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결 따라 살아온 삶
나무를 닮은 듯 편안한 목공인
미추홀학산문화원
게시일 2022.12.23  | 최종수정일 2023.02.25



"문짝은, 집 다 지은 후 마지막으로 문짝 달고 나서 ‘이제 집이 다 됐구나’ 라는 느낌을 주죠."
 



1. 어린시절과 가족이야기

어릴적 고향에서 지낸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저는 삼남이녀 중 둘째. 위에 형님 계십니다. 어릴 때는 시골 보령, 워낙 산골이었으니까, 보령군 미산면 비포장 도로예요. 아마 전기가 70년대 초반에 들어왔을 거야.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호롱불 켜고 살았어요. 거기서 어렸을 때 시골 사람들 다 뻔하죠. 밭농사 논농사 짓고 겨울방학 때는 형들 따라서 나이가 어리니까 지게는 못 지고 멜빵이라고 해가지고 어깨다가 새끼줄 해가지고 나무를 뒤에 싣고 내려오는 거지. 그리고 위에 형들은 지게로다가 나무해서 내려오고. 겨울에는 그렇게 나무하고 여름이나 이런 때는 농사 지은 거 거둬들이고, 밭농사 짓고 논농사 짓고 고구마 캐고 뭐 그런 거지. 그 당시에는 다 그렇게 살았죠.
겨울에는 학교 끝나자마자 집에 와서 나무하러 가요. 나무해서 싸놔야 겨울에 불 때니까. 그때는 연탄 이런 거 없고 보일러도 없고 거의 구십구 프로는 아마 나무이지 않을까 싶어요. 연탄 때는 집은 아마 조금 부자 쪽이 아닐까 싶은데. 그리고 어렸을 때는 자치기 같은 것도 하고 그다음에 겨울에는 팽이 돌리기도 하고 연날리기도 하고 많이 놀았죠. 그러다가 중학교 1학년 2학기 때 그냥 나왔어요. 친구들하고 같이. 중학교 졸업을 못 했지.

배우자는 어떻게 만나셨어요?
운동하러 가서 탁구장에서 만났어요. 회원으로다가. 친구들하고 탁구치러 온 집사람을 만났죠. 거기서 연이 돼가지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그랬죠. 저는 집사람 만난 거 후회 안 하죠. 집사람이 나를 만난 게 후회일지 모르지만.

현재 일하시고 계신 이 목공 일에 대해서 가족들의 호응은 어떤 편인지요?
솔직히 말하면 그 당시 때만 해도 그렇게 좋은 직업은 아니지만, 굉장히 활성화된 직업 중에 하나죠. 그때 당시에 목공소 철공소 뭐 이런 것들 많이 있을 때죠. 근데 어른들 말씀이 ‘깎는 직업’은 ‘가난하게 산다.’ 이런 말이 있었죠. 옛날 어른들이 그랬어요. ‘목수는 가난하게 산다.’ 목공소에서는 미신 같은 게 있는데, 그 당시에는 사람들이 도마 밀어달라고 그러면 절대 못 밀었어요. 손 다친다고. 지금은 막 밀어줘요.

직업을 가지고 있는 자녀는 사장님이 하시는 일하고 연관이 있는 일을 하나요? 
큰아이는 공항에 근무하고 있어요. 둘째 아들이 예술 쪽이에요. 여기 와서 한 번 촬영도 했어요. 학교에 내는 과제를 여기 와서 촬영하고 했죠. 대학은 한예종(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연출 쪽으로 공부해요. 근데 저는 반대하는 입장이었어요. 외고 나와 가지고 갑자기 한예종 들어가서 영화 쪽 공부한다고 하니까 반대했죠. 사실상 예술 쪽이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이 드물잖아요.

오랜 세월을 이쪽으로 한우물만 파고 계신 거잖아요. 그 부분에 대해서 옆에서 지켜보는 가족들이 훗날에 아빠에 대해서 사장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해주면 좋으시겠어요?
이거 한 가지 직업으로다가 이렇게 오랫동안 해왔다는 그런 자부심 그리고 아무래도 기술직이다 보니까 건강만 허락하면은 한 70까지는 무난하지 않을까. 그게 직장생활보다는 구애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오랫동안 할 수 있고 뭘 하나 만들면 자부심 같은 게 느껴지고 그러니까 애들도 뭐 아빠 직업에 대해서 지금도 좋게 봐요. 긍정적으로. 큰돈은 못 벌지마는 뭐랄까 굴곡이 거의 없으니까 평탄하지 뭐. IMF든 뭐든 경기가 어려워도 다 그냥 헤쳐 나가니까.

사장님 간판도 고향 이름을 딴 보령 목공이잖아요. 혹시 고향 이름을 딴 특별한 이유가 있으실까요.
그냥 단순하게 생각했어요. 내 고향이 그냥 좋아서. 다른 사람들은 간판을 뭐 이렇게 이것저것 알아보고 한다는데 나는 그냥 고향이 좋았으니까. 시골 태어난 데가. 


2. 부평에서부터 숭의동에 오기까지

목공 일을 하게 된 계기가 있으셨나요?
15살에 고향 떠나와서 나이도 어린 상태에서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뭐 배고픈 시절이라 그냥 세끼 밥해주고 용돈만 주면 그냥 가서 일하고 그럴 때였어요. 그리고 이 일도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우연치 않게 형님 친구분이 목공 쪽 직장생활을 한다고 한번 만나보라고 해서 만나봤는데 그 형이 추천해 준 겁니다. 조그마한 목공소. 그 사람도 월급쟁이였어. 사장은 따로 있었지. 그런데 갔더니만 그냥 맨 뒷일만 시켰었죠. 거기서 좀 일 하다가 부평에 있는 시장 로타리 쪽에 보면 목공소가 좀 많이 있었어요. 78년도에 한일목공소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지금은 부평에 한두 개만 있고 다 아마 없어졌을 거예요. 그 당시에는 대여섯 군데 있었던 것 같아요. 거기서 잠깐 꼬마 생활을 했죠. 한 2~ 3년 그러다가 회의가 느껴졌고 이 직업에 대해서 너무 힘드니까 회사 생활을 잠깐 했었지. 18살에 용인에 있는 외삼촌이 다니는 지관 공장이라고, 실 감는 실패 만드는 회사에 들어갔다가 회사생활이 아닌 것 같아 1년 정도 다니다 그만뒀죠. 그 후 공장에서 가까운 용인 동네에 현대 건업이라고 있었어요. 거기서 이제 회사 생활을 좀 하다 보니까 아닌 것 같아 아무리 봐도. 그냥 공돌이 생활이야. 그러다가 목공소가 하나 있길래 거길 아마 내가 직접 찾아간 것 같아. 거기서 일을 배워가지고 진짜 이제 일 다운 일을 배웠지. 열여덟 살 때 거기서 한 몇 년 배웠어요.
현대 거기가 김춘식이었나 그 양반 지금은 돌아가셨을지 모르겠다. 그때는 전부 무늬목 작업이었어요. 그 집은 전부 맞춤 작업만 했어요. 옛날에는 도원동에 유명한 기성문 가게들이 쫙 있었잖아요. 도원역 앞에 지금은 다 헐리고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양쪽으로다가 쫙 있었거든요. 그런 데는 기성문 판매하고 문짝 제작하고 그런 데였거든. 근데 그 집은 용인에서 고급 문짝만 짰어요. 전부 무늬목 작업해서 하는.그다음에 80년대 초 되지 않을까 싶어요. 용현시장 앞에 함씨목공소라고 있었어요. 함병호씨라고 용현시장 앞에 대로변에 목공소 하나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간판 이름이 따로 거의 없었고 그냥 함씨 목공소라고 했는데 거기서 몇 년 있었지 또.그때부터는 이제 중바(중급 기술자)로 들어갔지. 중기술자로 스무 살 초반. 거기서 일하면서 취미 겸, 대회도 나가려고 권투 했었죠. 제물포역 앞에 금강체육관도 다니고, 새벽에 일어나서 송도 유원지까지 달리기 운동하고 그랬죠. 그때는 한참 젊었을 때. 그 후로 또 신흥동에 노씨 목공소로 갔었죠. 그때가 아마 80년대 중반 되지 않을까 싶어요. 거기서 노씨 목공소에서 한 2~3년 있었는데, 거기는 학교 문짝 전문이었어요. 학교 문짝, 학교 창문 이런 거 전문이었는데 거기도 오래된 전통 있는 집이었죠. 거기서 하다가 이제 도원동으로 왔죠. 도원동 대우목공소에서 몇 년 있다가 그다음에 옹진목공소로 갔어요. 도원 목공거리라고 그 도원역 방향에 지금은 다 헐렸지마는 그쪽에 있었어요. 거기는 목공소가 많이 몰려 있어가지고 서로서로 일하다가 저쪽이 대우가 좋다면 옮겨가는 경우도 있고 아니면은 이제 뭐 일 잘한다 그러면 옮겨 다니는 그런 것도 있었죠. 사정상 이쪽이 일이 없어 이러다 보니까 그러면 이제 또 한 사람이라도 인건비 줄이려고 서로 윈윈하는 거죠. 내가 나가주면 주인 입장에서는 둘이 일하다가 한 사람이 되는 거야. 보통 그 당시에 목공소 일이 많아가지고 보통 두세 명이 있었어요. 도원동의 목공 시절이 그때 제일 호황기였어요. 그때가 80년대 아시안게임 시작하기 전 그때는 목공이 완전히 호황기였어요.

지금까지를 생각하면 목공 산업에선 그때가 가장 호황기였었나요?
80년대 초부터 90년대 초까지 그때가 아주 호황이었지. 물론 그전에도 호황이었지만 그때는 내가 꼬마 생활했을 때고 그때도 엄청 일이 많았었죠.왜 호황이었냐면 인천에 전국 체전이 그때 있어가지고 시에서 이것저것 보조해 줄 때인 것 같기도 하고, 정비 차원에서 한 거지. 그 당시에만 해도 전국 체전이 알아줬잖아요. 전국에서 다 모이니까 우리 시를 조금 달라 보이게 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막 개조하고 했던 시절이라.
 
초보시절 지나고 이제 중견급으로 들어갔을 것 같은데요.
옹진목공소에서 한 10년 정도 있었던 것 같아요. 거기서는 내가 기술자로 들어갔다가 나중에는 책임자까지 했지. 기술자 한 사람이 자기가 목공소를 차린다고 나갔고 그래서 내가 기술자가 돼서 책임자가 된 거죠. 책임자가 되면은 문짝이나 원목 가구 제작할 때 쓰미를 놔요. 문짝 제작하는 과정에서 나누고 더하고 해야 해요. 창문이 예를 들어서 몇 짝짜리다 하면 거기를 이제 더하기 빼기 해가지고 문 한 짝에 치수가 얼마나 나오는지 그걸 다하고 그다음에 이제 그려야 돼. 쉽게 말하면 설계 같은 건데 그걸 우리는 쓰미 논다고 하는데, 기술자가 그거 해줘야 그다음 사람이 각종 기계작업을 하고 다 해서 짜 맞추는 거죠. 거기서 한 십 년 하다가 이제 91년도에 현재 숭의동으로 넘어와서 창업을 한 거지.

도원동에서 배다리는 안 거치셨나봐요?
배다리는 사실은 목공이 없었어요. 배다리는 공예 조각 그리고 대나무 공예 그런 쪽으로 있었지. 배다리는 목공소는 거의 없었어요. 공예 쪽으로 있어서 간판 공예.

사장님이 하시는 일은 목공이고, 목공하고 공예하고 크게는 그렇게 분류가 되는 것 같아요. 간판에서 보는 것처럼 사장님은 조각이나 공예 쪽이 아니시고 목공 쪽이신 거죠.
우리는 다대구라고도 하고 자꾸 일본말 쓰는데 일할 때 일본말을 배워서 그래요. 근데 지금은 창호 부문이라고 해야 돼. 공예 하는 사람들은 분야가 완전히 다른데 지금은 약간 희석됐어요. 크게 다른 점은 뭐라고 해야 되나 목공은 어떻게 보면 제작이고 공예는 가공이라고 봐야겠다. 그리고 공예 쪽도 여러 분야가 있는데 어쨌든 간에 공예 쪽은 오리고 파내고 그런 쪽이죠. 우리는 원목을 갖다가 대패 작업을 해서 제품을 만드는 입장이죠. 그리고 주로 목공은 우리 같은 경우 주로 문짝이죠. 원목 문짝 뭐 한옥 문짝 주로 이런 쪽으로 하지요. 지금은 공예 하는 사람들이 가구도 짜고 문짝도 짜고 하는 사람도 있고 또 목공 하는 사람이 뭐 하는 사람도 있는데 저 같은 경우는 거의 문짝만 주로 해요. 내 분야만 하는 거지 쉽게 말하면.

이제 숭의동으로 오신거죠? 지금은 사장님 개인 사업장이시잖아요. 언제부터 개인 사업으로 전환이 됐나요?
그때가 91년도 숭의동 오면서요. 31~32년 전에 오면서 지금 이 자리예요. 양쪽으로 이렇게 나뉘어져 있어요. 원래는 저 끝에 있었어요. 그러다가 여기 아는 형님이랑 같이하다가 그 형님이 그만두는 바람에 내가 이 가게를 얻었죠. 동업을 하다가 저 가게(현 가게 옆에 다른 한 켠)가 또 나오는 바람에 저 가게를 얻었지. 여기는 우리 개인 소유가 아니에요. 다 소유주는 따로 있어요. 다 한 사람 거예요. 몇 사람 빼고는 다 그렇죠. 여기 숭의동에선 기성 문짝도 했고. 저쪽 옆에 가게 하나 늘리면서 저걸 늘린 것도 한 20년 된 것 같아요.


3. IMF 시절

여기 숭의동에 계시면서 IMF를 겪으셨잖아요. 그 당시는 어떠셨어요?
그때는 엄청 바빴어요. IMF 때 많이들 퇴직하고 잘리고 그랬잖아요. 그 사람들이 그냥 놀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가게를 차리기 시작한 거야. 체인점이든 가게를 차려. 그러면 인테리어를 꾸미다 보면 일식집이면 일식 문짝, 한식집 한식 문짝, 일반 체인점이면 체인점 문짝 그 일이 나한테 오는 거지. 그래서 일이 엄청 바빴어요. 예를 들어서 초창기 때 김밥 천국이라는 데가 있었는데 김밥천국에 벽에 보면은 한옥문짝으로 이렇게 이미테이션으로 창호지 부착해서 벽 인테리어 문짝 있죠. 가게 하나당 그게 보통 몇장 씩 들어가요. 또 체인점 지짐이라고 있었어요. 가게 앞에 출입문 보면은 다 나무 문이었어요. 목재 문 유리 껴갖고 이렇게 문살 약간 넣어가지고. 그러고 지짐이 가고 나니까 이제 강호동 체인 삼육구 체인 이런 거 걔네들이 엄청 또 해가지고 업자들이 가져오는 거예요. 그 문짝을 짜달라고. 홍대 쪽에 주로 많이 서울 쪽에. 그러면서 이렇게 자꾸자꾸 변화가 오는 거예요. 시대가 자꾸 바뀌니까. 그러다 보니까 지금은 이제 여러 방면에서 오죠. 다양하게.


4. 나무 가공의 과거와 현재

IMF 시절 때 직장인들은 직장을 잃고 고생을 많이 했는데 오히려 사장님한테는 그게 전화위복이 돼서 그때가 호황기였었다라는 사장님 말씀대로 굴곡진 적 없이 평탄한 생활을 하신 것 같아요.
애들도 굳이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저거 하지는 안 했으니까. 학교도 다 지들 공부도 잘했고 또 지네들이 알아서 잘 간 것도 있고 아빠는 옆에서 그냥 살짝 도움만 주는 것뿐이고 지금 제일 중요한 건 건강이죠. 가족 건강하고 내 건강. 가장이 건강을 해야죠. 저는 사실은 목표가 이거 목공소를 차리고 나서 50세까지만 하고 50세 이후부터는 어려운 일 안 하고, 하긴 하되 좀 내 개인적으로 생활을 누리면서 그냥 편하게 지내려고 했던 건데 그게 목표대로 안 되더라고요. 막상 오십이 됐는데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고 또 하는 일이 그다지 그렇게 손 놓고 이렇게 할 정도로다가 힘든 일도 아니고. 물론 육체적으로 힘들 건 있지만는 갈수록 편해져요. 기계가 잘 나오고. 아까 얘기했지만 1차 가공을 해오는 경우가 많고 2차 가공까지 해오는 경우도 있고. 그전에는 다 잘라서 대패질까지 했지마는 대패질을 다 해오는 경우도 많아요. 그러면 여기서 굳이 대패질을 많이 안 해도 된다는 얘기야. 그러면 힘든 일을 안 한다는 얘기죠. 그래서 목재만 가져다가 우리가 절단해서 기술적으로 만들기만 하면 돼요. 그러니까 힘든 일차, 이차 가공을 패스하는 거지. 옛날에는 다 했어요. 나무 건조까지 다 했어요. 그때는 수입목이 없었어요. 통나무 갔다가 다 그랬어요. 원목으로 들어오면 국내에서 제재를 해서 그 쌩목을 사다가 어디 공터에 있으면 나무를 바람에 말렸지. 그러고 다 말린 걸 갖다가 깎아서 가공하고 문짝 만들고 문틀 만들고 그랬죠.
나무 싸놓은 게 저쪽 이쪽 사이드에 쌓아놓은 거 있는데 저거(뒷마당을 가리키며) 지금은 수입목을 다 가져오는데 수입목이 건조가 거의 돼요. 수입에서 배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몇 개월씩 걸리니까 그 컨테이너 안에서 건조가 되고 또 여기 국내에 들어와서 야적장에다가 싸놓으니까 또 건조가 되고. 그래서 우리한테 올 때는 80% 정도는 건조가 된 상태에서 들어오고 그래서 여기서 굳이 건조를 잘 안 해도 돼요. 지금은 그렇게 시스템이 돼 있어가지고 아무래도 옛날보다는 일하기가 좀 편하죠. 다만 자재 이런 것은 좀 비싸졌죠.

원목 문짝이 부가가치가 높은 품목일 것 같아요. 그래서 수입이 좀 높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우리가 하는 일은 말씀대로다가 가격이 딱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제작하냐에 따라서 가격이 정해지거든요. 그래서 부가가치가 높은 편이죠. 보통 일반적으로 자재비 30% 내외 나머지 70%라고 보시면 돼요. 물론 이제 양에 따라서 틀린 데, 액수가 크면은 당연히 자재비가 조금 더 올라가고 수입이 조금 적게 책정을 하죠. 왜냐면 단가가 매출이 너무 많은 거니까 그런 건 부가가치가 많이 남게끔 주질 않지 업체에서. 그래도 보통 최하 50%는 마진.


5. 무늬목 문짝 

목공일 시작 초반에 무늬목 문짝 배우셨다 했는데 무늬목에 대해서 좀 더 듣고 싶은데요.
무늬목은 말 그대로다가 나무를 얇게 깎아서 문짝에다가 붙이는 거예요. 나무로 짠 방 문짝 있죠. 지금도 오래된 집 보면 무늬목으로다 짜가지고 한 거 있어요. 무늬목을 안 붙이면 그냥 합판 문짝이 되는 거야. 근데 그 위에다가 각종 무늬목을 붙이는 거예요. 특수목 그런 것은 비싸고 옛날에는 이티무늬목이 제일 저렴했어요. 좀 비싼 원목들은 홍송, 월넛, 오크, 부빙가지금도 생각나는 게 몇 가지 그런 목재는 수입 부분. 지금도 마찬가지고 국내 나무 갖고는 무늬목을 못 만들어요. 그 무늬목이 지금은 많이 없어졌지만, 우리나라에서 원목을 수입해다가 그걸 얇게 깎아요. 무늬목 공장이라고 그걸 판매하는 데 가서 목공소에서 사다가 목공소에서는 문짝을 제작한 다음에 그 무늬목을 본드로다가 붙여서 이쁘게 내는 거죠. 지금은 그 위에다 무늬목 안 붙이고 유색 페인트 바로 칠하는 경우도 있지마는 그전에는 다 무늬목을 붙였어요.
 
무늬목


6. 창호의 변화

지금은 무늬목이 거의 없는거죠? 이후로 창호는 어떻게 바뀌었나요?
무늬목은 거의 사양길이고 그 이후는 기성문들이 나오기 시작했죠. 플라스틱 아니면 MDF로 해서 필름이 붙여져서 나왔지, 필름 문짝이 나오고 그게 좀 들어가면서 ABS 문짝이 나오기 시작했지. 방문들 그렇게 하다가 그다음에 다시 원목 문짝. 아예 원목으로 짜는 문짝. 우리가 옛날에는 합판 위에다가 문짝을 짠 다음에 원목 마냥 보이기 위해서 무늬목을 발랐어. 그러면 사람들이 ‘원목 문짝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근데 지금은 아예 무늬목을 안 붙이고 원목을 갖다가 문짝을 짜요. 지금은 통원목을 갖다가 그냥 두껍게. 이거 무겁겠죠. 그리고 비싸요. 이런 원목 문짝은 대부분 중산층 이상. 한옥 아니면은 고급 음식점도. 음식점은 이제 한옥 문살 이런 게 들어가는 거고 원목 문짝 같은 경우는 개인 별장이라든가 아니면 단독주택 그리고 아파트에도 물론 들어가요. ABS가 싫어가지고 원목으로 해달라는 사람들 요즘에 있으니까. 제가 보기에는 경제적인 수준하고 자기 취향에 맞춰서 하는 것 같아요.
 
원목문짝


문짝의 흐름이 무늬목부터 철제, 플라스틱 등 변화가 많은데 사장님은 여전히 원목문짝을 고집 하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지요?
특별한 이유는 없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무늬목 문짝은 없어지고, 그리고 나무 문짝들은 자꾸 없어지잖아요. 나무 창문이 다 하이사시로 바뀌었고, 근데 이삼십 년 전만 해도 나무 창문들이 많았어요. 밖에다 알루미늄이 있고 그리고 안으로 다 이중창으로 해갖고 내부에는 다 목재 창으로 했거든요.근데 그것마저 지금은 샷시로 이중 창으로다가 다 하는 바람에 목재 창문이 이제 거의 100% 없어졌다고 봐야 돼. 그래도 이 한옥이라는 문살은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활성화될 거고 아무나 만들어내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한옥 문짝, 한옥 문살 이런 걸로다가 좀 오래 하게 되는 거죠.
나무 문짝은 아무리 수요가 줄어든다고 해도 영원히 없어지지는 않아요.다만 선택 사항이 나무가 비싸고 무한정 나오는 목재도 아니고 자연환경도 연관돼 있고 국내에서 하는 게 아니고 해외에서 수입해 오고 하다 보니 수요가 줄을 수 밖에 없지만 나무 수요는 계속 있어요. 일부에서 꾸준히 나무를 선호하니까 목재 산업이 지금 그냥 호황이고 그렇잖아요. 어떻게 보면 없어져야 되는데 목재는 안 없어져요. 인간이 사는 동안은 안 없어질 것 같아요.
아무리 인조적으로다가 문짝 비슷하게 잘 만든다고 해도 인조적으로 만든 건 자연하고 비교할 수가 없어요. 자연목으로 이걸 계속해도 옛날같이 일이 엄청 바쁘지 않아도 그냥 나 일하는 데는 그다지 영향이 없을 것 같아요. 그런 생각이라 한 가지 원목 일을 계속하는 거고 또 한 가지는 이걸 제작하는 사람이 없어요. 만들고 제작하고 하는 사람이 없다 보니까 수요가 없어도 제작하는 사람이 없다 보니까 일거리가 계속 그냥 유지할 수밖에 없죠.

목재는 주로 뭐를 쓰세요?
목재는 100% 다 수입 원목인데요. 초창기 때는 나왕을 썼죠.
그 당시에는 수입 나왕인데 제재목이라고 해가지고 원목을 외국에서 들여다가 국내에서 칫수별로 제재를 한 다음에 그걸 우리가 사다가 건조해. 다음에 그거 갖다가 대패질로 해서 문짝을 짜고 그랬는데 지금은 이제 그게 없어졌어요. 해외에서 자기네들이 다 가공을 해서 수출을 해버려요. 왜냐면은 원목만 달랑 수출해 버리니까 돈이 안 되고 그러니까 자기네들이 아예 치수별로 가공해서 수출을 시키는 거야.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그쪽에서는 이렇게 가공해서 각 나라로 수출하는 거야.지금은 생활 수준이 좀 높다 보니까 고급 목재를 많이 쓰죠. 주로 제일 많이 쓰는 게 미송 햄록이라고 있어요. 알래스카에서 주로 나오는 걸로 알고 있어요. 햄록이 추운 지방 게 보편화돼 있고 그다음에 그 위에 홍송 오크목 여러 가지가 있죠. 근데 주로 사용하는 것은 햄록이 제일 많이 사용하죠.한옥 문짝을 주로 하고 원목 문짝 하더라도 나왕이나 햄록 그 두 가지 정도 하고 그다음에 조금 저렴한 게 스프러스목재라고 있어요. 그것도 조금씩 하고.
 
제재목


나무를 평생토록 접하셨는데 개인적으로 나무에 대한 특별한 느낌이 있으세요?
그냥 나무는 말 그대로 편안함. 인간한테 이 나무 문짝을 달아놓은 거 하고 안 달아놓은 거 하고 집 안에 완전히 분위기가 틀려요. 옛날엔 문짝 달으려고 하면은 막 잔치 벌여 줬어요. 닭 삶아서 주고 고기 삶아서 막 먹이고 그랬어요. 우리가 문짝 시공 나가면은 집을 짓고 나서 문짝 달았을 때 이제 집이 다 됐구나 하는 그런 느낌이니까 문짝 다는 것을 중요시 여겼죠. 지금도 뭐 중요시는 하죠.

창호가 바뀌면서 생산체제도 바뀌었을 텐데요 어떤 방식인지요?
사용하는 나무질은 똑같은데 문제는 대량생산 하는 공장은 기계 자동화 시설이 돼 있고 그쪽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보면 대부분 다 기술자들이 60대예요. 그게 뭐냐 하면은 우리 마냥 목공소 하다가 혼자 못 버티니까 취직하는 거야. 회사로다가. 그러면 그 회사에 기술자로 들어가서 문짝을 짜는 거야 그런 식이지. 1인 사업장이 이제 거의 없어졌다고 봐야 돼요. 이 동네만 해도 뭐 고려하고 저하고 둘뿐이 더 있어요? 문짝 제대로 오리지널로 짤 수 있는 사람은 거기하고 나하고 둘 뿐이 없어요.
한옥문짝
완자문살


말씀을 듣다보니 희소 가치의 중요성이나 가치와 연관하여 이런 전통 기법이 사라지는 거는 정말 안타까운 일인데요.
 그게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시대적으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데. 1인 사업자는 사라진다고 보고 이제는. 예를 들어서 인천에서 제일 큰 영림이라든가 또 우딘이라든가 이런 데가 다 문짝 공장이잖아요. 그런데 걔네들은 이제 이런 고급 목재로다가 짜는 게 아니고 변형되게 ABS문짝, ABS도어 이런 거 아니면 필름 그런 걸로다가 주로 제작하죠.​​​​​​​


7. 목공 관련 용어와 도구들

일과 관련한 말씀하실 때 일본 용어가 자주 등장을 하던데요?
그게 왜 그러냐면요. 목수 선배들, 지금 거의 돌아가셨겠죠. 밑에서 일 배울 때 보면은 밀리(mm)도 사실은 안 썼어요. 밀리도 안 쓰고 다 일본어 했어요. 1mm가 일본으로 따지면 고링이야. 일제 강점기 시대 때 걔들이 와서 건축을 다 퍼뜨렸어요. 그때부터 문짝 짜는 법이나 이런 걸 그때 당시에 걔들이 와서 다 가르치고 다 배웠지. 그래서 목공 기계들도 일제가 많아요. 옛날에는 어쨌든 뭐 일본어로 다 했어요. 목공 손 연장들, 대패도 지금 생각나는 게 단다이, 나가다이 이렇게 있어요. 단다이는 짧은 거, 나가다이는 좀 긴 거. 그리고 시아기 대패, 아라다페 이런 식. 시아기는 이제 뭐 마지막에 깨끗이 하는 거. 그리고 우리가 지금은 1mm, 2mm, 3mm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저도 밀리로다가 계산한 것은 사실 얼마 안 돼요. 다 치수로 계산했어요. 이지부 니부 산부 요부 고부 이렇게. 한치 두치 세치 한 자 두자 세자 네자 이렇게 했는데 세월이 자꾸 변하고 다른 사람들도 다 센티로 밀리로 계산하다 보니까 자연적으로 밀리로 쓰게 돼요. 지금 자도 치수 자가 없어지고 다 밀리 자로 써요. 옛날에는 치수 자하고 밀리 자하고 같이 붙어 있는 거 썼어요.

가공 과정에서 사용하시는 도구라든가 기계에 대해서 말씀 해주세요.
여기 큰 기계는 지금 다 국내산이에요. 그전에 제작했던 것들.
오래된 거예요. 물론 그전에까지 또 다른 사람이 사용하고 그랬기 때문에 제가 아마 중고로 다 구입했을 거예요. 그 당시에. 고장 나면 간단한 건 고쳐가면서 쓰는데 대우시(대패기계) 같은 경우는 고장 한 번도 안 나고 지금도 쓰고 있고. 그전에 만든 기계가 참 좋아요. 20년 이상 다 됐어요. 그 나머지 기계 부속품들 톱날들 이런 것은 소모품이니까 새로 맞추고 새로 사고 그러는 거고.장비들이 자꾸 업되고 좋은 게 나오니까 필요하면 사서 쓰고. 예를 들어서 얼마 전만 해도 저 타카가 없었지요. 다 망치로 박았지. 저기 타카가 나온 지가 아마 글쎄요 얼마나 됐나. 한 30년 됐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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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우시(기계대패)
작업도구
 
보령목공 이복섭 사장님 손

사장님 하시는 일이 도구를 다루고 기계를 다루는 위험한 일이잖아요. 손을 보니까 일하시면서 사고가 있으셨던 것 같아요.
15살 때 부평에서 초보 시절에 저기 대우시에다가(대패기계) 손가락이 들어가서 3개가 다 날아갔는데 나머지는 다 복원됐어요. 근데 이거 하나가 잘렸지. 완전히 오그러졌지. 붙일 수가 없어 가지고. 15살 때 손가락 병신이 됐다고, 친구랑 부평공원이 부평역 앞에 있었거든요. 거기 보면 벤치도 있고 거기서 친구랑 앉아서 엉엉 울었어요. 이거 친구들이 손가락 병신 됐다고 약 올리면 그럼 어떡하냐, 그 당시에는 그랬지 어린 마음에. 그러고 나서 그 뒤로 특별히 다친 적 없어요. 


8. 거래하는 방식

오랫동안 서로 신뢰를 하면서 거래를 하는 고객이 있으신지요?
오랫동안이라, 그게 아까 얘기한 대로 세월과 그 유행에 따라서 사라지고 다시 보고 이러기 때문에 오랫동안 거래하는 사람은 없다고 봐야 돼요. 체인사업 할 때는 체인 업자 한 2~ 3년 했었고 또 인테리어 업자, 한동안 주택을 지을 때는 주택만 전문적으로 짓는 주택업자가 있었거든요. 그 사람 몇 년 거래하다가 이제 또 사라졌지. 또 지금은 대부분 인테리어 회사와 주로 거래하죠. 현재 하는 것은 스터디 카페라고 해갖고 스터디 카페에 아카시아 상품을 제작해서 납품하고 칠까지 해서 납품하는 경우가 있고. 그리고 또 촬영 스튜디오 지금 한옥 스튜디오가 촬영할 때 좀 이용하지. 스튜디오는 빨간 문짝이 주로. 제 작품 사진 보려면 네이버에 제작 갤러리 들어가서 사진 직접 보셔도 돼요.네이버 들어가서 인천 목공소 치면은 제 보령목공이 나와요. 옛날에는 건축업자들이 직접 다 일거리를 갖고 왔어요. 직접 우리한테 와서 맡기고 갔는데 지금은 인터넷 보고 다 거래하고. 그 사진 올린 거 보고 전화로 또는 인터넷 거래를 주로 많이 하는 편이지. 그러고 보니 아날로그에서 완전히 그냥 저걸로 변한 거네.​​​​​​​


9. 숭의동 목공예거리의 변화 모습

여기 숭의동목공예거리 변화상에 대해 궁금한데요, 91년도에 오셨으니까 이제 30년 세월이 넘으셨는데 30년 전에 하고 현재 모습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주변에 숭의 평화시장이라든가 깡시장이라고 하는 곳 등 기억나는 모습들 있으세요?
청과물 시장이 깡시장이죠. 평화시장 청과물 시장 조금 변하기는 했죠. 주위에 건물이 들어섰다든가 평화시장 건물 그대로 있잖아요. 옛날에는 시장이 좀 활성화됐지만 지금은 시장 역할을 못 하고. 목공예거리도 사실은 여기보다는 도원동이 활성화됐었죠. 그 당시에는. 도원동이 목공소가 양쪽으로다가 쫙 있었지. 몇십 개가 있었지. 지금은 도원동은 오히려 축소되고 도원동이 아예 다 없어졌지. 거기 있는 사람들이 이쪽으로 거의 다 옮긴 거죠.
30년 전에는 여기가 많았었어. 가게가 저 건너편에도 있었고 한 삼십 개는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도원동에서 기성문 판매하던 사람들이 이쪽으로 와서 열었으니까 기성문 판매하는 사람들은 문짝 판매. 그 나머지 제작하는 사람들. 실제로 문짝 제작하는 사람들은 많이 줄었다고 봐야죠. 없어지고, 은퇴하시고, 돌아가시고.
여기 있던 사람들은 보통 몇십 년씩 됐는데, 내가 이제 고참에 들어가죠. 제일 오래됐지. 거의 30년이니까 이 동네에서. 그리고 요 밑에 고려 목공 거기도 뭐 몇십 년 됐겠네. 그전에 먼저 온 사람도 있었는데 그만두었고 오래 여기 있는 것은 제가 제일 오래 있었다고 봐야죠. 거의. 물론 나하고 비슷하게 있는 사람도 있고. 어쨌든 간에 한 10년 전만 해도 활성화됐었죠. 나홀로 아파트들 들어서면서 그 자리 있던 사람들 쫓겨나갔잖아. 땅 주인이 파니까. 오성목공이나 공예들이 몇 군데 없어지고 옛날에는 굉장히 바빴죠. 지금은 조금 쇠퇴기라고 해야 되나. 아까도 말했지만, 목공 하는 사람들이 없으니까. 그리고 이제 공예 거리로 지정되고 나서부터 조금 알려진 거지. 또 숭의 목공예마을이다 이렇게 해서 버스 정류장도 숭의 목공예마을 앞이라고 이렇게 하잖아요. 당연히 숭의 공예마을인가 보다 하고 찾아오는 사람도 있고.
 
숭의목공예마을 버스정류장


숭의동 목공예 거리가 특화 단지로 조성이 되어 있는데 이렇게 동종업계끼리 모여 있는 거 하고 나홀로 사업을 하는 거 하고 장단점이 있을까요?
단점은 없는 것 같아요. 모여 있는 게 좋아요. 무조건. 고객 유치가 문제가 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자기들만의 기술이 있고 자기들만의 제작법이 다 다르고 또 소비자가 그걸 알아요. 처음에는 모르고 맞추었다가 나중에는 아 이 집이 더 잘 나오는구나, 그래서 자기만의 고객이 있고 뭐 굳이 경쟁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오히려 몰려 있는 게 더 이득이죠. 그리고 지금은 인터넷으로다가 저 같은 경우는 인터넷 홈페이지가 있어가지고 거기다 광고를 하니까 가게를 찾아와서 주문하는 것보다는 인터넷으로 주문 들어오는 게 더 많아요. 한 70%.그냥 인터넷 사진만 보고 제가 제작한 사진만 보고 전화로 상담하고 이제 그렇게 해서 발주를 받아가지고 제작하고 얼굴도 못 본 상태에서 제품 받고 납품하고 그렇게 계약이 이루어져요.


10. 목공일에 대한 바람

앞으로 목공예에 대한 어떤 바람 아니면 예측되는 거가 있으시면 한 말씀해 주세요.
바람이라는 건 뭐 특별한 거 없어요. 그냥 내가 건강 허락하는 데까지 이 자리에서 했으면 좋겠죠. 내 일을 여기서 옮기지 않고 이 목공예 마을에서. 그게 바람이고 뭐 특별히 원하는 것은 이 마을 자체가 좀 오래 버텨줬으면 하는 바람이죠. 개발에 휘둘리지 않고. 나만 혼자 버텨서도 안 되는 거니까 다른 업체들도 오래 버티고 그래서 최소한 10년 이상은 좀 버텼으면 하는 바람이 그거죠.
 
바쁘신데 오랜 시간 내 주셔서 감사드리고요, 제가 20년 후에 여기 이 현장에서 다시 면담을 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생기기를 바랍니다.
20년은 아니고 10년이라면 모르겠어요.


 
시민기록일지
• 면담자 : 표기자 (면담지원: 허은영)
• 면담일시 : 2022.8.29. 16시 / 2022.9.8. 10시
• 면담장소 : 보령목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