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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한 칸 한 칸 넓혀간 50년의 기록
최지은
게시일 2022.02.10  | 최종수정일 2022.03.29

한 칸 한 칸 넓혀간 50년의 기록

 
구 술 자 : 원웅(1969년생)
면 담 일 : 2021년 7월 9일(금)
면 담 자 : 고재봉
면담장소 : 용인정

가게 내력
용인정이 아주 오래된 가게잖아요. 몇 년 정도 된 거죠?
74년도에 다른 사업이 여의치 않아서 작은 식당 하나를 어머니랑 두 분이 여셨는데, 아버지 고향이 용인이시라 고향 이름을 따서 한 2년 정도 용인분식으로 시작하셨어요. 장사를 2~3년 정도 하시다가 가게가 커졌어요. 불고기나 갈비나 이런 걸 팔았는데 커지면서 그때는 식당이 크면 무슨 무슨 정이라고 이름을 지었어요. 그래서 용인정이라고 하시고, 한 10여 년 정도 운영을 하시다가 이 자리에 온 게 82년도였어요. 그 연도까지 다 따지면 대략 한 49년, 50여 년?

 

아, 굉장히 오래됐네요. 그러면 처음에는 분식이라고 이름을 지으셨다가, 나중에 바꾸셨군요.
그렇게 해서 이 자리에 왔을 때는 식당이 커진 듯하다가 좀 안 됐어요. 그래서 거의 들어오는 입구 아래층만 임대를 얻어서 식당을 다시 이쪽으로 와서 오픈하셨는데 그때는 해물전골이라고 각종 어패류 이렇게 모으고 끓이는 장사를 했죠. 메뉴를 해물전골 하나만 가지고 장사하셨어요.

80년대에요?
네, 82~84년도 이때. 그때 장사가 잘됐어요. 사실 용인정이 해산물 음식으로 알려진 거는 그때부터 알려지다가 한 10여 년 정도 해물전골을 하시다가, 해물전골이라는 게 계절에 따른 부침이 많아요. 그리고 또 주로 어패류인데, 어패류는 한 번 여름에 비브리오라든가, 이런 것. 그러다 보니까 메뉴를 하나 더 추가하신 거죠. 해물전골에다가 어떤 메뉴를 할까 고민하다가 그때만 해도 생태가 많았는데 국내산도 있고 일본산도 있고, 많이 수급이 잘 되고, 또 각종 어패류는 준비하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데 비해서 생선은 적게 걸리더라고요. 해물전골하고 생태 전골을 같이 시작했는데 점점 생태 전골 반응이 좋아지니까 그냥 자연스럽게 한 10여 년 생태 전골 위주로만 식당이 운영하다가 그때 동일본 지진이 2000년 즈음 났었어요. 일본산 수입이 거의 뚝 떨어지게 되고 손님들도 일본산 생선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으시니까 생태 전골을 하긴 하면서도 생대구 메뉴를 올린 거죠. 그러다가 최근 4~5년 전부터는 민어까지. 그래서 지금 굳이 이렇게 기준점을 잡는다면 자연산 생선찌개, 자연산 선어회 이렇게 메뉴를 잡고 있습니다.

저도 오면 거의 대구탕을 먹었던 걸로 기억해요.
요즘 대구탕은 많이 비싸요. 아무래도 대구는 국내산이고, 생태는 국내산이 안 나와서 오츠크해라고 러시아하고, 일본에서만 명태를 잡는데, 러시아는 무조건 다 동태고, 일본은 생태에요.

 


민어
그러면 민어는 어디서 가져오시나요?
민어는 저 노량진에서 오는데, 겨울에는 추자도 아래, 제주도 아래 바다고 요즘은 서해까지 올라오잖아요. 요즘은 목포나 전라도 쪽. 민어가 노량진으로 와서 저희 집으로 와요.

제가 예전에 여기서 대구탕을 먹으면서 술 마시고 그러면 할머니 한 분께서 두부랑 김치랑 가져다가 술안주 하라고 주셨던 기억이 나요.
어머니일 수도 있고, 여기 계신 다른 분일 수도 있어요.

아마 어머니이신 것 같아요.
저희 가게 아주머니들이 다 2~30년 정도 되셨어요.

그때는 엄청 연세 높으신 할머니께서 주셨던 걸로 기억해요.
할머니는 아마 어머니이실 텐데. 또, 그렇게 할머니는 아니에요.

정정하신가요?
네. 지금도 건강하세요. 지금도 사실 새벽, 아침 일은 김치라든가 이런 것들은 다 어머니께서 준비해놓으시고, 그리고 이제 볼일 보시고 그러세요.

그러면 어머니 아버지 전부 다 용인에서 오신 건가요?
어머니는 김포 분이시고요. 아버지가 1940년분이신데 그때 연배들은 대부분 다 객지 생활을 하잖아요. 용인이 고향이시긴 한데 인천, 김포에서 이렇게 다니시다가 어머니, 외할머니를 알게 돼서 연결돼서 결혼하셨어요.

그렇게 해서 인천으로 오신 거예요?
예. 인천 이 동네로. 제일 처음 가게 오픈한 데가 제일시장. 그 주변에서 땅이 있는 자리 그 주변에요.

민어는 보통 여름에 먹는 음식이라고 하잖아요? 그러면 여름, 겨울이 좀 차이가 있나요?
민어가 사실 다 잡혀요. 왜냐면 손님이 원하면 어부들은 돈이 되니까 다 잡거든요. 겨울에는 저 아래 바다까지 해서 잡아 올리는데, 민어 가격이 여름보다는 반도 안 되죠. 왜냐하면 겨울 민어는 킬로에 한 2만 원에서 3만 원이면 되는데, 요즘은 킬로에 한 5만 원에서 10만 원까지 가요. 손님들이 많이 찾다 보니까 가격이 오른 거고, 또 하나는 요맘때가 민어들이 산란하려고 막 올라오는 철이에요. 사실 무슨 철이라고 하는 게 산란기 바로 전이잖아요. 산란기 전이니까 특히 민어는 알을 그렇게 먹는 생선이 아니라. 알은 뭐 어란을 만들기는 하는데, 주로 이제 숫민어가 가격이 높아요.

예, 수놈을 더 쳐주죠.
원래 민어가 기름기가 있는 생선인데 숫민어가 아래 배 쪽에 기름기가 더 많이 껴요. 기름이 노약자나, 소화가 잘된다고 해서 끓여 드시기도 하고 회로 먹기도 해요.

대구탕도 그렇고 오늘 민어탕을 처음 먹어보는데, 어떻든 간에 용인정이 맛있으니까 굉장히 유명하잖아요. 비법은 아니겠지마는…. 조금 뭐 특징이라고 할까?
예전에도 그렇지만 저랑 같이 식당에서 일하는 매제가 있어요. 이 친구는 거의 매일 노량진하고 연안부두에 가서 생선을 사 오는데, 생선은 아시겠지만, 물만 좋으면 사실 소금만 넣고 끓여도 맛있어요. 생선이 시간이 지날수록 양념을 좀 진하게 넣어야 돼요. 근데 생선이 신선하면 그냥 집에 있는 파라도 넣고 끓이다가 소금으로 간을 해도 여기서 먹는 거랑 거의 비슷한 맛이 나요.

 


가게를 운영하면서 힘들었던 점 & 운영철학
사실은 이게 인천 사람들을 기록하는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아마도 내력이나 사연이나 혹은 힘들었던 이야기들. 이런 게 조금 들어가면 도움이 되거든요. 그리고 음식점 하는 일이 워낙 힘든 일이기도 하고요. 선대 어머니 아버지 대에 힘들었던 일이나 아니면 좀 특별했던 일이나 이런 사연 같은 게 있을까요?
장사하는 사람 입장에선 장사가 안될 때 힘들죠. 그때만 해도 식당에 여러 가지 메뉴가 있었는데 요즘은 대부분 식당이 단일 메뉴 많이 하시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부모님이 이 자리에 오셨을 때는 사업이 점점 잘되다가 갑자기 식당이라는 게 한 번 안 되기 시작하면 금방 또 망해요. 그래서 그때 여기 처음 올 때만 해도 극장이 있긴 있었지만, 주택가고 식당이 들어올 자리가 아니거든요. 제 기억에는 그전에는 다 주방장 있었는데 어려운 상황에서 들어오다 보니까 둘 수가 없죠. 그러다 보니까 한 가지 메뉴로 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에는 선구적이었던 것 같아요. 근데 해물전골이 유명해지다가 이제 해산물이 가격도 오르고 한 번 여름에 비브리오 패혈증 이런 것 때문에 손님들이 안 찾고, 그런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뭔가 새로운 걸 자꾸 찾을 수밖에 없죠. 창의적이다 이런 걸 떠나서 돈을 벌어서 살기 위해서는 그냥 그럴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게 이제 어떤 메뉴가 좋을까 하다가 누가 명태가 마진이 좋고 한번 해보라고 해서 그쪽으로 잘하는데도 다녀보고 해서 생선 장사를 시작했는데, 그 또한 한 10여 년 잘 되다가 또 일본에 지진이 나서 그런 부분이 있고…

그때가 가장 많이 힘드셨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 힘이 들어서 당장 국내산 생선을 찾다 보니까 대구, 생대구 그쪽으로 넘어오게 되는데 사실 이렇게 제가 먹어보면 생태찌개가 또 맛은 있어요. 그리고 또 하나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식당이라고 하는 게 잘 되는 식당에 가야 맛있다고 그러는 게 다름이 아니라 그냥 재료들이 좋으면 양념이라든가 비법 그런 거 연연하지 않거든요. 매운탕에다가 다대기를 넣게 되면은 그 맛이 또 풍미가 올라오기는 하는데, 다대기도 그냥 찐 고춧가루가 아니라 태양초를 넣으면은 국물 색깔도 좋고 다른 김치라든가 이런 것도 굉장히 맛있고 좋아요.

고춧가루에 되게 자부심이 있으시잖아요.
네. 식당이라는 게 좋은 재료를 사는 방법은 비싸게 주고 사면 돼요. 근데 비싸게 주고 사서 마진이 안 되잖아요. 그래서 고추를 어머니가 많게는 최소한 100상자에서 200상자, 한 20킬로짜리. 그걸 아버지하고 저하고 여기 옥상에다가 간이 하우스 지어 놓고 말리고 있어요. 그 말린 고춧가루를 쓰고, 저렴한 가격에 좋은 재료를 쓰니까 식당이 홍보라는 게 결국은 먹어보고 이 사람이 저 사람 끌어오고 이러기 때문에 그런 면이 유효했던 것 같고. 요즘 최근 들어서 대를 이은 식당이라고 명패도 해줘서 달아놓기는 했지만, 어릴 때 분식점 때부터 식당 일이라는 게 가족들이 다 같이 할 수밖에 없어요.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딱 그만하고 내가 들어온 게 아니라 그냥 어릴 때부터 해왔던 거를 지금도 계속하고 있는 거거든요. 물론 전에는 다른 일을 하면서 여기 일을 좀 도왔는데 요즘은 전적으로 여기의 일을 맡게 된 거고 좀 차이는 있지만, 가업처럼 계속해오는 상황인 것 같아요. 어려움이라고는 그런 거죠.

사실 저도 집에서 여름에 고추 20박스 정도 말리나, 고추 말리는 일 그거만 해도 고역인데. 비 오면은 다 걷어야 하고 너무 고생스럽잖아요.
그래서 자꾸 고민하죠. 그러다가 플라스틱 빠레트 같은 거 깔고 그 위에다가 또 합판 마루를 놓고 그 위에다 고추를 말려요. 비닐하우스처럼 비 올 때는 하나씩 덮고 열고 그러는데, 말씀하신 대로 저도 힘들죠. 근데 안 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하다 보면 힘들어서 어렵고요, 저는 예전부터 하다 보니까.

쉬운 것 같아도 국산 태양초 쓴다는 일이 만만한 일도 아니고 굉장히 비싸기도 하고요.
사려면 살 수도 없어요. 시골 이런 데서도 누가 그걸 말려요.

작년에 비도 많이 와서 고추 말리기도 굉장히 힘드셨을 텐데. 제가 가을쯤 오면 늘 여기서 순무 김치 굉장히 맛있게 먹는데, 중국에서 온 제 후배는 이거 한 대접씩 먹고 가고 그랬어요.
저희 주방에 계신 분이 강화도 분이세요.

그렇죠. 강화 분들이 순무 김치를 하시죠.
거의 40여 년 저희 집에서 같이 계셨는데. 어머님은 김포고. 강화에도 순무가 있죠.

예. 또 특별히 다른 말씀 들려주실 거 좀 있으실까요?
가게를 와보시면 처음에 입구의 간판이 달려있는 가게가 그때 당시에 워낙 안 나가던 가게 자리여서 아는 분 소개로 얻어서 임대로 7~8년 정도 잠깐 쓰다가 그 건물을 샀어요. 근데 이 자리랑 옆자리에 주택이 작은 게 있었는데, 그걸 사서 한 10여 년 정도 잠깐 쓰다가 건물을 올렸는데 그때는 다 식당으로 쓰지는 못하고 다 임대 줬다가 한 칸 한 칸씩 넓혀간 거죠. 그래서 식당에 손님들이 오시면 요즘 식당하고 달리 구조가 독특하죠.

 

아, 그게 그런 이유 때문이군요.
그래서 한꺼번에 커진 게 아니라 그렇게 해서 저쪽 맨 처음 건물도 1층만 쓰다가 2층을 쓰게 되고, 이 자리 점포를 처음에는 전세로 임대를 줬다가 이분들이 동네가 점점 장사가 여의치 않아 나가셨을 때 돈이 좀 벌려서 제가 열어서 조금씩 확장된 그런 가게 내력이 있고요. 그다음 중간중간에 오래된 느낌들이 좀 배어있는데 제 생각에는 아버지가 생태찌개가 한창 잘 될 때 체인점을 내달라는 분들이 꽤 많이 왔어요. 또 방송에서도 한다고 나왔는데 아버지 생각도 그렇고 저도 방송에 나가서 갑자기 손님이 몰려오면 감당할 수도 없고, 또 하나는 체인점을 내면 처음에 아버지도 그렇고 어머니도 생선이라고 하는 게 그때그때 계속 잘나가는 식당이어야 되는데 여의치 않으면 오히려 그쪽 가게를 여는 사람이 장사가 안될 가능성이 많거든요. 그래서 우리는 체인점을 내줄 수 없다고 하니까 어느 날은 집에 도둑이 들어서 다대기 통을 가져갔었어요. 사실 아버지도 특별히 계량하는 게 아니에요. 그냥 밥공기로 고춧가루 몇 개 넣고, 또 양파 다져서 넣고, 생강, 마늘, 국간장, 된장 넣거든요. 실제 아버지 말씀이 입맛이라고 하는 게 다 고정되지 않으니까 그때그때 항상 딴 데 가서도 먹어보고 자꾸 그렇게 생각을 해야 된다고. 아버지는 어디서 배우고 비법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만들거든요.

사실 어디 가서 먹어도 생태, 대구 자체가 좀 예민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맛이 진한 생선도 아니고 옅은 생선인데 이렇게 맛있게 하기도 힘들죠. 그러다 보니까 체인점을 하기가 어려운 것 같아요.
그냥 잘했던 것 같아요.

오늘은 어떻든 인터뷰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