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결 따라 살아온 삶
목간판에 새긴 나만의 글씨
미추홀학산문화원 관리자
게시일 2022.12.23  | 최종수정일 2023.02.25



"조각은 참 재미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보면 내가 좋아하는 글이나 그림을 이렇게 수작업을 하면 이렇게 변해요. 그래서 이 조각이라는 것이 그 수많은 어떤 인간의 생각을 이렇게 표현해내는 거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고 할까요. 
그래서 나무는 진짜 죽어 있는 거잖아요. 이게 죽어 있는 건데 여기다가 뭔가 내 솜씨가 가면은 새로운 어떤 그 작품이 되고 장식품이 되고 그런 경우죠. 그러니까 이 조각을 하다 보면은 굉장히 관찰력이 많이 늘어나요."

 



1. 고향과 어린시절

대표님 태어난 고향은 어디신가요?
나는 전라도 광양에서 1950년에 태어났어. 원래 태어나기는 아버님이 경찰 공무원이어서 여수 백야도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은 광양에서 보냈어. 2남 4녀의 형제 중에 위로 누이가 있고 내가 장남이었어요.

대표님의 어린 시절은 어떠하셨나요?
나는 어릴 적에 참 영특했데요. 공부도 잘했고, 친구들 앞에서 항상 리더 입장이었고 해서 그 당시 나중에 훌륭한 사람이 될 거라고 할 정도로 매사에 좀 잘했어요. 모든 게 다 자랑스러웠었지. 어린 시절 내가 다닌 학교는 큰 학교였어요. 한 학년이 7~8반이었는데 한 반에 60~70명이 있었으니까 근 삼천 명 정도 되는 큰 학교였어. 거기서 전교 어린이회장도 했어. 내 개인적인 자랑입니다마는 학교에서 내가 조금만 좀 몸이 아프다는 기미만 보이면 선생님들이 서로 양호실로 데리고 가는 등 특별한 서비스를 받았어요. 공부도 잘하고 또 아버님이 공직 생활하시다 보니까 그렇게 빈곤하게 살지 않았고, 우리 어머님은 그 지역구 정당에서 여성위원장을 하는 등 나름대로 사회 활동을 좀 하셨어요. 두 분은 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이 높아가지고 2남 4녀 모두를 잘 가르쳤어요. 그런대로 밥 먹고 살고 자신만만한 학창 시절을 보냈어요. 그림을 잘 그렸어요. 그림을 잘 그려서 전라남도 조선대학교 주최 전국 학생 미전에도 나가서 몇 번 입선도 하고, 학교 미술부도 내가 총괄해서 운영을 했어요.

조각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셨나요?
우리가 자라던 시절에 지방 젊은이들에게 서울은 선망이 대상이었어요. 그때 서울 나들이를 몇 번 했는데 참 멋졌어요. 서울로 올라올 때 내 스스로 자금을 만들어서 온 것도 아닌 거고, 아버지 돈을 몰래 가져온 거라 내려가면 반성문 갖고는 안될 것 같아 고민하는 찰나에 고향 선배가 조각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만났어요. 그게 어디냐면 서울 서대문구 갈현동이예요. 고등학교 선배인데 굉장히 반기면서 ‘야 너라면 이거 정말 잘할 것이다. 한번 해봐라.’ 하는데 아주 신기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그때 당시에는 뭐 특별한 계획도 없고 우선 의식주를 당장 해결해야 되고 그래서 머물러 배웠던 것이 조각 기술, 목공예였어요.​​​​​​​

서울에서 일하다가 어떻게 인천까지 내려오시게 됐어요?
서울 갈현동에서 일할 때, 사장 바로 밑에서 영업을 하는 영업부장하고 친구 같은 관계가 되다 보니까 다른 직원들에 비해 대접이 소홀하더라고요. 그때 한 3개월을 이걸 배워서 서각 목공을 한 거예요. 근데 3개월 동안에 초급을 이미 건너뛴 거예요. 그래서 나도 도급제로 해 달라고 했지요. 자재를 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해 오는 것이라 비싼 나무라 염려를 많이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불량을 내면은 재룟값은 변상을 하겠다라고 해서 내가 기존 기술자들하고 동일한 자격으로 일을 했었죠. 한 3개월 하다 보니까 해고를 당했죠. 그래서 광주로 내려갔죠. 광주로 내려갔는데 공예품을 만드는 그분하고 유대를 가지면서 친하게 지내면서 시간이 많고 하다 보니까 그분한테 목공 기술을 습득했죠. 벽걸이 공예품 조각을 만드는 것을 배워 가지고 서울에 올라와서 내 사업을 시작한 거죠. 그 마장동 원목 조합에서 나무를 사고 종업원을 6~7명을 데리고 청계천 뚝방 판잣집 두 칸 임대를 해가지고 공예품을 만들기 시작한 거죠. 근데 이것이 사람들에게 호감은 가는데 가격이 비싸고 또 판매는 한정되어 있어 대중적인 소비가 안 되더라고요. 좋아하는 사람만 사 가고. 이런 공예품을 내가 원하는 대로 대량으로 구매를 해 주는 게 아니라 마음에 드는 것만 골라서 가니 영업 수지타산이 안 맞았지요. 문제는 이것을 어차피 처분을 해야 되니까 위탁으로 주고, 수금으로 간다고 하면은 몇 개 팔렸다고 돈 조금 주고. 도대체 돈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재고를 판매를 하러 인천에 온 거예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 인천에 살게 되었어요.​​​​​​​

인천에 오신 것은 언제쯤일까요?
내가 인천으로 온 것은 1970년대 초였어요. 그때만 해도 인천은 낙후되어 있었어요. 인천에 와서 재고 정리를 하면서 그냥 인천에서 한 2~3일 머무르면서 특별한 계획도 없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우연치 않은 사건으로 인천에 자리를 잡게 된 거죠. 인천에서 돈도 한 푼도 없고 시내버스에서 어떤 사람과 인사를 나눈 사람이 있었어요. 모래내 쪽으로 가는 시내버스였는데 우연찮게 그 버스에서 한 사람을 만나게 되었어요. 내가 무슨 목적인지는 지금 기억이 없는 데 그분이 가진 나무를 보니까 관심이 가잖아요. 그래서 물어봤죠. 사장님, 이거 조각품 아니냐고, 그랬더니 자기 명함을 주는데 ‘안토니 공예사’였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이 배다리에서 공예사를 하고 있는 전종원 씨였어요. 전종원, 그 사람은 인천의 최고의 목공 원로죠. 지금도 운영을 해요. 배다리 철교 좌측에서 내려가면 옛날에 신흥동 가는 삼거리길이 있는 전원 공예사. 그분이 생각이 나는 거예요. 그래서 무작정 찾아갔죠. 종업원들을 많이 데리고 운영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저의 처지를 이야기 했죠. 인천에 와서 이렇게 재고 정리를 하고 특별한 진로가 마땅치 않아서 이렇게 찾아뵙게 됐다고. 그러니까 바쁜데 잘 와줬다고. 그래서 그곳에 머무르게 됐죠. 전종원 씨 가게에요. 거기서 내가 먹고 작업장 책상 위에 휴대용 침낭 같은 거 하나 가지고 자고 일하는 시절이었죠. 어느 날 바쁘니까 나보고도 공장으로 가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공장에 갔죠. 갔더니 거기 가구공장 사장이 광주에서 알았던 선배님이셨어요. 너무 반갑다면서 자기 공장의 규모가 커서 조각 책임자를 하나 주선을 하고 있는데 잘 만났다 이거예요. 그래서 그쪽으로 내가 옮기게 됐죠. 그러면서 전 사장하고는 좀 껄끄러워진 관계가 됐죠. 내가 고향 선배가 있는 쪽으로 가게 되었으니까요. 그래서 거기 가구공장에서 3년 정도 일을 하다가 내 사업을 시작한 거죠. 그러면서 집사람과 결혼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어느덧 고향처럼 인천에 머무르게 된 거죠.

부도 맞은 경험과 IMF 국난 속에서도 건재한 목공 사업의 비법은 무엇인가요?
한 서너 번 맞았죠. 저는 성격이 약속 지키는 걸 참 좋아하다 보니까 내가 직원들 월급이 내일 모래 돌아온다 하면 미리미리 준비를 해요. 나는 IMF를 모르고 살았어요. 오히려 IMF 때 연수동에다 5층짜리 건물을 하나 지었어요. 그때 이사를 들어갔는데 식구하고 숟가락만 들고 가서 모든 세간을 새 걸로 다 구비를 하고 그렇게 재밌게 살았어요. 집사람이 살림을 알뜰히 살아줘서 그래요. 아무튼 통장에 잔금 있는 것으로 주변에서 사업하면서 IMF로 어려워 SOS 하는 그런 친구들한테 잠깐씩 융통도 해주고 그렇게 살아서 IMF라는 것을 몰랐어요. 자랑할 건 없는데 재미있게 살았어요. 현찰이 많지는 않은데 자급자족할 정도는 됐죠.

사모님과는 어떻게 만나 생활하시게 되었나요?
아버님이 5.16 군사혁명 시절에 공직 생활을 그만두고 큰 과수원을 사가지고 이사를 하였지요. 전라남도 광주 근교에 있는 곡성이라는 곳인데, 그때 그 동네에서 집사람을 만나게 되었지요. 저보다 나이가 어려 그 흔한 오빠 동생이라는 그런 인간관계 속에서 지내다가 사귀다가 인천에 저 혼자 지내다, 집사람과 결혼을 하여 집사람과 인천에 오래 살게 된 거죠. 저는 집사람이 그냥 좋아 평생을 두고 감사해요. 내가 사업적으로 크게 움직이지 않는 가장 큰 이유가 가정을 중요시하기 때문이에요. 내가 좀 초라하더라도 처와 함께하는 인생을 사니까 정말 편안하더라고요.

 
작업 공간에서 부부의 모습


결혼해서 처음에 정착하신 데는 어디세요?
인천 중구 도원동이에요. 도원동은 그 당시에도 주거 지역이 많이 낙후되어 번듯한 집은 별로 없고, 번듯한 집이라곤 월남촌이라고 그 양옥집 2층, 3층 집이 가장 반듯한 집이었죠. 내가 팔불출 같은 얘기 해 볼게요. 집사람이 집을 하나 사봅시다 어쩝시다 해서 그 당시 개발된다던 연수동에 가서 땅을 샀어요. 거기에 집을 짓고 해서 건물주가 되었지요. 아내 덕분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 부모님이 재산을 정리를 해서 장남인 나에게 100% 다 주신다고 하는데 내가 집사람한테 양해를 구했죠. 우리 받지 말자 저건 두 분이 어렵게 모으신 돈이니까. 두 분이 돌아가실 때까지 쓰고 가시게끔 받지 말자고. 우리 신혼 때 우리 부모님이 광주에 계셨는데, ‘노인들은 밤새 안녕’이라고 하듯이 우리 어머님이 중풍으로 쓰러지시고, 집사람이 병원비 쓰라고 우리가 살던 전세금을 다 빼서 목돈을 갖다 드렸어요.

자제분은 어떻게 두셨나요? 
딸 둘에 아들 하나입니다. 위로 딸 딸, 그다음에 아들. 예전엔 남아 선호 사상이 있었잖아요. 나는 장남인데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딸딸 손녀를 보니까 겉으로 표현을 안 하시는데 섭섭한 느낌도 있잖아요. 그때 집사람한테 왠지 미안해하고 부담스럽고 했어요. 그렇게 해서 낳은 막내가 아들입니다. 제가 애들하고도 재미있게 농담도 잘하고 하지만 엄할 때는 엄하게 키워서 그런지 지금은 보람을 느끼고 삽니다. 집에서 왕 대접을 받고 사니까요. 아버지의 말을 어명처럼 존중해 주거든요. 이렇게 받아주고 하니까 행복해요. 특히 우리 애들이 내가 하는 일을 많이 지지해 줘요. 둘째 딸이 출가 전에 제 자존심 상하지 않게 “아버지는 지금도 훌륭하신데 좀 더 크게 잘 살았으면 좋겠다. ”라는 말을 했어요.

 
조각을 하기 위한 밑그림 그리기


2.  목공예거리의 형성과정

목공예 사업은 어디서부터 하시게 되었나요?
배다리에서 시작했지요. 가게가 한 40평 되고 한쪽에 사무실도 있고 컸지요. 지금은 헐린 쪽에 있죠. 철로 길 쪽. 종업원도 많고 그랬는데…. 거기가 도시개발 도로 확장 계획이 있어가지고. 그때도 이걸 해야 하냐 말아야 하느냐 하는 와중에 우연히 가게 임대를 했어요. 거기다가 ‘인일 조각’이라는 간판을 하나 붙여놓고 1년 치 임대료를 줬죠. 내가 ‘인일 조각’ 간판을 걸어 놓으니까 공예사들이 한두 명이 몰려들기 시작한 거예요. 그래서 배다리 그 동네가 목공의 거리가 형성이 된 거예요.

 
진교욱 사장님


숭의 목공예거리가 언제부터 형성되었는지 과정을 말해 주세요?
1997년 숭의동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는데, 하나둘씩 이사를 오다 보니까 여기 숭의동이 목공의 거리가 된 거예요. 나도 도시에서 살면서 보지만 이렇게 낙후된 도시가 없잖아요. 그러니까 남구청에서 인천 도시발전 그런 계획에 여기도 철거지역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이 된 상태예요. 아시안게임 전에는 여기가 완전히 철거가 된다. 이런 말이 나돌았죠. 그때 당시에 시 재정이 없어서 무산돼 버린 거죠. 그런 와중에 어느 날 남구청 기획실에서 공예인들이 모이게 해 달라는 겁니다. 건설교통부에서 차관급이 이 동네를 답사를 나온대요. 그래서 그분들이 오시니까 좀 모여달라고. 그래서 우리가 모였죠. 발전을 위해서 지원을 하겠다. 그러니까 이 동네 그 친목이랄지 공예인들의 참모습을 좀 보여줘야 되지 않냐는 거에요. 자기 기능을 가지고 3~40년간씩 해 온 기술업인데, 지원을 주실 일이 있으면 100% 지원을 해주십시오라고 얘기를 했죠. 그러고 나더니 그분들이 동네를 한 바퀴 더 돌고 가더라고요. 그분들이 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남구청 기획실에서 나한테 전화가 왔어요. 사장님, 그분들이 가시는면서 지원을 준다고 하는데, 공예가들 조직표를 달라고 하더군요. 전화상으로 알려줬더니 통과가 잘 된 거예요. 이쪽에 올라가시면은 센터 있기 전에 2층 건물 있죠? 4억 지원금이 나와 이 동네가 공예 거리 사업이 시작된 거예요. 근데 내가 아프기 시작했어요. 몸이 이렇게 팔도 움직일 수가 없고 목 디스크가 심해졌어요. 그러는 와중에 2차 지원이 목공센터에 해 준다는 거예요. 말로는 20억인가 얼마를 지원을 해준다는 그런 얘기가 있었어요. 그게 몇 년도더라 2010년 후반기 같은데 나는 몸이 안 좋아서 관여를 안 했어요. 그래서 목공 센터가 들어서고 친목회 운영을 하게 되었어요. 

목공 강의를 하게 된 과정을 알려 주세요.
산림조합 중앙에서 운영하는 목공의 기술 급수 자격을 준하는 교육이 있었는데, 친목회 회원들이 주기적으로 급수 시험을 보러 몇 번 다니더라고요. 기능보다도 객관식으로 그런 시험인데 목공 센터가 들어서면서 평생 학습 교육하게 되었죠. 나는 이 계통에 원로이다 보니, 내 전문 분야의 서각 강의를 부탁하더군요. 그래도 처음엔 사양을 했죠.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을 모셔다가 가르치라고. 근데 우연치 않게 내가 강의 진행을 하게 되어 사력을 다해 지도했어요. 한 3~4년간을. 아주 생소한 초보자들을 10시간 만에 교육을 해서 작품을 만들어 가져가게 하려니 정말 처음에는 자신이 없고 답답하더라고요. 그래서 내 나름의 프로그램을 짜서 10시간을 열심히 가르쳤더니 나중에 갈 때는 작품 두 개 정도는 가져가는 그런 경우가 생겼어요. 그러다 보니 교육생들한테 제가 존경을 많이 받고 호감을 많이 받다보니 남구청 관계자분들도 굉장히 칭찬을 많이 해주셨어요. 정말 최선을 다해 지도했어요. 근데 작년인가? 올해 초부터인가? 민영화를 시킨 거죠. 남구청에선 그래도 여전히 나한테 이걸 진행을 해줬으면 하고 얘기를 하더라고요. 이제 나도 좀 편하게 살고 싶고 해서 다른 분으로 교체를 해서 진행을 해 봐라 하고 나는 빠졌죠.

 
목공 체험 교육 하고있는 진교욱 대표님


3.  나무 이야기

목공 자재는 어떻게 수급하셨나요?
인천이 원목을 수입하는 도시 중에 가장 선두라고 봐야겠죠. 공예 자재는 우리나라 나무는 별로 없어요. 거의가 동남아시아에서 수입해 오는 나무는 남방지구 인도네시아 보르네오 쪽에서 가져와요. 열대 지방 거의 비슷하니까 온열대지방. 그러니까 그 수입자들이 그런 원목을 수입을 해서 제재업을 하는 쪽에서 판매를 하면 소상공인들에게 부탁을 하여 필요한 두께만큼 잘라서 판매를 주는 거죠. 그러면 우리는 그걸 사서 쓰는 거죠. 우리가 원목을 사 오는 경우는 구조적으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죠. 우리 목공 일은 거의 수작업이에요. 내가 이 목간판을 만들면서도 모든 글씨는 내가 손으로 다 써요. 그걸 조각을 하면 작품이 되는 거죠. 근데 최근에 컴퓨터가 나오면서부터 컴퓨터가 글씨를 써 주기도 하지요. 컴퓨터만 좀 늦게 나왔으면 굉장히 할 일이 더 많죠. 목공은 거의 수작업인데 컴퓨터가 나와서 개성이 적어졌어요. 지금도 아주 옛날 손글씨로 해달라고 찾아오시는 분들이 있어요.

목공 작업 하실 때  어떤 나무로 하시는지요?
나왕이 가장 무난하죠. 최근 들어 나왕은 수입이 안 돼요. 그린피스 환경 단체들이 산림 훼손도 막고 있고, 거기다가 방대한 중국이 산업화 되면서 동남아시아 원목들이 통째로 중국으로 가요. 그래서 우리나라에는 나머지 자투리들만 받아오다 보니까 제대로 공급이 안 돼요. 그래서 나왕 대치품인 집성목을 사용해요. 작업은 아주 힘들어요. 집성은 여러 조각을 붙여서 빗물에 오래 받으면 이게 퍼질 염려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건 우리가 작업 과정이 더더욱 힘든 게 앞뒤로 칠로 포장을 다 해줘야 되요. 집성목을 보면 중간에 이렇게 클립해 놓은 건 사용을 잘 안 해요. 집성 목재 중 솔리드라는 것을 사용해요. 그냥 나뭇결을 갖다 붙여놓은 거예요. 그래서 서각할 때에는 이게 별로 안 좋아요. 칼이 잘 안 맞아요. 이건 엊그저께 인천시장 당선자 인수위원회 간판이거든요. 이거 보시면은 솔리드라 해서 안에 여러 겹이 붙어 있는 거죠. 요게 집성목입니다. 집성이라는 말 그대로 나뭇조각을 갖다 이렇게 집합을 시켜서 본드로 붙여놓은 거잖아요. 요즘은 이 접합시키는 본드도 좋고 기술도 좋아가지고 떨어질 염려는 없어요.

목공예를 하기 위해 자재수급은 어떻게 하시나요?
자재 수입은 목재소를 가는 거죠. 인천에 원목을 수입하는 제재소가 많으니까요. 내가 젊어서부터 거래했던 제재소는 인천제철 앞에 평화 제재소라고 있었어요. 평화 제재소는 소비가 전국 위주로 하시니까 어마어마한 규모죠. 대성목재를 비롯한 목재소들은 목재 사업도 할 뿐만 아니라 목재하고 연관된 합판 제조, 가구 제조 등 여러 가지를 다하죠. 그 썬퍼니처 같은 데도 전국에 가구점들을 두고 대리점들을 두면서 운영을 하지요. 대성목재 옆에 대성 목재하고 거의 맞먹는 목재사가 있었던 상호 기억이 안 나네요. 그 회사 직장장이라는 사람이 나를 한번 만나자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거기 가서 만났더니 자기네 회사에도 가구부를 창설 하는데 조각을 잘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러니까 진교욱 당신이 와서 조각을 책임지고 해주면 좋겠다라는 제안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현재 지금 수입이 어느 정도인데 한 3년 정도는 미리 선불로 보장을 해주시오. 그럼 내가 다 정리하고 오겠다 했어요. 그러니 그건 좀 부담스럽대요. 그러니까 그분들도 한마디로 말해서 실험용이죠. 운영을 해서 잘 되면 밀고 가는 거고 안 되면 해체하고. 거기에 군침을 갖고 덤볐다면 대책이 없는 거잖아요. 그래서 협상이 안 되더라고요. 또 한 번은 가구 공장에서 목수라는 친구처럼 알고 지내는 사람인데, 자기 처제가 미군 장교 부인인데, 그 미군 회사가 현지 주둔을 하면서 부가가치 창출을 위해서 여러 가지 사업을 좀 몇 개 벌렸나 봐요. 민영화도 시키면서 나를 필요로 해서 사이판을 가자는 거예요. 내가 처자식도 있는데 거기까지 가는 것이 그렇더라고요. 그래서 그 거절했지요. 그 친구가 몇몇 사람들 데리고 갔는데 다들 큰 부자들이 됐어요.

 
사용하는 조각칼


4. 사용하는 조각도와 공구

대표님이  사용 하고 계신  조각도는 우리나라 제품인가요?
우리나라에서 파는 것들입니다. 가까운 후배가 와서 내 작업장에 오면 ‘형님네 사업장은 박물관’이라 해요. 무슨 웅장한 기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학생들이 쓰는 문구용 조각도 같은 것이 많아서요. 칼은 오래 쓰면 버려야 해요. 무디어진 칼을 숫돌이나 빼빠에다 갈아서 쓰는 거죠. 이렇게 연마를 하면 열을 받아요. 열을 받으면 이 칼이 가지고 있는 그 강한 성질이 그 열에 의해서 날아가 버려요. 그러면 이게 아무리 잘 갈아도 이렇게 우그러져 버리고 잘 안 들어요.

목공 작업을 하는 공구에는 어떤 것들이 있나요?
예, 톱하고 또 다른 평범한 공구들이 있어요. 이게 스카시라는 기계인데, 호수별로 있는 거거든요. 나무가 거친 건 좀 센 거, 약한 건 좀 약한 거. 그다음에 이제 이건 제재소하고 비슷한 오비노꾸라고 해요. 이게 다 일본 이름인데 오비노구. 둥근 톱날이죠. 제재소가 다 이런 기법이죠. 아까 저런 무늬를 이렇게 꺾는 거고, 이것은 올리는 거죠. 이런 곡선들을 올리기는 힘들어요. 옛날에는 이런 목공 기구들도 발달이 안 됐을 때에는 전부 사람들이 손으로 다 했죠. 요건 목재에 바르는 칠인데요. 목재에 바르는 칠이 종류가 있고 오일 종류도 있어요. 여러 가지 나무에 따라서 바르는 기법이 틀려요. 칠을 바르면은 마무리하는 칠도 있어요. 칠은 한 번 발라 끝나는 것은 아니에요. 보통 이제 소비자들은 니스 한 번 바른다라는 개념이잖아요. 목공예에서는 그게 아니에요. 일반 고급 칠에는 하도가 있고 상도가 있고 그래요. 목공 작품은 샌딩이라고 합니다. 말 그대로 샌딩이라는 것이 밑칠이에요. 말씀 그대로 깎아내는 거거든요. 갈아주는 거 그러니까 칠을 해서 그 칠을 그대로 쓰는 게 아니라 그걸로 칠의 평면을 잡는 거예요. 여기 보면 여기에 갖은 빼빠가 다 있어요. 이 빼빠가 그 센 것 중간 것 아주 고운 거. 그래 가지고 이 샌딩을 해가지고 그 위에다가 시아기칠을 바르는 거예요.


5. 인일조각을 운영하면서

인일조각 상호의 유래를 알려 주세요.
특별한 유래는 없지만, 처음엔 배다리에서 2층을 임대를 해가지고 ‘수정 조각’이라고 시작을 했었어요. 수정 조각이 제 첫 사업장이지요. ‘수정’이라는 한 것은 우리 둘째 딸 이름이 수정이에요. 그래서 수정 조각으로 해서 운영을 했는데 그렇게 운영을 하다가 상호를 한 번 바꿔 보려고 이거저거 고민하다 ‘인일조각’으로 바꿨어요. 옛날에는 학생들도 학교 숙제 작품으로도 우리 공예사를 자주 오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면 “아저씨 인일 상호가 뭐예요.” “인천에서 1등이다.” 그냥 내가 이제 그렇게 즉흥적으로 웃기는 대답을 해 준 기억도 있어요. 사실 우리 큰 딸은 또 인일여고를 다녔어요. 그래서 나는 인일이라는 것은 거기에서 나오지 않을까도 생각해요. 잠재적으로 인천에서 1등. 참 좋다는 그런 생각도 담겨있겠죠.

지금도 계속 일을 하고 계신데, 주문은 어떻게 받아 하시나요?
오더는 전부 소비자가 주문을 주셔서 합니다. 저는 0.1%도 영업을 안 해요. 주문 위주죠. 저희는 미리 만들어 놓을 수가 없죠. 우리가 하는 목공예는 생활용품으로 쓰거나 필수 도구가 아니니 고객의 주문에 따라 작업을 하게 돼요. 거기다가 요새는 이 일도 이렇게 메일로 다 받아요. 이렇게 메일로 주문을 받아 작품을 만들어요. 그러니까 세상이 너무 첨단화(정보화)가 된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노인들이 살기엔 너무 어려운 시대예요. 그러나 노인도 배워야죠.

목공예 주문이 많으신데 그 비결은 무엇인지요?
제 기사가 인터넷에 있고,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나 봐요. 조각가 진교욱에게 가면 잘해주더라. 정확하고 잘해준다. 그래서인지 지방에서도 오고 그래요. 독특한 글씨체와 조각 작품의 완성도 때문인 것 같기도 해요. 인천시에서 저에 대한 책을 하나 내준 게 있어요. 그것도 이렇게 구술로 해 가지고 나온 책이에요. 저와 다른 한 사람을 묶어서 책을 내주었어요. 가끔 메스컴에서 전화가 와요. 엠비엔인가 어디에선 ‘서민 갑부’도 해보자는 거예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아닙니다. 저는 그런 그릇이 아니고 그럴 규모가 아닙니다” 해서 다 거절했는데 한 여자분 기자(인터넷 신문사)가 그냥 간곡히 취재 한 번만 해달라고 어쩔 수 없이 했어요.

지금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다 기억에 남고 제 작품은 다 애착이 가죠. 제 손길이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이 갔으니까요. 이 노트가 인일조각 포트폴리오지요. 이게 지금 신영 초등학교 교표 사진이에요. 전부 손으로 써서 하는 글씨죠. 학교 애들이 이 글씨체를 ‘진교체’로 하겠다 했어요. 여기 화엄정사라고 썼지요? 이게 컴퓨터에서 말하는 백송체라는 글씨거든요. 왜 내가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이 글씨도 컴퓨터가 써놓은 글씨대로 하면 모양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컴퓨터에서 배열을 해서 빼가지고 내가 손으로 전부 고쳐요. 내 마음에 들게 하려고요. 저는 컴퓨터로 글씨를 만들어도 제 손 글씨가 거의 한 40% 이상은 고쳐서 하고 있어요. 그리고 여기 보면 재미있는 ‘시옌’이라고 시청 옆에 가면 중국집 간판이거든요. 이것도 제가 만들었죠. 여기 사진 봐요. 길병원 재단 역사관을 만들 때 간판 내가 썼어, 내가 종이에다 써가지고 재단 측에 보냈더니 심의를 했나봐요. 목간판 하면은 ‘인일조각’ 아니면 누가 손을 못 댔어요. 글씨를 못 쓰니까. 그때 굉장히 보람이 있었죠. 컴퓨터 나오기 전의 이야기네요. 여기 보시면 사과, 참외, 수박, 딸기, 배추, 양파…. 내가 그린 거예요. 그러면 이게 왜 만들었냐면 우루과이라운드협정했을 때 인천시 농협에서 우리 농산물 이용하자 캠페인으로 만들었어요. 지금 이 목공의 일을 하다 보면 인테리어 현장에도 재밌는 장식들이 많이 들어가요. 목공예는 시대 발전하고 멀어진 게 지금은 실상이에요. 모양 하나만 뜨면은 수십 개고 수백 개고 만들어 내버리니까. 돈이면 다 되죠. 안타깝죠. 저기 저 등 뒤에 보시면은 저 복 복자 써 있는 거 있죠. 저게 분당에 가면은 1층부터 5층까지가 전관이 청요리집이 있어요. 왕푸징이라고. 근데 그 집 전관 인테리어의 조각품을 내가 다 만들었어요. 여기에 보면 그 왕포진 금판도 여기 있거든요. 그다음에 지금 이런 것은 여기서 이렇게 한 작품이거든요. 근데 여기가 비어 있죠. 엘리베이터 이게 누르는 그 칸이에요. 어느 건물주가 5층인가 몇 층에 자기가 당구장을 하면서 당구장 안내 표시를 1층 엘리베이터 이 표지판 누르는데 이걸 하나 해달라는 거예요. 이걸 씌워 가지고. 그리고 지금 이거 있잖아요. 이 ‘설화정’이라고. 이것도 제가 쓴 것인데요. 우리나라 이만섭 국회의장 계실 때에 강화에 인삼센터 가는데 산이 있어요. 그 산을 밀어 가지고 공무원 국회의원 연수원을 만들더라고요. 거기에 그 정자를 하나 졌는데 이만섭 씨 호가 이건가 봐요 ‘설화’ 그래가지고 설화정이라고 이걸 하나 만들어 달라고 해서 내가 강화에 국회의원 연수원 산까지 내가 제작해서 배달해 드린 적이 있어요. 이건 산림조합 중앙의 현관에 붙인다고 이 벽에서 저 벽까지 가는 크기거든요. 너무 커서 두 토막으로 찍었는데 그러니까 이 공예품을 하다 보면 특히 이 서각 계통의 이런 간판을 합니다. 이렇게 사진으로는 볼 수가 없으니까 지금도 이 앨범을 들춰보면 참 세상이 너무 변해버렸다는 것이 느껴져요.

   
중국집 시옌 간판 조각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 시위에 사용된 과일 모양 제작
이길녀 산부인과 기념관 간판조각


6. 조각과 목공업을 바라보는 시선

조각에 대한 매력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조각은 참 재미있습니다. 지금 이렇게 보면 내가 좋아하는 글이나 그림을 이렇게 수작업을 하면 이렇게 변해요. 그래서 이 조각이라는 것이 그 수많은 어떤 인간의 생각을 이렇게 표현해내는 거기 때문에 무에서 유를 창조한다고 할까요. 그래서 나무는 진짜 죽어 있는 거잖아요. 이게 죽어 있는 건데 여기다가 뭔가 내 솜씨가 가면은 새로운 어떤 그 작품이 되고 장식품이 되고 그런 경우죠. 그러니까 이 조각을 하다 보면은 굉장히 관찰력이 많이 늘어나요. 목간판을 만들면서도 모든 글씨를 내가 손으로 다 썼어요. 그걸 조각을 해서 그게 제품이 돼서 나가죠. 근데 컴퓨터가 나오면서부터 컴퓨터가 글씨를 써버려요. 컴퓨터로 인해 그러니까 그 기능이 없어지는 거죠. 지금도 아주 옛날 제 글씨로 해달라고 찾아오시는 분들이 있어요. 컴퓨터만 좀 늦게 나왔으면 우리 수작업자들이 할 일이 굉장히 많겠죠? 그러니 우리 같은 기능인은 컴퓨터 때문에 할 일이 적어졌어요. 왜 내가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이 글씨도 컴퓨터가 써놓은 글씨대로 하면 모양이 없어요. 그러면 이 글씨를 내가 컴퓨터에서 배열을 해서 빼가지고 내가 손으로 전부 고쳐요. 내 마음에 들게 그래서 저는 컴퓨터로 글씨를 만들어도 제 손 글씨가 거의 한 40% 이상 고쳐서 하고 있습니다.

대표님 작업은 정성이 들어 있어요. 인천의 목공 장인으로 등록하셔야 되겠네요? 
제가 만든 물건은 어느 하나 소홀히 다룬 게 없었어요. 내가 돈을 조금 벌더라도 될 수 있으면 성의껏 해주자고 최선을 다해요. 그러니까 나한테 물건을 해가시는 손님들이 오죽하면은 안타깝게 보여서 그러는지 돈을 몇만 원씩 더 주고 간 사람도 있어요. 지금은 이 목간판에 대한 인식이 식상해졌지만, 옛날에는 이 목간판의 글씨를 사람들이 쓰지를 못했어요. 내가 다 써가지고 만드니까 나 밖에 이걸 할 수밖에 없는 거였어요. 요즘은 컴퓨터 글씨를 응용을 하니까 너도나도 이제 기웃거리면 이죠. 솔직히 이 목간판을 사수하고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예요. 컴퓨터가 글씨를 쓰다 보니까 이런 목공예를 한 사람들이 부수적으로 이걸 해요. 이 목간판에 대한 옛 그런 전설도 없어져 버리고 그런 그 목간판에 대한 고증도 없어진 거예요. 예전에는 진짜 내 손글씨를 좋아해서 오는 사람이 많았죠. 근데 참 우스꽝스러운 게 내가 글씨를 써놓고도 굉장히 마음에 드는 글씨가 있어요. 내가 썼는데 해놓고 봐도 내가 마음에 들어요. 우리가 TV 속에서도 보면은 특히 이런 공예 계통 문화재급들을 명장이다. 뭐다 뭐다 하면서요.

인천의 목공의 전통을 명맥을 잇기 위해서는 어떠한 것이 지금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게 일단 소비문화가 바뀌어야 하는데, 저도 이 목공을 하면서 광명과 일산에 있는 이케아도 자녀들하고도 한 3~4번 갖다 왔는데, 뭐랄까 세계가 하루 생활권이 돼가지고 모든 세계의 물질문명이 다 섞여 있어 버려요. 거기다가 그 엄청난 그 가격 경쟁. 이러다 보니까 우리나라 목공 기술업이 침체기죠. 이케아가 오기 전에도 일반 가구 공장이나 여러 군데서 엄청 염려를 했던 부분이지요. 손 공예로 만든 개성 있는 작품에 대한 애호정신 이런 것이 아쉬워요. 목공예 후계자가 없어요. 생계가 안 되는데 배우려는 사람이 있겠어요? 거기다가 우리나라 목공 대기업에서도 소비자들을 파고들기 위해서 모든 가구의 조립 과정을 애들 블록 맞추기를 해서 제품을 팔아요. 이 계통은 손으로 시작해서 손으로 마무리가 된 기술인데 명맥이 유지되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일반인들이 기계화를 시켜서 따라가기에는 너무 투자가 많이 되는 사업이고 그래서 어디까지 어떻게 갈지는 미지수예요.

숭의동에 목공 마을이 형성이 되어 있는데,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유지 해 나갔으면 좋겠습니까? 
지금 숭의동 목공마을에 있는 기술자들은 경력이 최소 20~40년이 넘어요. 그러기 때문에 체력이 있는 한 기존 단골들 확보로 그냥 잘 유지가 될 거예요. 또 요즘 뭐, 유행이 복고풍이라는 그런 얘기가 많잖아요. 그러니까 또 옛것을 그리워해서 수작업에 의뢰를 해서 개성을 표현하는 시대로 바뀌어 가는 경우도 있겠죠. 우리 목공예마을의 목공의 교육 과정을 보면은 각 분야가 다 특징이 있잖아요. 또 많은 교육생들이 지망을 하여 열성적으로 교육을 받고 있어요. 그들의 얘기를 전해보면 거의 다 취미, 그다음에 퇴직 후 노후 소일거리예요. 이런 쪽으로 인기도는 참 좋아요. 인기도는 좋은데 다만 사업적으로는 조금씩은 대형 기업들이 치고 들어와서 수입 면에선 염려돼요.

오랫동안 목공 일을 하시면서 생긴 직업병은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런 건 없습니다. 다만 70이 넘어버리니까 손을 많이 쓰니까 손 관절이 조금은 와요. 예전엔 제가 힘도 세고 건강했거든요. 제 침대에는 물리 치료기들이 있어요. 손에 뭐 지압하는 거, 그다음에 이렇게 찜질 팩, 암마, 이런 것들이 내 잠자리에 언제부턴가 동반을 하고 있어요. 손 관절이 아플 만도 하죠. 이 맨손으로 삼남매를 다 대학교까지 가르치고 키워서 결혼까지 다 시켰으니 고장이 안 나겠어요.

자제분에게 목공 장인 인생을 물려 줄 계획은?
저는 전수를 안 시켜요. 이 업이 굉장히 힘들어요. 이걸 사업으로 하다 보면 너무 힘들고 그래요. 이 서각 작품을 보시면 알겠지만, 서각 기술도 중요하지마는 체력, 힘도 필요해요. 무엇보다 사업으로 운영해야 하는데 강제로 하고 싶지 않아요. 저는 아이들이 하고 싶은 것을 잘할 수 하게 지원하고 싶어요. 편하게 해 주고 싶어요. 목공예일 참 힘든 일이에요. 저처럼 힘들게 살게 하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으신가요? 
저는 이제 쉬고 싶더라고요. 집사람하고도 얘기했어요. 우리 열심히 일해 왔는데 이 돈을 쓸 일이 쓸 시간이 없지 않냐며. 남은 시간은 이제 돈을 좀 쓰고 살자고. 우리 애들은 항상 불만이죠. 아빠 좀 사무실을 크게 해서 소파도 멋지게 갖다 놓고 환경도 깨끗이 해서 운영을 하시면 어떠냐고. 그때마다 좋은 말이다. 아빠는 그냥 이대로 한다고 합니다. 그 대신 집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최고로 해주고 싶어요. 내가 처자식을 보면 항상 안타까워 보여요. 돈 많은 자본주의에서 왜 하필이면 내 식구가 돼 갖고 이 고생 하나 싶죠. 그래서 형편이 닿으면 최선을 다해주자 그러죠. 식구가 즐길 수 있는 건 다 해 주고 싶어요. 아들에게 하는 얘기가 그래요. 너 인생의 목표를 네 마누라만 위하는 인생을 살아라 너 아빠 모습 안 보냐 아빠는 엄마를 위하기에 크게 사업을 안 하고 산다. 나는 그래요. 집사람이 있어서 내가 이렇게 존재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밖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나보면 별별 친구들 많잖아요. 그런데 저는 밖에 나가면 그냥 집에를 빨리 들어가고 싶어요. 왜냐하면 집사람만큼 나를 대접해 주는 사람이 없어요.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감사합니다.

 
평생을 작업한 손
  
은퇴하신 기념으로 아들 며느리가 쓴 손편지
 
시민기록일지
• 면담자 : 김용경 (면담지원: 허은영, 정지선)
• 면담일시 : 2022.8.25 / 2022.8.30
• 면담장소 : 인일조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