味미추홀 : 바다를 담다
[병어] 대청 앞바다가 만들어낸 집밥의 향수
관리자
게시일 2021.11.15  | 최종수정일 2022.03.29

  어느 고장이나 토박이들의 입맛을 대표하는 음식이 있기 마련이라, 음식만 보아도 그 지역의 자연과 물산 그리고 거기서 나고 자란 사람들의 인심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삼면을 접한 바다가 제각각이라, 같은 어종도 지역마다 다루는 풍습이 다르고 해먹는 음식도 천양지차이다. 그러기에 바다를 끼고 있는 고장들의 그 특출난 지역색은 물에서 나는 음식을 통해 돌출되곤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를 가지고 있는 인천은 이러한 사정에서 예외이다. ‘지역색이 없는 것이 지역색’이라고 말할 만큼 인천은 다른 지역과 구분되는 독특한 음식이나 대표되는 먹을거리가 유독 적은 편이다. 이는 바로 인천이 1880년대 이래로 대한민국의 관문 역할을 하였던, 제2의 항구도시라는데 연원을 찾아야겠다. 우리나라가 역사적 부침(浮沈)을 겪을 때마다 인천에는 각 지역,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몰려들어 생활의 터전을 잡아 왔다.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 때로는 피난으로 내려온 사람, 심지어는 일본이나 중국 땅에서 찾아온 외국인까지 서로 다른 사정으로 모여 겯고틀며 살아온 지역이 인천이다. 그러니 토박이의 음식이 성한 것이 아니라, 다른 고장의 음식들이 제각기 혼융되어 ‘인천식’ 음식이 되어버린 것이다. 까닭에 인천의 밥상에는 저 남도의 음식부터 충청과 기전(畿甸), 그리고 이북의 음식들이 고루 마주하여 깔리는 독특한 모습을 보여준다. 음식을 통해 인천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먼 과거의 고향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제는 인천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게다가 이마저도 고향의 방식이 아니라, 이주와 정착의 과정에서 겪은 맵짠 인생의 경험으로 간을 맞추고, 때로는 전혀 다른 지역의 음식들이 어우러지는 통에 인천의 입맛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복잡다단한 사연이 녹아 있다.

  우리는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모여, 이제 진짜 인천다움이란 무엇인가를 인천사람들의 입맛을 통해 확인해보기로 하였다. 인천 미추홀구에 깔려있는 가지각색의 바다 음식을 통해 사람들은 어떻게 인천사람이 되었고, 어쩌다 이러한 음식을 만들어 먹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였다. 너른 바다를 앞에 두고 있지만 인천 바다는 인천만의 바다가 아닌 셈이다. 저마다 마음에 품고 온 고향의 바다가 모여있기에 사연으로 가득 차 있는 ‘새로운 고향’의 맛이 짙게 배어 넘실거리는 삶의 복판인 셈이다.

  우리가 처음 찾아간 곳은, 인천 미추홀구청 앞에 있는 한 음식점이었다. 대청도에서 나고 자란 양주(兩主)가 집밥 같은 음식을 한다기에, 이러한 단란한 음식이라면 역시 첫 모임의 분위기를 도탑게 하기에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집밥 같은 음식을 내주는 식당이라는 말처럼 이상한 말도 없겠다. 그리고 이런 가게로 사람들의 발길이 멈춘다는 사실만으로도, 허기와 주림은 단순히 위장이 보채는 일만이 아니라는 진실을 우리는 알게 된다. 먹고 사는 일이야 늘 가파른 고갯길이라지만, 가지각색의 음식이 넘쳐나는 요즘 시대에 오히려 채우기 힘든 맛이 집밥이다. 그러니 이런 식당을 찾는 일은 위장의 허기와 마음의 허기를 함께 달래기 위한 끌림 때문이다. 삼시세끼 주림이야 몸이 알아서 하는 일이라지만, 집밥을 찾아 음식점 앞에 서성이는 이 기현상은 시절과 세월이 우리 마음에 새겨놓은 주림이라 더욱 절실하다.

  그래서 먹게 된 음식이 무엇이냐. 병어조림과 우럭구이와 갑오징어탕이었다. 기실 집밥이라 말하기에는 화려한 재료일 수도 있지만, 이 재료들이 각별하다고 생각하는 사실 자체가 변해버린 세월을 가늠케 한다. 나에게는 병어라는 생선이 특히 그렇다. 80년대 90년대 초반까지만 하여도 병어라는 놈은 어물전 생선 축에도 끼기 어려운 잡어 중에 잡어였다. 병어의 본디 이름인 ‘병치’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치’자 붙는 생선치고 대우받는 물건은 없었다. 그래 병치라는 놈을 대접해준답시고 ‘병어’라 떡 하니 고기 어(魚)자를 붙여준 것이니 몸값에 비해 얻은 과분한 이름이 오히려 서민의 식재료였다는 타고난 내력을 강하게 뒷받침해 주는 셈이다. 고등어 큰 손을 사거나 하면 덤으로 끼워주던 것을 시장통에 살면서 보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른 손바닥만 한 것들을 소금에 절여 큼지막한 대야에 쌓아 놓고 시장 할머니들이 표면이 마르지 말라고 물을 뿌리다 보면 뉘엿뉘엿 여름해가 떨어지면서 병어의 빛깔도 시들어 갔다. 흡사 박재삼의 시 「추억에서」에 나오는 ‘울엄매’같은 마음이 그러했을 것이다. 생선 장사를 하는 어머니가 저녁무렵 남은 생선을 바라보며 자식 생각에 서러움이 차오르는 그런 사연은 예전 여름 어물전에 담긴 작은 소묘이다. 특히나 병어와 같은 여름 생선은 해가 떨어지는 일만큼 야속한 일이 없었다. 겨울 생선이야 한데서 추위를 견디는 일이 고단하다 하여도 신선도를 유지하는 일이 그래도 괜찮았지만, 과거 여름 생선은 소금에 절여 파는 것이 대부분이라 해가 떨어지면 떨이로 팔기 일쑤였다. 그 떨이도 되지 못하면, 박재삼이 그렇게 시에서 애달프게 찾는 ‘울엄매’처럼 물이 가버린 생선 눈깔들이 닿지 못하는 은전과 도무지 펴질 요량이 없는 생계의 막막함으로 다가왔을 터이다. 하지만 값싸고 시장 어디에도 무진장으로 널려있는 생선이 병어였던 만큼, 이 짐승은 서민들의 여름 식탁에 늘 가까이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힘들 것 이다. 뼈째 썰어 막회로 소주 안주가 되기도 하고, 조리거나 쪄서 밥반찬을 해 먹기도 했다. 살이 희고 달기 때문에 ‘얕은맛’이 있는 축에서도 갈치와 함께 대표되는 생선이 아닐까 한다. 하긴 요즘은 ‘얕은맛’이라는 표현 자체가 사라져가니 얕은맛이라는 미감(味感)도 사람들의 입맛에서 사라져 가는지도 모르겠다. 마늘을 먹고 ‘아리다’는 말을 못하고 엉뚱하게 ‘맵다’라고 말을 하는 시절이니, 게의 내장이 지닌 달보드레함이나, 조개가 뿜어내는 배치근함 따위의 맛은 이제 사라져가는 맛이다. 음식은 남아있지만,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척박하여 이제 우리 입맛에는 맵고, 달고, 짠 것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서 병어조림은 졸지에 음식점에서 무려 ‘집밥’의 반열에 오르는 신분 상승을 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얕은맛이 주는 정다움이야말로 고급스러운 재료가 아닐지라도 밥 한술 잘 먹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해주니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제 병어는 몸값 자체가 높아져서 더 이상 서민의 음식이라 부르기 어렵게 되어버렸다. 옹진수협에서 일을 하셨다는 남자 사장님께 여쭤보니, 이제 병어도 중국으로 수출이 된단다. 몇 년 전만 하여도 대청 앞바다에서 무분별하게 어족 자원을 남획해가던 중국 어선과 해경이 거친 무기를 들고 대치하는 장면을 볼 수 있었는데 이제 그나마도 사정이 달라졌다고 한다. 쾌속정을 타고 온 중국 어부들이 해경을 발견하면, 배에 붙어있는 모든 창구멍을 막아버리고 전속력을 다해 북방한계선으로 도주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해경이 이들을 잡을 묘수가 없다. 아마도 남북의 바다가 하나로 연결되는 날이 오지 않는 이상, 병어 역시 오르는 값만 있지, 내리는 값은 없을 것이다. 서민의 생선값이 오르는 사연치고는 서글픈 우리 자화상이 배면(背面)에 깔려 더욱 마음이 아릴 수밖에 없다.

  어떻든 이 오월 알배기 병어로부터 갑오징어, 그리고 우럭은 대청 앞바다에서 안강망식 조어법으로 잡혀 들어온 것이란다. 병어를 조려주기도 하지만 그날그날 조업 상황에 따라 좋은 물건으로 음식을 해주신다고 한다. 안강망 조업 이야기가 나와서 물어봤더니 역시 선대 고향이 황해도라고 주인이 말하신다. 대청 앞바다의 세찬 조류를 이용하여 하루 두 번 자루그물로 온갖 종류의 물고기를 잡는 방식인데, 어족 자원 보호차원에서 더 이상 정부가 허가를 내주는 방식이 아니다. 그러니 안강망으로 조업을 한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여기서 조업을 하였다는 말이 되고, 또한 굳이 이북 황해도와 가까운 대청도에서 오랫동안 터전을 잡을 수밖에 없었던 사연도 자연 알게 된다. 인천에는 유독 황해도 실향민이 많은데, 까닭은 고향이 지척에 있기 때문이다. 대청도는 눈에는 보이지만 닿을 수 없는 땅이 바다 건너로 바로 보인다. 여자 사장님 역시 황해도 출신의 할머니께 음식을 배웠다고 하는데, 어머니가 아니라 할머니에게 음식을 배웠다는 말 한 마디에 신산한 삶의 내력을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 대청에서 나고 자란 두 분이 이제는 미추홀구청 앞에서 선대에 대물림 받은 방식으로 잡은 생선과, 또한 선대에 배운 방식으로 황해도 음식을 해주시는 것이다. 그러니 이는 집밥 중에서도 집밥이라는 생각이 들을 수밖에 없었다. 가 닿을 수 없는 집을 음식으로 구현해낸 것이니 가위 집밥이라는 말이 아니 어울릴 수 없는 것이다. 한편 병어만큼이나 요즘 우리 식탁으로부터 멀어져버린 것이 주인이 끓여주신 갑오징어이다. 예전 오징어가 금값이 되어 짬뽕값이 오를 수밖에 없다는 기사를 읽고 기가 찬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중국집 짬뽕에 오징어가 들어가지 않은 것이 이미 여러 해전부터의 일이기 때문이다. 대신 요즘 짬뽕에는 페루산 대왕오징어 따위가 들어간다. 그러니 들어가지도 않는 재료를 들어 가격 인상을 이야기하는 사정이,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만 야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여하튼 오징어 몸값이 오르는 통에 이 갑오징어는 더욱 귀한 물건이 되었다. 함께 배석한 선생 말씀으로는 과거 인천 중국집에서 짬뽕을 시키면, 갑오징어를 넣어줬다고 한다. 하긴 동해에서 잡히는 일반 오징어보다야 서해에서 잡히는 갑오징어를 넣어주는 것이 인천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순리일 법도 하다. 우스꽝스러운 짤막한 다리와 두툼한 몸통을 가진 이 원시 동물 같은 생명체는 몸통에 자기 몸만 한 유선형 뼈를 품고 있다. 예전 병원에 쉽게 가지 못하던 시절에는 이 뼈를 갈아서 상처 난 자리를 지혈하였는데, 그러니 식욕과 구급을 동시에 챙겨주는 고마운 짐승이 갑오징어였다.

  한편 이 오징어 이야기를 하면, 이름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를 전공하시는 선생 말씀으로는 오징어의 원래 이름이 오적어(烏賊魚)였다고 한다. 까마귀 오자에 도적 적자가 붙은 생선이라니, 꽤나 흉한 이름이다 싶지만, 기실은 까마귀가 훔쳐먹을 만큼 맛있는 생선이라는 유래를 지녔단다. 그러니 까마귀가 채간다는 말만 들어도, 과거나 지금이나 오징어는 채반이나 줄에 널어 건조시켜 먹는 음식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가장 크고 먹음직한 놈들은 까마귀 몫으로 갔을 터이니, 오징어가 품은 맛은 엉뚱하게도 까마귀를 미워하는 저 흉한 이름이 잘 대변해주는 것이겠다. 하지만 오늘 우리 밥상에 오른 것은 물오징어였다. 그것을 특별한 양념 없이 슴슴하게 끓인 것인데 찬거리가 아니라 순전히 안주 소용이었다. 물오징어국을 먹어본 지도 오래되었으니, 갑오징어야 더할 나위 없이 정말 흔하던 것에서 이제는 더욱 멀어져 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오늘 먹은 집밥 같은 음식이란, 아이러니컬하게도 이제는 멀어져 버린 음식이라는 공통의 분모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병어도 그렇고 갑오징어도 그렇고, 흔한 것이 멀어져서 특미가 되어버리는 시절. 고기가 아쉽던 시절 푸성귀의 단출함을 달래주기 위해 조려주었던 찬거리들이 이제는 이렇게 집밥으로 다시 소환되는 시절을 우리는 걷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또 하나 정겨운 음식으로 술잔을 기울였다. 우럭 구이. 보통 우럭이라 하면 회로 썰어 먹거나, 대가리가 크고 뼈가 굵어 탕맛이 좋다 하여 매운탕을 끓여 먹는다. 뼈와 내장으로부터 가득 배어나오는 기름이 탕의 일미를 담당하기에 인기가 높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한 마리씩 생물을 사다가 먹는 방법이고, 어업이 생업인 섬사람들은 오히려 염장을 하여 말려 먹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야말로 생활 음식으로서 섬에서는 이러한 반건조 생선들이 고안된 것인데, 이렇게 말린 것을 보통은 찌거나 구워 먹는다. 섬사람들에게는 염장 우럭을 쪄먹는 일이 더 흔한 일이지만, 지금 일반의 입맛으로는 그 냄새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것도 멀어져 버린 취향 중에 하나일 것이다. 까닭에 오늘 우리가 먹은 우럭도 쪄서 먹는 것이 아닌, 구워 먹는 것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전혀 짜지 않고 간기가 없었다. 수명이 늘면서 나트륨의 함량을 걱정하고 이제는 간기 있는 것은 미식의 반열에 조차 오르지 못하는 유행 탓도 한몫하리라는 생각이 든다. 기실 이 염장 우럭은 보존을 겸한 찬거리인지라 무척 짰었는데 유수 같은 시간에 우럭의 소금기도 썰물처럼 씻겨나간 셈이다. 물론 이 우럭이 예전만큼 짰다면 아마도 살점을 뜨자마자 얼굴을 찌푸렸을 것이다. 하지만 응당 짜야하는 그 고유의 개성이 사라지는 것은 한편 아쉬운 일이기도 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아마 젓갈일 것이다. 요즘은 오징어젓조차도 소금이 아닌 물엿에 절이는 까닭에 젓갈이라는 고유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젓갈이 삭아 만드는 배치근한 맛도 느끼기 힘들다. 아마도 이 집 주인 분들은 우리가 먹는 우럭보다는 조금 더 간기가 있는 것을 드시겠지 싶었다.

  첫 모임으로 대청도의 생선과 황해도 실향의 사연을 품고 있는 음식을 먹을 수 있어서 반가웠다. 어머니가 아니라 할머니 밑에서 자란 내게, 할머니의 고향인 황해도 음식은 유년의 기억이 담긴 엄마 젖과도 같은 음식이다. 더군다나 여자 사장님 역시 어머니가 아닌 할머니 어깨 너머로 음식을 배웠다고 하니, 그 사연에 더욱 마음이 아니 갈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늦도록 정다운 분들과 술잔을 기울이면서도, 아련히 감도는 유년 시절 집밥의 향수에 오랜만에 소년처럼 웃을 수 있는 초여름밤이었다.

 




병어조림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소리를 따라퍼지는 병어조림 냄새만 맡아도 입안에 침이 하나 가득 고인다. 국물이 자작해지고 병어가 익으면 한쪽 살을 떠서 숟갈 가득 백반에 올려 입을 한껏 벌려 넣으면 졸였음에도 불구하고 담백한 맛에 놀란다. 사실 생선조림은 그 비릿함도 즐기는 것이지만 담백한 맛이 으뜸일 것 같다. 그래서인지 자연 양념을 듬뿍 머금은 조림무로 손이 가는 것일 게다. 저절로 포식을 부르는 맛이다.







갑오징어국, 꼬막비빔밥, 우럭구이 한상차림
갑오징어국은 처음 먹는다. 보통 숙회로 먹는데 예전에는 중국집 짬뽕에 당연히 갑오징어가 들어갔었다. 오늘 제대로 싱싱한 갑오징어국을 먹었다. 육질이 질기지 않고 탱글탱글하며 오징어와 다르게 푸짐한느낌에 씹으면씹을수록 특유의 단맛이 난다.
탱글탱글한 꼬막의 식감과 양념장이 어울려 밥도둑이 따로 없다. 꼬막의 양도 푸짐해 반찬과 함께 먹다 보면 함포고복(含哺鼓腹)하는 즐거움을 자연히 누리게 된다. 우럭구이가 나오니 노릇노릇 적당하게 탄색깔과 함께 훅 들어오는 구수한 내음, 그리고 한입 베어 먹을 때의 부드러운 속살의 느낌. 손으로 쭉 찢어 뼈를 발라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 기록 : 학산 미담식회  (글 : 고재봉 / 사진 : 김상태, 천영기)
- 답사장소 : 엄지식당 / 답 사 일 : 2021년 6월 2일(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