데 목재는 정품으로 받아요. 이렇게 곰팡이가 슬었다든가 깨졌다든가 휘었다든가 옹이가 있다든가 이런 거는 제품에 하자를 발생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건 아예 안 받아. 제재소나 목재소 같은 데서 제 물건을 까다롭게 여기죠. 그래서 ‘노아목재는 좋은 걸로 줘야 해’ 이런 개념이 돼 있어요. 한 판을 받아도 휜 건 안 받아요. 반듯한 거 달라고 빠꾸 시켜요.
제품을 만들 때 좋은 제품이 나오기 위해서는 좋은 재료를 써야 해요. 그래서 저는 재료부터 좋은 걸 써야 한다고 해요. 집성목하고 솔리드하고 가격 차가 한 장에 2만 원 정도 차이가 나요. 그래도 저는 솔리드만 써요. 고객님 입장에서는 조금 비싸지만, 어차피 재료비보다는 인건비가 더 비싸다고 말씀드려요. 인건비에 비하면 재료비는 별거 아니니까, 대신 제가 튼튼하게 잘 만들어드릴 테니 좋은 재료 쓰세요. 그래도 안 하겠다 그러면 원하는 대로 해드려. 근데 웬만하면 좋은 재료로 쓰면 좋은 제품이 나오죠. 제거는 물건을 만들어서 가면 망가졌다는 얘기는 거의 없어요. 도리어 가게를 접게 됐으니까 좀 아까우니 가지고 가질 수 없냐고 연락이 오죠. 그러면 나는 내가 만든 걸 가져와요. 나는 내가 만든 거에 딱지 붙이는 거 싫어해요. 폐기잖아요. 그래서 웬만하면 내가 만든 거는 연락만 오면 가지고 와요.
지난번에 뭘 만들어 드렸는데 도장을 찍어 달래요. 도장을 찍으려면 그냥 찍지 않잖아요. 화인을 찍어야 하잖아요. 그거 만들려면 25만 원 들어가야 해. 손님이 자기가 준대. 그거 값 준다면서 “내가 이거 지금 2천만 원짜리 만드는데 그래도 장인 손으로 만든 거에 대한 확인이 있어야 되겠다” 그래서 만들어 찍어드렸어요. 뿌듯함도 있지만 대신 책임감을 느끼죠. 허투루 할 수는 없죠. 그래서 하나를 만들어도 책임감을 갖고 만들죠.


4. 갈림길에도 굴하지 않은 목공 인생

내 후배가 요기에 샤프장을 오성목형을 했어요. 지금은 검단에 큰 공장을 지금 하고 있어요. 그때 당시에 여기서 목형공방을 하고 있었거든요. 내가 퇴직하니까 “형님 선배님은 나한테 와서 좀 도와주세요” 그러더라고. 그래서 한 6개월 정도 같이 도와주다 보니까 옆에 자리가 났다고 “선배님 저쪽에 가서 잠깐 하시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그냥 다 넘겨받았어. 그때 받은 기계도 그냥 쓰고 있어요. 여기 원래 하시던 미산목공이라고 충남 목공소에서 이렇게 해서 왔는데, 그것도 오래된 거예요. 한 20년 이상 했다 그랬나 그러더라고. 그분은 목공만 했는데 목공 일이 그래요. 일당은 나가면 100% 내 돈이잖아. 그렇지만 우리가 사업체를 열고 있으면 100%가 아니야. 손님이 없으면 그날은 적자 나는 거잖아요. 일당은 일하러 나가는 날은 무조건 100% 받잖아요. 그래서 그분은 일당을 한다고 나가셨지. 나도 그분보고 오시라 해서 도움을 받았죠. 이곳에서 사업을 하셨던 분이니까 제가 조금 어려울 때는 “형님 좀 와주세요” 그러면 와서 본인이 쓰던 기계니깐 가르쳐주셔서 많이 배웠죠. 주변에서 많이 도움을 받았죠.


 
작업하는 모습


처음 숭의 목공예거리 오셨을 때랑 지금은 좀 분위기가 달라졌을 것 같아요.
그때 당시에는 참 분위기가 좋았던 것 같아요. 그 당시만 해도 좀 다 어려웠잖아요. 그 당시에는 아직 선진국도 안 들어갔을 때지. 개업했다고 그러니까 축하한다고 망치도 가져다주고, 줄도 갖고 오고 또 이렇게 하면 떡도 돌리고 요새는 거의 안 돌리더라고요. 그때 나도 개업했다고 떡 돌렸어요. 지금 뭐 거의 그런 거 없어. 그냥 자기 나름대로 개인주의가 많아져서 달라진 것 같아요. 그다음에 제일 중요한 건 그 당시에는 도제식이라고 할까? 일 배우시는 분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시다라고 그래가지고 한 6개월 정도는 뭐라 용돈 정도 차비 정도 식사 대접해 주고 일 배우는 거니까 1년 지나야 이제 월급을 줬죠. 기술자 되기 전까지는 그랬거든요. 근데 요새는 안 그러잖아요. 요새는 한 사람을 써도 기본 뭐 이렇게 4대 보험 기본적으로 한 250만 원 그냥 나가니까 못 쓰는 거죠. 그다음에 제일 중요한 거는 2010년부터는 아예 3D업종이라고 그러고 안 와요. 안 배워요. 40대분들은 이제 취미로 배우려고 오는 데 진짜로 필요한 젊은 사람들이 배우면 참 좋을 텐데 알바를 할망정 안 와. 3D업종이라고 그래서 아마 우리 대가 거의 끝이 아닐까 싶어.
선진국에서는 목수 하나 쓰려고 하면 아주 돈 많은 부자나 쓰지, 보통 평민들은 못 써요. 전부 자기 연장 사다가 휴가 때 자기네들이 다 작업하고 그러잖아요. 지난번에 뉴질랜드하고 호주를 한번 갈 기회가 있어서 다녀왔는데, 조그마한 슈퍼라는데 그 앞에 진열대 그거를 짜더라고. 차 뒤에 달고 다니는 거 있잖아요. 우리나라는 따로 달고 다니면 거기는 그냥 달고 다니는가 봐요. 뒤에다 연장 싣고 이렇게 쓱 끌고 와서는 뚝딱뚝딱하시더라고. 그래서 슈퍼 사장님한테 물었지. “사장님 저 목수분 부르시면 얼마나 드려야 해요” 그러니까 비싸요 그래. 우리 사촌 형이 호주에 사셨는데 날 보고 들어오라 그러더라고. 우리 기술자는 자격증으로 바로 오케이가 바로 떨어져. 비자가 바로 떨어진 대. 그래서 걱정하지 말고 들어오래. 우리 기술은 거기에서는 돈 많이 받는다고 해서 갈까 했는데 언어가 어눌하잖아요. 그런데 거기는 또 그런 사람들이 살아서 한국말을 해도 다 통한다고 그러네. 몰랐지 뭐야. 근데 안 갔죠. 안 가고 그냥 연구소 들어갔어요. 갈까 말까 고민했을 때, 연구소하고 학교하고 두 군데가 컨택이 됐어요. 학교는 더 발전이 없을 것 같고, 연구소는 그래도 또 이렇게 될 것 같아서 연구소로 들어갔죠.

그때 그러면 고등학교 졸업하고 군대 갔다 와서 연구소 가기 전에 그런 갈림길이 있으셨네요.
근데 안 간 게 참 잘한 거 같애. 지금은 그쪽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오려고 그래. 그때는 우리가 못 살았잖아. 그 당시에는 참 못 살았었는데, 지금은 뭐 호주 가봤더니 넓기만 넓고 고기만 마음대로 먹지.

목공이 굉장히 귀한 기술인데 우리나라에서 기술자들에 대한 대우는 어떤 것 같으세요?
이제 뭐 이렇게 장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같은 조건인데도 인정을 안 해. 우리나라는 무슨 무슨 쟁이라고 하대하는 그런 게 있어서. 일본은 가 봐요. 우리나라 도자기 쟁이들이 가서 거기에서는 최고로 대대로 대접받잖아요. 일본에 가 봤더니 아주 목형 하시는 분은 최고로 대우해주더라고. 손재주는 우리나라도 사람들의 손재주가 좋아서 이천 같은 데 가면 도자기 공방이 있잖아요. 그래도 있으니까 얼마나 감사해요. 거기서 나오는 건 비싸요. 거기서 나와서 백화점에 납품해요. 내가 아는 작가가 있는데 맨 처음에는 찻잔을 만들다가 요새는 화분 이런 거 만드는데 대단히 많이 받는데. 돈을 많이 벌어서 이천에다가 공장을 짓고 있어요. 고객들이 그분 수기가 들어간 것만 산대. 우리도 나름대로 내 도장 찍은 걸 원하듯이 그래서 저는 싸게 안 받아요. 물건 해달라고 하면 내가 여기서 첫 집인데 내가 싸게 하면 저 밑에 집들은 일이 참 힘들어져요. 그래서 저는 제값을 받아요. 내가 인건비가 얼마가 되니까 이렇게 해서 얼마입니다. 정확하게 가격을 알려 드려요. 그러면 그분이 마음에 들면 하고 안 들면 딴 데 가요.
그다음에 저는 내가 못 해도 대우공예에서 로구로를 잘하잖아요. 그다음에 뭐 인일 같은 데는 조각을 잘하고 그다음에 미추홀 같은 데는 또 아기자기한 그런 제품을 잘 만들고 그런 부분들을 저는 다 알고 있어요. 그러면 이제 제가 일할 때 그런 부분들이 들어오면 작업이 맞는 분들을 조합해요. 그 대신 그분들한테는 그분들에게 맞는 예우를 해줘요. 싸게 안 해줘요. 내가 받은 거니까 내가 받은 것만큼 주는 거야. 나는 첫 집이라 그런 마인드로 하죠. 가격이 우리 집은 싸지 않아요.
강남에서는 그런다고 그러잖아. 장롱 업체가 500만 원짜리 제품을 판매했는데 아무도 안 사가더래. 그다음에 같은 물건을 1,500만 원에 팔았더니 불티나게 나가더래. 왜 그런가 했더니 우리 집에 맞는 물건을 가져다 놔야 레벨이 맞는다더라는 거야.


5. 사랑이 넘치는 가족 이야기

사모님하고는 언제 결혼하셨어요?
78년도 4월에 했지.

날짜를 다 기억하고 계세요?
그럼, 매년 챙겨줘야 하는데.

오늘은 사모님은 자리에 안 계시네요?
점심 먹고 와요. 오전에는 집안일 보고 나는 이제 오전에 와서 내가 할 거 하고. 오후에 혼자 못하는 일들을 같이 도움을 받아요. 우리 집사람이 아주 그 뭐라 그럴까, 서당 개 삼 년이면 라면도 끓이잖아. 우리 집사람은 눈썰미가 있어요. 그래서 우리 집사람이 이건 됐다 그러면 그건 최고의 품질이야. 우리 집사람이 어느 것까지 하냐면 무늬 모양까지 따져요. 그래서 내가 묻지. “여보 이건 어떻게 해야 해” 그러면 “이렇게 하면 돼”라고 알려줘요. 혼자서 못 드는 물건들이 있어요. 큰 것들은 이제 같이 들지.

어떻게 보면 사모님하고 같이 운영하고 계신 거네요.
집사람이 회장이잖아요. 공동 사업자 강현숙. 나는 그냥 이름만 있는 거야. 왜 그러냐면 돈은 다 여기에서 가지고 가. 세무서도 50대 50으로 신고했어요.


자녀분은 어떻게 되세요.
두 명. 딸딸이 아빠지. 손주는 지금 중학교 3학년인데 가족들이 하는 톡방이 있어요. 공부는 잘 안 하는데 반장, 회장 뭐 이런 거를 적극적으로 해 가지고 이번에 회장이 돼서 장학금을 받았더라고. 내가 용돈 쓰라고 오만 원 보내 줬지. 축하금 보내줬더니 “할아부징 용돈 잘 받았어요. 야무지게 잘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당당” 용돈 줄 때 카톡이 많이 와. 보통 때는 안 해. 그래도 이렇게 조그만 가게를 하니깐 용돈도 줄 수 있어서 좋지. 둘째는 포스코 다니는데, 거기는 손주가 아들이야. 눈만 뜨면 할아버지, 전화하면 할아버지 바꿔 달래. 어린이집 다니거든. 할머니가 전화 받으면 할아버지. 걔는 할아버지를 좋아하는 것 같애. 늘 축복해주죠. 키가 자라고 지혜가 자라고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운 oo를 축복합니다. 그러면 아멘 이래.


6. 앞으로의 계획과 바람

지금 목공예센터가 굉장히 좋은 시스템을 갖췄다고 생각해요. 퇴직하신 분, 나이 드신 분 또 이렇게 취미로 배우시는 분들이 배워서 자꾸자꾸 많아지면 그런 부분들이 이제 활성화되지 않겠나. 또 전국에 목공예 단지로 이렇게 된 곳은 지금 인천 여기밖에 안 남았는데 박승화 센터장님이 센터 역할을 잘 운영하고 계세요. 옛날 거는 물론 좋기는 하지만 이제 실상에는 뭐라고 그럴까 좀 괴리되는 것들이 많이 있거든. 그러니까 옛날 것은 좋지만 새로운 것도 빨리 이렇게 접목을 시켜서 활성화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뭐가 돼요. 아이디어가 나오고 목공업 분야도 자꾸 발전하면 젊은 사람들도 재미있다. AI가 뜨는 것과 마찬가지로 목공예 부분에서도 그런 부분들이 접목돼서 “그거 멋있네, 히트 쳤네, 그것도 돈 되네” 쉽게 얘기하면 돈 되네 지금은 다 돈이잖아요, 하나를 만들어도 퀄리티가 나네.
나는 물건 주문을 받잖아요. 저는 다 써요. CNC도 쓰고 레이저도 쓰고 그냥 다 써요. 여기는 범용 기계밖에 없잖아요. 범용으로 할 수 있는 분야가 있어. 그렇지만 정밀로 갔을 때는 아니다. CNC 가공해서 내가 마무리하면 되거든. 물론 스카시로 파면 파지. 한두 개 했을 때는 그게 맞아. 여러 개를 나가는데 작업이 안 되잖아요. 그런 거는 CNC로 파서 고객이 원하는 대로 하지. 그런 부분들을 접목하면서 퀄리티를 높이는 거야. 저쪽에 동암사라는 간판이 하나 있는데 양각으로 CNC로 팠어요. 50만 원. 지금 하면 내가 100만 원에 해. 나뭇값이 배가 올랐거든요. 그래서 지금 하면 100만 원, 퀄리티가 높으니까. 하여간 우리가 앞으로 나가야 될 것은 수준을 높여야 한다. 그다음에 특화를 자꾸 시켜야 해요. 자기가 잘하는 부분은 최대한도로 높이고 그다음에 모자란 부분은 접목해서 업그레이드시켜야 한다 생각해요.

사장님께 목공이란 어떤 의미세요.
생활이지. 하다못해 식탁서부터 젓가락서부터 다 나무로 하니깐. 그래서 생활이에요. 생활이니까 그냥 허투루 하면 안 돼.

 

노아목재는 언제까지 운영하실 생각이세요.
내가 생각하기에는 한 85세까지는 할 수 있겠지. 지금은 연령들이 100세 시대가 됐으니까. 그래서 한 85세까지 내 마음은 85세까지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마음은 그래도 육체가 못 따라가요, 그래서 참 좋은 후배 기수가 나오면 요새는 기계가 좋기 때문에 금방 익힐 수가 있어요. 1년 정도 가르쳐서 대물림하고,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면 참 좋겠다. 지금 제가 이렇게 주위를 이렇게 돌아보고 있어요. 기회가 되면 새터민분들 있잖아요. 어떨 때 보면 막 마음이 아파요. 세 모녀가 목숨을 걸고 탈출했는데 굶어 죽다니 말 같지도 않은 거지. 여러 사정이 있긴 하겠지만 개방이 안 돼서 내가 그분들을 만나고 싶어도 정보가 없다 보니까. 거기는 꽃제비로 넘어오신 분들이 있다고. 그런 분들은 얼마나 손재주가 좋은데. 그런 그분들은 다 놓고 왔잖아. 그래서 언제 한번 기회가 되면 그런 분들 한번 키워볼까 그런 마음도 있어. 우리나라 사람들은 안 할 것 같으니까. 85세까지 일하는 거는 다 넘겨주고 그다음에 이제 기계 같은 거는 기곗값이 얼마니까 봉급으로 이렇게 하고 나중에 다 넘겨줄게. 하면 부담 없이 다 할 수 있잖아.
지금 대현금속 거래하는 것도 벌써 한 20년 동안 지냈죠. 내가 끊어버리면 그 사람은 이제 또 다른 데서 해야 하잖아. 그런데 이렇게 연결되면 사람이 바뀌더라도 계속 연결이 되잖아요. 창업할 때 보니까 단골이 없어서 힘든 거야. 일거리가 없어서. 근데 그냥 넘겨받으면 이어가니까 그다음은 자기가 또 이렇게 개발해서 나가면 되니까. 그다음에 제일 중요한 거는 덕성이야.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일하는지가 제일 중요한 거야. 목공예센터가 잘 되면 좋겠어요. 거기는 이제 개인이 아니니까 첨단 프로그램으로 딱 해서 3d로 딱 나와서 이렇게 하면은 얼마든지 좋은 제품이야. 그냥 바로 나올 수 있거든. 기계도 많이 있어. 좋은 기계도 있고 그러니까 잘 이렇게 운영하면 좋을 것 같아.

마지막으로 이건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으세요?
옛날보다는 쟁이쟁이 하던 개념에서 장인까지 올라오다 보니까 좋아졌어. 여기는 거의 수공이잖아요. 목공 박물관이 있나 모르겠는데 그런 거 하나 하고 싶은 마음도 있어. 나무 종류도 이렇게 하고 시대별로 이렇게 좀 해서. 땅을 사놓기는 했는데 이제 몸이 그래서 좀 젊은 분하고 같이 해야 하지 않겠나 싶어. 내가 기술을 갖고 있으니까 목장 같은 걸 하고 싶어요. 목장도 하지만 닭장이나 뭐 이런 거 다 하면서도 어차피 그 샤프장은 있어야 하잖아. 그래서 작업장 크게 하나 만들어서 아기들 와서 이렇게 놀다가 새집도 만들고 새집도 쉽거든. 도면 딱 해서 요건 요렇게 하는 거야. 마음은 있었는데 도움이 됐는지 모르겠어요.​​​​​​​

진짜 꼭 목공박물관을 하시면 좋겠어요. 상상을 하니까 꼭 가 보고 싶어요.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시민기록일지
• 면담자 : 조연희 (면담지원: 최지은)
• 면담일시 : 2022.11.2. 10시
• 면담장소 : 노아목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