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뭇결 따라 살아온 삶
나는 행복한 작은 거인
미추홀학산문화원
게시일 2022.12.22  | 최종수정일 2023.02.25



"사람이 좋은 마음을 가지면 좋은 결과가 따라와요. 그런 마음으로 살다 보니 목공 일, 군대 생활, 결혼생활, 자녀들 모두 편안하게 잘 지냈어요. 그래서 나는 행복한 작은 거인입니다."



1. 17세, 목공 일을 시작하다.

인천에는 언제부터 거주하셨어요?
충남 대산면 대로리에서 할머니와 큰아버지와 함께 살다가 14살 때 인천에 처음 올라왔어요. 시골에서 살 때 아침 먹으면 저녁 먹을 게 없을 정도로 워낙 살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할머니는 서산에서 사는 큰 고모님 댁으로 가시고 큰아버지하고 나랑 인천으로 온 거예요. 와 가지고 신포동 백반집을 들어갔지. 거기 골목이 지금도 그대로 살아 있더라고요. 그때는 백반집이었는데 지금 벌써 몇십 년이 흘러서 없어졌지만, 건물은 그대로 있더라고요. 일전에 나도 궁금해 갖고 한번 가봤는데, 나 있을 때 그 주인 양반들은 다 돌아가시고 대폿집으로 바뀌었더라고. 그 집에서 한 4년 동안 일했죠.




14살에 인천 올라오셔서 한 4년 정도 백반집에 계셨다고 하셨는데 목공 일은 언제 처음 하신 거예요?
17살 때. 그때 목수를 어떻게 배우게 됐냐 하면 거기가 백반집이니까 소주도 한 잔씩 팔고 그랬는데, 조 씨 아저씨라는 손님이 “야! 너 기술을 배워야지! 응? 기술 배워야 이다음에 먹고산다.” 그래 가지고 그분이 소개를 해줬어요. 맨 처음에는 이발소를 며칠 다녔어요. 근데 이거 아니더라고요. 그분이 “이다음에 벌어 먹고살기는 목수 일이 괜찮을 거다.” 그래서 그때부터 신포동에 있는 목공소에서 목수를 시작했죠. 그 목공소는 간판도 없었어요. 위치는 신포시장 닭강정 파는데 고쯤에 있었어요. 닭강정 집 근처에 있던 신신옥이라는 옛날 우동집 옆에 우리 주인아저씨가 가게 하나 얻어갖고 거기서 한 거예요. 거기서부터 제가 들어간 거예요. 제가 들어갔을 때 주인아저씨랑 직원(유희전씨)이 한 분 계셨어요. 목공 일이 계산도 좀 할 줄 알아야 해요. 저런 창살 같은 게 그냥 다 계산상으로 해서 작업해야 하는 거라, 그런 걸 유 씨한테 많이 배웠죠.

 
 
주문받은 창살 계산 그림
 
창살 도안을 바탕으로 완성된 물품

 
그때는 기계화가 없기 때문에 다 손으로 막 끌 구녕 파고 톱질하고 그랬어요. 저기 걸려 있는 것을 끌이라고 그러잖아요. 예전 문짝들은 지금처럼 이렇게 어렵지 않았어요. 그래도 하다 보니까 지금은 조금 하기 어려운 것도 하죠. 나만의 기술 같은 것도 좀 생기고(말끝을 흐리시며 쑥스러워하며 웃으심).


 
수제작 도구(끌)



문틀이랑 문짝을 처음 배울 때 제일 어려웠던 부분이 어느 부분이었어요? 
보통 손으로 수작업을 하니까. 그때는 문틀 같은 거 홈도 파고. 그거를 이해하실까 모르겠네(고개를 갸우뚱하시면서 손가락으로 설명을 해 주시면서). 이게 문이 이렇게 왔다 갔다 하려면은 홈을 파야 되거든요. 이 홈을 팔려면 사쿠리라고 하는데, 생나무를 대패질해 가지고 홈을 파는 작업이에요. 아~~ 그 과정이 굉장하죠(그 시절엔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었다는 표정으로). 우선 문틀을 만들어야 문짝을 만들 수 있거든. 그거 문틀 만들고 홈파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이런 줄(인터뷰와 촬영을 할 줄) 알았더라면 고런 걸 내가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었는데 아쉽네요.


2. 목공 일을 배운 경력으로 군대 목공방에서 근무하다.

그렇게 간판도 없는 곳에서 목수 일을 배우다가 21살 때 신포동에 신신 목공소라는 곳으로 잠깐 이탈했어요. 원래 있었던 곳이랑 거리는 얼마 안 되는 곳이었는데, 그 집에 가서 한 일 년 있다가 군대를 갔어요. 아(기억을 더듬으시면서)! 69년도 5월 27일 날인가. 저어기 조치원으로 입대를 했어요. 저는 군대 가니까 너무 좋고 그랬어요. 그래서 그랬는지 가서 자리도 참 좋은 자리로 했어가지고, 아주 열심히 하고 왔죠(허허허 행복하게 웃으시면서). 군대 가기 전에 병역 신고할 때 “너 사회에서 뭐 했냐?” 그래서 “나는 사회에서 목수 일을 4년 했다.”라고 말하니까 그게 기록되어서 올라가는 거예요. 그래서 조치원에 있다가 김해 공병학교로 갔는데 거기도 이런 다이가 쫙 있어요. 그럼, 일개 중대가 거기 들어가서 톱으로 자르고 그러죠. 6주 동안 중대에 있다가 학교로 가는 거예요. 학교 가서 배우고 실제 자기 3년 동안 근무할 자리로 가는 거죠. 배정받은 근무지는 대구 오관구였어요. 관구 안에 공시대라고, 우리 부대 이름이 오관구 공시대의 공병이라고 해야 하나. 그때 오관구 들어와서도 대기병으로 얼마 있다가 근무지가 정해지면 가는 거였는데, 저는 이중대에 들어가서 목공방으로 들어갔죠. 사령부 안에 큰 목공소 있는 곳으로 파견 나간 셈이죠. 제가 이렇게 생각해 보면 군대나 사회나 똑같아요. 군대에서도 목수가 필요해. 나무가 필요하고. 그래서 그 목공방에 들어가서 아주 대우도 받고 착하게 있었죠.

파견 나가서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목공소 안에도 이런 기계들이 있었는데, 거기에서는 민간인 문관들이랑 같이 있었어요. 문관 중에는 목수도 있고 배관도 있고 전기도 있고 다 있어요. 거기에 현역(군인)이 세 명이 있는 거예요. 선임하사 그다음에 고참 병장, 그다음에 나. 선임하사는 1년에 한 번씩 바뀌었어요. 고참 병장이 제대하면은 내가 고참이 되고 밑에로 쫄따구가 들어오고 그렇게 되죠. 파견 나간 거라 밥도 직접 해서 먹었는데, 위에 이렇게 철사 끈으로 되어가지고 네모난 통을 항고라고 그랬거든요. 거기에 국도 타다 먹고 했던 건데 중대에서 일주일 치 쌀을 주면 혼자서 항고에다 밥을 해 먹었지요. 거기에다가 라면 끓여 먹으면 진짜 맛있어요. 최고로. 그렇게 해서 한 1년 동안은 혼자 목공소 있으면서 혼자 밥해 먹고 그랬어요. 제일 많이 한 일은 문관들이 다 퇴근하면은 목공소 톱밥을 깨끗하게 치워놓는 거였어요. 그래야 아침에 그 문관들이 나와서 또 작업을 하거든요. 

그럼, 군대에서 목공 일로 만들었던 게 뭐였을까요?
문관들이 있어서 그 양반들이 다 했었는데, 타 부대 사람들이 목재를 수령해서 오면 문관들이 잘 안 해주잖아요? 그럼 내가 쫄 때 그런 거 다 켜주고 그랬어요. 물론 쫄병 때는 그냥 하라는 대로 해야 했었지만, 제가 고참일 때는 송판 가지고 키러 오면은 제가 켜주고, 그러면 그 사람들이 좋아하고 그랬어요. 만약에 한 20mm 정도 그렇게 나가는 거 송판을 갖고 오면은 내가 한 30mm 정도 이렇게 쫙쫙 켜주는 거예요. 그때 가져온 송판 규격을 원 바이 식스라고 했던 것 같아요. 군대 가서 난 영어도 배웠다니까요(다 같이 하하하 웃으면서). 그걸 이렇게 쭉쭉 켜주면 그걸 갖다가 몰딩 돌리는 거지. 그렇게 해주면 군인들이 좋아했어요.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꼭 켜 가는 거예요. 켜가면은 어느 부대에서 뭐 해갔다. 뭐 해갔다. 그런 거 적고. 문관들이 그 안에서 작업하는 거는 어디서 책상다리가 부려서 고쳤다. 어디서 뭐 했다. 그러면 그 결제하는 게 다 있어요. 우리 고참이 하다가 제대하면, 내가 하고 그랬어요. 당시에 다른 목공 일을 받아서 사제로 눈 감고 할 수는 있었지만, 문관들이 있어서 힘들었어요.
지금도 군대에 목공소가 있는지는 모르겠어요. 저 있을 때만 해도 대량 생산이 되던 시절이 아니니까 군대 내에서 해결을 해야 됐었던 거고 지금은 그냥 사재를 많이 구매할 수 있을 것 같으네요.

당시 어떤 종류의 나무였었나요?
우리나라 나무는 아니고 거의 다 미제 합판, 미송이었어요. 그 당시 미군들한테 지원받는 다 거라고 하나? 조달? 공급? 우리가 공병대기 때문에 하사관들이 나무를 수령해오는 거야. 우리 부대만 아니라 다른 부대에서도 가져오는데 사실 수령 해오는 곳이 어딘지는 모르겠네요. 그런 거엔 관심이 없었으니까. 


3. 목공 장인의 길로 들어섰던 청년 시절

군 제대 후 목공소로 다시 돌아가셨나요?
군대 제대하고는 제가 4년 동안 있던 집으로 갔죠. 그 집도 변화가 돼 가지고 도원동으로 왔어요. 그때 여기 도원역 쪽으로 와 가지고 그 간판이 건설목공소였어요. 거기서 20년 동안 봉급생활했죠. 그 건설목공소 주인아저씨도 착하고 주인아줌마도 착하고 그래서 이십 년 동안 일했어요. 이북 양반인데 그 양반도 나처럼 배움이 없어가지고 자기 이름도 못 쓸 정도로 그래서 그 집에 가서 4년 동안 있다가 군대 갔다가 다시 그 집에 가니까 반겨주셨지요. 거기서 한 이십 년 동안 거의 내가 만들어 팔다시피 하면서 운영하고 그랬어요. 그때 직원이 3명도 있다가 2명도 있다가 그랬어요. 제가 그때 69년에 군대 가서 72년도에 제대했는데 제대해서 다시 목공 일했을 때 월급이 6, 7만 원 정도 한 거 같아요. 

당시에 도원역 자리 양쪽에 목공소가 쫙 있었다고 했는데, 그때 풍경과 지금 숭의 목공예마을과 비교했을 때 어떤 차이가 있는지 기억나실까요?
그때가 지금보다 훨씬 분위기가 좋았죠. 그때 도원동에 양쪽으로 목공소가 쫙 있을 때 문짝 같은 거 해서 팔고, 뭐 흔문도 팔고 사고 그랬어요. 분위기가 좋았을 당시에 지금처럼 이렇게 인터뷰를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미추홀구나 인천시에서 목공소가 자꾸 없어지니까 여기다가 숭의목공예마을로 만들어 준 것 같아요. 
도원동 목공 거리 뒷골목에 포장마차 거리도 있었는데, 포장마차나 대폿집 같은 게 있었어요. 포장마차 거리는 배다리 쪽이 아니라 공설 운동장 있었던 자리거든요. 그때 대부분 안주 없이 잔술 먹고 소금 찍어 먹고 그랬어요. 그때 내가 생각나는 거는 주점 집에서 목로에다 이렇게 놓고 잔술을 파는 거예요. 잔 한잔에 얼마였는지 기억이 안 나는데. 막걸리도 팔고 소주도 팔고, 거기서는 돈이 없으면은 안주를 못 사 먹는 거예요. 이렇게 깨소금 조금 해 가지고 찍어 먹고, 돈이 있으신 분은 두부 같은 거 부침개 한 접시 가지고 먹고. 저는 주로 막걸리를 마셨어요. 창영동에 막걸리 공장이 있었는데 거기가 무슨 막걸리 공장이었는지 잘 모르겠네. 그 사람이 지금 다른 곳으로 이사 가서 소성주가 나오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우리 때는 주점에서 항아리에 이렇게 해 가지고 대폿집에 갖다주면 마시고 그랬어요. 그때가 사람 사는 맛이나 그런 게 좋았어요.

독립해서 목공소 개업한 이야기 좀 해주세요. 
제가 일했다고 했던 ‘건설목공소’ 거기에서 참 열심히 착실하게 일했는데, 거기서만 있을 수는 없잖아요. 누구나 독립을 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그 집에서 한 이십 년 동안 있다가 주인아주머니가 소개한 조카딸 되는 아내와 결혼해서, 그 맞은 편(도원역 자리)에 가게가 마침 있어 갖고 거기로 독립했죠. 독립해서 대흥목공소 간판을 붙인 거예요. 그런데 그곳이 흘려가지고(헐려가지고) 지금 이곳으로 이사 오니깐 바로 여기 삼거리에 코너에 대흥목공소가 있는 거예요. 지금은 아니지만. 요 삼거리 건너가면 애완용 팔고 그러는 데가 있어요. 코너집에. 그게 원래 목공소 자리예요. 그 집 간판이 대흥목공소라더라고. 그 사람이 나보다 오래된 거지. 근데 그 양반이 와 갖고 대흥목공소가 가까이 있으니까 물건 배송에 혼란이 오지 않겠냐 해서 내가 간판을 고려목공소로 바꿔 달았지. ‘무슨 목공소, 무슨 목공소’ 하다가 제 혼자 생각에 그냥 뭐 고려가 괜찮을 것 같아 가지고 고려 목공소라 이름을 내가 지었지. 사실 애들 이름도 내가 가게에서 일하면서 지은 거예요. 큰 애는 차 천호인데, ‘하늘 천’ 뭐 ‘무슨 호’ 해 가지고, 어디 가서 이름도 안 보고 그냥 그렇게 했고 작은 애는 차 두호인데, 하여튼 뭐(허허). 
개업하면 다들 그러겠지만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특히 안식구가 엄청 고생 많이 했어. 진짜로. 그때 남자애 하나는 업고 하나는 유치원 보내고 나면 일꾼들 점심을 해줘야지 새참 해줘야지. 안식구가 엄청 고생했어요.


4. 나를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 주는 가족 이야기

예전 직장 주인아주머니 소개로 사모님을 만나셨다고 하셨는데 결혼은 언제 하신거예요?
25살에 제대해서 열심히 일하다가 32살에 결혼을 했어요. 사실 32살 먹어서 돈 벌어 놓은 것도 없다는 생각에 그때 막 겁나더라고. 그래도 그 주인아줌마가 내가 착실하고 잘하니까는 남 주긴 아깝다면서 서울 금호동에 사는 조카딸을 소개해 줬죠(사모님 생각하시면서 흐뭇하게 웃으시며). 안사람 이름은 송연숙인데 나하고 8살 차이라 안사람 나이가 24살에 결혼했죠(허허허 웃으시면서). 한 2, 3년 연애했는데, 인천에서 일 끝나면 늦으니까 택시 타고 금호동까지 가서 데이트하고 그랬어요. 당시에 택시비가 만 이천 원 정도 나왔던 것 같아요. 월급이 6~7만 원이었던 시절이었지만 매일 서울 갔던 건 아니라 아깝지 않았어요. 결혼식은 인천 동원예식장에서 했어요. 지금 건물 짓다가 중단된 곳 있죠? 거기서 결혼하고 충남에 있는 온양 온천으로 신혼여행 갔다 왔죠. 신접살림은 숭의동 동사무소 옆에 있는 주택에서 시작했고, 거기서 애 둘 낳고 나왔어요. 단독주택이었는데 주인이랑 세 사는 사람이 우리까지 셋이 살았어요. 그러다가 처음 독립해서 차린 대흥목공소 지하실로 살림집을 옮겼어요. 당시에 갠신이(겨우) 이사 온 거였어요. 거기서 살다가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 온거에요. 그전에는 다 셋방살이였는데, 애들 엄마가 세로 있으니까 “나이 먹고 어쩌고 그러면은 어디 가게라도 하나 준비해야 되지 않냐!” 그래 갖고 여기 마침 이 가게를 준비하게 돼서 지금 월세는 안 내서 너무 좋아요(흐뭇하게 웃으시면서).

사장님이 행복하다면서 짓는 미소가 너무 좋아 보이세요. 부럽습니다!
그때 초반에는 애가 둘인데 하나 업고. 큰애는 유치원도 보내고. 나는 배움이 없지만, 애들은 가르쳐야겠다 하고 생각해서. 대학까지 보냈더니 애들이 나름대로 자리 잡더라고요. 우리 애들은 다 미추홀구에서 학교를 다녔어요. 광성중학교, 인항고등학교. 우리 애들이 학교에서 착실해서 그랬는지 추천장 받아서 시험 안 보고 대학 들어갔어요. 큰애는 인천대학교, 작은애는 순천향대학교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회사도 들어가고 그랬죠. 큰아들은 대학 졸업하고 회사 들어가자마자 같은 학교 다녔던 며느리랑 바로 결혼시켰어요. 큰아들이 지금 43세. 큰 며느리는 동갑. 작은아들이 41세예요.

 
행복한 웃음을 보여주시는 사장님


저는 행복한 남자라고 생각해요. 우선 색시를 잘 만났고, 자식들도 속 썩이지 않고 잘 자라주었고. 그래서 전 집에서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노래도 불러요(하하하 웃으시면서). 우리 창살 문 만드는 일은 쉽게 만드는 게 아니라 좀 손이 가기 때문에 값이 좀 세요. 아무나 못 하고. 요즘은 주문이 많지 않지만 그래도 한 번 제작하면 수입이 괜찮아요. 출판사에 다니는 며느리가 제 이야기를 듣더니 나중에 아버님 이야기를 꼭 책으로 내보고 싶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런 거 보면 나 스스로 나를 작은 거인이라고 생각해요. 


5. 독립해서 자리 잡기까지 함께한 동료 이야기

함께 일했던 동료나 직원에 대한 추억이 있으실까요?
대부분 남자 동료였어요. 직원도 남자였는데 둘도 됐다가 하나였다가 했어요. 제가 여기 이사 와서도 일꾼이 둘이랑 같이했는데, 이런 다이[받침대]가 3개 있었거든요. 직원 중에는 죽은 친구도 있지만, 나랑 오래 일했던 직원 하나는 지금도 만나요. 애들 엄마도 알고 오래된 친구인데, 이 친구가 나랑 같이 한 10년 동안 있다가 IMF 때 아파트 경비를 나갔어요. 경비 나가가지고 밤에 보초 서다가 머리가 아파갔고 병원에 갔는데 그때부터 병원 생활하는 거야. 병원에 입원했다가 그랬다가. 그게 자꾸 세월이 가니까 지금은 상대방 말을 잘 못 알아들어. 몸이 좀 불편해서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생일날은 꼭 만나러 가요. 
예전에 한창 일 많았을 때 애들 엄마도 나와서 도와줬어요. 이런 문짝을 짜면은 틀 안쪽으로 옆에다가 붙이는 게 있어요. 그걸 다 해줬지. 그리고 여기다가 또 쫄 대가 들어가요. 합판 켜서. 그럼, 거기다가 못을 박아주는 걸 집사람이 나보다 잘해. 그런 일 해가면서 일꾼들 점심까지 해 줘야된단 말이에요. 받아먹는 사람은 별론데 하다못해 된장찌개 하나 끓여와도 그냥 여자는 막 힘들은 거야. 집안일도 하고, 내 일도 도와주다 보니 고생을 엄청 많이 했죠. 그때 나 몰래 많이 울었더라고요. 너무 힘들어서. 그래서 지금은 무서워. 고생한 걸 아니까 마음적으로(허허허 웃으시면서). 마누라 고생한 거 생각하면 내가 눈물이 나지. 진짜로. 그렇게 살다 보니까 가겟세는 안 내고 사네요.

그래도 당시 주문량이 엄청나게 늘었다고 했는데, 어느 정도였어요?
많았죠. 진짜 밤새워서 일을 할 정도로. 그 일을 맡으다 보면은 막 일이 몰리게 돼. 그러면 그거 일을 하려면 밤새운 적도 많아요. 그러니까 동네에서 고려목공소는 그냥 아주 떼돈 버는 걸로 소문이 났어요. 목공도 그때는 문틀 같은 거를 이렇게 홈을 다 파가지고 우리가 조립을 해요. 지금은 그냥 다 현장에서 하지만 그때는 조립을 하면은 문틀 5개만 만들어도 용달차로 한 차요. 문틀 하나 해 가지고 다섯 개 짜면 5만 원인데 그거를 짜서(만들어서) 용달에 해서 보내야 되죠. 그 전에 ‘이구이구 용달차’라는 게 있었는데, 그 이구이구 용달차를 많이 이용했죠! 당시 기사님들한테 고려목공소에서 일을 많이 줬죠. 용달차를 얼마나 불렀는지. 사실 문짝, 문틀 만들어서 벌어가지고 다 용달차 줬다니까!

사장님 주변에 좋은 분들이 항상 계시는 것 같아요. IMF 시절 전에 돈 떼먹은 사람 빼고요.(하하하 웃으면서)
IMF 전에는 아! 돈 많이 뜯겼어요. 당시에 건축업, 인테리어 상인들 계산이 아주 나빠요(고개를 이리저리 저으면서). 인테리어 하는 사람들이 지금은 뭐 재룟값 받고 물건 나갈 때 돈 받지만, 그때는 예를 들어서 100만 원짜리 공사를 하면 딱 자가용 타고 넥타이하고 인테리어 업자가 오는 거예요. 그러면 한 오십 프로도 안 줘. 한 30만 원 정도 걸고 가는 거야. 그 사람들 가고 나면 나는 열심히 작업하죠. 그때 창살을 엄청 많이 했어요. 문 만들면 가서 설치할 때까지는 업자가 자주 왔다 갔다 해요. 문 설치 다 해고 돈을 받아야 된단 말이에요. 그러면 딱 그날 업자가 ‘뭐 이틀 있다 와라 삼일 있다 와라.’ 그래요. 문 설치 완료했다고 딱 주는 거 아니에요. 그럼 그때 그걸로 거의 끝이에요. 돈 받으러 가면 없고. 돈 받으러 다니다가 지쳐가지고, 포기하는 거야. 그러다가 또 업자가 건물을 지어. 그러면 여기서 만약에 100만 원짜리인데 50만 원 받고 이 사람이 딴 데다가 또 집을 지어. 또 그러면 50만 원 이제 받아야 되니까 꼬리에 꼬리를 물고 또 일을 하는 거예요. 하여간 다른 사람은 모르겠는데, 그 전에 나는 돈을 너무 많이 떼이고 그랬어요. 우리뿐 아니라 IMF 전에는 아마 목공 여기에서는 돈 못 받은 거 많았을 거예요. 근데 IMF 후로는 이제 그런 일이 전혀 없어. 일단 선금을 받고 일하고, 제작 완료되면 잔금 받고 내보내는 방식으로 해요. ​​​​​​​

제가 듣기로는 사장님하고 제일 친하신 미추홀공예 사장님께서 IMF 시절 지난 후에 이곳에 자리 잡으셨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친하게 되셨어요?
원래 내가 미추홀공예 자리에 있을 당시에 미추홀 공예 사장(상감기법 장인)은 서구 쪽에서 엄청 큰 공장을 운영했던 사람이었더라고요. 당시 서구에 목공예사들이 많이 모여서 했더라고요. 거기서 직원도 많이 두고, 아주 잘하다가 우리 옆 가게로 이사 왔더라고요. 한 10년 됐는데, 일하는 부분에서 잘 맞고, 서로 이해하니까 친해진 것 같아요. 꼭 이 사람이랑 오후에 한 4시 정도 되면 아주 습관적으로 여기서 그냥 한 잔 먹고, 또 조금 좋을 때는 나가서 대폿집 가서 한잔하고 그래요. 주로 대폿집에 가는데 조금 되는 날은 장어집 가서 한 잔, 곱창집 가서 한 잔. 안 그러면 여기서 한 잔 마시고. 좋아요. 일하는 데 힘도 나고.


 
미추홀공예사 사장님과 에너지 충전 시간


여기 숭의 목공예마을을 걸어 다녀보면 ‘00목공소’도 있고 ‘00목공예’도 있는데 서로 다른 거죠?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네. 다르죠. 그 차이가 목공소는 지금도 실제로 보면 왜 그 공장 문 파는 데 있잖아요? 공장에서 가져다가 샤시도 팔고. 근데 그 사람들도 보면 다 간판이 목공소예요. 원래 말 그대로 창살을 만들어서 다듬어서 끼어 맞추고, 문짝도 만들고, 문틀도 만들고 하는 곳이 목공소고, 그다음에 무슨 공예 조각하고 다른 것도 만드는 곳을 목공예로 알고 있어요.


6. 문틀과 문짝이 만들어지기까지

미추홀공예 사장님과 함께 작업하신다고 하시니 저절로 여기 있는 기계를 보게 되었는데, 매우 다양한 기계가 있네요? 어떤 기계인지 설명해 주세요. 
저게 각끌 그리고 자동 대패, 기계 대패, 요게 세깡인데, 미추홀 공예사 거보다 우리는 간단한 연장이에요. 각끌은 문짝 같은 걸 짤 때 구멍을 뚫어야 되거든. 문짝 짤 때 구멍 뚫어서 맞춰야 하는 거. 이따가 저거 뚫어 갖고 촉도 내서 그 방법을 가르쳐줄 수 있어요. 세깡은 이제 자르기도 하고 켜기도 한다는 뜻이고. 말하면 톱처럼 자르고 키고 하는 세깡이고, 우리나라 말인지 저도 모르겠어요. 그리고 작은 거 요거는 기계 대패 말하자면 일반 대패는 여기 있고, 그다음에 저쪽 거는 자동 대패 그런 정도로. 이 기계들은 사용한 지 한 40년 됐어요.


 
자동대패
  
수동대패

 
이거랑 저거랑(자동대패, 수동대패) 같이 사 왔는데 한성(상표)이든가 어디 붙었을지도 몰라요. 어딘가에 붙어 있을 거예요. 40년 지났지만 나 끝날 때까지는 쓸 거예요. 근데 진짜는 기계를 내가 써야지, 다른 사람은 쓰게 하면 안 돼. 쓰는 사람이 기계 저기 소리만 들어도 알아요. 기계 막 돌아갈 때 소리만 들어도 아! 뭐가 어디가 문제가 있구나! 그렇지!!! 여기 이상이 있구나. 그래서 다른 사람은 못 쓰는 거야. 만약 목공 하는 사람이 온다고 그래도 이건 빌려주면 안 돼요. 연장을 다루는 사람들은 마찬가지. 국산이어도 여태 고장 한 번 안 났고, 만약에 소리가 조금 이상하다 그러면 그리스 넣는 구멍이 있어요. 그걸로 해결됐었는데, 지금 저쪽 자동 대패라고 그러는 건 로라가 잘 안 굴러 가가지고 한 번 가서 고쳐온 적이 있어요. 문틀과 문짝 만들 때 이 4가지 기계는 꼭 있어야 해요.


 
각끌

 
그리고 옛날 짜던 문틀하고 지금 짜는 문틀하고는 또 틀리는 게. 지금 짜는 문들은 아시나 모르겠지만 ‘하이샤시 창문’을 아시나요? 하이샤시 창문은 이렇게 왔다 갔다 하잖아요. 그때 나무 문은 이렇게 왔다 갔다 안 했었고, 이렇게 ‘ㄷ’ 자로 짜갖고 격자로 짜서 했는데 샤시문처럼 요렇게 하니까 이게 틈이 조금 작아도 괜찮고 커도 괜찮더라고요. 그전에 격자로 따는 건 작업하기 아주 불편했어. 근데 샤시한 거를 보면서 나무 문 짜는 사람들이 생각을 한 거죠. 이것도 이렇게 하면 홈 들어가는 공간이 있으니까 조금 작아도 괜찮고, 조금 깊어도 괜찮다고 응용할 수 있게 된 거예요. 

나무는 어떤 종류로 어떻게 구매하세요?
저 같은 경우는 주로 문틀, 문짝은 나왕. 그리고 이제 지금 쓰는 거는 미송. 그다음에 주로 홍송. 나왕은 우리나라 건 아니죠. 우리나라 소나무는 물러서 사용하기 어려워요. 뭐 별 나무가 다 많이 있겠지만 저는 문짝을 쭉 짜오면서 그저 나왕으로만 했어요. 주로 옛날에 도원동에서 문틀 막 짜가지고 팔고 많이 했을 때도 나왕이고요. 미송은 나왕보다 좀 고급이라 웃질이고, 그다음에 미송보다 더 웃질은 홍송이에요. 문틀 문짝 만드는 홍송 같은 거는 돈이 좀 많은 사람이 하고, 이것(미송)도 나왕보다 좀 비싸니까 이제 하고. 
나무는 동명 목재 합판(목재소)에 주문하면 여기로 배송돼요. 우리가 직접 가서 사 오는 거 아니에요. 우리가 이 사람(목재상)하고 거래한 지가 한 10년이 넘어 오랜 단골이라 조금 더 갖다주기도 해요. 지금 사장 전에는 진흥 박 사장이라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되게 좋았어요. 그 양반이랑 거래하다가 그 양반이 안 오게 돼서 그 후로 동명 사장이랑 거래했어요.
가격대는 지금은 돈 만 원대인데, 나왕이나 미송이나 거의 같아요. 되게 비싸진 거예요. 가끔 미추홀이랑 같이 가서 사 올 때도 있는데, 제가 알기에는 나무가 아주 긴 놈하고 짧은 놈하고 좀 가격이 틀려요. 긴 거는 엊그저께도 사 왔지만 8,500원이었어요. 한 사이가 30mm 각으로 3600짜리 하나가 한 사이예요.

요새는 일본식 풍의 나무 문짝을 많이 해간다면 옛날에는 저런 한옥 모양으로 많이 했나요?
그때는 한옥 문인데, 이 양식 문이 완자라고. 우리는 보통 옛날에 한식 문이고, 그것을 조금 고급으로 하려면 이 완자 식으로 했어요. 이 책에 다 나와 있는데, 요즘은 인테리어 하는 사람들이 그려 가지고 와서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거예요. 얼마 전부터 한옥 문에서 좀 변화시켜서 일본식으로 많이 하더라고요. 이렇게 쭉 길게 하는 문 형태로요. 
문짝 디자인 보는 책이 여기 있는데, 이런 거(책에 있는 무늬를 가리키면서) 어렵죠. 보통 이렇게 막 꺾어지고 하는 거는 완자라고 그랬어요. 이 완자무늬는 일본 말로 ‘요코 스지’, 이거는 일본 말로 ‘다데스지’라고 그래요. 이거는 일본 문(책에 있는 무늬를 가리키면서)인데, 한식 문이 그래도 지금도 보기가 제일 나아요.


 
제작 완료 창살


문짝 창살을 보면 무늬가 이렇게 민자로 들어가는 게 있고, 이렇게 가운데가 움푹 파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무늬 이름이 다른가요?
푹 파인 거를 등미리라고 그러는 건데. 우리도 옛날에 짰었어요(샘플을 보여주시면서). 민자보다 기계를 한 번 더 들어가야 하는 거라 그만큼 공력이 더 들죠. 예전에 송도 회장님이라 그러든가? 그 할머니네 집에 등미리가 들어간 문짝을 짜고 남은 거가 있어요.


 
등미리 기법으로 만든 창살



여기 있는 전시품을 보면 나무색 그대로인 문짝도 있고, 색이 칠해져 있는 문짝도 있는데 사장님께서 칠을 직접 하시나요?
색칠은 공장에서 해 온 거예요. 그전에 우리 거래하던 칠 공장이 여기 문학동에 있었어요. 일 많이 할 때는 칠 공장으로 많이 갔죠. 저 송도 신도시 맨 처음에 생길 때 거짓말 조금 뻥 튀겨서 우리 거래처에서 창살 문을 엄청 많이 갔어요. 진짜 한 20% 우리 거 갔을 거예요. 근데 거기 사장이 몸이 좀 아프고 불편해서 그만두고, 공장장으로 있던 사람이 저 김포 쪽으로 이사 간 거예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사람들이랑 거래를 했죠. 근데 이제는 일이 없다 보니까 거래를 안 해요. 지금도 칠하게 되면 미추홀 공예사에서 하고, 나는 투명이나 그냥 자연적인 나무색이나 하지 색깔 내고 그러는 건 못 해요. 투명 락카로 나무색이 나오면서 아주 맨질 맨질하고 그래요. 손님이 원하게 되면 그건 해요. 막 이렇게 흔들어 가지고 뿌리는 스프레이로 해요. 그리고 가운데 살 들어가는 속에는 솔로 해야죠. ​​​​​​​

가구 짤 때 제가 봤던 접착제는 본드였는데, 문틀 할 때도 같은 본드를 사용하시나요?
문틀은 구멍에 맞춰서 끼우느냐고 나사로 하는 거라 본드를 안 써요. 그런데 문짝 만들 때나 창살 만들 때, 그리고 가구 만들 때는 꼭 들어가야 돼요. 이름은 ‘505’도 있고 뭐 공수가 다 다르지만. 저는 ‘505’ 목재 본드를 써요. 우리 같이 조금씩 제작하는 거는 저 목재 본드가 꼭 들어가야 됩니다. 나중에 나무라는 건 마르게 돼 있으니까, 마르면 헐렁헐렁 해져. 그런데 이 목재 본드로 딱 해놓으면 짱짱하죠. 이런 데 붙여서 했을 때 나무까지 같이 붙어서 따로 떨어지지 않아요. 아마 저거 만든 회사는 진짜 땡큐예요(하하하).


 
가구 제작이나 문짝 짤 때 쓰는 목공 본드


그 전에 없을 때는 아교라는 게 이렇게 기다랗게 나왔어요. 그럼 그거 사다가 항고(반합)처럼 생긴 용기에 물 넣고 아교를 녹이는 거예요. 지금도 상 만드는 데 있잖아요? 옛날 상. 그 사람들은 제가 알기에는 아교를 쓰는 걸로 알고 있어요. 막 구린내도 나고 그러죠. 

작업하고 나면 톱밥이 많이 나오던데 톱밥 처리는 어떻게 하셔요?
톱밥은 그전에는 부천 쪽에서 개 기르는 데에서 가져갔어요. 개가 똥을 막 싸고 그러니까 바닥에 다 깔아줘야 된 대요. 그 사람이 가져가고, 또 닭 기르는 사람이 가져가고. 또 과수원 하는 사람이 가져가서 좋아하는데, 저게 문틀 열 개만 짜도 몇 포대가 나와요. 엄청 많이 갈아야 되니까. 지금 가져가는 양반도 태안에 감나무 과수원 한다고 그러더라고요. 감나무밭에 뿌려 놓으면 퇴비로 좋다고. 그래서 여기다 모아놓으면 가져가는 거예요. 톱밥은 태울 수 없어서 돈 내고 버려야 하는데 필요한 사람이 와서 가져가니까 고마워요. 

나무 톱밥 날리고 접착제 쓰시고 여러 가지 일을 하시는데 직업병은 따로 없으세요?
현재는 나보고 유난하다고 할지 모르지만 일이 없으면 아파요. 그래가지고 그냥 미추홀 사장도 나보고 ‘사장님은 뭐 그냥.’ 이래요. 근데 체질 자체가 일하면 하나도 안 아파요. 허리도 안 아파. 일 안 하고 그냥 있으면 허리 아프고, 몸덩이가 막 이렇게 날씬해져. 정신적으로 힘들어서 그런지.


7. 앞으로의 계획과 남기고 싶은 이야기

목공소 일을 언제까지 계속하실 계획이세요?
아니 지금 몇 살까지는 계획 없고 할 수 있을 때까지.

꼭 만들고 싶은 가구나 문틀 이런 게 있으신지? 아니면 앞으로 이거만큼은 내가 하나로 내 작품으로 남겨놓고 싶다 하는 게 있으실까요?
그냥 뭐. 지금은 다른 거는 그냥 내가 지금 하고 있는 문틀, 문짝만 잘하고. 그 외에도 다른 것도 나오잖아요. 지금 나오는 거는 거의 다 미추홀이랑 같이하고. 내가 다 할 때까지 문틀 문짝은 변함이 없이 그냥 하는 걸로 생각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특별하게 없지만. 내가 할 수 있을 때까지 일을 하겠다는 말. 지금 세월도 그렇고 다른 걸로 바꾸고 싶은 그런 것도 없고. 나 지금 하던 대로 문틀 문짝을 할 수 있을 때까지 계속하려고요. 가끔 우리 손자가 오면 “장인 할아버지”라고 불러요. 그 녀석이 언제까지 와서 그런 말을 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손자한테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아주 자랑스러워요. ​​​​​​​

정말 ‘장인 할아버지’ 맞으십니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행복한 장인 할아버지’요. 긴 시간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하는 일을 기록해주신다니 제가 더 많이 감사합니다.

 
시민기록일지
• 면담자 : 정지선 (면담지원: 허은영)
• 면담일시 : 2022.9.5. 16시 / 2022.9.27. 19시
• 면담장소 : 고려목공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