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결 따라 살아온 삶
목재의 숨결을 느끼며 나무를 바라보다
미추홀학산문화원
게시일 2022.12.23  | 최종수정일 2023.02.25



"조각 일을 한지 20여 년이 지나서부터 몸과 마음에 와닿는 목재의 숨결을 느끼며, 나무 덩어리에서 조각품을 보는 혜안을 갖게 되었다. 자신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면서 손님이 원하는 것을 스케치하여 소통한다. 고통과 외로움을 통해 단단해지고 40년 넘게 한 길만 걸어온 끈기와 도전이 목공 장인으로 거듭나고싶다."
 



1. 목공장인으로 정착하기까지
 
어린 시절 주로 사신 곳은 어디이며 어떤 일을 하셨나요?
제가 태어난 곳은 전남 해남인데 부모님을 따라 서울에 와서 화곡동과 목동에 전전하다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인천 산곡동으로 이사 와서 살게 되었어요. 제가 살았던 산곡동, 청천동은 양계장이 많아 닭똥 천지였어요. 우리 집은 그때 청천농장에서 올라오는 공동묘지 근방 동네인데, 영아다방 쪽으로 쭉 내려오는 길이 있는 메꽃마을에 살았어요. 닭똥 냄새가 맨날 나도 거기가 즐겁고 좋은 데였죠. 왜냐하면 어렸을 때 살았으니까요. 우리 동네엔 양계장이 많았지요. 그 뒤에 맨 끝에 공동묘지가 있고, 그래 거기 원적산이죠. 지금 원적산 주차장 자리 옆으로 올라가면서 거기가 쭉 전부 다 양계장 브로크(블록벽돌)을 해가지고 살고 있었지요.
저는 16살 때 부천 소사 가서 살아보겠다고 일선에 뛰어들었는데, 최초로 프레스 일을 했어요. 그 철공 일이 가을쯤인데 너무 찬 거예요. 너무 차고 손으로 움직이는 기계에 닿는 찬 느낌이 싫더라고. 그래서 이거 내가 선택을 잘못했나 보다 해서 짜장면 먹고 도망 나왔어요.
또다시 사람을 쓴다는 곳을 찾아갔어요. 부평 5공단인데 수출할 무선전화기 박스를 만들었던 것 같아요. 그때 저는 철야를 해가면서 한 달 동안 일을 했는데 돈도 못 받고 나왔어요. 그냥 경험만 하고 나오게 되었어요. 그 나이는 삶이라는 게 모르는 나이잖아요. 동생들하고 어머니 아버지와 불화가 많으니까 나라도 도움을 줘야 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만 했던 거지요.
그리고 나서 부평 4공단에 취직을 했어요. 부평 4공단 맥심 옆 할인매장 옆에 한곡전기라고. 수출회사인데 거기서 한 삼 년 있고 퇴직했죠. 막말로 잘렸죠.
그러고 나서 효성동에 동보전기라는 데 가서 형광등 만드는 데서 한 1~2년 있었고, 그다음에 슈퍼마켓 한 6개월 배달하고, 그 후에 도라무통 만드는 데 있었어요. 여기서 1년 있었고 그러고 나서 군대에 갔다 와서 제대했어요.

20대 초창기에는 어떤 일을 하셨나요?
저는 20대 초반기 때는 주로 한미반도체 같은데서 포장 박스를 만들었어요. 포장 박스 100개씩, 조그만 거 300개씩, 그때는 나무 포장이 많았어요. 포장 재료가 모두 나무잖아요. 그러니까 그때 시절에는 그게 단가가 좋고 한라중공업 같은 경우는 배 간판 같은 것도 받으면서 몇 번 해보고. 저도 어떻게 만들었는지 거기다 납품을 했으니까요. 그다음에 경기도 쪽 골프장을 한 20군데 했어요. 한 사람 개인 들어가는 거를 20군데 하고. 근데 그게 기술이 있어서 한 게 아니라 고객이 말한(주어진 그림) 것을 내가 설계해서 만드는 거지요. 저는 배운 건 없지만 상상해서 이렇게 저렇게 짜 맞추며 머리를 써서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한 27~8년 전인데도 6백만 원을 받고 모형 배를 만들었으니까요. 아무튼 공주인데 거기도 몇 번 납품했는데… 그 시절에도 어떻게 이걸 만들어서 납품했는지 저도 신기해요.

언제부터 목공 기술을 배우게 되었나요? 그 과정은?
군대 갔다 왔을 무렵에 88 정비대대가 신천에 있었는데 미군 부대 박스가 많이 와요. 그 미군 부대 박스가 오면은 그 박스 자제가 뉴질랜드 소나무로 연했어요. 뭘 만들어 보니까 그게 범선 같은, 범선 같은 게 뭐냐 하면 그때 시절에 이런 걸 만들어서 또 달고 또 달고,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많이 만들더라고요. 그 시절에 그걸 만드는 것이 너무 재밌는 거예요. 그래서 제대하면서 내가 살 길이 뭔가 해 가지고 무조건 배다리라는 곳으로 갔어요. 81년도에 배다리에 와 가지고 목공 기술을 배우게 된 거죠. 제 나이 20대로 한 2년 동안 배웠죠. 배다리에 모형 배 만드는 데가 있었어요. 그 사람한테 이런 나무를 어디서 파냐고 했더니 배다리에서 판대요. 그래서 내가 배다리로 놀러 간 거죠. 놀러 갔는데 정말로 팔더라고. 그 사장님이 저 보고 배를 한번 만들어 보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군함이라든가 거북선 그런 것을 만들었어요. 처음에 나무를 대줬어요.
어떻게 만들었냐 하면 배 그림을 그려가며 했지요. 여기에 대포가 있고 여기도 대포가 있고 저기엔 헬기장이…. 이렇게 돌아가는 회의장이 있고…. 그 시절에 그러니까 3박 4일 동안 만들었어요. 남들보다 빨리 잘 만든 것이라 했어요. 3일에 하나씩 만들어 주니까 주인이 여기에 출근 한번 해보라 해서 월 12만 원 받고 도시락 싸 갖고 다녔는데, 그 집에서 일 년 넘게 있었고, 또 그 옆에서 1년 반에서 2년 반을 일하면서 수도국산에서 자취를 하며 배웠어요.
그때 사장이 중요한 이야기를 해 주었어요. 손님이 오면 연필을 잡고 손님 말을 스케치하라고요. 스케치를 해 가면서 표현을 조율하라는 거죠. 그래서 그때 알았죠. 노트를 놓고 스케치를 해야 손님이 원하는 본이 나온다는 것을. 손님과 소통한 스케치를 바탕으로 혼자 푹 빠져 배 만드는 법을 터득하게 되었죠. 그때부터 제가 좋아하는 목공예에 빠지게 되었어요.
그렇게 20년이 지나니까 조금씩 목공예 기술이 나아지고 스스로 연구하고 응용하게 되어 지금까지 왔어요. 내 목적은 어느 한 개의 기술이 아니라 그 하나의 기술로 인해서 응용을 여러 가지로 하다 보니까 차츰 가구가 되고 돈이 좀 되더라고요.
어느 한 개만 갖다가 하면은 그거는 숨이 막힐 정도로 일이 없어요. 그래서 여러 가지로 해보는 거예요. 칠도 해보고 가구도 짜보고 조각도 해보고 했지요. 제 기술은 100%를 배운 게 아니라 다 눈으로 보고 응용하고 연구하다 보니까 나에게 맞는 일이 오더라고요. 그리고 일을 하다 보면 빠꾸도 많이 당하게 되고, 그러면 왜 빠꾸를 당할까 원인이 뭐였을까를 많이 분석을 하다보니까 일이 늘어가고 기술이 늘어가더라고요.
그런데 일이 들어오면 아주 바쁜 거예요. 마음이 급해져 서두르고, 서두르다 보면 하자가 나오고.
젊은 그 시절에는 형편이 너무나 어려웠죠. 가게 세 못 낼 정도로 힘들었지요. 그땐 아버지하고 살았는데 그렇게 힘들 수가 없더라고요. 근데 오기가 생기는 거예요. 갈 데가 없더라고요. 이거밖에 할 게 없는 거예요. 돈이 많아서 딴 사업을 할 수도 없고 기술이 좋아서 크게 벌릴 수도 없고 부족한 게 너무 많다 보니까 벌릴 수도 없고, 돈도 없고…. 끝까지 가자, 열심히 해보자 하다 보니까 벌써 40년이 흘렀더라고요.
지금은 너무 만족스럽게 내 일을 하고 있어요. 그만큼 끈기 있게 꾸준히 해보니까 장점과 단점을 파악하면서 내 자신을 파악하고 성찰하게 되었어요. 오기와 끈기로 꾸준히 버티다 보니 이제 먹고 살게도 되고 보람도 느껴요. 삶은 끈기와 버티기인가 봐요.

군함 제조와 목공예에 쓰이는 목재는 어떤건가요?
보통 소비자들이 저처럼 직접 만들려고 군함 재료를 구하러 와요. 재료를 사러 와서 자기들이 조립해서 만들고 자기들의 행복을 느끼는 거죠. 본인들이 조립하면서 깎으면서 만드는 거죠. 그래서 저도 이렇게 하는 것이 너무 좋고 해서 직업으로 선택했지요. 그 시절에는 모형 배 판매가 많았죠. 재료 판매하면서, 그 당시 해군, 해병대들이 많았지요. 많은 해군들이 제대 기념으로 모형 배를 사 갔어요.
그때 당시에 그 군함 만드는 그 목재의 재질은 조각이 잘 되는 마디카로 꾸몄을 거예요. 마디카라는 나무가 있어요. 마디카는 인도네시아산인데, 그 인도네시아산 나무가 조각하는 용도로 제일 잘 깎였어요.
마디카라는 나무 재질은 인천에 있는 제재소에서 구입했어요. 평화 제재소, 영창 제재소 등이였죠. 우리가 직접 가서 구입하는 것이 아니고, 사장님이 그걸 사다가 손님이 오시면은 나무를 갖다가 깎아서 판매할 수 있게끔 해 주는 거죠.
목재를 취급하는 제재소에서 배다리 근방 인천 송현동에 많았어요. 원목이 주로 인천 송현동쪽 제재소를 통해 들어왔기 때문이에요.




대표님이 생각하는 목공의 기본은 무엇인가요?
80년대 제가 20대 초반, 그때 당시에는 인천에서는 목공 하면 배다리였거든요. 배를 만든다는 배다리, 뭐 거기에는 목공이나 대나무나 함석, 덕트나 그런 게 다 모여 있었으니까요. 배다리 시절에서 내가 그만두고 나오면서 숭의동에 왔을 때는 새로웠죠. 서로 알지도 못하고 필요로 하는 사람도 별로 없고 해서 나름대로 애를 쓰고 살려고 했죠. 어려울수록 공부를 해야 되나봅니다.
그때가 1984년 내지 1985년 정도 됐을 거예요. 배다리에서 조그만 가게를 차렸다가 너무나 기술이 없고 실력이 모자라는 판에 할 일도 별로 없고 해서 나는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서 서예학원을 한 2년 다니게 되었죠. 그때는 컴퓨터 시절이 아니니까 손으로 목공예를 하는 때라서 글씨가 중요했어요. 그래서 서예학원에서 저녁 10시까지 글씨를 썼어요. 서예는 입선만 세 번 했는데, 계속 서예를 배우고 싶은데 먹고살기 바쁘니까 포기했죠. 그 당시엔 열심히 일을 하려고 하는데 일이 없는 거예요. 실력도 없고. 맨날 빠꾸만 당하고. 이렇게 헤매다가 목공 일을 하게 되었어요. 하면서도 자신이 없어 계속해야 되나 말어야 되나 고민도 많이 되었고 그 과정도 많이 힘들었죠.
한 2년이 흐르니까 그래도 나름대로 좋더라고요. 2년이란 세월이 많은 걸 움직였어요. 그때 당시 행복했어요. 행복하다는 게 뭐냐 하면 일은 없고 돈을 못 벌었어도 서예학원 가서 글씨를 썼다는 게 행복한 거예요.
그러다 시간이 되어 상업체 글씨를 배워 쓰고, 그다음에 거기 배다리 흘러서 여기 숭의동으로 이사 오게 되었죠.
잠깐이나마 그런 세월을 겪다 보니까 그땐 일을 해도 남의 하청을 맡아서 하니 돈이 안 되고, 애를 썼는데도 인건비는 커녕 ‘물건을 이렇게 만들어서 돈을 받냐’ 그런 대우도 받고, 돈을 이만큼 줄 테니 해보라 하나 혼자서는 감당이 안 돼서 무섭고, 막상 맡아 가지고 무리를 해서 날밤 새기로 3박 4일을 해서 끝내기를 반복하니 건강도 많이 해치게 되고…. 내가 이걸 보면서 어거지로는 안되는 것이구나.
차라리 내 부족함을 메꾸는 게 낫겠다 싶더라고요. 마음만 바쁠 뿐이지 나한테 득이 되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쉬는 게 낫더라고요. 근데 그런 힘든 과정을 다 겪으면서 쌓이고 쌓이다 보니까 그게 노하우가 되는 거더라고요.
그때 당시에는 기계 사정이 안 좋았지요. 목공의 제일 기본이 직각이거든요. 직각을 못 맞추면은 물건이 다 삐딱해요. 내가 어디 상가(소비자)에 매대를 꾸며서 납품해 가지고 갖다 줬는데 안 맞는 거지. 그걸 나중에 알았죠. 근데 그때 당시에는 돈이 없으니까 직각 맞추는 기계를 못 샀어요. 그게 좀 비싸니까 남 업체에서 몇 번 빌려 쓰고 해봤는데 너무 거추장스러운 거예요.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나서 내가 빚을 내서 기계를 사서 해보니까 직각이 안 맞으면 모든 작품의 기초가 다 틀어버리는 거예요. 직각이 그렇게 중요하고 기본이에요. 사실 그 후 우리들도 헤매요. 잘못된 작품의 원인이 뭔가를 보면 직각이 안 맞는 경우가 태반이에요. 목공예에서 제일 중요한 역할이 직각 맞추는 거더라고요.




대표님의 목공 스승의 누구시며, 대표님 가게를 갖게 된 동기는 어떻게 되나요?
저의 목공 스승이라면, 배다리 목공예 사장님. 성함이 어떻게 되더라. 이봉기선생님입니다. 그분은 삶의 인간성부터 참 많이 존경스럽더라고요. 여유 있는 모습하고 진실하고 강하시고…. 이제 나이 들어 힘이 없는 모습이 안타깝더라고.
제가 가게를 갖게 된 특별한 계기는 평범해요. 처음에 ‘신라미술’을 1년 정도 하다가 친구 꼬임에 넘어가서 가게를 접었어요. 접고 한 5개월을 다른 데 가서 일을 하는 중인데, 그때 수원까지 다니면서 간판 조각만 해주고 출퇴근했는데 너무 멀어가지고 고민도 생기더라고요. 계속해서 수원까지 출퇴근을 해야 하는 것도 어렵고, 어떻게 살까도 고민 많이 하고 있는데 ‘한일공예사’라는 곳에서 전화가 왔어요.
한일공예사 사장이 저한테 “인수해서 좀 해 봐라. 할 수 있냐?” 그래서 너무 좋다고 하면서 얼마에 인수하겠냐고 하니까 200만 원 달라고 하더라고. 그래서 다시 제 사업을 시작을 했죠. 처음엔 전 주인 상호대로 ‘한일공예사’로 운영하다가 ‘한일원목목공’으로 바꿨죠. 이제 한 사십 년 가까이 되었네요. 요즘은 교회 용품 제작 의뢰가 많아 교회 용품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2. 배다리에서의 깨달음

배다리는 어떻게 알고 가셨나요? 
배다리에 목공소를 찾은 것은 버스에서 만난 사람이 들고 있는 나무 때문이었어요. 그때 청천동에서 12만 원 받고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했는데 삼십 분 걸리더라고요. 그 젊은 시절에 만드는 게 좋아 남들은 8시에서 8시 30분까지 출근하는 것을 저는 7시에 출근해서 출근하자마자 부지런히 만들었어요. 다들 저를 잘 보더라고요. 열심히 살다 보니까 주위에서 “김종필이는 잘 살겠다.” 말할 정도로 부지런하다는 얘기를 하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일 년 다니다가 그 옆에 신라공예가 있어서 그리로 가서 거기서도 열심히 일했어요. 밤새워 일도 해보고. 그러다 보니까 거기서 포장 박스 짜는 걸 배웠는데 삼립빵에 납품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생활이 조금씩 안정되었지요.
그러면서 그 시절에 조각을 2년간 배우며 응용하면서 터득하게 되었지요. 남들보다는 빨리 움직이고 빨리 알아야 된다는 생각으로 고려미술 업체에서 범선과 거북선 같은 배를 만드는 것을 배우고 만들면서 얼마간 다녔죠. 그리면서 조각도 배우고 글씨도 2년 배우면서 조금씩 혼자 터득해 나가다 보니 이 작업이 너무 좋더라고요.
예전에 배다리에 목공소가 많이 있었어요. 그중 안양 사람인데 지금은 거의 아흔 살이 됐을 거예요. 영흥도에 사셨는데 돌아가셨는지 모르겠어요. 그런데 그분이 얼마나 일을 잘하냐 하면 그 사람은 문짝을 짜는데 다섯 수를 보고 짜요. 장을 짜면서 다음 계산, 다음 계산 입력을 해 가지고 일을 하는 걸 봤죠. 한 번에 끝내고 쉬는 게 아니라 프로그램을 나름대로 전개하면서 짜나가는데 거의 수동으로 일을 해요. 간간이 기계 질을 하지만요.
저 사람은 톱질하면서도 생각을 하면서 다섯 수를 보고 일을 하는구나. 마음속에서 지금 이 일을 마친 다음에는 어떻게 전개를 할까를 구상하고, 다음 전개가 뭔가, 또 그다음 전개가 뭔가 하면서 입력시키면서 쳐나가면서 일을 하니 무지하게 빠른 속도가 되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분 작업을 보면서 생각하는 작업, 스케치하는 작업의 힘을 알게 되었지요. 아, 이래서 이 양반이 딴 사람보다 진짜 기술이 좋구나를 확인하게 되었어요.



숭의동 목공마을에서 발견한 목공 특기와 단련 과정을 말씀해주세요.
여기 숭의동 목공마을처럼 배다리에 한 13~14군데가 목공 말고도 대장간부터 함석부터 그다음에 조각까지 다 있었어요. 여러 가지 중 내 몸과 내 마음에 와닿는 게 나무더라고요. 사람들이 조각하는 그 모습이 내가 하고 싶었던 거였나 봐요. 나는 몰랐지만 여기 와 보니까 이게 내가 좋아하는 직업이었구나 하는 걸 그때 느꼈죠. 그래서 나는 이걸 꼭 하고 싶다는 생각과 욕심이 나더라고요.
돈을 떠나서 일단은 내가 제일 잘하는 것이 ‘목간판 조각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우리 주위에 고전조각, 인일조각 등을 비롯한 목공 일을 하시는 사장님도 계시지만요. 그 사람들이 나보다 선배고 많은 일을 해서 목간판도 많이 아시고 하시지마는 그래도 나 나름대로 혼자 노력해서 그분들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노력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분들은 우리 시절보다 더 앞서서 일을 했기 때문인지 그분들이 깔끔하게 작업하는 모습하고 내가 어설프게 하는 모습에서 많이 부족하다는 걸 항상 느꼈어요. 그게 성격이었더라고요. 그분들은 성격대로 일을 깔끔하게 하고 나는 내 성격대로 거칠게 일을 했더라고요. 시간이 흘러서 보니까 일은 내가 빠르게 잘하나 내 부족한 걸 나중에 알았죠. 소비자의 마음을 무시하고 나만 잘났다고 하는 모습이 언제부턴가 오더라고요. 소비자 눈과 마음에 들게끔 일을 해주는 게 우리 임무인데 가장 기본이 되는 그런 걸 몰랐으니…. 그렇게 되었음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죠.
내가 남들보다 일은 빠르게 잘하는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더라고요. 그게 아마도 없이 살면서 빨리 벌어보려고 하는 그 패턴이 너무 잘못된 길을 가는 거더라고요. 그걸 어떻게 깨닫게 되었냐하면 그 시절에 내가 수금한 곳에서 싸우고 다니다 보니까 내가 일했다고 돈을 받으러 다니는 것 자체가 잘못된 거였다는 걸 차츰 알게 되었어요. 실력이 없었다는 걸 알고 인정하는데 25년 세월이 걸렸지요. 손님한테는 최선을 다해서 그 사람이 만족할 수 있게끔 일을 해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이제는 자신 있게 그 사람이 요구하는 게 뭔가를 빨리 분석해야지만이 내가 살 길이라는 것을 알았죠. 단순히 일이 아니고 어떤 의도로, 어떤 요구인지 움직이는 포인트를 잡고 해야 되는데 내 식으로 내 마음대로 하다 보니까 경우가 안 맞는 일이 종종 벌어지더라고요. 소비자가 원하는 것을 정확히 받아들이고 반영 해줘야지만이 내가 발전할 수 있더라고요. 내 자신도 핵심을 잡고 깊이 생각하고 일을 해야 나한테 발전이 오더라고요.




목공가게를 운영하면서 깨우친 인생 교훈은 무엇인가요? 
배다리에서 헐리기 전까지 300만 원 전세 주고 일하다가, 헐리면서 이곳 숭의동으로 이사 오게 되었어요. 숭의동 와서 본격적으로 내 가게를 했는데 처음에는 너무 어려웠죠. 거기 배다리에서도 혼자 하다가 사업체를 안 했고 여기 숭의동 와서 내 명함 걸고 했는데 ‘신라미술’이라고 했어요. 굉장히 고전하다가 일 끝나면 그냥 갈 데가 없으니까 서예학원을 한 2년 다니며 서예를 배웠지요. 진짜 재밌더라고요. 저는 글씨 쓰는 그 시간이 좋았어요. 그때 제 나이는 23살 정도 됐는데 이게 내가 갈 길이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렵더라고요. 직장생활 하면은 월급이라도 받는데 혼자 하니 돈이 안 되니 그만둘까도 했다가 버틸까도 하다가 고민하는 사이에도 세월이 흐르더라고요.
실패도 역경도 다 시간이 해결해 줘요. 이 목공은 실력도 있지마는 깨우친 과정까지의 시간이 25년이 걸리더라고. 정말로 쉽지가 않더라고요. 그리고 제대로 된 물건 만드는 과정까지 완벽하게 터득하려면 그만큼 시간이 더 흘러야 지만이 얻어지더라고요. 거의 50년 정도는 걸리는 것 같아요.
나이가 60에 드니까 차츰 안정이 되네요. 지금은 너무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그런 여유가 있어 좋고, 일이 많다는 게 좋아요. 지금은 어느 누구 부럽지가 않다고 생각하고 만듭니다. 그러니까 뭐 자랑하는 게 아니고 열심히 일하니까 주어진 일이 많고, 그래서 새벽같이 나와서 일을 하는 거죠.


3. 목공예마을과 목공의 미래

목공마을의 현재 모습과 이상적 모습을 말씀해주세요.
저는 숭의동 목공마을이 계속 유지할 수 있게 시에서 이렇게 살아나갈 수 있게 한 그 자체로 고맙게 생각하죠. 앞으로도 목공마을의 고유성이 그대로 보존되었으면 해요. 여기 목공마을에서 몇십 년을 살아왔으니까 이렇게 터치(간섭) 안 하면서 꾸준하게 유지되어 나갔으면 좋겠어요.
여기 숭의동 낙후된 시설을 88올림픽 때, 아시안게임 때 조금 보조해줬을 거예요. 한 예로 그전에는 화장실이 없어 불편했었어요. 최근 저는 화장실을 꾸미고 주방도 꾸미고 조그만 사무실도 꾸몄어요. 그리고 불편한 사항이 너무 많아서 넓게 한 거예요. 교회 일 하면서 그래도 돈이 되니까 나름대로 투자해서 남의 집에다가 투자를 많이 했어요. 근데 왜 일하기 편하니까 내가 자연스럽게 해야지요. 나에 맞는 환경을 만든 거죠. 제 생각에 조금 더 깨끗한 목공마을을 만들기 위해선 서로 협조해야 더 나은 마을이 될 것 같아요.

앞으로 숭의 목공마을에 어떤 큰 변화가 있을까요?
특별하게 큰 변화는 없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여기 원주민들이 오랫동안 자리를 잡고 40~50년 이상을 사시고 계시는데, 이분들이 함부로 나갈 수도 없고. 그러다 보니 큰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워요. 내가 보기에는 오래 걸릴 것 같아요. 이곳 땅은 철도청하고 나라 땅하고 섞여가지고 공동명의가 많아요. 그래서 함부로 못 움직이는 것 같아요. 저도 이걸 사보려고 애를 썼는데 너무 엉켜 있으니까 엄두를 못 내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아주 장기전으로 길게 마음먹고 있는 거죠. 제 생각에 변화가 오려면 어느 누가 전체적인 합의를 해서 한 사람이 이걸 통째로 사야지요. 나라하고 개인하고 합의를 해야만이 이걸 살 수 있는데…. 어렵네요. 그래서 세 들어 살고 있어요.
숭의동 목공예마을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제 생각에는 앞으로 한 9년 정도를 예상해요. 10년을 예상하는데 이제 1년이 지났습니다. 9년 그 이후에는 어떤 좋은 세계가 나름대로 오겠지요. 또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봐야지요. 내가 9년을 더 하면 50년이 넘는 목공 인생인데. 여기에 더 몰입하고 빠지다 보니까 40년이 넘고 나이가 60이 넘었어요. 그때 가면 70살일 텐데 힘도 없겠지만 쉬어야겠죠? 누군가에게 목공 일을 시켜가면서 하면 참으로 좋을 텐데…. 그럼 나도 좀 쉴 수 있을 텐데….

목공마을의 전통을 이어나갈 후계자는 양성하셨는지요?
우리나라 사람들은 80%가 재주꾼들인데, 모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일단 목공예가 생계유지를 위한 돈이 안 돼요. 두 번째는 목공 일이 지저분하고 먼지 많고 환경이 안 좋죠. 그래서 사람들이 다 꺼려하는 거예요. 저희야 어차피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먼지를 먹든 내 직업인데 하고 열심히 하며 살지만 말입니다. 누가 와서 한다는 게 그게 어렵더라고요.
저는 제 후계자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요. 현실은 젊은 층을 얻어야 되는데 목공을 배우려는 젊은이가 없더라고요. 제일 안타까운 것은, 이 직업이 참 재밌는 직업인데 일하는 사람이 너무 힘들어요. 어떤 일을 하든 노후를 생각하면 이게 망할 일은 없잖아요. 아무리 기계가 나오고 컴퓨터가 나와도 사람의 손으로 하는 이 목공예는 가치가 높잖아요. 목공은 정년이 없는 직업이잖아요. 그래서 좋은 직업인데….  젊은이들에게 안정적인 수입 보장이 안 돼요.


4. 사용하는 나무의 종류

사용하는 나무 종류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제가 배다리에서 일할 때 한미 반도체 포장 박스를 제작했어요. 포장 박스 재료로 그때는 MDF를 많이 썼어요. 가공한 것을 도장을 해 가지고 컬러를 만들어서. MDF는 아마 합판 집성목을 갖다가 짜는 거지요. 한미 반도체가 지금 많이 커졌어요. 제가 한 10년 이상 거래했어요. 그때 당시에 일을 하다가 그만두고 또 자기들끼리 막 찾아다니면서 하청해 가지고 조그만 기업을 내고 하더라고요. 문제는 그 사람들이 목재로 박스 만드는 일은 안 하더라고요. 그때 당시에는 제가 한미 반도체 일을 하고, 그 사람들이 하청 나온 사람들이 하는 그런 박스를 소개받으며 많이 했는데….
제가 당시에 만들었던 스낵바 만들었는데, 재료는 그때 당시에 뉴질랜드 소나무하고 인도네시아산 나왕이 많았었어요. 어느 게 좋다는 것보다도 그 필요한 양이 소나무가 될 수가 있고 나왕이 될 수가 있죠. 필요하면 문짝 같은 거는 나왕이고 그 시절에는 나왕하고 소나무가 많았거든요. 지금은 뉴질랜드산 소나무는 수입이 안 되어 구하기가 어려워요.
요즘은 주로 교회 용품을 전문적으로 하는데 나무 재질이 다 다르게 사용합니다. 교회 용품 같은 경우는 말하기가 좀 애매한데 오크나 고무나무를 상대를 많이 하죠. 고무나무는 일단 사용하는 게 아니라 제작하는 과정의 재질이죠. 고무나무 자체의 이름이 고무나무라고 이렇게 돼 있어요. 도토리, 상 수리나무가 오크예요. 여기서 작업을 진행해보면 오크가 쓰기 좋고요. 이 고무나무가 어떠한 가구를 만들 때 상당히 단단하면서도 그 안정감이 있어요.




5. 일에 대한 책임과 열정

목공예에 대한 소회와 전문가가 되는 지름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내 경험으로 보면 손님이 오면 서로 함께 이야기 해서 스케치를 하는 거예요. 소비자도 처음에 오시면 저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하는데 구체적인 안이 없어요. 그러면 내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서로 일치되는지 스케치를 통해 조율해 보고 작품 제작에 들어가는 것이 성공의 비결이지 않나 싶어요.
대화가 안 되는 경우는 먼저 반갑게 맞이해서 ‘뭐가 필요하시죠? 어떻게 제작하면 좋을까요?’라고 상대를 하면서 그 사람의 속에 있는 그림을 내가 모방을 해가지고 스케치로 보여주는 거지요. 그리고 납기일을 약속을 하고 가격을 흥정해야 해요. 그게 약속이라는 게 그만큼 무서운 거예요. 책임을 못 지면은 맡으면 안 되고요. 그게 제일 중요해요. 밤을 새서라도 약속은 지켜줘야 되는 거예요.

기나긴 목공 인생에서 느끼는 기쁨과 행복은 무엇인가요?
그래도 저도 건장하다면은 끝까지 해서 해 나가는데 내가 만드는 물건이 소비자한테 막말로 탈이 없고 잘 만들었다면 참 행복한 건데 저도 사람이라 실수도 하고 그러기 때문에 정말 그 사람들한테 이쁘다 할 정도로 소리 들었으면 하고 만들거든요. 돈을 벌고 안 벌고 떠나서 내가 맡은 작품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질 때 정성껏 만들었다. “참 예쁘다!”라는 그 소리 한번 듣고 싶은 거지요. 저는 그런 마음을 갖고 이런 생활을 하는 거죠.

긴 세월 인내한 목공 장인의 애착 작품은 무엇인지요?
제 작품 중 애착이 가는 작품을 고르라고 하면 돈을 벌기 위해서 상업적인 일을 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약속과 판매를 빨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급하게 움직이고 또 약속 시간을 지켜야 되고 해서 애착 가는 작품 찾기는 어려워요. 다 내 손을 거친 작품이라 애정은 가지요.
현실은 아무래도 살기 위한 거니까 내가 살아야지 물건도 되고 돈도 되고 그러니까 그걸로 인해서 일단 사는 게 우선이잖아요. 내가 가게를 얻었으면 세를 내야죠. 먹고 살려면은 그만큼 바쁘게 움직이고 현실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더라고요. 욕심은 끝이 없는데 안정되게 나가려고 애를 쓰죠. 왜냐하면 그 노력한 만큼 대가가 오다 보니까, 그 노력한 만큼 열심히 사니까, 내게 주어진 임무에 열심히 살다 보니까, 돈도 되고 내가 원하는 순리대로 적금 넣고 편안하게 노후 대책하고 가니까 그래도 최대한 만족을 하죠.

목공의 매력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저는 자면서도 작품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 어떻게 만들면 물건이 나오겠다 하고 머릿속에서 다 그리면 작품이 나오죠. 그리고 시작할 때는 다시 한번 체크해서 치수를 확인하고 일차 재단해 가지고 조각을 하는 거죠. 그러니까 모든 것은 머릿속에서 암산을 많이 해놓고 일을 하는 거죠. 그런 다음에 절단하고 재단해서 조리까지 과정으로 계속 만드는 거죠. 머릿속 생각이 창조인 셈이죠.
목공의 매력은 내가 만든 물건을 소비자가 받았을 때 행복하고 좋아했을 때라고 생각해요. 손님이 왔었을 때 내가 생각한 것을 표현을 했을 때 그 사람이 빨리 이해할 때가 제일 행복해요. 또 손님이 오셨을 때 어색한 분위기 없이 ‘필요한 게 뭐예요?’, ‘사장님 나 이거 만들어야 되는데 어떻게 만들어야 됩니까?’ 그러면, ‘어떤 거죠? 이런 건가요?’라고 표현했을 때 손님이 ‘선생님은 어떻게 내 마음을 아시고 이렇게 그릴 수가 있냐’는 말을 듣는 순간이 많이 행복합니다.

앞으로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요?
지금 같이 일하는 직원은 안 지가 40년이 넘었어요. 이 동네 토박이가 아니라, 어렸을 때 다니던 반장 댁 아들인데 저 친구가 나중에 하겠다고 해서 왔어요. 점잖고 좋은데 목공이라는 게 솔직히 굉장히 어려워요. 이게 쉬운 게 아니에요. 좋아해도 막상 이렇게 보면은 어렵다는 걸 느껴요. 왜냐하면 열정은 물론 기본과 응용이 제일 중요해요. 그리고 기계 다루는 거는 위험스럽고 무서워요. 저 자신도 아직도 기계가 무서워요. 제 손도 이렇게 나가고. 제 주위에 목공 하다가 손 나간 사람이 많아요. 그게 이렇게 순간이에요. 자만도 있지마는 기계를 쓸 때는 순간 무지하게 빨리 판단하고 해야 해요. 하여간 이 목공은 어떤 일이든 다 무서운데 이건 특히 더 무섭더라고요.
이 계통에서 빨리 가는 사람도 있고 둔하게 가는 사람도 있는데 눈에 보이는 게 있어요. 안 한다는 게 아니라 어쨌든 만들어서 그 사람들하고 혼합해 가지고 일을 좀 하면 그런 사람들은 기초 일을 금방 하기 때문에 응용만 잘하면 이 공예일은 되거든요. 이 일은 물론 기계도 활용해야되서 기계를 다루는 요령을 아는데 5년만 흘러가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능력이 돼요. 디아이와이(DIY) 그런 기술보다는 현장에서 지금 만들고 있는 것을 눈으로 50%만 봐도 배운 거예요. 눈으로 보고 그 사람이 그때 어떻게 했더라는 기억만 하면 내가 앞으로 할 때는 기억을 되돌려서 이럴 땐 이런 방법을 써야지 하는 지혜가 생겨요. 경험과 경륜으로 생긴 노하우를 앞지를 것은 없다고 봐요. 목공예 자체가 손으로 하는 섬세한 작업이잖아요.
지금 직원이 퇴근했지만, 도와주는 사람이 좀 더 있으면 좋겠어요. 그 일하는 직원에게는 이 일이 노동이고 저 또한 노동이지요. 근데 저는 머리 써서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이라고 볼 수 없어요. 재밌게 즐겁게 하는 것이 좋다고 느끼며 살죠.​​​​​​​


 
시민기록일지
• 면담자 : 김용경 (면담지원: 표기자, 정지선)
• 면담일시 : 2022.9.13. 18시, 2022.10.1. 14시
• 면담장소 : 한일원목목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