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결 따라 살아온 삶
목공예의 달인
미추홀학산문화원 관리자
게시일 2022.12.23  | 최종수정일 2023.02.25




“ 힘들게 일했던 사람이지. 이 날까지 자식들 잘 키웠고 . . .”
평생 한 우물을 파고 길어 올린 장인의 담담한 말 한마디에 목공예 장인의 노고로움이 느껴진다.

 



1. 목공일을 시작하다

어떤 계기로 목공일을 시작하게 되셨는지요?
중학교 2학년 다니다가 집안이 어려워서 객지 나오게 됐는데 서울에 둘째 형님이 사는 데로 와가지고 어떻게 우물쭈물하면서 직장을 조금 다녀봤어요. 그러다가 금호동에 형님 아시는 분이 조각하는 데가 있다고 그거 한번 배워보겠냐고 가서 보니까 내 마음에 싹 들어. 조각하는 것이 내 적성에도 맞고 그래서 그때부터 조각을 하기 시작해서 일을 한 거예요. 그때 당시에 월급이라고 볼 수도 없고 그냥 용돈 정도도 안 되죠. 돈을 떠나서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신념으로 들어가서 일을 하기 시작한 거죠. 금호동에서 일을 하다가 그 공장이 조금 어려워져가지고 다른 데로 가기로 했는데 갈현동이라고 있어요. 거기에 계시는 모규원 씨라고 조각하는 대로 자리를 옮겨서 그분한테 그때부터 목공 일을 제대로 배운 거예요. 홍대 나오신 분인데 작가나 다름없어요. 일을 잘하시고 그분 밑에서 많이 배웠죠. 

그때 배우신 공예는 어떤 종류인지요?
가구에 들어가는 거예요. 나는 공예를 해도 가구 조각만 많이 했어요. 저기 벽에 있잖아요. 저런 조각들은 그때 다 배운 거예요.
 
처음에 조각 배울 때 만들었던 공예품들


그 후 인천으로 내려와 가지고 도원동 동사무소 옆에 살면서 조그마한 가구 공장에 조각을 하는 기술자로 취직을 한 거야. 거기서 일을 하다가 주인이 내가 일을 좀 잘하고 하니까 도급을 맡아서 하라고 그래서 맡아서 한 거야. 조그마한 방을 하나 얻어가지고 사람이 한두 명이 됐고. 그 후 군대 마치고 율목동이라는데 방을 얻어가지고 다시 일을 시작을 한 거야. 혼자서 조각 일 시작하다가 거기서 결혼했지. 조각을 조금씩 하고, 군데군데 도원동, 부평 그런 데서 주문을 맡아서 개인 거래 했죠. 그때 당시에는 그렇게 하다가 시간이 지나서 도원동 옆에 가게를 하나 얻었어요. 조그마한 가게를 하나 얻어가지고 거기서 일을 시작하면서 바로크가구라고 큰 거래처를 하나 잡은 거지. 삼익가구 일도 했고, 옛날에 시계 케이스 공장이라고 있어요. 가나물산 이라고 수출하는 회사 그런 일들을 좀 많이 했죠.

2. 바로크 가구에 조각품 납품하던 시절

예전 바로크 가구의 조각 디자인 생각나는데요, 그 조각디자인을 사장님이 직접 하신 건가요?
화려하기보다도 단단하고, 뭐랄까 질이 좋은 제품을 만들었죠. 바로크라는 회사가 당연히 비쌀 수밖에 없는 게, 나무질이 좀 단단한 걸로 해요. 바로크 위상돈 사장이 처음에는 가구 공장을 한 게 아니고 청우기업이라고 아파트 문짝 하다가 가구 공장을 시작을 한 거야. 바로크에 조각일 처음 시작은, 위상돈 사장이 가구회사 한 번 해보려고 하는데 나보고 조각을 다 해줄 수 있냐 하길래 ‘합시다’ 그래서 바로크는 나 때문에 생겼다고 볼 수도 있어요. 거기 조각을 내가 전적으로 맡아서 하기 시작하면서 일하는 사람들도 여러 명 두고 했어요. 돈하고는 관계없지만 내가 그거에 굉장히 협조를 많이 한 거죠. 처음에 만들었던 물건은 전부 내 머리에서 나온 가구라고 생각하면 돼요. 그럴 정도였어요. 그때는 여기 도원동 헐리면서 배다리 쪽으로 옮겨가지고 와서 일을 하고 했어요.

조각 디자인 발상은 어떻게 하세요?
솔직히 말해서 남의 것 곁눈질도 좀 하고 외국책도 좀 봐서 내가 알아서 도면도 뜨고 그렇게 해서 작업한 거지. 누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해서 한 게 아니고 그렇게 도면을 만들어서 조각을 만들어오면 그게 좋으니까 결정이 돼가지고 가구가 시작이 된 거죠. 가구 처음에 A타입으로 나오기 시작한 거는 내가 모든 걸 ‘이렇게 이렇게 합시다’ 해서 한 거니까. 회사에서 만들어 달라는 조건도 걸려 있었지만 내가 거기에 맞춰가지고 모든 걸 다 해줬으니까, 그런 정도로 내가 바로크를 전적으로 했어요. 그때가 재미있었지. 그렇게 하다가 이 조각이 대한민국에서만 인기가 좋은 게 아니고 중국 쪽에서도 많이 들어왔어요. 중국 쪽에서 조각도 들어오고 하다 보니까 가격 면에서, 사람을 여럿 데리고 할 만한 가격이 안 되고 자꾸 떨어지다 보니까 손을 들고 안 한 거예요. 그때 외교가 중국하고 터지면서 중국의 조각 기술이나 이런 게 한국 못지않아요. 지금도 한국 사람보다 중국이 더 잘해요. 아주 세밀한 조각을 중국 사람들이 잘해요. 우리나라 사람들도 잘하는데 특히 중국은 인구가 많아서 그런지 진짜 잘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때 당시만 해도 그림을 그려서 중국에 팩스로 보내잖아요, 사이즈하고 보내면 일주일이면 물건이 와. 일손이 많으니까 일주일이면 물건이 온다니까요. 그래서 그렇게 되다 보니까 타산이 안 맞지.

가격 경쟁력이나 속도전에서 밀렸네요. 그 당시에 우리나라는 조각 쪽으로 일하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었나 봐요, 중국에 비교하면.
그때 당시, 그러니까 1980~1990년대인데, 창문에 들어가는 조각들이 한국에서도 수출을 많이 나갔어요.


3. IMF 시절에 가구공장을 직접 운영하다.

IMF 전후 가구 회사의 사정 이야기 좀 해주세요.
IMF 오기 한 3~4년 전에 바로크하고 내가 정리를 하고 가구 공장을 시작했어요. 가구 공장을 막 시작을 했는데 그때 당시에 일은 잘하고 물건은 잘 만드는데 대금 결제가 안 됐어. 옛날에는 당좌 수표 받아가지고 날짜 돼가지고 은행에 추심시켜 놓으면 날짜가 잘 넘어가면 돈 되고 안 그럼 부도야. 그 당시 90%가 다 부도났어. 그 당시에 다 챙겨서 돈이 됐으면 빌딩 하나 샀을 겁니다. 그런 얘기 거짓말 같죠? 그거에 치어가지고 가구공장을 한 3년 하다가 다시는 못 하겠더라고.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이렇게 하다가는 진짜 몇 푼 가지고 있는 거 다 거지 되겠다 하고 싹 정리한 거야. 정리하고 쉬었어요. 그래도 정리를 빨리했기에 버팀목이 되고 살았지. 우리 주변에 정리도 못 한 친구들 많아요. 우리 친구들 공장 더 크게 한 친구들도 많은데 지금 아무것도 없는 사람 많아요. 그때 당시에.​​​​​​​

가구 공장 하실 때 모든 가구를 직접 다 짜신 거예요?
사람 두고 공장을 했어요. 납품도 좀 하고. 판매는 나중에 좀 했지만, 처음에는 수공예로 만드는 문짝이 있어요. 그 문짝만 만들어 가지고 어느 정도 좀 큰 공장에다 납품을 했어. 문짝만. 그게 수입이 더 좋고. 내가 기술이 좋으니까 그거 만드는 걸 굉장히 선호했지. 그렇게 만들어 줬는데 그게 일만 잘해주면 뭐 해요. 돈이 나와야지. 어음이나 당좌 다 부도가 나고 하니까 서로가 다 어렵죠. 그러니까 그만둔 거죠.​​​​​​​

4. 나무 이야기

혼자 사업을 운영하실 때 사용하시던 나무는 국내산이었나요?
공사의 자체 조각할 때는 마디카를 많이 썼고 그 후에는 나무 여러 가지 다 썼죠. 나무라면 자재를 얘기하는 거잖아요? 지금 같이 자재가 착착 들어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때만 해도 통나무 제재 해다가 직접 말려가지고 썼어요.옛날에 동화 개발이라고 지금도 동화개발 있잖아요. MDF도 만들고 하는 그 회사 근방에 목재 회사가 많았어요. 평화 목재 뭐 동화기업 그쪽으로. 등치 큰 나무들이, 지금들은 그런 나무가 보기 힘드는데 막 서너 아름 되는 거 있어요. 엄청나게 큰 것들. 국산 나무가 가끔 있는데 0.001%도 안 될 거야. 내가 보기에는 없어요. 요즘 편백나무라고 해서 좀 나와요. 지금 저기 있는 나무가 전부 국산 아니에요.

 
제재목


동남아 쪽에서도 온 거 있고, 말레이시아 이런 데서 많이 들어오죠. 외국에서 많이 들어온 건데 산지까지는 자세하게 우리가 모르죠. 그냥 나무 좋으면 사 쓰고 했으니까. 우리가 수입을 한 것도 아니고 수입해다 놓은 거 가서 큰 거 한 토막씩 제재기에다 짜개가지고(짤라서) 갖다 말려 놨다 쓰고 그랬으니까요. 우리가 나무를 사러 가는 게 아니고 거래하는 데가 저 북항의 수입상들이 있어요. 이 동네에도 합판 가게들이 있는데 한두 장 같은 거는 여기서 사는데. 북항에 전화하게 되면 거기서 보내줘요. 돈 송금시키면 거래 하고 있는 그 회사에서 그냥 물건 보내주면 쓰는 거예요. 저희가 쫓아다니면서 이것저것 고르지 않아도 우리가 나무에 대해서 아니까 전화로 주문해요.​​​​​​​

나무 종류에 대해서 말씀해 주세요.
나무 중에도 여러 가지가 있어요. 소나무도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건 육송이라고 그러죠. 그리고 미국에서 나온 거는 미송, 소련 거 하면 뉴질랜드에서 나온 거는 뉴송. 같은 소나무인데 산지에 따라서 좀 질이 틀리고 가격도 달라요. 지금은 뉴송보다도 미송이 제일 비싸요. 옛날에는 이렇게 집성돼가지고 수입되는 게 없었고 인천 앞바다에 가면 통나무 실어와 가지고 한국에서 깎아서 만들고 했잖아요. 그런 시절이 있었고 이제 세월이 바뀌다 보니까 외국 산지에서 통나무를 안 팔아요. 걔들도 나무는 팔되 거기서 가공비에서도 좀 수익이 돼야니까 제재해가지고 판매하는 거지. 일본이나 가까운 동남아 쪽에서도 옛날에는 원목으로 막 팔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안 팔려고 그러죠. 인건비라도 챙기려고 그러고.​​​​​​​

과거에는 나왔는데 지금은 수입 안 되는 것도 있지 않아요?
있는데 가격이 워낙 비싸서 못해요. 지금 우리나라에도 보면 가정집에 들어가 보면 식탁 같은 거 좋은 나무들 가지고 쓰는 거 있잖아요. 나무 식탁 테이블 하나 떡판이라고 그러는 건데 그거 하나에도 몇백만 원씩 가는 게 수두룩하지. 아주 좋은 거는 1천만 원 넘는 것도 있잖아요. 그런 나무들은 귀한 나무잖아요. 귀하다면 크기도 그렇고 나무 질도 좋고 하니까 비싼 거예요. 그리고 지금은 우리나라에서 나온 소나무도 굵은 건 있다 그러지만 많지 않잖아요. 옛날 우리나라 무슨 서원이라든가 이런 데 나무들 보면 아름다이 진짜 별것도 다 했잖아요. 그건 외국에서 가져온 게 아니고 진짜 한국에서 나온 나무. 옛날에는 굵은 나무 있었잖아요. 근데 어느 땐가 모르게 우리나라도 나무를 다 잘라다가 땔감 쓰고 이것저것 쓰기 위해서 굵은 나무 다 잘라서 쓰다 보니까 지금 나무가 없잖아요. 한국에도 지금은 또 많이 나아졌죠. 지방에 가보면 편백나무 같은 거 아름드리도 나오고 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편백으로 제재해서 나오는 게 몇 프로 안 돼요. 그렇듯이 이제 세상이 많이 바뀌었어요. 수입이 95%, 97%까지는 전부 외국산이라고 보면 될 거예요. 국산 나무가 쓸 만한 게 많지 않잖아요. 그리고 산에서 마음대로 잘라서 쓸 수도 없는 거고 지금 쉽게 허가 안 내주잖아요.국내산 나무가 수급이 안 되죠. 국내에서는 빨리 안 크잖아. 지금 저 큰 나무 있잖아요. 저거 참죽나무라는 나무 있죠. 저건 외국산보다 국산이 좋아요. 나무 예쁘잖아요. 근데 그런 나무는 구하기가 쉽지 않아요.

옛날에 커다란 통나무들 잘라서 쓰셨다고 했는데 여기가 인천 바다로 나무가 들어오는 거잖아요. 제가 전해 듣기로는 그런 통나무들이 들어오면 바다 위에 떠 있었다, 이런 얘기를 인터넷에서 봤거든요.
나무 뗏목에 양 끝 가쪽에 철로 쇠고리 박아가지고 뗏목을 끌고 들어오면 돼요. 뗏목 배는 그러니까 뭐라 그래 멍텅구리 배가 아니고 그 뭐라 그러나 이게 엔진만 있어 끌고 오는 배가. 힘이 좋아서 막 빨리 오는 게 아니라 세월아 네월아 끌고 들어오는 거예요. 시간은 걸리지만 그때 그게 싸죠. 몇 달씩 걸려요. 동남아 쪽에서 올라오다 보면 한없이 시간이 많이 걸려도 오는 거야. 거기 동화개발 앞에 개건너라고 있잖아요. 거기 옛날에 전부 바다였어요. 지금 송도가 없던 게 새로 생겼지만. 거기 바다에 가서 쳐다보면 둥둥둥 떠 있어요. 토막 이런 것들 다 봤어요. 우리 보고 어떨 때는 ‘거기 가서 나무 좋은 거 있다’ 그래서 목재 수입해서 판매하는 사람들이 어디 어디 있다고 가보자 그러면 가서 보고 저거 좋다고 건져다가 제재해서 해봤었어요. 우리 그때.


5. 공구와 기계이야기

처음 일 시작하실 때 하고 현재하고 물건을 가공하는 과정에서 사용하시는 공법이라든가 기계 같은 거가 바뀌었나요?
옛날에는 손으로 대패질했죠. 지금은 기계로 거의 다 하잖아요. 옛날에 기술자들은 손으로 대패질 망치질, 톱으로 자르고 그걸 잘하는 사람이 목수지만 지금은 실제로 그것보다는 기계 잘 쓰는 목수라고 보면 돼요. 그럴 정도로 기계화가 됐다고. 저는 목공 목수를 먼저 한 게 아니고 저기 보면 조각 있잖아요. 저게 필요할 때 만들어 썼던 거예요. 전부요. 주문하면서 한두 개 나무 걸어놓고 때로는 일부러 모양을 한두 개 깎아놓은 것도 있고 그런 물건이에요. 원래가 조각했던 사람이라 내가 조각하다가 목수 일을 늦게 배워서 목수를 하다 보니까 여러 가지를 다 하죠. 저는 전천후로 다 해요. 지금도 조각 들어오면 조각도 해요. 지금 간판 들어오면 간판 파잖아요. 로구로도 조금씩은 깎는데 복잡하고 일부러 기계 놓고 쓰기 싫어서 거의 안 하는 거예요.

사용하시는 공구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내가 주로 쓰는 건 일본 거. 이거 내가 한 이십몇 년 썼는데도 아직 고장 하나도 안 나. 서비스받을 일이 없어요. 다른 건 고쳤을 수도 있겠지만요. 이거 같은 경우에는 이게 각도기인데 내가 쓴 지가 20 몇 년 됐는데도 고장이 안 나요. 옆에 사람들 각도기라고 중국, 대만 거 몇 년 못 쓰고 망가져서 버리잖아. 이게 마끼다 건데. 미국 거는 기계 덩치가 크고 일본 거는 얍삽하고 유연하고 잘 만들어져있고, 독일 거 좋은데 내가 지금 독일 거는 많이 사서 쓰는 게 없어요. 이런 드릴 같은 거 구멍 뚫는 드릴 같은 거 있잖아요. 보쉬 거, 이거는 독일 건가?그런데 이런 기계들이 국산은 금방 못 써요. 아직도 못 따라와요.처음에는 좀 싼 거 그냥 사 쓰다가 지금 이런 거 같은 경우는 내가 한 이십 년 썼어요. 여기 마끼다 일본 거. 한 20년 써도 아직도 견고해요. 근데 저 뭐야 마끼다라고 똑같은 게 아니고 오리지날 일본에서 만드는 마끼다가 아니고 대만이나 이런 데서 만들어온 거는 한 몇 년 쓰면 각도 안 맞고 기계가 막 틀려요. 그런 점이 있어요. 또 요즘 일본 못지않게 독일 게 좋아요. 그런데 가격이 비싸니까. 실제로 저는 일본 거 많이 써요. 저기 저 나무 깎는 기계도 일제고 일본 제가 많아요. 수십 년 일하면서 선택을 해서 쓰는 것들이죠.

    

    


6. 숭의동 목공예 거리 이야기

숭의동으로 오시기 까지 과정에 대해 듣고 싶은데요, 이주해 올 때 거의 비슷한 시기에 목공소들 함께 오신건가요?
그거 아니고 나 같은 경우는 도원역 바로 옆에 도로 쪽에서 가게 하다가 도로가 확장되면서 헐렸잖아, 지금 같이 그렇게 헐리면 보상이라도 받았지만, 그 당시 돈 몇백만 원 주고 그러고 쫓겨 다닌 거야. 도원에 있다가 저 배다리 내려갔다가 그 후에 부도나고 바로 IMF 이후에 숭의동으로 들어온 거예요. 이 가게 안쪽에 반쪽을 내서 시작한 거예요. 시작한다기보다 했던 일은 있고 진짜 연락처라도 하나 가지고 가게라도 한다고 여기 들어왔는데 그때 당시에 일 제대로 했나요? 놀았지 그냥. 놀면서 나와 있었던 거예요. 그 후 2~3년 지나니까. 이 건물이 또 넘어갔어. 그때 500에 30만 원인가 내 기억상 그래요, 그거 500 보증금 날아갔잖아요. 법원에서 경매 통지서가 왔더라고요. 여기는 1차 지나고 2차 때 성질 나 가지고 돈은 많지는 않았지만 이걸 내가 사버렸잖아. 경매에 내가 낙찰 받아 버렸잖아.

지금처럼 확장한 거는 그때 사 가지고 다 하신 거예요?
여기 있다가 나간 사람, 그 사람 죽었는데 보증금 이거 다 까먹고 버텼는데 참 내쫓지는 못하고 이 위에 가게 하나 얻어서 보증금 그때 당시에 사백오십인가 얼마 내 생돈 줘가지고 내보냈고, 이 가게 터 가지고 내가 그냥 쓰기 시작한 거지 그때부터 이제까지. 그땐 굉장히 넓었는데 지금 보니까 넓은 게 아니야. 옆에 것까지도 다 샀어야 하는데 욕심을 안 부린 거지. 그냥 큰 거 샀으면 뭐 해. 그 옆에까지 한 필지가 있는데 그것도 경매로 넘어가는데 살까 하다가 그 뒤에 공장하는 사람하고 분쟁이 될 것 같아서 내가 손대지 말자고 안 산 거야. 잘했지.그때 당시 IMF 때잖아요. 돈 몇억 있는 사람들은 괜찮았지. 룰루랄라 했잖아요. 은행에서 나온 이자도 만만치 않았잖아요. 그런 시절에도 먹고 살 만큼 가지고 있었으니까 살만한 거죠. 집도 하나 가지고 있고 뭐 이것도 가지고 있고 돈도 좀 가지고 있었으니까 살만하고.

숭의동으로 오시면서 이곳 분위기에 대해 좀 더 듣고 싶은데요.
이곳으로 올 때가 97년인가 정확하게 모르고 IMF 시절이야. 이거(현재 사업장) 내가 2000년도에 샀을 거야. 와서 조금 이따 샀으니까 그러니까 그 연도가 대충 계산 나오지.
그때 당시는 목공예장 몇 개 없었어요.여기가 모이고 싶어 모인 게 아니고 어떻게 해서 일로 모였냐면 원래 도원역 있죠? 인천 기계 상사라고 그러면 다 알아요. 바로 건너편에서 내가 공예사를 했어요. 거기 갔는데 도로 확장으로 헐렸잖아. 쫓겨나는 거야. 이사 비용이라 그때 돈 몇 푼 받아서 어디 갈 데 없으니까 저 배다리 있잖아요. 유동 삼거리에 가게 조그마한 걸 또 하나 얻었어. 조그만 거 얻은 게 아니라 1층 가마니 가게 한 걸 내가 좀 얻어가지고 자리가 좁으니까 주인한테 상의를 해가지고 천장이 높으니까 2층을 달아서 그 위에 사람이 앉아서 일을 할 수 있게끔 만들어서 일을 했어요. 그러다가 거기 또 헐렸잖아. 갈 데가 없으니까 여기로 넘어온 거야. 내가 한일공예 있잖아. 거기로 일단 온 거야. 여기 와가지고 좀 하다가 가구공장 운영한다고 정리하고 나갔다가 다시 일로 왔다고 그랬잖아요. 그런 과정이죠.

숭의동 마을에서 함께 일하시는 동료들 간의 친목 활동에 대해서 듣고 싶은데요. 예전에 협동조합 대표 하셨었잖아요. 동료들과 함께 활동하신 이야기 좀 해주세요.
그때 당시에 이끈다기보다도 뭐랄까 협동조합 내가 이사장 맡을 때 별로 융화가 안 되니까 하다가 안 한 거죠. 각자 자기 고집이 좀 세니까. 합동으로 모임 같은 거 할 때는 자기도 좀 죽여 가면서 남들도 좀 따라가야 되는데 나는 아니다, 뭐 그런 식으로 얘기하니까. 여기 공예사 나무 쪽에 단합이 잘 안 돼요. 안 되는 이유가 몇 가지가 있어. 왜 안 되냐면 업종이 비슷하잖아요. 내 같이 이렇게 가구를 짜는 사람은 가구만 제대로 짜서 가격을 받을 만큼 받고 일해야죠. 지금 저 테이블 다리 같은 경우에 보면 구멍 파가지고 끼워가지고 만들었잖아요. 그럼 변형이 안 가요. 그만큼 시간이 많이 걸리고 공이 많이 들잖아요. 그만큼 돈을 좀 많이 받아도 받을 만큼 받고 제대로 해줘야 되는데…. 그런데 그렇게 안 되는 경우도 있고 이것저것 다 있죠.우리 같은 경우에는 하루 일을 하게 되면 지금 목수들이 현장 일을 하는 사람은 한 30만 원 받아요. 그 사람들도 현장에서 몸만 가서 30만 원 받는데 여기서 내가 공장 내 기계 써가면서 30만 원 받아서 되겠어요? 그 사람들보다 돈 더 벌어야 될 거 아니에요. 솔직히 그래. 내 인건비를 제대로 받아야죠.


7. 2022년 ‘이어가게’ 선정되다.

이번에 ‘이어가게’로 선정되셨잖아요?
나 같은 경우는 30년 이상 미추홀구에서 오래 했어요. 여기 숭의동에서는 24년 했어요. 이 자리에서요. 저 밑에 한일공예 있잖아요. 그 자리에서도 내가 꽤 오래 했고 그러다 보니까 30년이 넘게 된 거죠.이어가게 선정도 이 동네 몇 사람들에게 물어봤더니 다른 사람은 중간중간 사업자 안 내고 해서 해당이 안 돼요. 사업자 등록 있어야 인정을 해요. 다들 오래 한 사람이지만 그게 안 되니까.
 
이어가게 현판

   

8. 목공 재능을 평생 업으로 삼아 살아오신 이야기

자손들에게 목공사업을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지요?
작은아들이 가끔 와서 이거 배우겠다고 하는데 내가 못하게 해요. 힘들게 살았잖아요. 솔직히 말해 옛날에는 끼니 걱정까지 하고 살았는데, 진짜로. 우리 큰아들이 지금 마흔네 살인데 걔가 뱃속에 들었을 때 쌀이 없어서 끼니 걱정했다니까. 진짜 어려웠어요. 우리 집사람이 그런 얘기 하면 울어 지금도.그렇게 어려운 시절이 있었어요. 전반적으로 그 시대가 그런 거예요. 나 같은 경우에는 진짜 몸뚱아리만 가지고 객지 나온 사람이잖아요. 그렇다고 고향에서 부모님한테 돈 달래 가지고 나올 처지도 못 하고 진짜 몸뚱아리만 나와서 기술 배우려고 나왔다고. 그러다가 어떻게 우리 집사람 만나서 결혼했지만 얼마나 어려웠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그때 당시가 엄청 어려웠죠. 진짜.​​​​​​​

목공 일이 더 어려웠다라고 생각이 드시는지요?
목공 일이 어렵다기보다 그 시절이 다 어려웠잖아, 우리만 어려운 게 아니라 다 어려웠잖아. 그 와중에 이 목공이 그때 당시 조각할 때인데 조각이 자개한테 좀 밀려가지고 진짜 어려울 때 있었어요. 내가 먹고 쌀 사 먹을 돈이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는 얘기를 하잖아요. 진짜 그런 시절이 있었어요.

그러면 이 일을 하시면서 좋았던 시절은 언제인지요?
기업에다 납품하고 할 때. 한 때는 돈도 잘 벌을 때 있었어요. 돈 잘 벌어서 좋은 게 아니라 잘 나간 거지 그때 시절에.

자녀들에게 공예품 만들어 준 거 있으세요?
많이 만들어 갖다줬는데 애들이 새로 아파트 사서 이사 가면서 싹 다 없애버리더라고요. 별거 다 만들어줬었어요. 지금 새로 만들어달라는 것도 없어요.우리 집에도 가보면 옛날에는 내가 만드는 작품들이 좀 있었는데 우리 집사람이 가져오는 거 싫어해 이제는. 이 안에 들어가면 교육하면서 만든 미니 화장대들도 있고 별거 다 있어요. 이 동네 다른 사람들 보면 이렇게 나같이 이렇게 여러 가지 하는 사람 많지 않아요. 조각일 겸해가면서 가구를 짜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지금 저기 물건들을 보면 별 용도가 다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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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공예 강의 시 만든 미니 화장대


사장님 저 글씨를 사장님이 하신 거죠? 사장님 글씨도 배우셨어요?
아니 저거 컴퓨터로 뽑아온 거예요. 직접 쓰려고 그러면 저기 보세요. 손님하고 잠깐 스케치하면서 제가 그렸던 거잖아요. 저렇게 쓸 수 있는데 지금 시간 낭비 안 하고 컴퓨터로 뽑아서 써요. 전부 컴퓨터로 하는데 그분이 자꾸 궁금해하니까 내가 저렇게 쓴다 그걸 얘기하면서 써놓은 거죠. 과거에는 직접 쓰고 했어요. 지금 못 써요.

다방면으로 재능이 많으세요.
네이버 들어가가지고 ‘목공의 달인’ 들어가면 나올 거예요. 한번 찾아보세요. 그 내용 나올 거예요. 그거 보시면 그때 간판 하나 글씨 써가지고 판 거 가지고 나올 거예요. 아마 조각으로 한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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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판에 새긴 컴퓨터 글씨
사장님이 직접 스케치한 글씨


9. 앞으로의 바람

평생동안 목공예로 한 우물을 파고 계시잖아요. 목재 산업의 변화를 보아오신 입장에서 앞으로 바람이 있으시다면 뭐가 있으실까요?
내가 보기엔 힘들 것 같아. 이게 어떤 면에서 배우는 사람이 없잖아. 기술적으로라도 배우는 몇 명 젊은 사람이 있는데 완전하게 배우는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은 또 현시대에 맞게끔 맞춰서 하지. 뭐랄까 어려운 일 뭐 이렇게 하는 거는 못 하잖아요. 그러니까 쉽지 않을 거라.​​​​​​​

가족들이나 주변인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으신지요?
좋은 평 받으면 좋은데 뭐 좋은 평을 해주는 사람이 있겠어요. 힘들게 일했던 사람이지. 힘들게 일했던 사람이라고. 그 지금 이날까지 자식들 잘 키웠고.

자식 자랑 좀 마지막으로 해 주세요
자랑요, 특별하게 뭐 할 건 아닌, 잘 컸어요. 직장도 좋은 데 들어갔고 누구 말마따나 의사 변호사 이렇게 만들지 않았어도 어쨌든 간에 지금은 대한민국으로 봐서는 그냥 뭐랄까 그냥 밥 먹고 살 만한 직업으로 들어갔다고 생각하면 되지.


 
시민기록일지
• 면담자 : 표기자 (면담지원: 정지선, 허은심, 양지원)
• 면담일시 : 2022.8.26, 2022.9.27
• 면담장소 : 고전공예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