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결 따라 살아온 삶
88세 노장(老將) 연마 장이
미추홀학산문화원
게시일 2022.12.22  | 최종수정일 2023.02.25



"74년에 공무부장으로 승진했지만 내 일을 하기 위해 퇴사한 후, 80년대 500원짜리 하나 보고도 거래처를 확보하기 위해서 어렵게 일해 왔던 사람이에요. 아들 둘, 딸 둘을 다 대학까지 보낼 정도로 열심히 살아서 그런지 지금도 용돈은 내가 벌어 쓰지요."

 



1. 숭의 목공예마을에서 유일한 톱 연마 가게

숭의동에서 언제부터 연마 가게를 운영하셨어요?
원래 가게는 지금 버스정류장 앞(숭의 목공예센터)에 건축하는 자리에서 41년간 있었어요. 80년부터 500원짜리 하나 보고도 거래처를 확보하기 위해서 고생을 많이 했었는데, 직장 다닐 때 알았던 선후배와 주변 도움을 많이 받아 자리 잡을 수 있었어요. 지금 여기는 작년(2021년) 9월 6일에 이사 왔어요. 가게 이름은 한문으로 넉넉할 유자하고 성할 성자(이룰 성자 밑에 피 혈있는 한자)를 사용했는데, 내가 그냥 뭐 어디가 작문한 게 아니고 내가 만든 거예요. 내 이름인 유일이라는 거는 족보에 있는 이름이에요. 우리 집안에 24세 손. 유자 돌림이죠.


 
유성톱연마 옛 가게 모습(이사오기 전)

 
사용하셨던 기계에 대해 설명해주세요.
이사 오면서 기계를 많이 처분했지요. IMF 전에는 바이닝에서 나온 6,800만 원짜리 톱날 성형 기계가 있었어요. 근데 제작 물량이 줄어서 정말 참 억울하게 고물값에 팔아 없앴어요. 그 당시에는 아파트 하나 살 수 있는 돈이었는데 아깝지요. 팜플렛도 어딘가에 있을 텐데, 이사 오면서 이것저것 섞여서 어디에 있는지 찾기가 어렵네요.
갓타날 같이 넓은 문틀을 짤 때 쓰는 톱은 성형할 때 환봉을 사다가 만들어요. 지금은 기계가 없어서 못 만들지만, 예전엔 톱 제작도 직접 했어요. 환봉은 숭의공구상가에 있는 조일기계랑 거래해서 받았는데, 쇠 종류랑 규격만 알려주면 딱딱 해놓고 둥그런 원판만 가져오는 거죠. 절단된 환봉을 기계에 물려가지고 원판을 깎은 후 2차로 밀링 작업을 해서 팁을 붙이는 거죠.
톱날을 만드는 이 기계는 구멍에 따라 톱날의 개수를 정할 수 있어요. 마음대로 360도 회전되는 HARLEY(일본) 기계예요(회전되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나사를 풀고 계심). 이거 좌우로 다 돌아가고 그래요.


 
톱날 만드는 360도 회전되는 기계(HARLEY(일본))


팁은 ‘긴노’라고 하는 명칭인 재료로 합금을 했는데, 은이 많이 들어가는 접착이에요. 이거 전부 산소 달고 불에다 달궈 가지고 하기 때문에 시커멓게 된다고. 그때 콤프레샤 돌려 가지고 강도가 아주 센 금강석으로 만든 금강사(모래 형태)로 때리면은 이 쇠가 약간 거칠었던 게 뽀얗고 깨끗하게 그렇게 돼요. 그게 샌딩작업이지. 이사 오기 전에 사용했었는데, 그것도 다 없애고 천일에서 나온 국산 콤프레샤만 남았어요. 샌딩이 잘 되려면 연속해서 금강사로 때려야 하니까 차징(charging) 양이 많이 필요해서 큰 거예요. 이사 오기 전 가게에서는 톱 제작의 시작부터 끝까지 다 했었지.

 
예전에 샌딩할 때 사용했던 콤프레샤


지금 연마하실 때 사용하시는 기계는 어떤 것이에요?
제가 사업장을 오픈하기 전에 큰 회사에서 공무부장을 했어요. 회사에 있으면서 일본에 출장 갔을 때 연마 기계 설계도랑 일부 부품(현재 사업장 캐비넷에 있는 부품) 같은 걸 줘서 그걸로 영등포에 있었던 대일 기계에서 지금 사용하는 톱 연마 기계를 제작해 온 거에요. 그래서 사용해 오던 게 오늘까지 참 잘 썼어요. 국산 기계 그렇게 오래 쓰는 사람은 없어요. 처음에 왔을 때는 저거 색깔이 아주 맑은 색이었었지. 한 해 가고 또 가다 보니까 저렇게 새까맣게 된 거예요. 일을 적게 하면 기계도 색깔이 크게 변하질 않아요. 기계 돌리면 생기는 먼지가 많이 앉는데 이게 지워지지를 않아요. 쇳가루가 붙으면 철 수세미가 가지고 문질러도 잘 안되고. 기계 돌릴 때 분진이 덜 나고 열처리되라고 물을 뿌려요. 처음에는 맹물이 들어가고 그다음에는 연삭액이라는 약물이 들어가서 희석이 돼 가지고 나오는 거예요. 그리고 여기 붙어 있는 부분은 초경 팁이라고도 해. 이걸 가는 거지.

 
일본에서 가져온 설계도를 가지고 대일기계에 주문 제작한 연마 기계
  
연마기계 세부


갈 때 사용하는 동그란 판을 다이아몬드 휠이라고 하는데 부산 다이아몬드 회사에서 제작되어 올라오는 거예요. 그게 빨갛게 달았다가 식으면은 그 강도가 그대로 있는 거예요. 강도가 참 세요. 저거 붙일 때도 전기 기계로다가 해가지고, 빨갛게 달아야지만 붙어요. 또 접착제를 약칠을 해 가지고 이걸 붙이지. 규모가 커지고 제작을 하는 집들도 기계 자동화가 되기 이전에는 전부 아주머니들이 만들었어요. 당시에 사람들이 앉아서 그거 붙였을 때 생산 수치는 지금으로 치면 얼마가 안 되지. 지금은 자동화가 돼서. 이거 한 달에 한 일곱 개씩은 써요. 기계 저거는 지금 새카맣게 돼서 그렇지 원래는 이런 건데 더 넓어. 이거는 6mm 지만은 그거는 한 9mm나 10mm가 이렇게 되고, 이 구멍도 저 기계가 커요. 24.5mm가 1인치인데 인치니부니까 한 삼십몇 mm 될 거에요. 요게 규격이 넓으면 넓을수록 거기 계산 공식에 준 해가지고 가기 때문에 가격이 다 달라요. 이거는 측면으로 쓰는 거지만 이건 스트레이트로 쓰는 거지.
 
다이아몬드 휠
  
다이아몬드 휠 세부


이 기계는 팁이 넓은 갓타날을 가는 기계는 이건데, 말하자면은 여기 문 같은 거 있잖아요? 문틀 형태가 다양하고 또 골이 있고 막 그렇잖아요. 그 홈을 파는 공구를 갓타날이라고 하는데, 그 공구가 저만큼 넓은 거지. 지금은 이런 게 PVC로 이렇게 나오지마는 그전에는 나무로 해야 하니까.
 
가타날 가는 기계
  
문틀 만드는 카타날

 
연마 작업할 때 날이 잘 들게끔 갈아진 것을 어떻게 아세요?
보면 알아요. 육안으로 보이니까 끝이 안 보일 정도예요. 마모된 게 그냥 덜 갈리면 허옇게 그대로 보여요. 근데 그게 안 보이게 되면 예리하게 갈려진 거예요. 그게 머리를 갖다 이렇게 대면은 칼 같은 거는 머리가 싹 끊어져요. 얼마나 잘 들으면. 얇은 거는 한 10mm 정도에서 한 15mm 정도는 갈 수 있고. 이 기계가 아니면 하질 못해요. 제작할 때도 마찬가지고.

목공예마을로 지정되기 전과 후에 변화된 것은 있었나요?
목공예마을이라고 해서 하는 거 별로 없어요. 여기가 내 집에서 가깝고, 가게 월세가 다른 데보다 조금 싸고, 활동하기가 편리하니까 여기서 일하는 거예요. 제가 숭의 목공예마을을 바라고서 여기 있는 거 아니고, 우리가 먼저 있던 거지. 제가 여기서 40년이 넘었고, 숭의 목공예마을은 나중에 생겼어요. 숭의 목공예마을로 만들었다고 해서 나로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어요. 여기는 지나가다 들리는 사람들이니까 큰 도움 받는 게 없어. 세공비로 처음에 4천 원 받다가 5천 원 받다가 지금 7천 원 받는데, 아주 좋은 거, 이런 250 규격 나가는 거 그거는 만 5천 원 받고. 그게 무슨 돈 되겠어요? 이거 바래면서 여기 있는 거 아니에요. 나는 인테리어 하러 다니는 사람들 그네들이 톱을 여러 장씩 가져오기 때문에. 지방에서도 올라오고 제주도에서도 택배를 붙여요. 부산도 역시고, 전라도에서도 막 올라오고. 이렇게 해서 많이 했드랬는데, 지금은 물량들이 아주 줄어가지고 이상해 정말. 이거 흐름을 타기 때문에 그러나 봐요. 일을 그렇게 하고 있었지. 여기(숭의동)에서 뭐 어떤 믿음을 갖고 뭐가 좀 나올까 이런 생각을 가져본 적도 없어. 이게 내가 원해서 생긴 것도 아니고. 사실 공구는 한 번 연마하게 되면 몇 달씩 쓰기 때문에, 그리고 이 동네에서는 큰 물량들을 많이 안 하기 때문에 자주 오지는 않아요.


 
고려목공소 차기대 사장님께서 연마 맡긴 톱을 찾으러 오심


근데 한두 개 맡기자고 멀리 가지 않으니까 우리 가게에 맡기기는 해요. 목공 일할 때 톱이 없으면 깨끗하게 만들지 못하지. 우선 톱으로 깎는 집은 날들이 잘 들어야지만 매끈하게 나가니까 안 들으면 거칠게 나가고 안 돼. 털이 많이 생기고. 생각해보면 중요한 부분이죠. 그래 나는 나고 저는 저고 이렇게 지내지. 그냥 내가 이거 하니까 와주면 고맙고, 안 오더래도 그만이고. 나는 이렇게 마음 편하게 생각하니까. 서로 간에 그런 관계로 지내요.

밖에 걸려 있는 ‘유성 톱 연마’ 나무 간판은 어디서 한 거예요?
고전공예사에 부탁해서 만들었어요. 판재 내가 다 가져다주고 맡긴 거예요. 이 글씨도 제가 쓴 거예요. ‘신념(信念)-굳게 믿는 마음’이에요. 어때요? 잘 썼죠. 사실 제 아들들이 아버지 필체가 좋다고 남기고 싶다고 하는데, 기회가 되면 해보고는 싶은데 여건이 안 되네요.

 
고전공예사 사장님께서 주문한 유성톱연마 나무간판
  
김유일 사장님이 직접 쓰신 한자_신념


과거에도 이 동네에서 톱 연마해주는 가게는 사장님만 유일하셨던 거예요?
그전에는 수(手)공구 하는 사람이 하나 있더랬어. 옛날 톱인데, 이래 이래 끊는 거 있잖아? 손으로도 요만한 거 가지고 이래 이래 하는 거. 그거 줄이라는 게 있어. 그거 일본말로 “야스리”라 그래. 그걸로 끝에 이렇게 마모된 거 싹 싹 갈아주고. 그런 거 했드랬어. 그 사람이 아침마다 수봉공원에 운동을 꼭 나갔는데, 제물포 저 밑에 자동차 중고 매매 센터 있잖아요. 거기 횡단보도 건너다가 차에 부딪혀가지고 그 자리에서 죽은 모양이야. 그래가지고 여기 작업장은 접고, 부인이 그 집을 다 수리해가지고 무슨 뭐 금속 절곡이니 뭐니 하잖아? 그게 그 집이여. 금속 절곡 간판 크게 붙었잖아. 여기 위에. 거기가 원래 자기네 집이지. 그러니까 부인이 세놓고 아마 딸네가 가서 있을 거야.
그리고 이석규씨라고 나하고 연배가 같은 대장장이가 있었어요. 지금은 가로공원 근처에 살고 있는데, 1년 전쯤 대장간 접고 구청 노인인력과에서 하는 용정초등학교 안전지킴이 활동을 한다고 들었어요.


2. 40년 이상 거주하고 있는 숭의동의 생활 모습

인천에 오셔서 거주하셨던 곳이 어디셨어요?
독쟁이 들어가다 보면 가로공원 있는데, 그게 수인역에서 주안역으로 나가는 철길이에요. 주인선이라고 하는데 수인역이라는 데서 순전히 짐만 가지고 주안역에 갖다주면 그때 화차가 와서 끌고 가고 막 그랬던 가교 역할을 한 철길이에요. 그 철길 바로 아래 도로 옆 거기가 ‘숭의4동 248번지’인데, 그 지역이 일자로다가 전부가 국민주택이었어요. 원주에서 인천으로 이사 오자마자 세입자로 계약해가지고 왔었지. 당시 국민주택은 이렇게 일자로 됐는데 마루가 있었고, 마루 양쪽으로 방이 있는데 좀 길었어. 마루가 이 방에서 이 방으로 왔다 갔다 하는 통로가 된 거지. 단독으로 되어 있으면서 두 가구씩 그렇게 살게끔 되어 있었지. 내가 원주에 있을 때 제일은행이 있었는데, 거기다가 조금씩 조금씩 적립한 것이 그래도 그 당시에 몇십만 원이 되더라고. 그거 갖다가 국민주택 계약했어요. 그리고 나서 이사한 곳이 지금 하나아파트 자리에요. 예전에는 주공이 있었는데 77년도에 17평인가 13평인가 하는 주공아파트 302호를 불하받았어요. 그러다가 안식구가 좀 아파서 팔고 1동 505호로 올라갔다가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했죠.
처음에 살았던 곳이 지금은 개발이 돼서 옛날 철길이 다 묻혔어요. 제물포 나가게 되면 역 밑에 왜 역 쪽으로다가 이렇게 나와서 있는 거 있잖아요. 거기가 철길이 놓여 있던 데예요. 주인공원 철길이 이쪽으로 독쟁이까지 왔다 가는 거지. 수인역까지 돌아가고. 그 전에 수인선에 조그만 열차도 있었어. 그게 삼거리에서 송도로 해가지고 여기 수인역까지 오고 다 그럴 땐데 뭐. 나도 그거 타 봤는데, 기차 그거 뭐 큰 힘도 없고 그래서 기차 지나갈 적에 빠른 사람은 갖다 뛰어가서 타(하하하 웃으시면서).

숭의동의 옛 모습을 기억하고 계시는 부분이 있을까요?
당시에 인천에서 주택이 제일 좋은 집은 길옆에 사거리 있잖아요? 숭의2동 남구청(현 미추홀구청) 별관 그 밑에 건물이 제일 좋았어요. 거기 건물이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시에는 거기가 제일가던 데예요. 남구청 뒤에 쭉 내려 가는데 거기는 교대로 썼죠. 그러다가 교대가 계산동으로 나갔잖아.
숭의동에 혜진 뷔페랑 동원 예식장도 있었어요. 혜진 뷔페는 농협 뒤에 있었는데 없어진 지 얼마 안 돼요. 그 집이 영업을 하다가 주위 분위기가 전부 달라지니까 없어지더라고요. 동원 예식장은 지금 건물 짓다가 작업이 중단돼가지고 있는데, 바로 거기였어요. 거기 결함이 주차장이 없는 거였는데, 아직도 그 상태인 거 보니까 무슨 또 문제가 생겼는지 몇 해째 완공을 못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와룡소주는 저쪽 넘어 제물포 위에 제물포시장 뒤에 있었어요. 우리가 오고 갈 때 보면 가동은 안 하는데 그대로 있더라고요. 제물포시장 그 밑에 주택 앞으로 물 고이는 저수지도 굉장히 넓었고. 지금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는데 아마 제물포시장 바로 뒤가 다 와룡 공장 대지에요. 와룡 공장은 저쪽 편으로 이렇게 붙어 있었고. 거기는 순전히 저수지만 있었고. 제물포시장도 반은 다 붕괴되서 지금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저수지가 여기 있었으면 그 위편으로 제물포시장이 있었지. 그다음에 거기를 다 이렇게 메꿔가지고 주택들을 지은 거예요. 제물포에서 이렇게 올라가서 보면 용정초등학교 이쪽저쪽이 다 배나무 과수원이었어요. 그리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공동묘지도 있었지. 파출소 있는 부분에는 그 당시에는 경기 자동차 운전학원이 거기 있었고. 아~ 옛날얘기네요.


3. 삶과 일의 원동력이었던 가족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 결혼하셨어요?
군 제대 이후에 원주에서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그곳에서 홍천읍이 고향인 안사람을 처음 만났어요. 당시 강원도 원주에 극장이 네 개 있었는데, 안사람 이모님네가 운영을 했던 곳이었어요. 극장에서 안사람이 심부름하고 현금 같은 것도 관리를 다 하고 그래서 상당히 똘똘하게 지냈다고 해요. 주변에서 결혼하자고 권유가 많이 들어갔던 모양인데, 다 연결이 안 되고 어떻게 아무것도 없는 나한테 연결이 됐는지 참 신기해요. 그런데 인연이라는 것이 누구의 소개로만 전적으로 된 게 아니고 우리가 서로 만나서 첫째 본인들 정말 의연히 서로 간에 존중해야만 되는 거고 이 결혼이라는 거는 그냥 되는 게 아니잖아요. 서로 어느 정도 내가 하는 말은 저쪽에서 이해를 충분히 해야만 되고 저쪽 말은 내가 또 어느 정도 수용이 돼야지 합류가 되는 거니까. 그렇게 좋은 감정으로 만나다가 이모 되시는 분이 한번 보자고 해서 만나서 묻는 말에 소신껏 대답했더니 어딘지 모르게 좋게 봤던 모양이야. 그랬더니 “어느 곳에 갖다 놔도 너 배 하나는 안 골리겠다. 결혼하도록 해라!” 그런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렇게 결혼 허락을 받고 안사람하고 서약서를 썼죠. 서약서는 ‘서로가 거짓말은 없고, 진실만을 얘기하지마는 진실을 말하면 참 기실로 믿어줄 때에 우리의 만남이 정말로 성립이 된다.’라는 내용이었어요.

사모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원래 키가 좀 조금 작은 편이에요. 머리는 김자옥 씨 있잖아요? 머리 이렇게 뒤로 올렸던 배우. 꼭 그런 형으로 처녀 때 딱 만났는데 그렇더라고요. 살짝 높은 신발을 신고, 근데 아주 빳빳해요. 걸음을 걸어도 고대로 가지 절대 꾸부러지는 적이 없어. 우리 안사람이 숭의3동 부인회장도 했었고, 바르게 살기에서 활동을 많이 했어요. 봉사활동을 엄청 많이 했어요. 민원 봉사, 인천경찰서, 인천 의회에도 나가고 봉사활동을 많이 했어요. 봉사상도 많이 받고. 그리고 음식은 뭐든 하든 간에 잘했어요. 하다못해 부추 넣고 부침개를 해도 깔끔하게 냈어요. 담는 것도 그냥 덜컥 담는 게 아니고 채반에다 뭐 깔고 착착 썰어서 담아가지고, 아주 눈에도 뭐 보기 싫지 않을 정도로.
안사람이랑 나랑 즐겨 마시는 커피(수O리O)가 있는데, 제가 집에도 박스째 사다 놔요. 그래서 그런지 우리 처가 집에 가면 처제들이 다섯이나 있는데 날 붙들고 “형부는 언니를 사랑하나 봐!” 이런 소리 들었어요.

자녀분이 딸, 아들, 아들, 딸이시죠?
네. 공항에 다니는 큰아들이랑 은행에 다니는 둘째 아들. 그리고 미국에 있는 큰딸이랑 인천대 나온 막내딸 이렇게요. 큰아들은 제 밑에서 연마하는 기술을 완전히 마스터해서 지금은 공항에서 일하고 있고, 둘째 아들은 건국대학교 나와가지고 은행에서 일해요. 지금 여의도로 출근하는데 여의도 아니면 삼성동이나 을지로. 간혹 청라지구에 올 때 있어요. 큰딸은 조지아주 주립대 거기에 유학 가 가지고 거기서 결혼했어요. 사위도 유학생이야. 막내딸도 인천대 나와가지고 결혼해서 남매를 낳았어요. 그것도 한 오십 줄에 되고 그렇지.

숭의동엔 공설운동장이 가까이 있었는데, 가족과 함께 자주 가셨나요?
그럴 새가 없었어요. 나는 가진 것 없이 주민등록증만 가지고 인천에 올라왔기 때문에 다른 식구들을 먹여 살리려면 그런 여유를 즐길 수가 없었어요. 가족 건사 그걸 위해서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사람이에요. ‘나는 우선 가족이 먼저기 때문에 가족 먼저 잘 돼야 나한테 좋은 것도 찾을 수가 있다.’ 이런 건실한 마음에서. 내가 생각해도 참 올바르게 살아온 것 같고! 그러니까 우리 가족들한테도 지금도 아주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고! 조금도 마음에 거리낌 없이 참 양심적으로 공개적으로 얘기할 수가 있는 거! “난 이렇게 살았다.”

지금도 자녀분들한테 비용 하나도 용돈 하나도 안 받고 살고 계신다고 들었어요.
솔직하게 용돈도 천 원 하나 안 받아요. 이건 우리 아들, 딸들 앞에서도 얘기할 수 있어요. (자신감에 넘치시는 표정으로) 다른 거 하는 거보다 소위 이게 어딘지 모르게 은근히 나한테 들어오는 것이 좀 있어요. 그러니까 수입이 좀 낫다는 거지. 그래서 일이 없을 때 이렇게 한가하게 놀아도 그러니까 평균을 잡아요. 한 달에 15일 일을 한다 해도 하루 한 세 시간씩 잡고 세 시간도 안 돼. 한, 두 시간 하면 많이 할 거예요. 그렇게 해도 내 생활은 평균이 되니까. 뭐 일 없다고 아등바등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일이 들어오는 것도 아니고. ‘내 생활은 얼마 정도면 된다.’라는 기준이 있기 때문에. 그런 생각에서 마음 편히 지내고 있어요. 그러니까 용돈이 필요 없죠.


4. 기계와 친했던 어린 시절,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던 청년 시절

어릴 적 꿈은 무엇이었나요?
예전에 사범학교라고 있었어. 그거 나오면 초등학교 선생은 되는 거고, 그 과정 지나면 대학교 가게 되는 건데 허나 거기까지는 욕심이 안 가고 고등학교 선생은 한번 해봤으면 싶어서 공부했던 적도 있었지. 우리 아버님이 일본 사람 광산 지대에서 엔지니어 생활을 하셔서 자연스레 기계에 대해 자주 보게 되고, 또 그 주위에서 살다 보니까 왠지 모르게 참 관심이 생겼던 것 같아. 그런 환경에 있다 보니까 일본 말을 어릴 때부터 자주 접하게 됐지. 내가 자랄 때 일본말을 일제히 습득하게 했었지. 그래 하여튼 일본 학교 4년 다녔는데, 거기서도 일본말을 잘했어. 학교 선생님이 나한테 일본어를 물어본 적이 있는 그런 건 기억이 나요.

아버님이 근무하셨던 수리광산에서는 어떤 광물이 나왔나요?
중석이라고. 지금으로 말하면 아주 특수 철을 만드는 거야. 또 수수연이라고 하는 있는데, 반짝반짝 빛이 나는 거지. 그거는 꺾여지지 않으니까 쪽쪽 구부러지는 넓은 게 나와. 광물이 그런 게 나올 때는 이렇게 해보면 쫙 휘어져요. 갈피갈피 일어나는 게 부서지는 게 없어. 그런 걸 캐기 위해 갱도를 뚫는 기계를 만드는 작업을 아버님이 하셨지. 갱도가 잘 뚫리게 톱날이 잘 들게끔 만드는 거지. 보기에는 참 엄청난 큰 기계인데, 그걸 하기 위해서 불에다가 벌겋게 달궈가지고 넣고서 이런 레바 하나만 쥐고서 만드는데, 그 큰 게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그게 막 찢는 거예요. 그다음에 가다에다가 딱 데면은 부르르하면서 그게 이빨이 갉혀. 아주 날카롭게 그렇게 되지. 아버지가 하시는 그런 일을 보고 자란 거예요.

일본어를 잘하신 것이 도움이 많이 되셨나요?
학교 다닐 때도 그랬지만, 직장에 다닐 때도 일본어 하는 것이 이점이 많았지. 일본에서 바이어가 오면 직원 누구 하나 응대를 못 해. 말이 안 통해서. 그래서 일본 바이어가 온다면 일단 나부터 불러. 먼저도 얘기를 했지만 내가 일본어를 잘하니까 그 바이어가 나오면 내 담당이여. 호텔까지 데려가고 데려오고 그렇게 생활했더랬어요. 지금도 쉬운 말들은 할 수 있지만, 일본 사람 말에 의하면 “나는 일본 가서 살아도 언어 소통에 대해서는 아무 지장 없이 원활하겠다.”라고 그런 얘기 들은 적이 있었고, 그런 기억들이 있어요. 참 오래된 얘기에요.

군대는 언제 가셨어요?
저는 독자였는데, 아버님이 마흔다섯에 저를 낳았고, 우리 어머니도 연세가 많으셨어요. 고등학교 졸업하니 두 분 모두 60세 이상 되는 거예요. 그래서 군대를 57년 7월 그때 보류 두 번이나 했어요. 당시엔 6개월밖에 보류가 안 되는 거예요. 지금은 독자는 보충역으로 면제가 되잖아요? 그때는 그게 없었고, 뭐 말은 ‘제가 대통령의 아들이라도 병역의무는 필해야 된다.’ 이런 거가 있었기 때문에 면제받으려고 마음은 안 먹고 보류를 했었죠. 학교 나오자마자 부모님을 두고 오려니까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요. 그래 있다 보니까 59년도 1월 11일부로 군에서 제대했어요.

군대 제대 후에 인천에서 생활하신 거예요?
아니요. 강원도 원주에 큰 회사가 있었는데 AID 차관으로 전부 독일에서 기계를 수입해다 놨는데 다룰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때도 내가 또 줄이 있어가지고 우리 집안 먼 형님 되는 사람이 거기 부장직으로 있더라고요. 그래 말 한마디 던지니까 뭐 금방이지 뭐. 당시엔 그 기계를 다룰 사람이 없는 게 문제였으니까. 이 기계의 명판도 읽을 줄 모르는 정도였으니까. 거기에 있다 보니까 책임이라는 것이 생겨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지 않고 나에게 주어진 자리에서 책임지고 일을 했지. 한마디로 얘기해서 멋있게 했지. (약간 어깨 힘이 들어가신 듯한 표정) 아직까지도 그런 기질이 조금 있는 것 같아. 지금도 나 자신이 그렇게 느껴지니까.

젊은 시절, 기억나는 에피소드가 있을까요?
내가 오토바이를 한 7년 이상 8년은 탔을 거야. 처음에는 차 살 힘도 안 되고 자전거도 살 힘도 안 되고 했는데, 어떻게 오토바이를 하나 샀었어. 처음에는 88을 샀었지. 배기량 88로. 그런데 그거 가지고는 뭘 실을 수도 없고 그거는 뒤떨어져서 안 돼. 나는 아주 힘이 있고 정신력이 있는데 말이야. 그래서 120짜리 샀잖아. 첫 번에는 타기가 거북했지만 타던 사람은 몇 번만 타면 익숙해요. 그렇게 면허도 없이 타다가 임시 검문소에서 딱 걸렸지. 지금 옥련동 입구에 파출소가 있는 곳에 수인선 역(송도역)이 있었는데 그 삼거리에서 임시 검문소 쪼가리 갖다가 딱 세워놓고 사람들 둘이서 가지고 오토바이 세우는 거예요. 그리곤 먼저 키를 빼요. 경찰들이. 당시에는 무면허자가 많았는데 그때 당시에 나도 면허가 없어서 딱 걸렸지. 오토바이 타는 데는 면허자 이상으로 탔지만…. 그래서 거래처에다 나 이만 저만 해서 여기 지금 잡혀 있다고 연락을 해야 하는데 당시엔 방법이 없었지. 그래서 내가 그 경찰 보고도 그랬어. “나 잡히면 안 돼요. 우리 네 식구 다 책임지고 사는 사람이니까. 면허 없이 오토바이 탄 잘못은 잘못이지만”이라고 말하니까 연락해 주더라고. 그렇게 거래처 과장님하고 연락하니까 뭔가 한 장 쓰라고 하더니 나가라고 하더라고. 나와서 면허는 바로 땄지요. 남들은 오토바이 면허 시험을 세 번 네 번 가요. 저는 오전 내로 필기시험에 합격 되고 실기 시험도 금방 해 가지고 오전 내로 다 마쳤어요. 그거 보면은 나도 지금도 참 신기해. 내가 믿어지지 않아요. 지금도 그 생각 하면(웃으시면서). 그때 코스 돌 적에 참 아슬아슬했죠. 그래서 되거니 생각은 안 하고 했는데, 오~ 활발하게 탔던 경험이 있으니까 내 감각이 어느 정도 맞아서 떨어졌던 모양이에요. 합격 소리가 나더라고. 그래서 그 길로 바로 은행에 가서 도로 주행에 관한 세금 얼른 내고 댐방 오토바이 구입해가지고 가 왔어요. (하하하 웃으시면서)

젊은 시절에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있으셨나요?
내가 술, 담배를 안 하다 보니 내 주위에 가까웠던 사람이 많지 않았었어요. 한 12명 정도 있었는데 나보다 몇 년 전에 다 갔어요. 그중에서 여든다섯 된 사람이 있었는데, 작년 ‘6월 9일’ 날짜도 안 잊어버려. 여기 이 종이컵(사장님이 커피를 타서 주신 종이컵)이 그 친구가 한 박스 사다 준 건데 아직까지도 먹어. 여기 몇 개 남았어요. 일 년이 넘었는데 언제나 이거 뭐야 커피 여기다 먹으면서 생각하네. 그 친구는 나한테 참 잘했어요. 그래 그런 사람이 정말로 세상 먼저 떠나니까 섭섭해. 그 친구 딸이 나하고 면회를 가기로 했는데. 병원에서 요양원에 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한 2개월도 안 넘었어. 근데, 갔어요. (눈물을 글썽이시며) 그 당시에 코로나 때문에 면회를 가지 못해서 딸하고 약속을 했었거든. 딸이 전화가 와 가지고는 “오래도록 아버님하고 막역하게 지내셨다는데, 얘기는 들어서 잘 알고 있지마는 뵌 적이 없기 때문에 잘 모르겠어요. 그래도 아버지 말씀을 따라 전화를 드리는 겁니다.” 그러면서 언제 면회를 갈 예정인데 그때 전화를 드릴 테니까 만나서 같이 면회를 가자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전에도 내가 면회를 하려고 몇 번 이래 신청했었는데 본인이 싫다고 그래. 자기 초라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그러다가 서로 만나지 못하고 이 사람이 세상 떠나고, 그 딸이 나한테 카톡 준 게 있어. 그거 읽어보면 이상하게 공교롭게도 운구차가 가다가 이 가게 앞에 있잖아요? 거기에 자연적으로 섰대. 그 내용이 왔는데, ‘아마 마지막으로 나한테 인사를 하려고 차도 그렇게 정말 운구차가 잠시 멈췄던 모양이라고. 두 분이 진한 우정을 나누셨던 관계였나 봐요.’라고 말이야. 그 딸이 보내준 문자인데 한번 보셔요.
‘유성 연마 아저씨 안녕하세요. 저는 이영복 씨 딸입니다. 불행히 뵙지 못하고 아버지가 6월 7일 새벽에 별세하셨습니다. 그러나 희한하게 오늘 장지에 가는 데 신호등 때문인지 모르겠는데 운구차가 잠시 아저씨 가게 앞에 정확하게 멈추었습니다. 저는 아저씨 가게를 보고 무척 놀랐어요. 아마도 아버지가 아저씨께 마지막 인사드린 듯합니다. 너무 서운해하지 마시고 혹시나 지나가는 길에 가게 문이 열려 있으면 한번 찾아뵙겠습니다. 건강하세요.’
내가 잘해서 그런 게 아니고 그 사람이 그런 성의를 가졌어요. 처음 이 사람을 알게 될 때 그 사람이 자기 주관이 굉장히 또 센 사람이야. 사실을 알지 못하는데 아는 척하고 그래가지고 나한테 한마디로 얘기를 해서 막 공격당했지. 내가 공격을 막 했지. 결국 그 사람이 사과했어요. 잘못했다고. 그러면서 가까워진 것이 그렇게 정말 잘했어요.


5. 앞으로의 계획과 남기고 싶은 이야기

아직도 일감이 있으셔서 나오시는데, 혹시 언제까지 이 일을 하실 계획이세요?
내 생각으로서는 잘하면 명년(내년) 2023년도 거의 채웠으면 하는데, 그게 안 될 것 같으면 처분하고요. 그런데 제 이야기가 뭐 들을 가치가 됩니까?


 
직접 제작한 연마 기계 앞에서 찍은 사장님의 모습


그럼요. 이 동네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잖아요. 그리고 88세에 아직도 일을 하신다는 것이 한창 열심히 일하고 살아가는 젊은 세대에게 아주 큰 의미로 다가옵니다.
모르긴 몰라도 동네에 대해 나만큼 아는 사람이 없을 거야. 그리고 내가 아직도 일을 하는 것을 주위에서도 대단하다고 말을 하긴 해요. (흐뭇하게 웃으시면서)

맞습니다.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감사합니다.

 
시민기록일지
• 면담자 : 정지선 (면담지원: 표기자, 허은심, 양지원)
• 면담일시 : 2022.8.31. 16시 / 2022.9.29. 16시
• 면담장소 : 유성톱연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