味미추홀 : 바다를 담다
[홍어] 향취(香臭)와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 홍어 접시를 대하며
관리자
게시일 2021.10.21  | 최종수정일 2022.03.29

 


가을이 되면 옛 공설운동장 길을 따라 걷기를 즐긴다. 죽 늘어선 은행나무들이 누런 단풍을 떨구며 황금의 길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아무리 빼어난 도로일지라도 가을 한 철 은행이 뿌려주는 이 황금의 길에는 비길 수 없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을에 흠뻑 빠져들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나는 이 길보다 더욱 사랑하는 것이 있다.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 떨어진 은행과 은행잎이 짓이겨지며 나는 자극적인 냄새. 사람들은 그것을 악취라고 여기지만, 이 냄새는 벌레를 타지 않기 위해 은행나무가 자구책으로 만든 것이라니, 이것은 자신과 자식의 일신을 깨끗하게 보존하기 위한 방책인 셈이다. 나는 가을비가 내리는 날이면, 과연 이 은행과 같이 독특한 자신만의 향기를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을지 생각에 잠긴다.

음식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어떤 음식의 개성을 떠올릴 때 맛보다 더 강렬하게 작용하는 것이 그 음식의 향취이다. 집집마다 다른 묵은 김치의 냄새가 코로 물큰 들어올 적이면, 우리는 남의 집 김치 냄새가 때로는 달갑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다. 하지만 할머니나 어머니가 만든 ‘우리집’ 묵은지의 냄새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친근하고 눅지근히 마음을 녹인다. 적과 나를 구분하는 짐승 시절로부터 내려온 인간의 후각은 음식에서도 이렇게 강렬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그러니 메주 뜨는 냄새가 고약하다고 한들 우리가 한식구라는 안도와 사랑을 머금고 있는 것이요, 상투적이지만 고향집 구석 메주가 걸려있는 장면에 우리는 익숙하다.

그런데 아마 이런 은행과도 같이 독특하고 개성 넘치는 향취, 그리고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강렬한 개성을 뿜어내는 음식이 있다. 바로 ‘홍어’가 그것이다. 오늘 우리가 찾아간 곳은 그중에서도 호불호가 가장 극명하게 갈리는 전라도식 가게였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과연’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삭힌 홍어 냄새가 와락 손님을 반겨주었다. 들어가는 입구는 골목 한편에 수줍게 숨어있지만, 단박에 우리를 압도하는 냄새로 “내가 진짜배기”라는 정체를 감히 숨기지 않았다.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면 입구에서 꽁무니를 빼게 할 기세였다.

주인아주머니의 내력을 여쭤보니 역시 전라남도 영산포가 고향이라고 하신 다. 전라도 사람이라고 모두 홍어를 삭혀서 먹는 것도 아니고, 삭혀 먹더라도 그 정도가 제각각이다. 그중에서도 유독 영산포나 나주 지역에서는 코가 콱 쏘일 정도로, 혹은 속칭 입천장이 벗겨질 정도로 삭혀 먹는 것으로 알고 있다. 주인 말씀이 어려서 먹었던 그 입맛으로 음식을 만든다고 하였는데, 서울에서 살다 이제는 인천에 터전을 잡고 홍탁집을 연 것이란다. 거개가 인천 사람의 내력에는 이런 이주사(移住史)가 어려 있으니, 이곳을 찾는 분들도 유난히 전라도가 고향인 사람들이 많다고 하셨다. 그러니 이 삭힌 홍어의 독특한 냄새와 입안에 쨍하며 도는 맛을 찾는 일이란, 인천살이 중에 잠시 놓고 있었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한 발로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전라도 출신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홍어를 즐길 수 있다. 비록 예전 영산포에서 먹던 그런 맛이 잘 나지 않는다고 주인이 말씀하셔도, 어려서부터 입맛으로 익힌 그 기술이 어디 가겠는가.

다만 주인은 홍어라는 짐승에 대하여 많은 애정을 두고 있기에, 그 가치를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아 속이 많이 상한 모양이었다. 국산 홍어의 경우 값이 제법 나가는 물건임에도 가끔 손님들 중 가격을 두고 볼멘소리를 하는 모양이다. 이 주의 내력이 있는 음식들이 대부분 이러한 괄시에 속절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불과 며칠 전 우연히 강진 답사에 들러 먹은 홍어는 어여쁜 청자 접시에 올려 내주었다. 그곳 사람들에게는 귀한 음식이기에 걸맞은 대접을 받는 것이다. 하지만 인천에서 같은 대접을 받을 수는 없는 노릇인지라, 음식도 타향살이에 그 처지가 야위고 만 것이다.

그래서 오늘 즐긴 것이 바로 인천에서 먹는 영산포 홍탁이었다. 말이 우습다. 전라도식으로 삭혀 엉뚱한 인천에서 먹는 - 만드는 방식, 먹는 곳이 모두 다른 이색적인 내력의 음식인 셈이다. 이주의 역사가 깊은 인천에서는 이렇게 과거 고향 고유의 향취를 찾는 음식이 한 축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일단 홍어가 잡혀 올라오면 그 자리에서 업자에 의해 한 번 삭히고, 이곳에 와서 주인이 다시 한 번 삭혀 본고장의 강도를 유지하려 한단다. 항아리에 막걸리를 붓고 짚을 쌓은 자리에 홍어를 넣어 2차 발효에 들어간다. 나는 문득 이 이야기를 들으며, 정체성이란 지조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이 알아주지 않을지라도, 그리고 재료가 예전 같지 않은 한계가 있을지라도 이 음식의 정체성을 지키려 뒷일과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니, 본연의 맛과 차이가 난다고 한들, 그 차이가 바로 지조를 지키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홍어를 다루는 이야기를 듣는 사이에 접시가 상에 오르며 홍어는 그 향취로써 자신의 출신을 유감없이 드러낸다. 정작 우리 중 고향이 전라도 출신인 사람은 없었지만, 김이 펑펑 나는 돼지 고기와 시큼한 묵은지에 얹은 홍어를 우물거리며 주인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밖에 없었다. 삼합이 아니라, 주인의 이야기까지 얹어 사합(四合)을 즐겼던 것 이다. 우리는 홍어와 관련된 각자의 추억을 풀며 나름의 사합을 즐기기 시작하였다. 처음 동기가 호기로 안주를 사겠다고 홍어집에 들어갔다가, 그 강렬한 향에 졸도할뻔한 이야기, 그리고 다음 날 그 맛이 입에 삼삼하여 다시 찾아갔다는 경험담은 홍어를 즐기는 사람이면 누구나 수긍할 공통의 경험이다. 혹은 과거 송도를 가는 길에 조갯고개까지 바닷물이 넘실거렸고, 그 길목으로 죽 늘어선 매콤하고 시원한 홍어 무침에 대한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인천의 홍어집이라면 과거 그 장소를 떠올리기 마련인데, 이제는 시절이 바뀌어 그 자리도 많이 위축이 되었다고 한다. 하긴 요즘은 이런 오래된 가게의 내력 있는 음식이라기보다, 소위 야식으로 찾는 음식이 되어가면서 지나치게 달게 변해버렸으니, 배로 단맛을 내던 그런 청량한 음식이 더는 아닌 셈이다. 이 역시 입맛의 변화로 인해 음식의 처지가 도리어 수척해진 꼴이다.

한편 남귤북지(南橘北枳), 환경이 변하면 그 모양과 본질도 변한다고, 충청도의 간재미 무침이 함흥냉면의 고명으로 올라가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기실 명태식해가 꾸미로 올라가야 하는데, 함흥냉면이 인천으로 들어오자 충청도 출신의 사람들이 구할 수 없는 명태식해 대신 충청도식 간재미 무침을 올린 것이다. 인천식 회냉면이란, 함흥과 충청이 섞여 그런 독특한 음식으로 진화하며, 이북 출신의 입맛과 충청 출신의 입맛을 교묘히 사로잡았다. 이 역시 복잡한 인구구성을 가진 인천에서 벌어질 수 있는 진풍경이라는 탁견에 모두 고개를 즐겁게 주억거렸다. 

그러던 와중 주인이 먹어보라며, 홍어의 애를 꺼내 보였다. 족히 두 근은 되어 보이는 애가 싱싱한 선홍빛을 띄고 있었다. 저 ‘애’라는 물건은 우리에게 각별한 감정을 일으킨다. 우리는 마음이 아픈 일이 있을 적에 “애가 끊길 거 같다”고 이야기한다. 이때 애란 창자를 말하니, 창자가 끊어지는 것, ‘단장(斷腸)의 미아리 고개’가 한국전쟁 당시 생이별의 사연을 담은 것마냥, 애는 우리식 슬픔의 가장 강렬한 표현에 쓰인다. 한편 “애간장이 녹는다”는 말도 있다. 이때 애란, 간장을 의미하는데 쉽게 변질되어 녹아버리는 저 홍어의 간처럼, 마음을 모두 소진해버릴 만한 처지를 빗대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홍어의 애는 녹지 않고 싱싱한 자태를 뽐내고 있으니, 주인이 자부심을 가질만하다. 기실 이런 자부심이나 긍지를 가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간도 쓸개도 빠진 놈”이라는 비아냥처럼 간이란 때로는 양심을 대표하는 증좌로 쓰이기 때문이고, 이 양심이란 사람이 살면서 지키기 힘든 덕목이기 때문이다. 가령 순결한 청년 윤동주는 일제강점기 시절,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 싶어 이렇게 ‘간’을 노래한 적이 있다.

 

바닷가 햇빛 바른 위에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

코카사스 산중에서 도망해온 토끼처럼
둘러리를 빙빙 돌며 간을 지키자
(윤동주, 「간肝」 중에서)

 

<별주부전>에 토끼가 헛된 욕심으로 간을 내줄뻔한 사연을 재밌게 비틀어 쓴 윤동주의 작품이다. 그만큼 양심이란 지키기 어려운 것이기에, 윤동주는 금세 상하기 쉬운 간에 빗대어 “습한 간을 펴서 말리우자”라고 노래한 것이다. 윤동주는 양심과 지조의 상징인 저 간을 젊은 시절의 목숨과 맞바꾸어 우리 마음에 영원한 청년으로 남았다. 나는 주인이 꺼낸 싱싱한 홍어의 간을 보며 그 순결한 청년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홍어의 간이야 말로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삭힌 냄새가 심하게 코를 찌르기에, 오로지 신선한 상태에서만 그 진면모를 맛보여주기 때문이다. 주인이 홍어에 대한 지조와 정성이 없다면 저 홍어의 간을 지켜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음식은 대견한 음식이고 쉬 맛볼 수 없는 값진 것이다.

비단 간만이 아니라, 홍어가 가진 특유의 암모니아 냄새도 알고 보면 이것과 유사한 사연을 품고 있다. 홍어라는 짐승은 몸에 상처가 나면 살이 썩지 말라고 강한 암모니아성 물질을 뿜어내는데, 제 몸이 사람에게 잡혀 죽임을 당하고서도 자신의 육신만큼은 썩지 않도록 더욱 강렬한 향을 몸에 두른 것이다. “홍어먹고 탈 나는 사람 없다”라는 말의 기원은 여기에 연유한 것이다. 이것은 흡사 은행나무가 벌레로부터 일신을 지키기 위해 독특한 향취를 발산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니, 은행과 홍어는 지조와 의젓함에서는 동류인 셈이다. 결국 오늘 우리가 접한 홍어의 살점과 간이란, 오히려 쉽게 양심을 저버리고 일신을 망칠 수도 있는 세파에 특유의 개성 넘치는 향취로 삶의 방편을 알려주는 음식이라는 역설도 가능할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나는 후배를 데리고 또다시 이 가게를 찾아, 이 나름의 홍어가 지닌 미덕을 예찬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누구나 힘들고 어려운 시기이기에, 홍탁이 주는 지혜와 위로가 각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술자리를 파할 쯤되니, 제법 여러 점의 홍어 살점이 남았다. 주인에게 아까우니 싸달라고 하고, 취기에 오래 걸을 수 없어 택시를 잡아 탔다. 기사가 넌지시 차창을 내리는 것을 보니, 악취가 차안에 가득 침노한 모양이다. 그리고 순간 주인이 하소연 하였던 사연이 내 뇌리를 강타하였다.

 

“어디 가서 사람구실 하고 살지 못해요. 이 음식 만드려면요.
온통 냄새가 몸에 배는 통에 매일 사우나를 해도 가시지를 않으니까요.
결혼식장은 커녕, 택시만 타도 내리라고 아우성일 때도 있어요.

 

마음 시큰한 사연이 택시 안에 있었던 내 가슴에 실시간으로 차오르고 있었다. 모두가 개성을 잃고 퓨전이니 접목이니 떠들며 정체불명의 음식으로 우리 입맛을 쉽게 길들이는 이때, 주인이 홍어의 향취를 포기하지 못한 채 꼭 붙들고 살아왔을 삶이란 어떠하였을까. 그러니 개성과 독특함과, 나만의 오롯함과, 지조와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 고집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은행나무처럼, 혹은 홍어처럼, 혹은 홍어를 다루는 주인의 인생처럼, 본색(本色)을 온몸으로 끌어안고 사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 비 오는 가을날에나 빠질 수 있었던 감상을 홍어 한 접시가 또 한 번 일깨워주는 밤이었다.



홍어삼합
삭힌 홍어는 호불호가 분명하다. 그러나 잘 삶아진 수육과 묵은 김치와 함께하는 홍어의 맛은 참으로 별난 맛이다. 여기에 홍어 부위 중에서도 귀한 대접을 받는 싱싱한 홍어애와 홍어코 역시 쉽게 맛볼 수 있는 맛은 아니다. 이런 홍어 맛은 물론집에 돌아가서는 속옷까지 다 벗어서 빨리 빨래통에 집어 넣어야 하는 수고를 감내할만하다.





소주 한 박스를 부르는 맛
홍어탕에 간재미무침 그리고 홍어삼합의 맛을 돋우어주는 갓김치까지 무엇하나 빠지지 않는 조연이면서 주연처럼 행세하는 맛들이 입안에서 노닌다. 홍어탕 한 솥에 취하지 않고 박스로 먹던 소주까지 소환하면서 호사를 누렸다.

 

- 기록 : 학산 미담식회  (글 : 고재봉 / 사진 : 김상태, 천영기)
- 답사장소 : 흑산도 홍탁 / 답 사 일 : 2021년 6월 8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