味미추홀 : 바다를 담다
[대구] 50여년, 세월의 파고(波高)를 넘은 고수의 품격
양지원
게시일 2022.02.04  | 최종수정일 2022.03.29


  겨울 저녁이면 유난히 어린 시절 기억이 보채는 통에 삼삼한 놈이 있다. 온통 흔하여 지천이었던 것이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어 버렸으니. 유년 시절 동무와도 같다고 하면 과언일까? 생태라는 놈이 그립다. 꽁꽁 언 몸으로 집에 들어가면, 할머니가 채 익지 않은 김장이나 배춧속을 대충 썰어 생태를 지져주시곤 하셨다. 생태탕이 끓을 즈음 말 그대로 눈처럼 하얀 새우(冬白蝦, 동백하)를 위에 뿌려주시면 맑고 시원한 것이 추위에 쨍한 속을 물큰하게 녹여주곤 하였다. 김장과 동백하와, 명태와 이북에서 오신 할머니까지, 북국의 겨울음식은 풍성하였는데 이제는 달랠 수 없는 공복의 그리움이 되어버렸다. 가닿을 수 없는 그리운 시절, 이제는 더는 볼 수 없는 생태와 그것을 지져주셨던 정다운 분을 생각하면 백석의 시가 떠오른다.
 
 
명태는 길다랗고 파리한 물고기인데
꼬리에 길다란 고드름이 달렸다

해는 저물고 날은 다 가고 볕은 서러움에 차갑다
나도 길다랗고 파리한 명태다
(백석, 「멧새소리」)


  고향에서 떨어져 나와 제 외로운 심사를, 처마에 매달려 고드름을 달고 있는 명태의 처지에 비유한 백석의 시이다. 그런데 우리 역시 그 흔하디흔한 명태를 즐기던 시절로 더는 돌아갈 수 없으니 고향을 잃은 시인의 처지와 매한가지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일까? 겨울이면 유난히 찾아가게 되는 음식점이 있다. 50여 년 가게를 운영하시며 생태와 대구를 끓여주시는 분들이 있는 곳이다. 대학 시절 늘 어리광을 받아주시던 선생 한 분을 모시고 다짜고짜 가게를 찾아간 것도, 이런 따뜻한 음식에는 어린 시절을 기억해주는 분과 마주해야 제격이기 때문이다. 기실 생태를 먹던 추억을 팔러 여기에 왔지만, 오늘 우리가 마주한 것은 대구탕이었다. 본디 워낙 생태로 이름 높은 집이었으나 이제 여기도 대구가 가장 많이 나가는 음식이 된 것이다. 부모님께 자연스레 물려받았다는 주인께 사연을 들으니, 그동안 잊고 있었던 시간들이 사전의 페이지마냥 쉴 새 없이 넘어가는 것만 같았다.

  사연이란 이렇다. 경기도 용인에서 인천으로 오신 주인 내외가 애초에 이곳에 새집을 틀 적에는 뜻밖에도 분식점을 하셨다고 한다. 그러니 그 내력이 생태나 대구와는 애초에 먼 것이고, 짠내 나는 바다 음식과는 연고가 먼 ‘용인’이라는 이름이 간판에 떡하니 붙어있는 까닭도 이 때문인 셈이다. 하긴 1970년대에 간판을 처음 거셨다고 하니, 당시는 나라가 앞장서 혼분식을 장려하던 시기였고 밀가루 음식이 본격적으로 우리에게 친숙해진 시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분식점이 잘 되자, 한식집을 하셨고, 다시 한식집 운영이 어려워지자 단일 메뉴에 매진하여 오늘의 생선탕집으로 우뚝 자리 잡게 되었다.

  지금이야 전문점이라는 말이 당연스레 여겨지고, 또 기왕의 것을 찾아 먹으러 발품을 팔 적에는 전문점을 선호한다지만 1980년대에 단일 메뉴로 승부를 거는 일은 모험과 다름없었다. 패류와 각종 해산물을 모아 처음 시작한 해물전골은 그래서 성공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경제가 성장하고 삶의 질이 올라가기 시작하던 시절, 이제는 평범한 한식이 아니라 특별한 가게를 찾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정서와 맞아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이 해물전골도 이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겨울이야 문제가 없지만,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여름에는 해물전골을 찾지 않게 된 것이다. 방송과 신문에서 비브리오 패혈증에 대한 기사가 나기 시작하면서, 손님이 뜸하기 시작하였다니, 이제는 입의 즐거움뿐만이 아니라 건강도 챙기는 시절이 도래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준비한 음식이, 바로 이 집의 오랜 간판 메뉴인 생태탕이었다. 생태야 늘 지천으로 널려있는 생선이라 선도를 유지하는 일이 패류를 다루는 해물전골과는 품이 달랐다. 또한 생태는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좋아하는가장 익숙한 음식이요, 서서히 바쁜 일상에 집밥과도 멀어지던 시기였기에, 친근하여 오히려 더욱 각별한 외식 메뉴로 손색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동해에 명태가 씨가 마를 줄은. 제아무리 음식에 일가견이 있는 주인도 ‘지구 온난화’니 ‘해수 온도의 상승’ 따위를 예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장사는 지속할 수 있었다. 일본 북해도에서 냉장된 생태를 공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긴 ‘그 사건’이 벌어질 때까지, 우리 집도 여느 가정처럼 일본에서 수입한 값싼 북해도산 생태를 즐겨 먹었으며, 거리에는 생태탕집들이 즐비하였던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 이 가게를 비롯하여 거리거리 줄지어 늘어섰던 생태탕집들은 명태가 동해바다에서 종적을 감추듯 거리에서 모두 사라져버리고 만다.

  2011년 대지진이 일본의 동부를 강타하고 최악의 쓰나미와 함께 원전이 폭발해버린 것이다. 비브리오 패혈증을 걱정하던 사람들에게, 원전 오염수의 유출 사건은 물에서 나는 음식을 아예 꺼리게 만드는 충격적 사건이었다. 당연히 시장에서 그 흔하던 생태는 종적을 감췄고, ‘일본산(日本産)’을 다루는 가게는 더는 영업을 할 수 없었다. 이곳 주인이 국내산을 강조하여 궁여지책으로 생태탕 대신 생대구탕을 내놓은 연유도 이 때문이란다. 생태와 같이 맛이 연하면서도 비슷한 국내산 생선을 고르자니, 예전에 비하여 오히려 어획량이 증가하고 있었던 대구가 선택된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들이 미식과 보양을 따지기에 여름이면 민어회와 민어탕도 메뉴에 추가하셨다고 한다.

  선대의 분식집으로부터 시작하여 그 아들이 물려받은 50년, 바다 음식의 아연한 부침(浮沈)이 이 집 간판 메뉴의 변천사에 고스란히 다 녹아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우리 앞에서 이제 막 끓고 있는 대구탕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하긴 생태를 먹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 일부러 더욱 맵게 추운 날을 골라 이 집에서 대구탕을 시켜 먹고 있었으니, 이 집을 찾는 발걸음도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 대구탕을 내놓을 때까지 세월의 파고를 능란하게 헤쳐가신 이 집 주인 대(代)의 솜씨와 슬기가 참으로 존경 할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식집에서 한식집으로, 그리고 해물전골과 생태탕집으로. 시절마다 가게를 엎어버릴 감당 못할 조건들이 덮쳐왔어도, 어느 한 가지만 고수하다 침몰하는 것이 아니라 노련하게 그 악조건을 기회로 만드는 기지는 ‘고수(高手)’라는 말이 오히려 아깝다는 생각마저 들게 하였다. 이 집의 빗 바랜 간판은 그 세파를 모두 감당해낸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니 여느 휘황한 네온사인 따위가 감히 넘볼 수 없는 것이리라.

  까닭에 나는 이 이름난 가게의 진정한 비결이 무엇이냐고 주인께 여쭈었다. 그랬더니 하시는 말씀이란, 결국 “재료만 좋으면 소금만 들어가도 맛있다.”는 것이 다였다. 방송의 어느 채널만 돌려도, 소위 고수라는 사람들이 나와 수십가지 재료를 이용하여 양념을 만든다는 그런 너스레와는 너무나 다른 태도였다. 누구는 비법을 선전하고 기상천외한 조리법을 과시하는 시대에 주인이 생각한 방법은 오히려 복잡한 것이 아니라, 소금만 들어가도 맛있는, 그런 좋은 재료를 찾는 일이었다. 그래서 해물전골이 생태탕이 되고, 다시 생태탕이 대구탕과 민어탕에 이른 것이다. 서로 다른 이 두 가지 고수의 길 중에 나는 당연히 후자를 더욱 신뢰한다. 맛있는 ‘비법 집’들은 많아도 50여 년이라는 시간의 채찍을 맞고 버티는 가게는 드물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 집은 그 유명세에 비하여 방송을 탄 적도 없고, 그 흔한 분점조차 내지 않았다. 누군가 함께 크게 사업을 벌이자는 제안을 하였어도, 재료에 대한 공수가 부담이 되어 오직 이 가게 안에서만 조금씩 공간을 넓힌 것이 다라고 한다. 이 집은 들어서면 마치 골목을 들어가듯 오밀조밀한 방을 맞게 되는데, 한 땀 한 땀 시간으로 넓힌 그런 연유가 깃든 곳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 장소 하나만 지키는 외골수이시다 보니 심지어 어느 날은 가게에 도둑이 들어 양념장 통만 훔쳐 간 적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탕의 양념장은 지금 주인의 아버지께서 담당하셨다고 하는데, 이 양념통을 훔쳐 가자 가게 사람들은 어처구니가 없었다고 한다. 아무런 비법이 없는, 그저 밥공기 눈대중으로 아버지께서 적절히 만든 양념인데 그것이 ‘비법’이라 탐을 내어 도둑질을 한 것이다. 시절이 주는 혹독한 시련을 이겨내고, 궁여지책으로라도 재료가 없을 때는 다른 좋은 재료를 다시 찾아내고야 마는, 그 정성과 노력을 양념통 하나와 맞바꾸려 하였으니, 그 도둑은 필경 ‘비법’을 찾기는커녕 그 근처에도 이르지 못하였을 것은 뻔한 이치이다.

  한편 나에게도 이 집과 관련된 추억이 하나 있다. 공부를 하던 시절 중국 하얼빈에서 유학을 온 후배와 종종 이곳에 들렀던 일이 그것이다. 흔히 조선족이라 부르는 중국인 동포 출신의 이 친구는 엉뚱하게도 이곳의 순무 김치에 맛을 들여 단골이 되었다. 순무라 하면 그 향이 독특하여 우리나라 사람도 처음 먹을 적에는 다소 가림이 있는 음식인데, 그 향에 취해 이 곰 같은 덩치의 북국 남자는 김치 종지를 탕이 끓기도 전에 동을 내곤 하였다. 그러면 늘 음식을 가져다주시는 분들이 다시 종지를 채워주셨는데, 나는 그게 못마땅하여 눈치를 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오히려 여기 계시던 선대 여주인께서는 순무 김치를 대접채 내어다 주시고, 안주가 조금 모자라면 두부와 볶은 김치까지 따로 챙겨주셨다. 그 친절함이 각별하였기에 고향을 떠나온 이 북국의 청년은 순무 김치의 알큰한 향과 더불어 타향에서 느끼기 어려운 정겨움에 취하였을지도 모른다.

  하긴 이 집의 김치며 탕이며 들어가는 재료를 다는 몰라도, 이 집에서 쓰는 고춧가루가 각별하다는 것은 무딘 내 입맛으로도 잘 안다. 여름이면 직접 물고추를 말려 일년 치 태양초 가루를 장만하신다고 하는데, 고추를 말려본 사람이라면 그 수고로움이 얼마나 고된 것인지 잘 안다. 나도 어머니와 여름이면 물고추를 옥상에 스무 상자씩 말리지만, 조금만 비를 맞아도 짓무르고 썩는 것이 고추라는 놈이다. 그러니 하늘이 어둑어둑해지고 빗방울이라도 떨어질 요량이면 옷도 다 갖추지 못한 채 부리나케 옥상으로 뛰어 올라가 고추를 거두느라 낭패를 본 적이 한 해 여름이면 다반사이다. 그런데 이곳 사장님은 아직도 아버지와 고추를 이백여 상자씩 말린다고 하시니 그 정성과 공이 예사가 아니다. 게다가 이 고춧가루로 순무 김치를 담그시는 분은 이 가게 한 곳에서만 40년가량 주방일을 돌보셨다고 한다. 용인 출신의 남자 사장님이 고추를 말리시면 40년 동안 일해오신 강화 출신의 아주머니께서 김치를 담가주시고, 김포 출신의 여자 사장님께서 손님상에 정성으로 그것을 올리시는 것이다. 겨우 탕에 곁들이는 김치가 이 정도니 탕의 깊이는 더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또한 일하시는 분들 모두가 한 두 해 이 집 일을 돌보시는 것이 아니라, 일이십 년씩은 족히 계셨다고 하니, 만사가 빈틈없고 한 끼 식사가 늘 푸근할 따름이다.

  그러니 오늘 대학 시절 못된 푸념을 들어주시던 선생을 모시고서 대하는 이 대구탕 한 냄비는 옛 추억을 더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겨울이라 더욱 기름진 생대구의 간을 씹으며, 한편으로는 생태를 지져 먹던 시절 이야기로 너스레를 떠는 일은 겨울에만 맛볼 수 있는 각별한 특미이다. 아직은 김이 펑펑 나는 대구의 풍성한 속을 꺼내 먹을 수 있다지만, 우리는 또 이것조차 추억으로 소용하며 먼 훗날 다른 음식을 대하고 있을지 문뜩 고약한 상상이 치밀다가도,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 그건 그때 가보아야 알 일이겠다. 이 집의 부침(浮沈)이 그 평범한 진리를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계시는 여러 고수의 삶을 생각해보면, 논어의 한 구절이 생각난다.

 
“사람이 도를 넓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人能弘道, 非道弘人)”

  무슨 비법이니 왕도가 있어서 우리에게 길을 제시해주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참되게 좋은 재료로 꾸밈없이 찌개를 끓이는 사이에 생활의 수가 나고 맛은 한 해 한 해 더욱 깊어질 따름인데, 왕도가 어디 따로 있을까. 그래 겨울바람이 쌀랑이는 계절이면 내 정다운 사람을 마주하고서 지난 세월의 안부를 묻느라이 속 깊은 생선의 살을 아니 권할 수 없는 것이다.



대구탕
바람이 쌀랑이면 더욱 생각나는 음식이 대구탕이다. 냉동한 것과 생대구를 끓인 것은 맛의 차이가 완연하다. 생대구탕은 잡미가 없고 국물이 맑고 개운하기에 별다른 양념이 없어도 제 몫을 톡톡히 한다. 그러므로 냉동이 아닌 생대구를 내준다는 믿음 하나로 이 음식을 찾는 것이다. 맛이 강하지 않고 살이 부드럽기에 오히려 먹으면 먹을수록생각이 나는 외유내강의 음식이라 할만하다.




대구 내장
살맛이 연한 대구는 내장이 특미이다. 특히 겨울이 추우면 추울수록 대구간은 지방을 가득 머금기에 일미(一味)로 이름이 높다. 홍어, 쥐치, 아귀와 함께 대구간은 그 특유의 녹진한 맛으로 미식의 반열에 빠지지 않는다. 유독 날이 추워지면 대구탕이 생각나는 이유이기도 하다. 옅은 맛의 살점과 녹진한 맛의 간이 이루는 맛의 조화가 겨울 음식의 대표라 할 만하다. 얼지 않은 생대구 곤이(정소) 또한 부드러운 맛으로 이름 높은데, 이렇게 내장을 아끼지 않아야 탕 맛이 깊고 풍성해진다.

 
- 기록 : 학산미담식회  (글 : 고재봉 / 사진 : 김상태, 천영기)
- 답사장소 : 용인정 / 답 사 일 : 2021년 11월 11일(화)